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에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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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에 대화재는 1962년 9월 26일 일본 후쿠에시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이다. 열악한 소방 환경, 기상 조건, 취약한 도시 구조로 인해 발생했으며, 규슈 쇼센 창고 부근에서 시작된 불은 강풍을 타고 급속도로 번져 나가 시청, 병원 등 주요 시설을 포함한 시가지의 80%를 태웠다. 화재 발생 후, 자위대의 지원과 주민들의 노력, 정부의 지원을 통해 복구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대규모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을 통해 도시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 화재는 일본의 방재 정책 변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구 3만 명 이상 도시의 상비 소방 의무화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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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에 대화재 | |
---|---|
화재 개요 | |
위치 | 일본(나가사키현 후쿠에시 (현재의 고토시)) |
발생일 | 1962년 9월 26일 |
발생 시간 | 오전 2시 10분 |
원인 | 실화 |
피해 규모 | |
소실 면적 | 132,000 제곱미터 (39,930평) |
소실 가옥 | 604채 |
사망자 | 0명 |
이재민 | 피재 세대 811세대, 피재민 3,936명 |
2. 발생 배경
화재는 1962년 9월 26일 오전 2시 10분경[1] 나가사키현 후쿠에시 히가시하마마치(현 마루키바시 부근)의 규슈 쇼센 후쿠에 지점 창고 부근[1]에서 발생했다.[1] 일본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성냥불이 원인으로 추정된다.[1]
1962년 9월 26일 오전 2시 10분경, 나가사키현 후쿠에시 (현 고토시) 히가시하마마치 마루키바시 부근의 규슈상선 창고 근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일본 소방청은 성냥불을 화재 원인으로 추정했다.[1]
당시 북북동[1]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탓에 불길은 해안가를 따라 중심 상업지구로 빠르게 번져나갔다.[1] 화재는 6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시가지의 대부분인 총 604가구를 태우고 오전 8시 10분경 진화되었다.[1] 총 연소 면적은 132000m2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나가사키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다.[1]
화재 발생 시기는 일본 전역에서 시정촌 합병이 활발히 진행되던 때로, 이러한 행정적 변화가 대형 화재 대응 및 피해 복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큰 규모의 화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1]
3. 화재 발생 및 전개 과정
당시 북북동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이 바람을 타고 불길은 해안가를 따라 시 중심 상업지구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화재는 약 6시간 동안 계속되어 시가지의 대부분인 총 604가구를 태웠으며, 같은 날 오전 8시 10분경 진화되었다.
이 화재로 총 132000m2 면적이 소실되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나가사키현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다. 화재 이후 후쿠에 중심가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폐허로 변해, 잿더미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기록된다.
이 화재는 일본의 대규모 재해 특별조치법이 제정된 후 처음으로 적용된 사례(제1호)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 내 방화 및 방재 정책 수립에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되었다. 당시 복구 사업에는 3.67억엔이 투입되어 도서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현대적인 도시로 재건되었다.
3. 1. 발화
1962년 9월 26일 오전 2시 10분, 후쿠에시 동함정(東浜町) 대파지(大波止) 해안도로에 위치한 구 규슈상선 창고 부근에서 최초 발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소방청의 자료에 따르면, 화재의 주된 원인은 성냥불로 잠정 결론 내려졌다.
3. 2. 초기 대응
1962년 9월 26일 오전 2시 10분, 동함정(東浜町) 대파지(大波止) 해안도로에 위치한 구 규슈상선 창고 부근에서 화재가 처음 발생했다.
화재 신고는 14분 뒤인 오전 2시 24분에 후쿠에시 (현 고토시) 시청 야간 근무자에 의해 접수되었다. 곧이어 오전 2시 25분, 사이렌이 울리고 소방대원 소집 명령이 내려졌다.
소방대원들은 오전 2시 35분에 현장에 도착하여 소화 작업(방수)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간조 시간대여서 바닷물을 소화 용수로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소방대원들은 인력을 동원해 삽으로 바닥을 파내 겨우 정상적인 수압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방대의 방수가 시작된 시점은 이미 최초 발화 후 30분이 지난 뒤였다.
같은 시각(오전 2시 35분), 불길은 이미 주변의 주택과 여관으로 번졌고, 인근 주유소에 옮겨붙으면서 큰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거세게 치솟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소방대장, 후쿠에시장, 경찰서장은 사카야정(酒屋町)에 현장 경비 본부를 설치했다.
