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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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1년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분쟁은 2001년 4월, 인도와 방글라데시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1947년 벵골 분할로 인해 국경이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아 분쟁이 지속되었으며, 파두아 마을을 둘러싼 영유권 다툼이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방글라데시 군대가 파두아 마을을 점령하면서 시작된 이 분쟁은 양측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이후 양국 정부의 개입으로 사태가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양국 간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국경 장벽 건설과 같은 문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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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충돌 개요 | |
원인 | 양측 군대의 침입 주장 |
날짜 | 2001년 4월 16일–20일 (4주 4일) |
장소 | 방글라데시-인도 국경 (고와인가트, 실렛/동 카시 힐스, 메갈라야, 보라이바리, 쿠리그람) |
결과 | 결론 없음 (여파 섹션 참조) |
영토 | 전쟁 이전 상태 |
교전 세력 | |
부대 1 | 방글라데시 소총대 |
부대 2 | 국경 보안군 |
지휘관 1 | A. L. M. Fazlur Rahman |
지휘관 2 | Gurbachan Singh Jagat |
병력 1 | 700–1,000명 |
병력 2 | 300명 이상 |
사상자 | |
민간인 사상자 | 24명 부상, 10,000명 임시 이재민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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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7년 벵골 분할은 인도와 방글라데시(구 동파키스탄) 사이에 국경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사실상'' 국경 양쪽의 여러 마을에 대한 소유권은 분쟁의 대상이 되었고 양국 모두가 주장했다. 190개가 넘는 월경지의 존재로 인해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획정에 대한 분쟁이 악화되었다.
2. 1. 1947년 벵골 분할
1947년 벵골 분할은 인도와 방글라데시(구 동파키스탄) 사이에 국경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사실상'' 국경 양쪽의 여러 마을에 대한 소유권은 분쟁의 대상이 되었고 양국 모두가 주장했다. 190개가 넘는 월경지의 존재로 인해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획정에 대한 분쟁이 악화되었다.2. 2. 파두아(피르디와) 지역 분쟁
1947년 벵골 분할은 인도와 방글라데시(구 동파키스탄) 사이에 국경을 명확하게 획정하지 못했다. ''사실상'' 국경 양쪽의 여러 마을에 대한 소유권은 분쟁의 대상이 되었고 양국 모두가 주장했다. 190개가 넘는 월경지의 존재로 인해 인도-방글라데시 국경 획정에 대한 분쟁이 악화되었다.3. 원인
분쟁 지역 중 하나는 방글라데시와 인도 메갈라야 주 경계에 있는 파두아 (피르디와라고도 불림) 마을 근처의 작은 땅이었다.[21] 이 지역은 인도 보안군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동안 무크티 바히니로 알려진 민족 벵골인 게릴라전 훈련에 사용했다. 독립 이후 방글라데시는 1971년부터 인도의 국경 경비대(BSF)가 주둔하고 있는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16][21] 이 마을은 방글라데시와 메갈라야의 국경에 있는 인도 월경지 중 하나이다.[17][18] 방글라데시가 주장하는 영토에는 111개의 인도 월경지가 있고, 인도가 주장하는 영토에는 50개의 방글라데시 월경지가 있다. 파두아 마을은 점유취득 지역으로, 법적으로 방글라데시가 소유하고 있는 인도인이 거주하는 마을이다.[13][19][9] 이 마을 사람들은 민족 카시족이다.[16]
나중에 발표된 인터뷰에서, 당시 방글라데시 소총대(BDR)의 국장 A. L. M. 파즐루르 라만 소장은 인도 국경 경비대(BSF)가 파두아에 있는 그들의 캠프와 비무장 지대 및 방글라데시 영토를 통해 10 킬로미터 떨어진 또 다른 캠프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5][20]
4. 전개 과정
이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전투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전투는 인도 메갈라야 주의 파두아 마을 주변에서 벌어졌으며[21], 이곳은 실렛구의 방글라데시 국경에 있는 타마빌 지역과 인접해 있다. 비록 이 지역에서 실질적인 ''현상 유지''가 유지되었지만, 약 6.5km에 달하는 국경선은 지난 30년 동안 분쟁의 대상이었다.
