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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펠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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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우펠트 전투는 1747년 7월 2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오늘날 벨기에의 라우펠트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지휘 아래 컴벌랜드 공작이 이끄는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프랑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의 봉쇄와 동맹국의 참전으로 인해 프랑스는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저지대 국가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 전투는 컴벌랜드 공작의 전략적 판단 미숙과 리고니에 장군의 용감한 기병 돌격으로 특징지어진다. 라우펠트 전투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쇠퇴를 확인하고, 영국-오스트리아 동맹의 붕괴와 외교 혁명을 초래하는 등 유럽 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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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펠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라우펠트 전투
다른 이름라펠트
라펠트
로펠트
로펠트
마스트리흐트 전투
발 전투
일부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루이 15세와 모리스 드 삭스가 라우펠트에서
루이 15세와 모리스 드 삭스가 라우펠트에 있는 모습
날짜1747년 7월 2일
장소리에주 공국 라우펠트 (통에런과 마스트리흐트 사이, 현재 벨기에 림스트)
결과프랑스의 결정적인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하노버 선제후국
교전국 2프랑스 왕국
지휘관
지휘관 1컴벌랜드 공작
존 리고니어
발데크 공 카를 아우구스트
카를 요제프 바티아니
폰 다온
[[파일:Wappen-HK (1736-1804).svg|15px]] 프리드리히 2세
지휘관 2모리스 드 삭스
루이 15세
클레르몽-토네르
뢰벤달 백작
병력 규모
교전국 180,000명, 최대 200문
교전국 282,000 ~ 98,000명, 170문
사상자 및 피해
교전국 16,000명 (포로 제외) ~ 11,000명 사상자
대포 23문
교전국 25,000명 ~ 11,000명 사상자 (추정치)

2. 배경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은 이미 1739년부터 주로 카리브해에서 스페인과 젠킨스의 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플랑드르에 주둔한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은 처음에는 하노버 선제후국 소속 군대로서 전쟁에 참여했다. 프랑스는 1744년 3월이 되어서야 영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으며, 네덜란드 공화국은 1747년까지 기술적으로 중립 상태를 유지했다.

1746년 10월 로쿠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지만, 영국을 굴복시켜 평화 조약을 맺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프랑스는 1713년 이후 확장된 영국의 상업력이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1747년 무렵 영국의 무역은 다시 확장세를 보였고, 프랑스 경제는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746년 말에 이르자 대부분의 참전국들은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왕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잃어버린 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재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얻은 것은 1713년의 일이었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 모두 상대방이 이 지역을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게 이 지역을 유지하는 것은 전략적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중립을 유지하며 프랑스의 수출입품을 운송하는 주요 통로 역할을 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무역 손실은 양국 경제에 부담을 주었고, 네덜란드 정부는 영국에 평화를 요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영국 역시 상당한 국가 부채를 안고 있었지만, 자금을 조달할 여력은 상대적으로 나았다.

동맹국들의 전쟁 참여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은 1747년 1월 헤이그에서 협약을 맺고 이탈리아 주둔 오스트리아군과 사보이 군대, 그리고 플랑드르의 연합군 병력 14만 명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 지원 규모는 1748년에 19만 2천 명으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당시 영국의 외교 정책을 총괄하던 국무장관 뉴캐슬 공작은 동맹군이 네덜란드를 탈환하여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1746년 7월 스페인펠리페 5세가 사망하자 부르봉 가문의 동맹이 약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1746년 8월 브레다에서 프랑스와 영국 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뉴캐슬 공작은 특사로 파견된 샌드위치 백작에게 협상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라고 지시했다.

3. 전투

1747년 라우펠트 근교에서 모리스 드 삭스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컴벌랜드 공작이 지휘하는 동맹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군은 약 12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동맹군은 이보다 약간 적은 규모였다.