오전 3시경에는 불길이 동함정(東浜町), 사카야정(酒屋町), 가미정(上町), 만정(萬町), 신정(新町)까지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시점에서 소방 당국은 건물을 미리 파괴하여 연소 확대를 막는 파괴 소화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나가사키현 경찰 본부에 상황을 보고한 후, 통신 두절에 대비해 순찰차 무선만을 이용해 연락을 유지했다. 또한, 같은 시각에 정전이 발생하여 주민들은 아무런 재산도 챙기지 못한 채 급히 대피해야 했으며, 경찰은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현장 주변의 통행을 차단하고 피난민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3. 3. 확산
시간 (1962년 9월 26일) | 주요 상황 |
---|---|
오전 2시 10분 | 후쿠에시 동함정(東浜町) 대파지(大波止) 해안도로의 구 규슈상선 창고 부근에서 화재 발생 |
오전 2시 24분 | 시청 야간 근무자가 화재 신고 접수 |
오전 2시 25분 | 사이렌 발령 및 소방대원 소집 명령 |
오전 2시 35분 | |
오전 3시 | |
오전 4시 | 신영정(新栄町), 이케다정(池田町), 에도정(江戸町), 후쿠에정(福江町) 및 후쿠에 경찰서까지 연소되었다 |
오전 5시 | |
오전 5시 30분 | |
오전 6시 | 나가사키현은 현지 재해 대책 본부를 구 규슈 전력 고토 영업소에 설치하였다 |
오전 6시 30분 | |
오전 8시 10분 | 진화 완료. 그러나 저녁까지 잔불 처리 작업은 계속되었다 |
3. 4. 진화
오전 2시 25분 사이렌 발령과 함께 소방대원 소집 명령이 내려졌고, 10분 뒤인 오전 2시 35분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소화 활동을 시작했다.[1] 하지만 간조 시간대라 해수를 수원으로 확보하기 어려워 삽으로 직접 땅을 파 해수를 끌어와 겨우 평상시 수압을 확보했다.[1] 방수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발화 후 3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불길은 주택과 여관을 거쳐 주유소까지 번졌고, 오전 2시 35분경 주유소가 폭발하며 큰 소리와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1] 같은 시각, 소방대장, 후쿠에 시장, 경찰서장은 酒屋町|사카야마치일본어에 경비 본부를 설치했다.[1]오전 3시경에는 東浜町|도하마초일본어, 酒屋町|사카야마치일본어, 上町|가미마치일본어, 萬町|만초일본어, 新町|신마치일본어 등 5개 마을로 불이 번졌다.[1] 소방 당국은 파괴 소화를 포기했고, 경찰은 현경 본부와 전화 연락 후 순찰차 무선만으로 통신했다.[1] 정전으로 주민들은 재산을 챙기지 못한 채 대피했으며, 경찰은 현장 접근을 통제했다.[1] 불길은 계속 번져 오전 4시에는 新栄町|신에이초일본어, 池田町|이케다초일본어, 江戸町|에도마치일본어, 福江町|후쿠에초일본어 및 후쿠에 경찰서까지 연소되었고,[2] 오전 5시에는 堀町|호리마치일본어, 東町|히가시마치일본어, 本町|혼마치일본어, 北町|기타마치일본어로 확산되었다.[2] 오전 5시 30분에는 공립 고토 병원과 고토 시청까지 연소되었다.[2]
오전 5시 나가사키현과 현청에 재해 대책 본부가 설치되었고,[2] 나가사키현 해상보안부 및 후쿠에 해상보안서가 무선 연락 업무를 대행했다.[2] 오전 5시 30분에는 나가사키현이 재해 구조법 적용을 결정하고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2] 오전 6시에는 현지 재해 대책 본부가 구 규슈 전력 고토 영업소에,[3] 6시 30분에는 후쿠에 시 재해 대책 본부가 후쿠에 소학교 체육관에 설치되어 구호 물자 담당 배정, 피해 실태 조사, 수용소 설치 및 급식 제공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3]
오전 8시, 항공자위대 미이라쿠 주둔지의 자위대원 190명이 불도저 1대, 덤프트럭 3대, 대형 트럭 3대를 동원하여 현장에 도착, 잔해 제거 등 복구 활동을 시작했다.[3]
오전 8시 10분, 화재는 진화되었다.[3] 하지만 저녁까지 잔불이 남아 소방대의 소화 활동은 계속되었다.[3]
진화 후 구호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전 7시 해상자위대 구잠정 おおとり가 사세보항을 출항하여[3] 오전 10시에 현지에 도착, 구호 물자를 전달했다.[3] 이어 오전 11시 25분에는 구잠정 かささぎ,[3] 오후 2시에는 구잠정 はつかり, 오후 3시에는 호위함 ちくご가 각각 구호 물자를 싣고 도착했다. 오후 1시에는 일본적십자사 지원선 海竜丸|카이류마루일본어가,[3] 오후 6시에는 규슈상선 潮路丸|시오지마루일본어가 구호 물자를 날랐다. 오후 1시에는 임시 경찰서가 후쿠에 교회 천주당 내에 설치되었다.[3] 오후 7시와 9시에는 육상자위대 재해 파견 부대 총 184명과 차량 19대가 도착했다.