2001년 4월 16일, 약 1,000명의 방글라데시 군대가 파두아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현상 유지가 깨졌고, 그곳의 민간인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방글라데시는 이 마을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이후 인도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되었다고 주장했다.[21] 파두아 마을에 있던 인도 국경 경비대 (BSF) 초소는 포위되었고, 그 안에 여러 BSF 병력이 갇혔다. 하지만 양측은 발포를 중단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약 세 개의 BSF 중대가 초소를 강화하기 위해 진격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유혈 사태 없이 해결되었다.
이 대치 상황 이후, 인도-방글라데시 국경을 따라 배치된 BSF 병력은 최고 경계 태세에 돌입했고, 집중적인 순찰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며칠 후, 소규모의 BSF 병력이 파두아에서 서쪽으로 200km 이상 떨어진 보로이바리 마을 근처의 방글라데시 영토로 진입했다. 반대 점유인 파두아 마을과는 달리, 보로이바리는 방글라데시 내부에 펜스가 쳐져 있는 지역이다. 이 침입은 파두아에서 발생한 이전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의 "''반격''"으로 이용되었다. 방글라데시 측에 따르면, 인도군은 아삼 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쿠리그람 구의 국경 지역에 있는 방글라데시 초소에 이른 아침 공격을 감행했다.
방글라데시 영토에 진입하자마자 인도 준군사력 병력 16명이 방글라데시 국경 경비대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고,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자정 무렵, 인도 외무부 장관 초킬라 아이어는 방글라데시 외무부 장관 세이드 무아젬 알리로부터 파두아에서 즉시 철수하고 현상 유지를 복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방글라데시 소총대 (BDR)는 4월 19일 밤까지 파두아에서 철수했다.
이 대치 상황에서 인도 국경 경비대 16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공격으로 방글라데시 국경 경비대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국경 충돌로 약 24명이 부상을 입은 후 약 10,000명의 민간인이 이 지역을 탈출했다.
4월 18일 보로이바리 침입 이후, 인도는 BDR이 또 다른 분쟁 중인 인도 월경지인 만카차르 마을에 3인치 및 8인치 박격포 포탄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4. 1. 파두아 전투 (2001년 4월 16일)
이 전투는 1971년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의 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전투는 인도 메갈라야 주의 파두아 마을 주변에서 벌어졌으며[21], 이곳은 실렛구의 방글라데시 국경에 있는 타마빌 지역과 인접해 있다. 약 6.5km에 달하는 국경선은 지난 30년 동안 분쟁의 대상이었다.[21]2001년 4월 16일, 약 1,000명의 방글라데시 군대가 파두아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현상 유지가 깨졌고, 그곳의 민간인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방글라데시는 이 마을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이후 인도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되었다고 주장했다.[21] 파두아 마을에 있던 인도 국경 경비대 (BSF) 초소는 포위되었고, 그 안에 여러 BSF 병력이 갇혔다. 하지만 양측은 발포를 중단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약 세 개의 BSF 중대가 초소를 강화하기 위해 진격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유혈 사태 없이 해결되었다.
방글라데시 소총대 (BDR)는 4월 19일 밤까지 파두아에서 철수했다.
4. 2. 보로이바리 전투 (2001년 4월 18일)
이 전투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이후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전투는 인도 메갈라야 주의 파두아 마을 주변에서 벌어졌으며[21], 이곳은 실렛구의 방글라데시 국경에 있는 타마빌 지역과 인접해 있다. 약 6.5km에 달하는 국경선은 지난 30년 동안 분쟁의 대상이었다.[21]며칠 후, 소규모의 BSF 병력이 파두아에서 서쪽으로 200km 이상 떨어진 보로이바리 마을 근처의 방글라데시 영토로 진입했다. 반대 점유인 파두아 마을과는 달리, 보로이바리는 방글라데시 내부에 펜스가 쳐져 있는 지역이다. 이 침입은 파두아에서 발생한 이전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의 "''반격''"으로 이용되었다. 방글라데시 측에 따르면, 인도군은 아삼 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쿠리그람 구의 국경 지역에 있는 방글라데시 초소에 이른 아침 공격을 감행했다.