전투에 앞서 컴벌랜드 공작은 동맹군 전방의 요새화된 마을들을 점령하자는 리고니에 장군의 중요한 조언을 무시하는 실책을 범했다.[17] 이는 이전 로쿠스 전투에서와 유사하게 동맹군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또한 우익의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약한 좌익을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프랑스군은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라우펠트 마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컴벌랜드 공작은 네덜란드영국군을 동원하여 반격을 시도했지만, 네덜란드 기병대가 프랑스 기총병(Carabiniers)의 돌격에 격파당하며 혼란에 빠져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 기병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맹군 중앙을 돌파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18][7]

프랑스군의 총공세로 동맹군 좌익의 영국 보병대가 전멸 위기에 처하자, 리고니에 장군은 독단적으로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동맹군을 구출했다. 이 전투에서는 양측 합쳐 약 15,000기에 달하는 기병이 격돌하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최대 규모의 기병전이 벌어졌다.[8] 리고니에 장군은 동맹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한번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 과정에서 말에서 떨어져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19]

3. 1. 전투의 전개

삭스 원수


컴벌랜드 공작은 프랑스군 본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리고니에 장군이 동맹군 전방의 마을들을 점령하고 요새화하자고 제안했으나, 컴벌랜드 공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7] 리고니에의 조언을 따랐다면 전황을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었다. 로쿠스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우익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은 방어가 약한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투는 오전 6시에 포병 사격으로 시작되어 오전 8시 30분까지 이어졌다. 컴벌랜드 공작은 밤 사이 점령했던 마을에서 보병을 이동시키고 불을 지르는 심각한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삭스 원수는 이를 컴벌랜드 공작이 뫼즈강을 건너 후퇴하려는 신호로 해석하고, 오전 10시 30분경 보병에게 마을 점령을 명령했다. 플리팅겐은 비어 있었지만, 라우펠트는 프리드리히 휘하의 헤센 병력이 다시 점령했다. 이후 몇 시간 동안 라우펠트는 프랑스군과 동맹군 사이에서 주인이 네다섯 번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오후 12시 30분경 프랑스군이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다섯 차례의 대규모 공격 끝에 약 10,000명에 달하는 영국과 헤센 방어자들을 라우펠트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리고니에 백작 (1680–1770). 그의 기병 돌격은 동맹군이 질서 있게 후퇴하도록 도왔지만, 그는 포로로 잡혔다.


컴벌랜드 공작은 네덜란드와 영국군을 재편성하여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기병대는 프랑스 기총병(Carabiniers)의 돌격에 쉽게 격파당하며 도주했고, 이 과정에서 뒤따르던 동맹군 보병대와 충돌하여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이 틈을 타 프랑스 기병대는 동맹군 중앙을 돌파했다.[18][7] 동맹군 좌익에 배치된 영국 보병대는 프랑스군의 총공세 앞에 전멸 위기에 놓였다.

이때 리고니에 장군은 독단적으로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여 동맹군을 위기에서 구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기병전으로, 양측 합쳐 약 15,000기의 기병이 격돌했다. 이 돌격으로 프랑스 아일랜드 여단은 1,4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8] 근시였던 컴벌랜드 공작은 붉은 군복을 입은 아일랜드 여단 병사들을 아군으로 착각하여 하마터면 포로로 잡힐 뻔하기도 했다.[9] 리고니에 장군은 동맹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세 개 연대만 이끌고 다시 한번 돌격을 감행했으나, 안타깝게도 말에서 떨어져 4개의 군기와 함께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19] 리고니에의 희생 덕분에 카를 요제프 바트야니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동맹군이 마스트리흐트로 무사히 철수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3. 2. 주요 참전 인물


  • '''모리스 드 삭스''':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원수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라우펠트 전투에서도 그의 지휘 아래 프랑스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라우펠트 마을을 최종적으로 점령하고 동맹군을 격파하며 승리를 거두었다.[18] 그는 전투 후 리고니에의 기병 돌격이 아니었다면 동맹군이 전멸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 '''컴벌랜드 공작''':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아들이자 동맹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전투에서 여러 실책을 보였다. 그는 리고니에 장군이 동맹군 전방의 마을들을 점령하고 요새화해야 한다는 중요한 조언을 무시했다.[17] 또한, 전투 당일 점령 중이던 마을에서 병력을 이동시키고 불을 지르는 등 결정적인 판단 착오를 저질러 프랑스군에게 점령의 빌미를 제공했다. 프랑스 기병대의 돌파로 동맹군 중앙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졌으며,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아일랜드 여단을 아군으로 오인하여 포로가 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9]