제공 기관 | 선박/부대 | 주요 물품 |
---|---|---|
해상자위대 | {{lang | 주·부식, 통조림 500개 |
{{lang | 담요 540장, 건빵 8,960개, 부식 15,024개 | |
{{lang | 담요 2,390장, 건빵 6,080개 | |
{{lang | 물자 3,000개, 건빵 | |
나가사키현 및 일본적십자사 | 海竜丸|카이류마루일본어 | 트럭 4대 분량 구호 물자 |
규슈상선 및 나가사키신문사 | 潮路丸|시오지마루일본어 | 담요 95장, 식량 3,111개, 위생 용품 432개, 빵 400개, 수건 1,000장 |
이후에도 일본 전국 각지에서 식료품, 생활용품 등 구호 물품이 계속 도착했다. 자위대와 적십자사 외에도 다양한 경로로 위문품이 전달되었는데, 종류가 워낙 다양하여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의 학생들과 부녀회, 관공서 직원들이 분류 및 배급 작업을 도왔다. 한편, 이때 도착한 구호 물품의 일부는 약 3개월 후인 1962년 12월 4일 미이라쿠정에서 발생한 화재 피해자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4. 피해 상황
1962년 9월 26일 새벽 2시 10분경[1] 나가사키현 후쿠에시 히가시하마마치의 규슈 쇼센 창고 부근에서 발생한 화재는 성냥불이 원인으로 추정된다.[1] 북북동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불길은 해안가를 따라 중심 상업지구로 번졌고, 약 6시간 만인 오전 8시 10분경 진화되었다.
이 화재로 총 132000m2가 소실되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가사키현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다. 화재로 인해 후쿠에시 시청사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와 민간 시설 다수가 불에 탔으며, 시가지의 약 8할이 전소되어 중심가는 폐허로 변했다. 진화 후에는 잿더미 속에서 바다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례적으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막대한 재산 피해로 인해 대규모 재해 특별조치법이 공포된 후 처음으로 적용된 사례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일본 내 방화 및 방재 시스템 구축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복구 사업을 통해 도서 지역에서는 전례 없는 현대 도시로 재건되었다.
4. 1. 인명 피해
이 화재 사건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기록되었다.당시 후쿠에 경찰서장과 후쿠에 시장이 현장에서 화재 진압과 대피를 직접 지휘하며 신속한 대응을 이끌었다. 이들은 주민들의 빠른 대피를 유도하는 한편, 재산을 챙기기 위해 화재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시민들의 접근을 막는 등 교통 통제를 실시했다. 또한, 화재 확산을 예상하고 병원 입원 환자들을 미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등 조기 대응이 인명 피해를 막는 데 큰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이때 경찰서장은 "인명 구조에 전력을 다하라. 특히 각 병원의 입원 환자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철저히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재산을 가지러 돌아가려는 시민들에게는 "목숨과 짐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짐은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며 통행을 허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4. 2. 재산 피해
후쿠에 대화재로 인해 후쿠에시 중심가의 8할이 전소되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가사키현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재산 피해는 막대했다.내용 | 내역 | 비고 |
---|---|---|
피해 면적 | 132000m2 | 39,930평 |
피해 세대 | 전소 797세대, 반소 14세대 | 계 811세대 |
피해 인원 | 전소 3,910명, 반소 26명 | 계 3,936명, 전 604호 |
피해액 | 약 40억엔 | 현재 가치로 약 76억엔 |
고토시 공식 「후쿠에 대화 재건 50주년」 페이지 기반. |
이 화재로 후쿠에 시청 청사를 비롯하여 시 소방차 차고, 나가사키현 고토지청, 후쿠에 세무서, 후쿠에 경찰서, 고토시립병원 등 주요 관공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또한 민간에서는 진료소 12곳과 약국 6곳도 불에 탔다.
