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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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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희천 전투는 6사단이 평양 점령 후 진격 방향을 바꿔 순천, 개천, 희천 방면으로 진격하며 벌어진 전투이다. 6사단은 순천을 점령하고 개천에서 북한군과 교전했으며, 10월 22일에는 영변을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6사단의 승리는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 전쟁 초기 전세를 뒤집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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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천 전투
희천 전투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10월 20일 ~ 10월 23일
장소성천 - 개천 - 희천
결과대한민국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지휘관 1유재흥 제2군단장 소장
김종오 제6사단 준장
함병선 제2연대장 대령
석순천 제1대대장 소령
이성훈 제2대대장 대리 대위
송대후 제3대대장 소령
임부택 제7연대장 대령
김용배 제1대대장 중령
김종수 제2대대장 중령
인성관 제3대대장 중령
김익열 제19연대장 대령
김준교 제1대대장 소령
김욱전 제2대대장 소령
박철 제3대대장 소령
김성 제16포병대대장 소령
지휘관 2불명
병력
병력 1국군 제6보병사단 7연대
병력 2조선인민군 18사단 1개 연대
피해

2. 배경

6.25 전쟁 발발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과 UN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다. 10월 19일, 제1사단과 UN군이 평양을 탈환하면서 조선인민군 주력은 북쪽으로 패퇴하고 있었다.

UN군 사령부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연내에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목표 아래 총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북진 작전의 일환으로, 동부전선에서 북진하던 제6사단은 제2군단의 작전 계획 변경에 따라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평안북도 내륙의 중요 거점인 희천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희천은 만포선 철도와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이곳을 확보하는 것은 압록강 방면으로의 진격을 위한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당시 국군과 UN군은 중공의 대규모 중국인민지원군 개입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는 곧이어 벌어질 희천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2. 1. 작전 명령

제6사단은 평양 공격 명령을 받고 10월 15일 원산-덕원을 출발하였다. 10월 18일 22:15, 제7연대 제2대대가 양덕을 점령하고 계속해서 성천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19일 12:00, 제1사단과 UN군이 이미 평양을 탈환함에 따라, 제6사단은 군단장 명령에 따라 진격 방향을 변경했다. 기존의 성천에서 순천-개천-희천 방향으로 진격로를 바꾸었다.

이에 따라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18호에 따른 제2군단 작전 계획에 의거하여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주 공격 부대로, 제2연대를 예비대로 편성하였다. 우선 순천-개천-안주를 공격한 후, 즉시 희천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3. 전투 과정

10월 19일 평양 탈환 이후, 제6사단은 진격 방향을 순천-개천-희천 방면으로 변경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10월 20일에는 제7연대가 순천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퇴로 차단을 위해 공수 투하된 미군과 조우했다. 다음 날인 10월 21일, 제7연대는 개천으로 진격하여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며 점령에 성공했고, 다른 연대들도 순천과 개천 일대로 이동하며 전선을 북상시켰다. 10월 22일에는 개천 서남쪽에서 대규모 북한군 패잔병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멸했으며, 제19연대는 영변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국군은 희천으로 향하는 길목을 확보해 나갔다.

3. 1. 순천 탈환 (10월 20일)

10월 19일 12:00, 제1사단과 UN군 부대가 이미 평양을 탈환함에 따라, 제6사단은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진격 방향을 성천에서 순천-개천-희천 방면으로 변경했다.

10월 20일 07:00, 제7연대는 제1대대와 제2대대를 선두로 하고 제3대대를 예비대로 하여 성천을 출발, 순천을 향해 도보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진격 도중, 연대 수색대로부터 북한군이 이미 순천 북쪽으로 퇴각하여 저항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연대장은 즉시 전 병력을 차량으로 이동시키는 전술적 기동을 명령했고, 같은 날 20:00에 순천에 돌입했다.

한편, 미 제11공정사단 제187연대는 이날 14:20에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미군 포로를 구출할 목적으로 순천 서남쪽 3.2km 지점에 공수 투하되었다. 제7연대 주력이 순천에 도착하자, 양 부대 장병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반가움을 나누었다. 이때 미군 공수대원들이 노획한 소련제 권총과 기관단총을 기념품으로 원하여 일부를 넘겨주기도 했다.

