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슈사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혼인보 슈사이는 21대 혼인보이자 마지막 세습 당주로, 187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4년 명인 칭호를 얻어 바둑계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일본기원 설립에 기여했다. 슈사이는 고세이겐과의 대국에서 시간 사용 특혜를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은퇴 대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명인》의 소재가 되었다. 1940년 사망했으며, 그의 기풍은 일본 바둑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바둑 기사 - 요다 노리모토
요다 노리모토는 1980년 프로 입단 후 1100승을 달성하고 명인전 4연패, 삼성화재배 우승 등 국내외에서 활약하며 일본 바둑계에 큰 족적을 남긴 최정상급 프로 바둑 기사이다. - 일본의 바둑 기사 - 오청원
중국 출신 바둑 기사 오청원은 20세기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신포석 창안, 십번기 압승, 본인방 슈사이와의 명승부 등 바둑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그의 이론과 철학은 현대 바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1940년 사망 -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뉴질랜드 노동당 창당에 기여하고 총리직에 올라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방송 국영화 등 정책을 추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하고 뉴질랜드 복지 국가 설계자로 평가받았다. - 1940년 사망 - 윤덕영
윤덕영은 조선 말기 문신이자 대한제국 관료, 일제 강점기 조선귀족으로, 한일 병합 조약에 적극 가담하고 순종의 일본 천황 알현을 강요했으며 고종 독살 의혹을 받았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1874년 출생 - 윈스턴 처칠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수상이었으며 군인, 정치가, 작가, 화가로서 활동하며 냉전 시대 개막을 알린 윈스턴 처칠은 제국주의적 관점과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1874년 출생 - 하워드 카터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이집트학 학자인 하워드 카터는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발굴 과정에서 여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과학적인 고고학 연구를 강조했다.
혼인보 슈사이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다무라 야스히사 |
출생일 | 1874년 6월 24일 |
사망일 | 1940년 1월 18일 |
사망 장소 | 아타미시, 시즈오카현 |
국적 | 일본 |
직업 | 바둑 기사 |
단 | 9단 |
로마자 표기 | |
로마자 표기 | Hon'inbō Shūsai |
한자 표기 | |
한자 표기 | 本因坊秀哉 |
일본어 표기 | |
일본어 표기 | 本因坊 秀哉 (ほんいんぼう しゅうさい) |
일본어 표기 (본명) | 田村 保寿 (たむら やすひさ) |
2. 생애
슈사이는 도쿄 시바에서 쇼군의 가신인 타무라 야스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1] 10세에 바둑을 배우고, 1883년 무라세 슈호의 지도로 호엔샤에 입단하여 13세에 초단이 되었다. 18세에 2단이 되었으나, 이후 잠시 바둑계를 떠나 개인 사업을 시도하고 지바현의 불교 수행 센터에 들어가기도 했다. 1년 넘게 바둑을 떠났다가 롯폰기에 자신만의 바둑 도장을 열었다.[1]
1892년,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 김옥균의 도움으로 혼인보 슈에이에게 소개받아 4단으로 재평가받고 이후 승단했다.[1] 그는 이시이 센지와 1895년과 1897년에 선아이센에서 두 차례 십번기를 두었고, 1899년에는 네 번째 십번기가 미완으로 남았다. 1897년 야스이 가문의 마지막 인물인 야스이 산에이에게 십번기를 신청하고, 혼인보 슈겐에게도 도전했다. 1897~98년 이시이 센지와 다시 대국했고, 1899년에는 카리가네 준이치와 십번기를, 1900~01년에는 이와사 케이와 십번기를 두었다. 슈에이를 제외하고 최고수 명성을 얻었으며, 1907년에는 7단이 되었다.
슈에이의 후계자로 혼인보 가문의 21대이자 마지막 세습 당주가 되었으나, 슈사이란 이름을 얻은 타무라와 혼인보 가문의 카리가네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카리가네는 슈에이 미망인의 지지를 받았다.[2]
1914년 명인 칭호를 얻어 초대 혼인보 산사 이후 열 번째 명인이 되었다. 이전의 슈에이처럼 공식적인 정부 관여는 없었고, 동료 기사들의 찬사로 칭호를 받았다. 이후 유일한 9단 기사로서 명인 자리를 지키기 위한 몇 차례의 "방어전"을 치렀다.