4. 3. 주요 시설 피해
이 화재로 후쿠에시 시청 청사를 비롯하여 시 소방차 차고, 나가사키현 고토지청, 후쿠에 세무서, 후쿠에 경찰서, 고토시립병원 등 주요 관공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민간 시설 중에서는 진료소 12곳과 약국 6곳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5. 대처 및 복구
1962년 9월 26일 새벽 규슈 쇼센의 창고 부근에서 발생한 화재는 북북동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해안가를 따라 중심 상업지구로 번져 6시간 동안 타올랐다.[1] 이 화재로 총 604가구가 소실되고 연소 면적은 132000m2에 달했으나,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가사키현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다.
화재 진화 후 폐허가 된 후쿠에시는 대규모 재해 특별조치법 적용 제1호로 지정되어 국가적인 지원 아래 복구 작업에 착수했다. 이 사례는 이후 일본 내 다른 지역의 방재 및 복구 사업에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복구 사업에는 당시 금액으로 3.67억엔이 투입되었으며, 이는 섬 지역에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투자였다.
복구 과정에는 자위대의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 소방단, 청년단, 부인회, 심지어 중고등학생들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불탄 자리를 정리하는 등 시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특히, 화재 이전보다 도로 폭을 약 두 배로 확장하는 등 과감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시가지는 화재에 강하고 질서 정연한 현대적인 방화 도시로 재탄생했다. 상점가에는 아케이드가 설치되었고, 후쿠에시는 고토 열도의 중심 도시로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복구가 완료된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는 후쿠에 시가지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1966년 1월, 시청 앞에는 재난을 극복하고 도시를 성공적으로 재건한 시민들의 노력을 기리는 복구 기념비가 세워졌다.
5. 1. 초기 대응 및 진화
1962년 9월 26일 오전 2시 10분경, 나가사키현 후쿠에시 히가시하마마치(현 마루키바시 부근)의 규슈상선 후쿠에 지점 창고 근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성냥불이 원인으로 추정된다.[1]북북동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불길은 해안가를 따라 중심 상업지구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화재는 6시간 동안 계속 타올라 시가지의 대부분인 총 604가구를 태웠으며, 같은 날 오전 8시 10분경에 진화되었다.
화재가 확산되는 중부터 현지에 주둔하던 자위대의 복구 지원 활동이 시작되었다. 주요 지원 내역은 다음과 같다.
부대명 | 활동 기간 | 인원 | 장비 및 주요 활동 |
---|---|---|---|
미쓰이라쿠 자위대 (항공자위대 후쿠에섬 분둔기지) | 화재 발생 직후 | 190명 | 불도저 1대, 굴착기 1대, 레커 1대, 덤프트럭 5대, 대형 트럭 3대 동원 |
오무라·타케마쓰 부대 | 9월 27일 - 10월 2일 | 208명 | 십팔은행 금고 폭발을 포함한 위험물 제거 활동, 정지 작업 (면적: 11560m2, 총 배토량: 2403m3) |
5. 2. 주민들의 노력
화재 당일 도착한 주요 지원 물자는 다음과 같다.지원 주체 | 선박/기관 | 지원 물품 내역 |
---|---|---|
해상자위대 | {{lang | 주·부식, 통조림 500개 |
{{lang | 담요 540장, 건빵 8,960개, 부식 15,024개 | |
{{lang | 담요 2,390장, 건빵 6,080개 | |
{{lang | 물자 3,000개, 건빵 | |
나가사키현 및 기타 | 海龍丸|해룡환일본어 | 나가사키현 및 일본적십자사 구호 물자 (트럭 4대 분량) |
長老丸|장로환일본어 | 규슈상선 (담요 95장, 식량 3,111개, 위생 용품 432개), 나가사키신문사 (빵 400개, 수건 1,000장) |
이후 전국 각지에서 식료품, 생활용품 등 다양한 구호 물품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육상자위대·해상자위대, 일본적십자사 등 공식적인 지원 외에도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위문품이 매일 도착했으나,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제각각 도착했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고 피해자들에게 배분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역할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의 학생들과 지역 부녀회 회원, 관공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수행했다.
