혼다 노부요시
1. 개요
혼다 노부요시는 1934년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의 혁명적 공산주의자이자 사상가였다. 와세다 대학교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으며, 헝가리 혁명 이후 일본 공산당과 결별하고 트로츠키즘을 따랐다. 그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구로다 간이치와 함께 활동하다가 분열 이후 중핵파를 이끌었다. 1969년 오키나와 데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1975년 가쿠마루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사상은 반제국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중심으로 트로츠키즘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독자적인 혁명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저서로는 '승리를 향한 시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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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핵파 관련자 -
기타코지 사토시
기타코지 사토시는 1960년대 안보 투쟁 시기 전학련 지도자, 분트와 중핵파 지도자로 활동한 일본의 신좌파 운동가로, 혁명적 의회주의를 주창하며 도쿄 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외무성 심의관 자택 방화 살인 사건 옹호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
중핵파 관련자 -
구로카와 요시마사
구로카와 요시마사는 일본의 학생 운동가이자 테러리스트로,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의 일원으로서 기업 폭파 사건을 일으켰으며, 1979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현재 미야기 형무소에 수감 중이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1934년 출생 -
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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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출생 -
임동원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임동원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군과 정부의 요직을 거쳐 나이지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으나, 제2연평해전 발언과 불법 감청 혐의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 경력
혼다 노부요시는 1934년 2월 6일 도쿄도간다구간다 이즈미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일본 우편 노동자였으며, 아사쿠사구토리코에에서 성장했다. 야나기키타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태평양 전쟁 중 사이타마현 기타아다치군 아다치정 (현 시키시)으로 피난하여 소우오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가와고에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중학생 시절 일본 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청년 공산 동맹(후의 일본 민주 청년 동맹)에 가입했다. 가와고에 고등학교에서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3년 와세다 대학교 제2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1954년 와세다 대학교 제1 문학부 국사학과로 전입했다가 1958년 중퇴했다. "와세다 대학교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공산당 와세다 세포 (당시 400명)를 지도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일본 공산당의 노선을 스탈린주의로 규정하고 결별했다. 1957년 구로다 간이치의 "변증법 연구회"에 참가하고,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 (트로련) 결성에 참여했다.
1958년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트로련)이 발전하여 결성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혁공동)에서 구로다 간이치 등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그룹 (RMG)"을 형성,"트로츠키즘을 뛰어넘었다"고 칭하는 "반스탈린주의파"로서, 제4 인터내셔널 가맹을 주장하는 니시쿄지 등의 "트로츠키스트파"와 대립했다. 1959년 구로다 간이치의 스파이 사건 (구로다 · 오카와 스파이 문제)이 발생하자, 혼다는 구로다를 옹호했다. 8월 31일 구로다 간이치와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 위원회"를 결성하고, 구로다 간이치는 의장, 혼다는 서기장에 취임했다.
1962년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제3회 전국 위원회 총회에서 혼다 노부요시는 자신이 기안한 "당 건설 방침"과 "노동 운동 방침"을 둘러싸고 구로다 간이치와 이론적으로 대립하였다. 1963년 구로다 간이치가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가쿠마루파)를 결성하자, 혼다파는 "중핵파"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 중핵파"에서 유래한 것이다.
1969년 4월 27일 오키나와 데이 사건과 관련하여 파방법 개인 적용(예비·음모 혐의)으로 체포되었으나, 1971년 3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1975년 3월 14일 사이타마현가와구치시 자택에서 가쿠마루파에 의해 피살되었는데(중핵파 서기장 내분 살인 사건),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2.1. 초기 생애 (1934년 ~ 1957년)
혼다 노부요시는 1934년 2월 6일 도쿄도간다구간다 이즈미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일본 우편 노동자였으며, 아사쿠사구토리코에에서 성장했다. 야나기키타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태평양 전쟁 중 사이타마현 기타아다치군 아다치정 (현 시키시)으로 피난하여 소우오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가와고에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중학생 시절 일본 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청년 공산 동맹(후의 일본 민주 청년 동맹)에 가입했다. 가와고에 고등학교에서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3년 와세다 대학교 제2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1954년 와세다 대학교 제1 문학부 국사학과로 전입했다가 1958년 중퇴했다. "와세다 대학교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공산당 와세다 세포 (당시 400명)를 지도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일본 공산당의 노선을 스탈린주의로 규정하고 결별했다. 1957년 구로다 간이치의 "변증법 연구회"에 참가하고,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 (트로련) 결성에 참여했다.
2.2.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활동 (1958년 ~ 1963년)
1958년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트로련)이 발전하여 결성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혁공동)에서 구로다 간이치 등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그룹 (RMG)"을 형성,"트로츠키즘을 뛰어넘었다"고 칭하는 "반스탈린주의파"로서, 제4 인터내셔널 가맹을 주장하는 니시쿄지 등의 "트로츠키스트파"와 대립했다. 1959년 구로다 간이치의 스파이 사건 (구로다 · 오카와 스파이 문제)이 발생하자, 혼다는 구로다를 옹호했다. 8월 31일 구로다 간이치와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 위원회"를 결성하고, 구로다 간이치는 의장, 혼다는 서기장에 취임했다.
2.3. 중핵파 지도 및 사망 (1962년 ~ 1975년)
1962년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제3회 전국 위원회 총회에서 혼다 노부요시는 자신이 기안한 "당 건설 방침"과 "노동 운동 방침"을 둘러싸고 구로다 간이치와 이론적으로 대립하였다. 1963년 구로다 간이치가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가쿠마루파)를 결성하자, 혼다파는 "중핵파"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 중핵파"에서 유래한 것이다.
1969년 4월 27일 오키나와 데이 사건과 관련하여 파방법 개인 적용(예비·음모 혐의)으로 체포되었으나, 1971년 3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1975년 3월 14일 사이타마현가와구치시 자택에서 가쿠마루파에 의해 피살되었는데(중핵파 서기장 내분 살인 사건),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3. 사상
혼다 노부요시는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를 핵심 사상으로 삼았다. 트로츠키즘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독자적인 혁명 이론 구축을 목표로 했다.
4. 저서
wikitext
* 승리를 향한 시련 (전진사, 1967년 1월 1일, ASIN B000J9KFCU)
* 혼다 노부요시 저작선 (전7권, 전진사 디지털 아카이브, 전진사, 2016년 7월 27일, ISBN 9784881391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