2. 1. 수행 시대
슈사이는 도쿄 시바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쇼군의 가신인 타무라 야스나가였다.[1] 할아버지는 히젠 가라쓰 번・오가사와라 씨의 가신[8]인 아사하라 코지였다. 아버지는 고케닌의 자리를 사서 타무라를 칭하는 막신이 되었고, 후에 내무성에 근무했다.[9] 반초에서 태어나 아카사카 히카와초・칸다 사루가쿠초・우시고메 에노키초 등으로 이사하며 자랐다.[9]10세에[8] 바둑을 배웠다. 1885년, 11세 때 방원사에 입학하여 무라세 슈호에게 사사받았다.[8] 당시 기숙 학생은 숙장인 이시이 센지, 도우케 토미타, 스기오카 에이지로, 타무라 야스토 4명이었다. 타무라는 이시이 센지, 스기오카 에이지로와 함께 '''방원사의 삼소승'''이라고 불렸다. 1886년 슈호가 사망한 후, 나카가와 카메사부로에게 사사받았다.[8] 같은 해 9급(초단)을 인정받았다.
1891년에 방원사를 탈퇴하고, 슈호의 양자인 무라세 히오와[8] 「심인회합소」라는 지방에서 상경하는 젊은이를 위한 사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아 좌절되어 방원사에서 제명된다. 지바현의 도후쿠지에서 바둑 상대나 농업을 도왔지만, 바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도쿄로 돌아와, 김옥균의 소개로 19세에 혼인보 슈에이 문하에 입문, 4단을 허락받고, 1897년에는 5단으로 승단한다.
1896년부터는 5살 연상의 이시이 센지와 5번의 십번기를 두었고, 처음에는 야스토의 정선으로 시작했지만, 1897년의 제2차에서 호선이 되었고, 1907년의 제5차에서는 선2까지 몰아넣었다. 슈에이는 당시 다른 기사들을 모두 선2 이하로 몰아넣었지만, 타무라는 유일하게 선을 유지하며, 혼인보 계승의 최유력 후보로 여겨졌다.
1904년에는 일본 위기회 발족과 함께, 슈에이 마지막 대국의 상대로 2번기를 두었다. 그러나 슈에이는 타무라를 싫어했고, 가리가네 준이치의 실력이 타무라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면서 가리가네를 후계자로 원했다. 1905년에 7단으로 승단, 이때 가리가네와의 대국을 지바둑으로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을 슈에이가 기보에서 간파한 일도 있어, 슈에이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면회도 허락받지 못하게 되었다. 타무라의 성격은 매우 자아가 강했고, 또 금전에 밝은 점이 있어, 이것이 슈에이에게 미움을 받은 요인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2. 2. 혼인보, 명인 습위
1907년 스승인 슈에이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혼인보 문하에서는 슈사이(타무라)를 지지하는 파와 카리가네를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다. 전자는 슈에이의 동생이자 16세 혼인보였던 슈겐과 노자와 치쿠초였으며, 후자에는 슈에이 미망인과 세키 겐키치 등이 있었다. 결국 슈겐이 20세 혼인보에 취임하고, 1년 후 슈사이에게 혼인보위를 양도하여, 1908년 슈사이가 21세 혼인보가 되었다.[2]1910년 이노우에 타부치 인세키 5단과 십번기에서 승리하는 등 다른 기사들을 압도했다. 1911년 8단으로 승단했다. 1914년 41세 때 명인으로 추대되어 바둑계 제1인자가 되었다.