  • '''존 리고니에''': 동맹군 기병대를 지휘한 장군이다. 컴벌랜드 공작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조언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7] 전투 중 동맹군 좌익의 영국 보병대가 전멸 위기에 처하자, 독단적으로 기병 돌격을 감행하여 아군을 구출하는 용맹함을 보였다.[18] 이어진 대규모 기병전에서 그의 지휘 아래 동맹군 기병대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특히 그의 마지막 돌격은 동맹군이 질서 있게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낙마하여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19]

  • '''로웬달 백작''': 프랑스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라우펠트 전투 이전에 사스 반 겐트, 이젠이크, 에켈스 등을 점령하여 마스트리흐트로 향하는 컴벌랜드 공작의 보급선을 위협하는 등 프랑스군의 작전에 기여했다.

4. 영향

프랑스군이 1747년 9월 베르겐 옵 줌에 입성하다.


라우펠트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군이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동맹군이 퇴각하자 삭스 원수는 로웬탈 백작 휘하의 30,000명 병력을 북쪽으로 보내 베르헌옵좀을 공략하게 했고, 9월에 함락시켰다. 이로써 1747년의 전역은 마무리되었다.

1748년 봄, 새로운 전역이 시작되자 프랑스군은 마스트리흐트를 포위 공격하여 5월 7일에 함락시켰다. 마스트리흐트 공격과 함께 4월부터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결국 1748년 10월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종결되었다. 삭스 원수는 저지대에서 벌인 여러 공성전과 야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특히 마스트리흐트 함락은 평화 협상에서 프랑스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플랑드르에서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는 프랑스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관세 수입이 급감했고, 주요 식량 공급원이었던 뉴펀들랜드 대구 어업이 차단되었다. 재무 장관 마쇼는 루이 15세에게 재정 시스템 붕괴 가능성을 여러 차례 경고했다. 1747년 10월 케이피니스테르 해전에서 프랑스 호송 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고, 프랑스 해군은 더 이상 식민지와 무역로를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1746년 말부터 대부분의 참전국들은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 계승을 확고히 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방어보다는 슐레지엔 탈환에 더 집중하고자 했다. 네덜란드 역시 중립을 통해 얻었던 무역 이익이 전쟁으로 위협받자 영국에 평화 협상을 압박했다. 영국은 높은 전쟁 비용에도 불구하고 자금 조달 능력은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프랑스의 경제적 어려움과 러시아의 참전 가능성(1748년 2월 러시아 군단 라인란트 도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평화 협상에 임하게 되었다.

엑스라샤펠 조약의 조건은 대체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는 인정되었지만, 프랑스는 많은 비용을 들여 점령했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는 "Bête comme la paix|베트 콤 라 페프랑스어" (평화만큼 어리석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전쟁은 네덜란드 공화국이 더 이상 유럽의 주요 강대국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영국이 대륙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병합을 사실상 용인하면서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오스트리아 동맹이 붕괴되었고, 이는 이후 유럽 열강들의 외교 관계가 재편되는 외교 혁명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한편, 라우펠트 전투는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의 군사적 약점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그는 부적절한 정찰, 전략적 인식 부족, 고위 지휘관과의 협조 미흡 등의 문제점을 보였다.

5. 평가



라우펠트 전투는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 또 다른 프랑스의 전술적 승리로 평가된다. 총 사상자 수는 출처에 따라 5,000명에서 11,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프랑스군 사령관 작센 원수는 이전 전투들처럼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개인적인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쟁을 길게 끌려 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라우펠트에서의 승리는 이후 프랑스가 1747년 9월 베르겐 옵 줌을, 1748년 5월 마스트리흐트를 점령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반면, 이 전투는 연합군을 지휘한 컴벌랜드 공작의 군사적 약점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미 1745년 폰트누아 전투 패배 당시 지적되었던 문제점들이 반복된 것이었다. 특히 부적절한 정찰, 전장 상황에 대한 전략적 인식 부족, 그리고 휘하 고위 지휘관들과의 서툰 협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컴벌랜드 공작은 리고니어에게 보병 부대의 철수 사실을 제때 알리지 않아 전술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휘상의 결함은 연합군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플랑드르 전선에서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전반적인 국면은 프랑스에게 점차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영국의 강력한 해상 봉쇄는 프랑스의 관세 수입을 급감시켰고, 당시 프랑스 서민들의 주요 식량 공급원이었던 뉴펀들랜드 대구 어업을 차단하여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당시 프랑스 재무 장관 마쇼는 루이 15세에게 재정 시스템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여러 차례 경고할 정도였다.