이렇게 모인 구호물자 중 일부는 후쿠에 대화재 3개월 뒤인 1962년 12월 4일 미이라쿠정에서 발생한 화재(11가구 전소)의 피해자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이는 후쿠에 경찰서와 후쿠에 지역 피해 주민들의 온정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의료 지원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복강초등학교에는 공립 고토 병원 임시 진료소와 일본적십자사 무료 진료반이 설치되어 피해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특히 화재 진압 과정에서 많은 소방대원들이 눈에 작은 바늘 모양의 이물질이 박히는 등 부상을 입었는데, 지역 안과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원정 경찰서 터에 안과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고 피해자, 소방대원,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안과 진료를 제공했다. 시내 병원의 기존 입원 환자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다른 병원들의 협조로 분산 수용되었다.
지역 부녀회와 후쿠에시 여성 공무원들은 주먹밥 등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제공하는 급식 활동을 벌였다. 본래 재해구호법에 따른 급식 지원은 3일간으로 제한되었으나, 특별히 5일간으로 연장되는 등 행정적인 협조도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급식을 받은 총 인원은 10,846명에 달했으며, 배급된 쌀의 총량은 6508kg이었다.
물가 안정을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부녀회는 복강초등학교 옆 빈터에 일용품과 신선식품 판매소를 설치하고 시중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물품을 제공하여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자 했다. 또한, 건자재 가격 급등을 막기 위해 후쿠에시는 국가로부터 시내 국유림 6,500석(石)을 할당받아 지역 목재 유통을 촉진하고, 시가보다 10%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여 가격 안정을 도모했다.
피해자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교통 지원도 이루어졌다. 규슈상선페리는 후쿠에-나가사키 정기 항로 요금을 1962년 10월 25일까지 무료로 운행했고, 이후 1963년 3월 30일까지는 요금을 절반으로 인하했다. 고토버스 역시 1963년 9월 5일까지 시내 정기 노선 운임을 전면 무료화했다.
화재 이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나가사키현 경찰본부는 긴급 기동대를 후쿠에시에 파견했으며, 기타마치 천주당, 혼마치 후쿠에 경찰서 옛터, 오오나미토 세 곳에 임시 순찰 파출소를 설치하여 지역 경비를 강화했다.
5. 3. 정부 지원
후쿠에 초등학교 옆 빈터에 부녀회가 생필품과 신선식품 판매소를 열어,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시중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물품을 공급했다.건자재 가격 급등을 막기 위해 후쿠에시는 정부로부터 시내 국유림 6,500석(石)을 배정받아 지역 목재 유통을 관리했으며, 시세보다 10%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여 가격 안정화를 꾀했다.
규슈상선페리는 후쿠에 - 나가사키 정기 항로 운임을 1962년 10월 25일까지 무료로, 이후 1963년 3월 30일까지는 절반 가격으로 운행하여 피해 주민들의 이동을 지원했다.
고토버스는 1963년 9월 5일까지 시내 모든 버스 노선 운행을 무료로 하여 주민들의 불편을 덜어주었다.
5. 4. 복구 계획 및 재건
화재 당일인 1962년 9월 26일 오후 3시경, 진화 작업이 마무리된 직후 나가사키현 지사, 후쿠에 시장, 후쿠에 시 의회 의원, 후쿠에 상공회 간부 등이 모여 재해 대책 연락협의회를 열고 복구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재해였기 때문에 사업 계획을 서둘러 확정할 필요가 있었고, 구체적인 토지 구획 정리 사업 설계는 나가사키현이 중심이 되어 추진했다.복구 과정에는 자위대의 지원뿐만 아니라 지역 소방단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청년단, 부인회는 물론 중고등학생들까지 자원하여 불탄 자리를 정리하는 등 복구 작업에 힘을 보탰다.