이 무렵 호엔샤의 스즈키 타메지로, 세고 겐사쿠도 슈사이에게 접근했다. 1919년 돤치루이 초대로 히로세 헤이지로, 타카베 도헤이 등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2. 3. 일본기원 총수
1923년 중앙기원 설립에 참여했으나 분열되었다. 1924년 일본기원 설립에 참여했고, 슈사이는 기원 최상위자로서 정식 대국(오테아이)에 출장했다.그러나 카리가네 준이치 등은 일본기원을 탈퇴하고 기정사를 설립했다. 요미우리 신문의 쇼리키 마쓰타로 사장의 중재하에 양측은 "다이쇼 대쟁기"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대항전을 시작한다. 1926년에 열린 그 첫 경기에서 슈사이는 카리가네 준이치와의 주장 결전에 임했다. 돌을 따내는 명국으로 칭송받는 격렬한 꼬임 끝에 승리하여 불패의 명인이라는 이름을 높였다.[10]
2. 4. 은퇴
1933년, 고세이겐과 슈사이는 유명한 대국을 펼쳤다. 당시 고세이겐은 18세로 5단이었으며, 일본에 온 지 약 5년 정도 되었다. 이전에도 대국을 한 적이 있었지만, 호선은 아니었고, 고세이겐이 다섯 번의 접바둑에서 승리했었다.[3]당시 관례에 따르면 백을 잡은 쪽이 언제든지 대국을 중단할 수 있었고, 수봉(封, 수를 적어 봉하는 것)은 없었다. 이는 명목상 강자인 슈사이가 백을 잡았으므로 자신의 차례에 언제든지 대국을 중단하고 중단 시간 동안 자유롭게 심사숙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슈사이는 이 특권을 악용하여 13번이나 대국을 중단했는데, 예외 없이 자신의 차례에만 대국을 중단하여 대국 기간을 3개월(1933년 10월 16일 ~ 1934년 1월 19일)로 늘렸다. 예를 들어, 슈사이는 대국 8일째에 먼저 수를 두었고, 고세이겐은 2분 안에 응수했다. 그 후 슈사이는 3시간 30분 동안 생각했지만 대국을 중단하기만 했다. 슈사이가 대국 중단 시간에 자신의 제자들과 대국을 검토하고 최선의 수를 연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따라서 고세이겐은 혼인보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3]
슈사이는 대국 내내 열세였지만, 대국 13일째에 백160수(W160)에서 묘수를 던져 지금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발한 수는 슈사이가 아니라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마에다 노부아키가 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고에 겐사쿠는 비공개 인터뷰라고 생각한 자리에서 기자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4] 마에다 본인도 암시했다. 마에다는 이러한 소문을 반박할 기회가 있었지만, 부인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5] 대국은 혼인보 슈사이의 2집 승으로 끝났다.
고세이겐 vs. 혼인보 슈사이(백) 대국에서 W160=
슈사이는 1936년 혼인보 타이틀을 일본기원에 양도하고 은퇴했다.
1938년, 64세의 나이로 그는 기념적인 "은퇴 대국"을 위해 돌아와 기타니 미노루와 대국을 펼쳤고, 5집 차이로 패했다. 이 대국은 후에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의해 소설 ''명인'' (영어로 ''The Master of Go'')으로 불멸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기타니 미노루는 슈사이가 고세이겐과의 대국에서 정지 시간 특권을 남용한 것을 목격한 후, 매 정지 전에 수를 봉수할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슈사이 측이 이에 반대했지만, 기타니가 끈질기게 요구하여 결국 슈사이가 물러섰다. 제한 시간은 각 40시간이었으며, 기타니는 깊이 생각하며 대국을 진행했다. 그는 5집의 넉넉한 차이로 승리했다 (이 대국에는 덤이 없었으므로, 흑을 잡은 기타니는 안전한 운행으로 초반의 이점을 유지했다).[6]
3. 논란
혼인보 슈사이는 명인과 혼인보 지위로 인해 막대한 명성을 지녔지만, 혼인보 가문 내 경쟁 관계, 일본기원 설립과의 관계, 기사로서의 행위, 금전적 거래 등과 관련하여 여러 비판을 받았다. 그는 종종 최고 기사로서의 특권을 남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하시모토 우타로는 스승 세고 겐사쿠가 슈사이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자에게 밝혔다. 세고는 슈사이와 함께 중국 바둑 후원자들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기사들과 시범 대국을 가졌는데, 슈사이는 손님임에도 중국 경기 규칙을 따르지 않아 주최 측을 당황하게 했다. 또한, 젊은 중국 기사에게 지는 것을 꺼려 많은 대국을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나중에 결론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세고는 하시모토에게 슈사이가 환대와 많은 대국료를 받고도 대국을 미완성으로 남긴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4]
우칭위안 역시 슈사이를 "악당"이라 부르며 매우 낮게 평가했다.[4] 그는 슈사이가 혼인보 타이틀을 거액에 팔아 호화로운 집을 지으면서도 그 돈의 일부를 바둑계에 돌려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4]
4. 기풍 및 영향
혼인보 슈사이는 느긋하고 깊이 생각하는 기풍을 가졌다. 일본에서 비교적 느린 기풍이 유행하게 된 것은 그의 영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 그의 생애 동안 시간 제한과 시계와 같은 혁신적인 요소가 도입되었는데, 이는 슈사이를 매우 화나게 했다.