방글라데시 영토에 진입하자마자 인도 준군사력 병력 16명이 방글라데시 국경 경비대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고,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이 이들을 지원했다.[21] 이 대치 상황에서 인도 국경 경비대 16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공격으로 방글라데시 국경 경비대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국경 충돌로 약 24명이 부상을 입은 후 약 10,000명의 민간인이 이 지역을 탈출했다.[21]
4월 18일 보로이바리 침입 이후, 인도는 BDR이 또 다른 분쟁 중인 인도 월경지인 만카차르 마을에 3인치 및 8인치 박격포 포탄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4. 3. 만카차르 포격
2001년 4월 18일 보로이바리 침입 이후, 인도는 BDR이 또 다른 분쟁 중인 인도 월경지인 만카차르 마을에 3인치 및 8인치 박격포 포탄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21]5. 결과 및 영향
양국 정부가 개입한 후, 방글라데시인과 인도인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이전의 ''현상 유지''를 회복했다.[22] 양측이 최근 살해에 대해 유감과 우려를 표명한 지 몇 시간 만에 인도-방글라데시 국경을 따라 새로운 충돌이 발생했지만, 4월 20일 자정까지 국경 간 총격은 중단되었다.[19] 한 기사에서는 6,000명의 인도 민간인이 이 지역을 떠났으며, 인도 정부 관리들은 이재민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19]
방글라데시는 다음 날 16명의 인도 군인의 시신을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22] 사망자 시신을 검사한 후, 인도는 방글라데시군이 포로들을 총살하기 전에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비난했다.[23][24] 한편, 세 명의 방글라데시 군인도 사망했는데, 두 명은 전투 중에, 다른 한 명은 국경 간 작전 중 부상으로 사망했다.
관찰자들은 이 사건을 방글라데시 선거(사건 당시 2개월 전) 전에 민족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정치적 책략이자 방글라데시 소총대(BDR)의 악의적인 모험주의라고 평했다.[13][21] 방글라데시 정부는 BDR의 대 인도 적대 행위 개시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이 사건을 "현지 지휘관들의 모험주의"라고 칭했다.[22]
방글라데시 총리 셰이크 하시나와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는 전화 통화를 통해 사건에 대한 고위급 조사를 명령하는 데 합의했다.[25][26] 인도 외무부 대변인 라민더 싱 자살은 인도와 방글라데시가 양자 외교 채널을 개선하고 향후 자제를 약속할 것이라고 보고했다.[19]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2002년 3월에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다. 2002년 7월까지 양측은 미확정 국경 구역에 합의하고 이를 확정하기 위해 공동 실무 그룹을 설립했다.[18]
방글라데시는 어떠한 군사 재판, 정직, 또는 현지 군 지휘관의 전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27] 이는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온 두 이웃 국가인 인도와 방글라데시 간의 첫 번째 무력 충돌이었다.[28] 짧은 분쟁의 종식은 방글라데시에서 민족주의의 급증을 가져왔다. 의회 선거에서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과 자마아테 이슬라미 방글라데시가 이끄는 4당 연합은 300석 중 196석을 획득하여 과반수를 차지했다.
양측은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자제하고 4000km의 국경을 따라 분쟁을 논의하기 위한 국경 회담을 시작했다.[29] 두 국가는 직후 외교 관계에서 해빙기를 경험했다.