프랑스의 어려움은 해상에서도 이어졌다. 1747년 10월, 영국 해군은 케이피니스테르 해전에서 서인도 제도로 향하던 프랑스의 대규모 호송 선단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비록 대부분의 상선은 탈출했으나, 이 공격으로 인해 선단의 이동 경로가 노출되었고, 이후 조지 포콕 제독이 이끄는 영국 리워드 제도 전대는 1747년 말부터 1748년 초에 걸쳐 이들 상선 다수를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 패배로 프랑스 해군은 자국의 식민지와 무역로를 더 이상 효과적으로 보호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쟁 말기, 영국은 러시아와 동맹을 강화하여 1748년 2월에는 37,000명의 러시아 증원군이 라인란트에 도착했다. 한편, 영국 측 지도부는 해상 봉쇄가 프랑스 경제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양측 모두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다. 결국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먼저 주요 내용에 합의한 후 다른 동맹국들에게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조약은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영유를 인정하고 이탈리아에서 약간의 영토 조정을 하는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 전쟁 이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점령했던 저지대 국가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이처럼 큰 희생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이득을 거의 얻지 못한 채 전쟁을 마무리한 것에 대해 프랑스 내에서는 "평화만큼 어리석다"는 격한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이 전쟁은 네덜란드 공화국이 유럽의 주요 강대국 지위에서 완전히 내려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국 내부에서는 협상을 주도했던 뉴캐슬 공작 스스로 나중에 자신의 "무지, 완고함, 그리고 순진함"을 자책하기도 했다. 또한 영국이 대륙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병합을 용인한 것은 전통적인 영국-오스트리아 동맹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는 이후 유럽 열강들의 외교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외교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6. 전후 상황

1746년 10월 로쿠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지만, 영국을 압박하여 평화 조약을 맺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1747년에 이르러 프랑스 경제는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고, 반면 영국의 무역은 다시 확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46년 말부터 대부분의 참전국들은 평화를 원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왕위 계승 문제가 안정되자 슐레지엔 탈환을 위한 군비 재건에 더 집중하고자 했으며, 전략적 중요도가 낮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유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중립을 통해 프랑스 무역의 중개자 역할을 했으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경제적 부담과 프랑스의 요새선 점령 위협 등으로 인해 영국에 평화 협상을 촉구하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막대한 전쟁 부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재정 조달 능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있었다. 영국은 동맹국들의 이탈을 막고 전쟁 수행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1747년 1월 헤이그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및 사보이 군대와 플랑드르의 연합군에 대한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당시 외교 정책을 주도하던 뉴캐슬 공작은 동맹군 강화와 스페인 펠리페 5세 사망 이후 예상되는 부르봉 가문의 약화를 통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 아래, 영국은 1746년 8월 브레다에서 시작된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서 특사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에게 의도적으로 협상을 지연시키도록 지시했다. 이는 라우펠트 전투 이후에도 평화 협상이 난항을 겪는 배경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A Polite and Commercial People: England 1727-1783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3-04-20
[2] 서적 History of England
[3] 간행물 Fontenoy and Great Britain's Share in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1-48 London, Edinburgh
[4] 간행물 Fontenoy and Great Britain's Share in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1-48 London, Edinburgh
[5] 문서
[6] 서적 Cassell's Chronology of World History Weidenfeld & Nicolson
[7] 간행물 History of England, from The Revolution to the Death of George the Second London
[8] 간행물 Irish Brigades Abroad Dublin
[9] 간행물 Irish Brigades Abroad
[10] 백과사전 1911 Encyclopedia Britannica
[11] 백과사전 The American Cyclopaedia New York
[12] 서적 History of England
[13] 간행물 Fontenoy and Great Britain's Share in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1-48 London, Edinburgh
[14] 간행물 Fontenoy and Great Britain's Share in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1-48 London, Edinburgh
[15] 문서
[16] 서적 Cassell's Chronology of World History https://archive.org/[...] Weidenfeld & Nicolson
[17] 문서
[18] 간행물 History of England, from The Revolution to the Death of George the Second London
[19] 서적 History of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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