슈사이는 메이지 시대의 전략을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혼인보 슈호의 저서 『호엔 신포』에 잘 나타나 있다. 약점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해 더 멀리, 때로는 더 높게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새로운 이 방법은 "조화 파괴"라고 불렸다.
그의 포석 스타일은 신포석 포석 혁명의 도래로 인해 다른 많은 기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정석에서 거의 혁신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새로움을 추구하지 말라"는 훈계를 선호했다.[1]
일본기원이 설립되기 전에는 성문화된 규칙이 전혀 없었다. 슈사이는 초기 시절에 만넨고 등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1]
5. 주요 대국
슈사이는 여러 차례 유명 대국을 벌였다. 1895년과 1897년 호엔샤의 최고수였던 이시이 센지와 선아이센에서 두 차례의 십번기를 두었고, 1899년에는 네 번째 십번기가 미완으로 남았다. 1897년 야스이 가문의 마지막 사람인 야스이 산에이에게 십번기를 신청했고, 혼인보 슈겐에게도 도전했다. 1897~98년 이시이 센지와 다시 한번 대국했고, 1899년에는 수십 년 동안 유일한 경쟁자가 될 카리가네 준이치와 십번기를, 1900~01년에는 이와사 케이와 십번기를 두었다. 슈에이를 제외하고 최고수의 명성을 얻었다.[1]
1914년 명인 칭호를 얻은 후, 유일한 9단 기사로서 명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몇 차례 "방어전"을 치렀다.
5. 1. 기세이샤와의 대국
1926년, 일본기원 대 기세이샤 대항전에서 카리가네 준이치와의 주장 대결이 벌어졌다. 이 대국은 "그룹 포획의 걸작"으로 불리며, 에드워드 라스커는 "기록상 가장 아름다운 대국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2]요미우리 신문은 대국 진행 상황을 게시판에 게시하고 수가 진행됨에 따라 수를 붙이는 방식으로 홍보하여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각 선수에게는 16시간이 주어졌고, 대국은 6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카리가네는 5집 정도 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시간 부족으로 기권했다. 슈사이는 백을 잡고 승리했다.[2]
이 대국에서 하변의 백 모양에 쳐들어간 카리가네의 흑돌을 슈사이가 강하게 공격하면서 대혼전이 벌어졌다. 하변 흑 1(43수)에 붙여 들어간 곳에서 난전이 시작되었고, 슈사이는 흑의 눈을 빼앗았지만, 카리가네도 포위망의 허점을 노려 반격하여 보기 드문 팽팽한 접전이 되었다. 백 58(100수) 이후에도 싸움이 계속되었고, 슈사이는 여기서 발생한 코를 계기로 우세를 점해 결국 카리가네의 시간패로 끝났다.
42 잇다(37) 44 잇다(35)
주최 측인 요미우리 신문은 각지에서 대국반을 사용하여 속보를 내고, 관전기에 기쿠치 칸, 가와히가시 헤키고토 등 유명 문인들을 배치하여 선전에 힘쓴 결과, 부수를 단번에 3배로 늘렸다고 한다.
