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막진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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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막진숭은 북위의 장군 후막진흥의 아들로, 북위 말에서 북주에 이르는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이주영, 하발악 등의 휘하에서 군공을 세웠으며, 서위 건국 후 경주자사를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서위와 북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563년 우문호의 몰락을 예견했으나, 우문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사후 시호는 조에서 장민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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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주의 사도 - 우문직
우문직은 북제 권신으로, 동생 우문호와 권력을 잡았으나 갈등 후 우문호를 실각시키고 우문옹의 우문호 제거 계획에 가담하여 권력을 장악했으나, 반란을 일으키다 처형당했다.
후막진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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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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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후막진(侯莫陳) |
이름 | 숭(崇) |
시호 | 장무(襄武) |
작위 | 안정군개국공(安定郡開國公) |
봉호 | 하내군(河內郡) |
관직 |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태부(太傅) 상서령(尙書令) |
생애 | |
출생 | 493년 |
사망 | 563년 |
가계 | |
아버지 | 후막진월(侯莫陳悅) |
아들 | 후막진장(侯莫陳璋) 후막진흔(侯莫陳欣) 후막진필(侯莫陳弼) 후막진열(侯莫陳悅) |
2. 생애
북위의 전중장군(殿中將軍) 겸 우림감(羽林監)이었던 후막진흥(侯莫陳興)의 아들이며, 형은 후막진순(侯莫陳順)이다.
15세에 군 경력을 시작하여 이주영, 하발악, 원천목 등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공을 세웠다. 특히 하발악 휘하에서 갈영의 난 진압, 원호 격파, 관중 평정 과정에서 활약했으며, 묵기추노를 생포하는 공을 세워 임경현후(臨涇縣侯)에 봉해졌다.
534년, 하발악이 동족인 후막진열에게 살해되자 우문태를 지지하였고, 후막진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며 정서장군(征西將軍)과 광무현백(廣武縣伯)에 봉해졌다.
535년 서위 건국 이후, 경주자사(涇州刺史)를 시작으로 여러 요직을 거치며 팽성군공(彭城郡公)까지 올랐다. 동위와의 전쟁에서 사원 전투, 하교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 상서령(尙書令) 등을 역임하고, 556년 육관(六官) 제도가 시행되자 대사공(大司空)에 임명되었다.
557년 북주(北周) 건국 후에는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지고 태보(太保), 대종백(大宗伯), 대사도(大司徒) 등 최고위직을 역임했다.
563년, 당시 실권자였던 우문호의 몰락을 예측하는 발언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우문호의 압박으로 자결하였다. 시호는 조(躁)였으나, 우문호가 숙청된 후 장민(莊閔)으로 추증되었다.
2. 1. 초기 활동과 서위 건국 (534년 이전)
북위의 전중장군 겸 우림감이었던 후막진흥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후막진순이며, 동생으로는 후막진경, 후막진개가 있었다.15세 때 이주영과 하발악이 갈영의 난을 토벌할 때 처음 군에 참가했다. 이후 원천목의 부하로 형고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건위장군에 임명되었다. 하발악 휘하에서는 낙양에서 원호를 격파하는 데 기여하였고, 직침으로 관직이 옮겨졌다.
그 뒤 하발악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적수촉을 토벌하였다. 묵기추노(만사추노)가 기주를 포위하자, 하발악을 따라 출정하여 그의 부장 위지보살 등을 무공에서 격파하고 기주의 포위를 풀었다. 또한 백리세천에서는 후복후원진의 방어 시설을 파괴했다. 묵기추노가 고평으로 달아나자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경주 장갱에서 따라잡았다. 후막진숭은 단기로 적진에 돌격하여 묵기추노를 말 위에서 사로잡았고, 그의 용맹에 묵기추노의 부하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이 공으로 안북장군, 태중대부, 도독에 임명되었으며, 임경현후에 봉해졌다.
534년, 하발악이 후막진숭의 동족인 후막진열에게 살해당하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우문태에게 귀의했다. 당시 원주 자사 사귀가 후막진열을 위해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우문태의 명을 받은 후막진숭은 야밤에 기습하여 사귀를 사로잡고 참수했다. 이 공으로 행원주사를 맡게 되었다. 이후 후막진열의 난이 평정되자 정서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진주의 치안을 안정시킨 공으로 광무현백에 봉해졌다.
2. 2. 서위에서의 활약 (534년 ~ 557년)
534년, 동족인 후막진열이 하발악을 살해하자, 후막진숭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우문태를 추대하였다. 우문태의 명으로 원주 자사 사귀(史歸)를 습격하여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고, 행원주사(行原州事)를 제수받았다. 이후 후막진열을 평정하는 과정에 참여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했으며, 진주(秦州)의 치안을 안정시킨 공으로 광무현백(廣武縣伯)에 봉해졌다.535년, 서위가 건국되자 경주(涇州) 자사에 임명되었고, 산기상시와 대도독 직위가 더해졌으며 작위는 공(公)으로 올랐다. 이후 차례로 의동삼사,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거쳐 팽성군공(彭城郡公)으로 봉해졌다.
537년, 동위의 두태를 격파하고 홍농을 점령했으며, 사원 전투에서 고환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538년에는 하교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541년, 계호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이후 옹주(雍州) 자사에 임명되었고, 태자 첨사(詹事)를 겸임하였다. 549년에는 주국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소부로 자리를 옮겼다. 554년에는 영주(寧州) 자사로 부임했다가 상서령으로 전임되었다.
556년, 북주에서 육관(六官) 제도가 시행되자 대사공에 임명되었다. 557년, 효민제 우문각이 즉위하자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으며, 태보의 지위가 더해졌다. 이후 대종백과 대사도를 역임하였다.
2. 3. 북주 건국과 죽음 (557년 ~ 563년)
556년, 서위에서 육관(六官) 제도가 세워지자 대사공(大司空)에 임명되었다. 557년, 북주(北周)의 효민제(우문각)가 즉위하자,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고 태보(太保)의 지위가 더해졌다. 이후 대종백(大宗伯)과 대사도(大司徒)를 차례로 역임하였다.563년, 후막진숭은 무제가 원주(原州)에 행차하는 것을 따랐다. 무제가 밤중에 갑자기 장안(長安)으로 귀환하자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후막진숭은 상승(常昇)에게 "내가 전에 점치는 사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진공(우문호)은 올해가 액년인 듯하다. 어가(車駕)가 지금 갑자기 밤중에 귀환한 것은, 진공이 죽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퍼지자 무제는 여러 공경(公卿)들을 대덕전(大徳殿)에 불러 후막진숭을 견책했다. 그날 밤,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우문호(宇文護)가 병사를 이끌고 후막진숭의 저택을 포위했고, 후막진숭은 자결을 강요받았다. 통상적인 예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시호(諡)는 조(躁)라고 했다. 훗날 우문호가 주살된 후에 시호가 장민(莊閔)으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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