인도는 그 이후 방글라데시와의 국제 국경 전체에 걸쳐 장벽 건설을 시작했으며,[30] 여전히 건설 중이다.[31] 방글라데시는 국경에서 150야드 이내에 울타리를 건설하는 것이 인도-방글라데시 우호, 협력 및 평화 조약의 심각한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장벽 건설에 항의했다.[32] 방글라데시 정부는 또한 잦은 인도 국경 보안대 (BSF)의 방글라데시 침입, 그리고 방글라데시 영토 내에서 방글라데시인의 사망을 초래한 국경 간 총격에 항의했다.[33] 2008년 8월의 기자 회견에서, 이전 6개월 동안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으려다 97명(방글라데시인 69명, 인도인 28명, 나머지는 신원 미상)이 사망했다고 진술했다.[34][35]
5. 1. 양국 정부의 개입과 사태 진정
양국 정부가 개입한 후, 방글라데시인과 인도인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이전의 ''현상 유지''를 회복했다.[22] 양측이 최근 살해에 대해 유감과 우려를 표명한 지 몇 시간 만에 인도-방글라데시 국경을 따라 새로운 충돌이 발생했지만, 4월 20일 자정까지 국경 간 총격은 중단되었다.[19] 6,000명의 인도 민간인이 이 지역을 떠났으며, 인도 정부 관리들은 이재민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려 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19]방글라데시는 다음 날 16명의 인도 군인의 시신을 반환했다.[22] 인도는 방글라데시군이 포로들을 총살하기 전에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비난했다.[23][24] 세 명의 방글라데시 군인도 사망했다.[22]
이 사건은 방글라데시 선거 전에 민족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정치적 책략이자 방글라데시 소총대(BDR)의 악의적인 모험주의라고 평가되었다.[13][21]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 사건을 "현지 지휘관들의 모험주의"라고 칭했다.[22]
방글라데시 총리 셰이크 하시나와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는 전화 통화를 통해 고위급 조사를 명령했다.[25][26] 인도 외무부 대변인 라민더 싱 자살은 인도와 방글라데시가 양자 외교 채널을 개선하고 향후 자제를 약속할 것이라고 보고했다.[19]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2002년 3월에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고, 7월까지 미확정 국경 구역에 합의하고 이를 확정하기 위해 공동 실무 그룹을 설립했다.[18]
방글라데시는 현지 군 지휘관에 대한 군사 재판, 정직, 또는 전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27] 이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 양국 간의 첫 번째 무력 충돌이었다.[28] 분쟁 종식 후 방글라데시에서 민족주의가 급증했고, 의회 선거에서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과 자마아테 이슬라미 방글라데시가 이끄는 4당 연합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양측은 국경 회담을 시작했고,[29] 이후 외교 관계에서 해빙기를 경험했다.
인도는 방글라데시와의 국제 국경 전체에 걸쳐 장벽 건설을 시작했으며,[30] 여전히 건설 중이다.[31] 방글라데시는 인도-방글라데시 우호, 협력 및 평화 조약 위반이라며 장벽 건설에 항의했다.[32] 방글라데시 정부는 또한 잦은 인도 국경 보안대 (BSF)의 방글라데시 침입, 그리고 방글라데시 영토 내에서 방글라데시인의 사망을 초래한 국경 간 총격에 항의했다.[33]
5. 2. 인명 피해
방글라데시는 16명의 인도 군인의 시신을 반환했다.[22] 인도 측은 사망자 시신을 검사한 후, 방글라데시군이 포로들을 총살하기 전에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주장했다.[23][24] 세 명의 방글라데시 군인도 사망했는데, 두 명은 전투 중에, 다른 한 명은 국경 간 작전 중 부상으로 사망했다. 6,000명의 인도 민간인이 이 지역을 떠났으며, 인도 정부 관리들은 이재민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려 했다.[19] 2008년 8월 기자 회견에서는 이전 6개월 동안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으려다 97명(방글라데시인 69명, 인도인 28명, 나머지는 신원 미상)이 사망했다고 밝혔다.[34][35]5. 3. 방글라데시의 입장
방글라데시는 16명의 인도 군인의 시신을 반환했다.[22] 인도 측은 방글라데시군이 포로들을 총살하기 전에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주장했다.[23][24] 방글라데시 군인 3명도 사망했는데, 2명은 전투 중, 다른 1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이 사건은 방글라데시 선거를 앞두고 민족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정치적 책략이자 방글라데시 소총대(BDR)의 악의적인 모험주의라는 평가를 받았다.[13][21] 방글라데시 정부는 BDR의 대 인도 적대 행위 개시를 지원했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현지 지휘관들의 모험주의"라고 칭했다.[22]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와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는 전화 통화를 통해 고위급 조사를 명령했다.[25][26] 방글라데시는 어떠한 군사 재판, 정직, 또는 현지 군 지휘관의 전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27]
분쟁 종식 후, 방글라데시에서는 민족주의가 급증했다. 의회 선거에서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과 자마아테 이슬라미 방글라데시가 이끄는 4당 연합이 과반수를 획득했다.