5. 2. 고세이겐과의 대국
1933년, 고세이겐과 혼인보 슈사이는 유명한 대국을 펼쳤다. 당시 고세이겐은 18세로 5단이었으며, 일본에 온 지 약 5년 정도 되었다. 이전에도 대국을 한 적이 있었지만, 호선은 아니었고, 고세이겐이 다섯 번의 접바둑에서 승리했었다.[3]당시 관례에 따르면 백을 잡은 쪽이 언제든지 대국을 중단할 수 있었고, 수봉(封, 수를 적어 봉하는 것)은 없었다. 이는 명목상 강자인 슈사이가 백을 잡았으므로 자신의 차례에 언제든지 대국을 중단하고 중단 시간 동안 자유롭게 심사숙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슈사이는 이 특권을 악용하여 13번이나 대국을 중단했는데, 예외 없이 자신의 차례에만 대국을 중단하여 대국 기간을 3개월(1933년 10월 16일 ~ 1934년 1월 19일)로 늘렸다. 예를 들어, 슈사이는 대국 8일째에 먼저 수를 두었고, 고세이겐은 2분 안에 응수했다. 그 후 슈사이는 3시간 30분 동안 생각했지만 대국을 중단하기만 했다. 슈사이가 대국 중단 시간에 자신의 제자들과 대국을 검토하고 최선의 수를 연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따라서 고세이겐은 혼인보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3]
슈사이는 대국 내내 열세였지만, 대국 13일째에 백160수(W160)에서 묘수를 던져 지금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발한 수는 슈사이가 아니라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마에다 노부아키가 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고에 겐사쿠는 비공개 인터뷰라고 생각한 자리에서 기자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4] 마에다 본인도 암시했다. 마에다는 이러한 소문을 반박할 기회가 있었지만, 부인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5] 대국은 혼인보 슈사이의 2집 승으로 끝났다.
고세이겐 vs. 혼인보 슈사이(백), W160= |
5. 3. 은퇴 대국
1938년, 64세의 혼인보 슈사이는 은퇴 기념 대국을 위해 기타니 미노루와 대국을 펼쳤으나, 5집 차이로 패했다.[6] 이 대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명인》의 소재가 되었다.기타니 미노루는 혼인보 슈사이가 고세이겐과의 대국에서 정지 시간 특권을 남용한 것을 목격한 후, 매 정지 전에 수를 봉수할 것을 요구했다.[6] 처음에는 혼인보 슈사이 측이 이에 반대했지만, 기타니가 끈질기게 요구하여 결국 혼인보 슈사이가 물러섰다. 제한 시간은 각 40시간이었으며, 기타니는 깊이 생각하며 대국을 진행했다. 흑을 잡은 기타니는 덤이 없었으므로 초반의 이점을 안전하게 유지하여 5집 차이로 승리했다.[6]
6. 저작
1910년 1월 요시카와 코분칸에서 출판된 『신안 츠메고 시카츠 묘키』(新案詰碁死活妙機, 신안 막힘 바둑 사활묘기)는 메이지 시대의 지시신보에 게재되었던 현상 막힘 바둑 120문제를 증보 수정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서문에는 "본 책의 막힘 바둑은 옛사람들의 대국 및 저자의 대국을 기초로 한 실전상의 것으로, 고로 만들어진 진롱적인 것이 아니며, 오로지 실용을 주로 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실전을 기초로 한 작품집임을 알 수 있다.[1] 마에다 텐지가 "막힘 바둑 명작 베스트 텐"의 6위에 올렸을 정도로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적 저작이며, 발양론적인 난해함으로 알려져 있다.[1] 1931년에 오사카야 서점에서 재판되었으며, 현재는 1981년에 산카이도에서 출판된 판을 구할 수 있다(2004년 개정판 있음).[1]
그 외 저작은 다음과 같다.[1]
출판 연도 | 제목 | 저자 | 출판사 |
---|---|---|---|
1909 | 바둑의 기초: 신선기경 | 이나가키 겐타로 저, 혼인보 슈사이 편 | 하쿠분칸(博文館) |
1910 | 신안 츠메고 시카츠 묘키 | 혼인보 슈사이 | 킷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
1910 | 아마기감: 실전 상세 상 | 츠치야 슈에이고, 혼인보 슈사이 보정 | 중앙위기회 |
1914 | 위기 진롱 발양론 | 이노우에 인세키 저, 혼인보 슈사이 교정 | 오노 만자이칸 |
1916 | 위기 신수 | 혼인보 슈사이 강술, 히로즈키 료 편 | 중앙위기회 |
1916 | 위기 신수 일, 월, 화, 수, 목, 금, 토 | 혼인보 슈사이 강술, 히로즈키 료 편 | 중앙위기회 |
