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1년 콘클라베
1. 개요
1721년 콘클라베는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사망 이후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열린 선거이다. 추기경단은 파벌로 나뉘어 대립했으며, 주요 후보로는 프란체스코 피냐텔리가 거론되었다. 콘클라베는 3월 31일에 시작되어 미켈란젤로 데 콘티가 5월 8일 55표 중 54표를 얻어 교황 인노첸시오 13세로 선출되었다.
| 월 - 일 | 3월 – 5월 |
|---|---|
| 연도 | 1721년 |
| 날짜 | 1721년 3월 31일 – 1721년 5월 8일 |
| 위치 | 사도 궁전, 교황령 |
| 수석 추기경 | 세바스티아노 안토니오 타나라 |
| 차석 추기경 | 빈첸초 마리아 오르시니 |
| 교황청 камерленго | 안니발레 알바니 |
| 수석 사제 | 갈레아초 마레스코티 |
| 수석 부제 | 베네데토 팜필리 |
| 거부된 후보 | 파브리치오 파올루치, 프란체스코 피냐텔리 |
| 투표 횟수 | 75회 |
| 선출된 교황 | 미켈란젤로 콘티 |
| 선택된 이름 | 인노첸시오 13세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이전 콘클라베 연도 | 1700년 |
|---|---|
| 이전 콘클라베 링크 | 1700년 교황 콘클라베 |
| 다음 콘클라베 연도 | 1724년 |
| 다음 콘클라베 링크 | 1724년 교황 콘클라베 |
-
카를 6세 -
사라고사 전투
사라고사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연합군이 스페인 부르봉 군에게 승리한 전투로, 마드리드로 가는 길을 열었으나 전략적 영향은 크지 않았고, 연합군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
카를 6세 -
빈 조약 (1725년)
빈 조약 (1725년)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간에 체결되어 사국 동맹 전쟁 이후 대영국 정책 협의와 지브롤터 탈환을 목표로 스페인의 오스텐데 회사 무역 특권을 부여하고 영국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형성하려 했으나, 이후 양국이 적대 관계가 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
루이 15세 -
팡테옹
팡테옹은 파리에 있는 기념 건축물로, 원래 교회로 지어졌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리는 사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져 역사, 과학, 예술을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
루이 15세 -
라우펠트 전투
라우펠트 전투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군이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로, 엑스라샤펠 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으나,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하여 네덜란드의 쇠퇴와 외교 관계 재편을 초래했다. -
콘클라베 -
2005년 콘클라베
2005년 콘클라베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해 열린 콘클라베로, 베네딕토 1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115명의 추기경 선거인이 참여하였다. -
콘클라베 -
1978년 10월 콘클라베
1978년 10월 콘클라베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해 111명의 추기경이 참여하여 폴란드 출신의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추기경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했으며, 이는 455년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교황의 선출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 추기경단
1721년 콘클라베에는 추기경 50명이 투표에 참가했고, 12명은 불참했다. 추기경단은 황제 파벌, 부르봉 파벌, 클레멘타인 파, 젤란티 등 크게 네 파벌로 나뉘었다.
2.1. 추기경단 구성
추기경단은 두 개의 정치적 파벌과 두 개의 쿠리아 파벌로 나뉘었다. 신성 추기경단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인 황제 파벌은 제국 장관 알탄이 이끌었으며, 그 세력은 20표에서 25표 사이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카를 6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이익을 대변했다.
부르봉 파벌은 부르봉 왕가 출신 왕들이 통치하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추기경 그룹으로, 11명 또는 12명의 추기경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루이 15세와 펠리페 5세의 이익을 대변했다.
클레멘스 11세의 추기경 조카인 안니발레 알바니가 이끈 클레멘타인 파는 세 번째 파벌을 형성했다. 알바니는 그의 삼촌이 임명한 추기경 그룹의 지도자였으며, 그들의 수는 8명에서 15명 사이로 추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젤란티는 교회에 대한 세속적 영향에 반대하는 추기경 파벌로, 파브로니 추기경이 지도자였다. 젤란티의 세력은 6명에서 12명 사이로 추정되었다.
일반적으로 두 쿠리아 파벌인 클레멘타인과 젤란티가 콘클라베에서 힘을 합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3. 주요 후보
프란체스코 피냐텔리가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파파빌리)로 여겨졌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받았으며, 젤란티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다. 안니발레 알바니는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후보를 지지했지만, 실제로는 삼촌의 국무 장관인 파브리치오 파올루치를 선출하길 원했다. 선출될 가능성이 높은 다른 후보로는 코르시니, 타나라, 콘티, 팜필리, 바르바리고, 고차디니가 있었다.
4. 콘클라베 진행 과정
줄리오 알베로니와 루이 앙투안 드 노아이유는 파문당한 상태였지만, 1721년 콘클라베에 초대되었다. 그러나 노아이유 추기경은 건강 문제로 불참했다. 부총장 피에트로 오토보니 추기경은 서품을 받지 않았지만 콘클라베 참여가 허가되었다.
콘클라베는 3월 31일에 27명의 추기경으로 시작되었고, 4월 9일까지 40명으로 늘어났다. 토마스 필립 발라드 드 에냉-리에타르 달자스와 다미안 휴고 필립 폰 쇤보른 추기경은 5월 7일에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안니발레 알바니 추기경은 파브리치오 파올루치를 선출하려 했으나, 4월 1일 황제 카를 6세의 공식적인 배제 선언으로 실패했다. 4월 2일, 프랑스의 로한 추기경이 알탄의 행동에 감사를 표했다.
4월에는 스파다, 고차디니, 코르나로, 카라치올로 등 여러 후보가 제안되었지만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4월 20일 시엔푸에고스 추기경이 도착했고, 프랑스 파벌이 제안한 콘티 추기경이 유력해졌다. 4월 25일 콘티는 7표를 얻었다. 5월 1일, 스페인은 피냐텔리를 공식적으로 배제했고, 황실 파벌은 콘티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했다.
5월 8일, 75번째 투표에서 미켈란젤로 데 콘티 추기경이 55표 중 54표를 얻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기려 인노첸시오 1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베네데토 팜필리 추기경이 그의 선출을 알렸고, 5월 18일 바티칸 대성전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5. 콘클라베 이후
8일 아침, 75번째 투표에서 추기경 미켈란젤로 데 콘티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55표 중 54표를 얻었다. 유일한 반대표는 그가 추기경단 단장인 세바스티아노 안토니오 타나라에게 던진 표였다. 그는 선출을 수락하고 콘티 가문 출신인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기려 인노첸시오 1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잠시 후 수석 부제 베네데토 팜필리는 고대 공식 하베무스 파팜으로 그의 선출을 로마 시민들에게 알렸고, 18일에는 장엄하게 바티칸 대성전 계단에서 그를 대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