나가사키현이 주도한 복구 계획의 핵심은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이었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정리 용지 범위 설정'''
# '''가로(街路) 계획 수립'''
# '''구획 정리 실행'''
특히 가로 계획은 도시의 방재 기능을 강화하고 미래의 교통량 증가에 대비하며, 도시 미관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총 연장 14.5km에 달하는 8개의 주요 도로를 계획했으며, 후쿠에시에서는 처음으로 차도와 보도를 분리한 폭 16m의 넓은 도로를 도입했다.
1962년 11월 9일, 후쿠에 시청과 고토 지청에서 이 복구 계획안이 공개되자, 피해 지역 주민들, 특히 상점가를 중심으로 큰 반발이 일어났다. 시 당국은 여러 차례 주민 설명회를 열었지만, 반대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주민들은 "후쿠에 시 구획 정리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반대 운동에 나섰다. 반대 운동의 강도는 거세서 당시 후쿠에 시장은 매일같이 비난에 시달렸고, 신변 보호를 위해 경찰관의 경호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나가사키현 지사에게도 계획에 반대하는 내용의 전보가 수백 통이나 전달되었다.
그러나 후쿠에 시는 포기하지 않고 각 동별로 주민 설명회를 끈기 있게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 끝에 일부 시민들 사이에서 "구획 정리 촉진 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계획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시 당국은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획 정리 사업을 강행했으며, 공사가 실제로 진행되면서 점차 반대 운동의 기세는 약해졌다.
마침내 화재 발생 4년 후인 1966년 여름, 후쿠에 대화재 복구 사업은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로는 화재 이전보다 약 두 배 넓어졌고, 과감한 토지 구획 정리를 통해 시가지는 화재에 강하고 질서 정연한 현대 도시로 거듭났다. 상점가에는 아케이드가 설치되어 편의성이 높아졌으며, 후쿠에시는 고토 열도의 중심 도시로서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맞았다. 복구가 완료된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는 후쿠에 시가지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기록된다.
1966년 1월에는 후쿠에 시청사 앞에 재난을 극복하고 도시를 재건한 시민들의 노력을 기리기 위한 복구 기념비가 세워졌다.
6. 영향 및 의의
후쿠에 대화재는 나가사키현 역사상 최악의 대형 인재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된다. 연소 면적은 132000m2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일본 전역에서 진행되던 시정촌 합병 작업 시기와 맞물려 피해가 더욱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 소방청은 화재 원인을 성냥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화재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 중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6. 1. 일본 방재 정책 변화
1962년 9월 6일, 후쿠에 대화재 발생 20일 전에 '격심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특별한 재정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지만, 당시 이 법률은 후쿠에 대화재와 같은 지역 재해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쿠에시와 나가사키현 출신 국회의원들이 국가에 적극적으로 건의한 결과, 1962년 12월 11일 공포된 정령 제448호에 의해 후쿠에 대화재는 격심재해 제1호로 지정되었다.이 대화재는 이후 일본의 방화 및 방재 정책 수립에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되었다. 특히, 1964년 2월에는 일본 정부가 정령을 통해 인구 3만 명 이상의 도시에 상시 소방 조직 설치를 의무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후쿠에 대화재의 교훈을 바탕으로 소방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6. 2. 기타 영향
화재 이후 진행된 구획정리로 인해 신에이정(新栄町)이 4개로 나뉘면서, '히고모리(日ごもり)'나 '곤피라산(こんぴらさん)'과 같은 마을의 친목 행사가 중단되는 결과를 낳았다.1962년 10월, 당시 나가사키현에서 '동화의 아저씨'로 알려진 니시카와 타케지(西川武治)가 후쿠에섬을 방문했다. 그는 '부흥의 해가 뜬다(復興の陽が昇る)'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 시가 이후 나가사키현의 꽃 가꾸기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참조
[1]
웹사이트
平成29年版 消防白書 附属資料1-1-7 昭和21年以降の大火記録
https://www.fdma.go.[...]
総務省
2017-00-00
[2]
문서
후쿠에시는 현재의 고토시이다.
[3]
문서
연소된 면적인 132,000 제곱미터의 규모는 독도의 0.18 제곱킬로미터보다도 조금 작은 편이다. 고성, 구레 산불과 비교하면 약간 작은 편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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