순천에는 북한군의 후방사령부가 위치해 있었으며, 북한군은 황급히 패주하면서 많은 보급품을 그대로 남겨두고 갔다. 이때 노획한 보급물자는 대부분 아군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

3. 2. 개천 전투 및 순천 재탈환 (10월 21일)

10월 21일 06:00, 제7연대 제2대대는 개천 남쪽 15km 지점까지 진격하여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과 교전했다. 대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추격했고, 북한군은 주변 산악지대로 흩어져 저항했으나 대대는 추격을 멈추고 개천 방향으로 전진을 계속했다.

한편, 예비대였던 제7연대 제3대대는 순천에서 출발하여 개천을 점령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았다. 제3대대는 차량으로 개천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던 중, 도로 위에서 북쪽으로 행군하던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과 마주쳤다. 대대장 인성관 중령은 개천 점령 시간 확보를 위해 교전 대신 북한군 대열 중앙을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차량 위에서 투항을 권유하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북한군은 대부분 무기를 버리고 흩어지거나 산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제3대대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개천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이후 개천으로 향하던 연대 수색중대가 앞서 제3대대와 마주쳤던 북한군 잔병에게 기습을 받아 일부 손실을 입었으나, 곧 이들을 격파하고 개천까지 진격했다. 이 시각 연대 주력 부대는 순천과 개천 사이를 이동 중이었다.

같은 날, 제19연대는 13:30에 순천을 출발해 용원리까지 진격한 후 부대를 정비했다. 전날 성천까지 진격했던 제2연대는 이날 08:00 성천을 출발, 22:00경 은산을 거쳐 순천까지 진격했다. 사단 사령부와 제2연대 본부는 21:00에 은산으로 이동했으며, 포병대 역시 공격 부대 지원을 위해 순천으로 이동했다.

순천 남쪽에서는 굴속에 숨어 지내던 민간인들을 구출하고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포탄 보급이 원활하지 않자 대대장 김성 소령은 인접한 미군 포병 부대를 찾아가 포탄 지원을 요청했고, 미군이 보유한 포탄 800발 중 400발을 지원받아 사용했다.

3. 3. 개천 전투 및 영변 탈환 (10월 22일)

10월 22일 새벽, 제7연대 제3대대는 전날 밤의 상황이 이어진 가운데, 신안주 방면에서 개천 쪽으로 행군하는 1개 사단 규모의 북한군을 발견했다. 대대장이 쌍안경으로 관측한 결과, 이들은 후미에 전차 10대를 동반한 패잔병 대열이었다. 대대장은 즉시 전 병력을 개천 서남쪽 장방일대에 은밀히 배치하여 기습 공격으로 적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국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북한군 선두 부대가 교량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대대장의 신호탄 발사와 함께 국군은 일제히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북한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나, 미리 구축된 국군의 화망에 걸려 대부분 격멸되거나 분산되었다. 북한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집단이었기에 국군의 기습 공격에 오합지졸처럼 무너져 흩어졌다.

제7연대 제3대대는 전장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이날 07시에 연대 주력과 합류하여 희천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한편, 제19연대는 같은 날 12시에 용원리를 출발하여 개천까지 진출했다. 이 중 제3대대는 105mm 곡사포대와 대전차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영변 쪽으로 계속 진격했다. 이날 19시 30분경,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과 조우하자 지체 없이 돌격하여 적을 격파하고 영변을 점령했다. 점령 직후, 연대는 즉시 주변 일대에 대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4. 결과 및 영향

동부전선의 수도사단10월 22일 북청-중양리-신흥가도를 따라 진격했고, 좌측의 제1사단안주개천 중간 지점까지 진출했다.

한편 제6사단 사령부는 10월 22일 밤, 사단 주력 부대의 빠른 진격에 발맞춰 개천까지 나아갔으며, 다시 구장동으로 전진할 준비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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