1917 | 구 막부 어비장 기전 | 혼인보 슈사이 | 오사카야호[외] |
1923 | 다이쇼 기감: 명인 타기 혼인보 슈사이 평론 | 히로즈키 젯켄 편 | 도쿄 중앙위추회 관서 지부 |
1930-1933 | 호선 정석 상중하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誠文堂) |
1930 | 치석 정석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명인 바둑 전집; [제1]) |
1931 | 위기 실전 궤범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명인 바둑 전집; [제3]) |
1931 | 신안 츠메고 시카츠 묘키 | 혼인보 슈사이 | 오사카야호 서점 |
1931 | 2, 3, 4자 포석법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명인 바둑 전집; [제2]) |
1933 | 명인 바둑 강좌 제1 실전 상세 아마기감. 상, 하 | 혼인보 슈에이, 혼인보 슈사이, 히로즈키 젯켄 | 헤이본샤(平凡社) |
1933 | 명인 지도 바둑 전집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
1934 | 명인 바둑 강좌 제2 명인 지남 바둑. 호선국 | 혼인보 슈사이, 히로즈키 젯켄 | 헤이본샤 |
1937 | 명국 해설 상권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신코샤(誠文堂新光社) (명인 바둑 전집; 속 [2]) |
1937 | 혼인보 기담 | 혼인보 슈사이 | 오카쿠라 서방 |
1939 | 대사 정석 상하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신코샤 (명인 바둑 전집; 속 [1]) |
1939 | 타기 선집 상하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신코샤 |
1939 | 사활 묘기: 신안 츠메고 | 혼인보 슈사이 | 오사카야호 |
1940 | 대사 정석 | 혼인보 슈사이 | 세이분도 신코샤 |
1941 | 혼인보 슈사이 전집 제1권 | 슈사이회 편 | 하쿠분칸 |
1946 | 명인 지남 바둑 호선국 사자국 육칠자국 | 혼인보 슈사이 저, 히로즈키 젯켄 편 | 헤이본샤 |
1947 | 명인 바둑 강좌 제2 명인 지남 바둑. 2·3자국 | 혼인보 슈사이, 히로즈키 젯켄 | 헤이본샤 |
1950 | 슈사이 명인 바둑 전집 제1-5책 | 혼인보 슈사이 | 슈사이 명인 바둑 전집 간행회 |
1952 | 츠메고·사활 묘기 | 혼인보 슈사이 | 오사카야호 서점 |
1957 | 슈사이 명인 걸작집 | 혼인보 슈사이 저, 미야시타 히데히로, 타카하시 시게요키 [편] | 일본기원 (바둑 문고) |
1972 | 명인 혼인보 슈사이 | 슈사이회 | |
1974 | 혼인보 슈사이 전집 전 6권 | 슈사이회 | 일본기원 |
1981 | 사활 묘기 | 혼인보 슈사이 해설, 바둑 연구회 편집 | 산카이도(山海堂) |
1977/8 | 『슈사이』(일본 바둑 대계18) | 치쿠마 쇼보(筑摩書房) | |
2004 | 『사활 묘기』 | 산카이도 (1981년) (초판 『신안 츠메고 사활 묘기』 1910년) |
7. 기타
1907년 스승인 슈에이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1년간 슈겐이 혼인보를 맡았다가, 1908년 슈사이가 혼인보가 되었다. 1938년, 더 이상 세습 혼인보를 두지 않기로 결정하여, 마지막 세습 혼인보가 되었다. 그가 은퇴하면서 기타니 미노루와 기념 대국을 하였는데, 이 대국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명인》의 소재가 되었다.
역대 혼인보는 다음과 같다.
세습 혼인보 |
---|
타이틀 다섯 번 연속 혼인보 |
참조
[1]
간행물
Go Monthly Review
1963-11
[2]
간행물
Go Monthly Review
1963-11
[3]
웹사이트
Analysed Games of Go Seigen
https://www.usgo.org[...]
[4]
웹사이트
The Pieter Mioch Interviews – Go Seigen (part 2)
http://gobase.org/st[...]
[5]
간행물
Go Monthly Review
1963-11
[6]
웹사이트
Playable version of Shūsai'a retirement game
http://ps.waltheri.n[...]
[7]
서적
新編 囲碁名言集
教養文庫
[8]
서적
本因坊自伝
[9]
서적
本因坊自伝
[10]
간행물
日本棋院物故棋士名鑑
日本棋院
1993
[11]
뉴스
囲碁二十一世名人、死去
東京日日新聞
1940-01-19
[12]
서적
以文会友
白水社
[13]
서적
坂田一代
日本棋院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