방글라데시는 국경 장벽 건설에 대해 인도-방글라데시 우호, 협력 및 평화 조약 위반이라며 항의했다.[32] 또한, 인도 국경 보안대 (BSF)의 방글라데시 침입 및 국경 간 총격으로 인한 방글라데시인 사망에 대해서도 항의했다.[33]
5. 4. 정치적 영향
양국 정부가 사태에 개입한 후, 방글라데시인과 인도인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이전의 ''현상 유지''를 회복했다.[22] 4월 20일 자정까지 국경 간 총격은 중단되었다.[19] 6,000명의 인도 민간인이 이 지역을 떠났으며, 인도 정부는 이재민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려 했다.[19] 방글라데시는 16명의 인도 군인의 시신을 반환했다.[22] 인도는 방글라데시군이 포로들을 총살하기 전에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비난했다.[23][24]관찰자들은 이 사건을 방글라데시 선거 전에 민족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정치적 책략이자 방글라데시 소총대(BDR)의 악의적인 모험주의라고 평했다.[13][21]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 사건을 "현지 지휘관들의 모험주의"라고 칭했다.[22]
방글라데시 총리 셰이크 하시나와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는 전화 통화를 통해 사건에 대한 고위급 조사를 명령했다.[25][26] 인도 외무부 대변인 라민더 싱 자살은 인도와 방글라데시가 양자 외교 채널을 개선하고 향후 자제를 약속할 것이라고 보고했다.[19]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2002년 3월에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다.[18]
이 사건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온 인도와 방글라데시 간의 첫 번째 무력 충돌이었다.[28] 짧은 분쟁의 종식은 방글라데시에서 민족주의의 급증을 가져왔다. 의회 선거에서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과 자마아테 이슬라미 방글라데시가 이끄는 4당 연합은 300석 중 196석을 획득하여 과반수를 차지했다.
양측은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자제하고 4000km의 국경을 따라 분쟁을 논의하기 위한 국경 회담을 시작했다.[29] 인도는 방글라데시와의 국제 국경 전체에 걸쳐 장벽 건설을 시작했다.[30] 방글라데시는 국경에서 150야드 이내에 울타리를 건설하는 것은 인도-방글라데시 우호, 협력 및 평화 조약의 심각한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장벽 건설에 항의했다.[32]
5. 5. 국경 장벽 건설
양국 정부가 개입한 후, 방글라데시인과 인도인은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22] 양측은 인도-방글라데시 국경을 따라 발생한 충돌과 살해에 대해 유감과 우려를 표명했다.[19]인도는 방글라데시와의 국제 국경 전체에 걸쳐 장벽 건설을 시작했으며,[30] 현재도 건설 중이다.[31] 방글라데시는 국경에서 150야드 이내에 울타리를 건설하는 것은 인도-방글라데시 우호, 협력 및 평화 조약의 위반이라며 항의했다.[32] 방글라데시 정부는 또한 인도 국경 보안대 (BSF)의 방글라데시 침입, 방글라데시 영토 내에서 방글라데시인의 사망을 초래한 국경 간 총격에 항의했다.[33]
6. 한국의 입장과 역할
6. 1. 중재 노력과 평화적 해결 지지
6. 2. 인도적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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