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크 하시나
1. 개요
셰이크 하시나는 방글라데시의 정치인으로, 방글라데시 독립의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장녀이다. 1975년 쿠데타로 가족을 잃고 망명 생활을 거쳐 1981년 귀국 후 아와미 연맹의 당수가 되었다. 1996년과 2009년부터 여러 차례 방글라데시 총리를 역임하며, 2024년 8월 시위로 인해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했다. 그는 2024년 총선에서 4선 연임에 성공했으나, 재임 기간 동안 권위주의적 통치, 부정부패, 인권 침해 등의 논란에 휩싸였다.
| 이름 | 셰이크 하시나 |
|---|---|
| 원어 이름 | শেখ হাসিনা벵골어 |
| 로마자 표기 | Syēkh Hāsinā |
| 출생 이름 | 하시나 셰이크 |
| 출생일 | 1947년 9월 28일 |
| 출생지 | 퉁기파라 우파질라, 동벵골, 파키스탄 자치령 |
| 국적 | 방글라데시 |
| 정당 | 아와미 연맹 |
| 다른 정당 | 대연합 (2008년부터) |
| 배우자 | M. A. 와제드 미아 (1968년 결혼, 2009년 사망) |
| 아버지 |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
| 어머니 | 셰이크 파질라투네사 무지브 |
| 자녀 | 사지브 사이마 |
| 친척 | 셰이크-와제드 가문 |
| 학력 | 에덴 모힐라 칼리지 다카 대학교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수상 및 훈장 | 전체 목록 |
|---|
| 직위 | 방글라데시 총리 |
|---|---|
| 재임 시작 | 2009년 1월 6일 |
| 재임 종료 | 2024년 8월 5일 |
| 대통령 | 이아주딘 아흐메드 질루르 라만 모하마드 압둘 하미드 모하메드 샤하부딘 |
| 이전 총리 | 파크루딘 아흐메드 (최고 자문관) |
| 다음 총리 | 무함마드 유누스 (최고 자문관) |
| 직위 | 방글라데시 총리 |
| 재임 시작 | 1996년 6월 23일 |
| 재임 종료 | 2001년 7월 15일 |
| 대통령 | 압두르 라흐만 비스와스 샤하부딘 아흐메드 |
| 이전 총리 | 무함마드 하비부르 라흐만 (최고 자문관) |
| 다음 총리 | 라티푸르 라흐만 (최고 자문관) |
| 직위 | 원내대표 |
| 재임 시작 | 2009년 1월 6일 |
| 재임 종료 | 2024년 8월 5일 |
| 이전 원내대표 | 칼레다 지아 |
| 다음 원내대표 | 미정 |
| 재임 시작 | 1996년 6월 23일 |
| 재임 종료 | 2001년 7월 15일 |
| 이전 원내대표 | 칼레다 지아 |
| 다음 원내대표 | 칼레다 지아 |
| 직위 | 아와미 연맹 총재 |
| 총비서 | 압두르 라자크 시예다 사제다 초두리 질루르 라만 압둘 잘릴 사이예드 아슈라풀 이슬람 오바이드울 카데르 |
| 재임 시작 | 1981년 2월 16일 |
| 이전 총재 | 압둘 말렉 우킬 |
| 직위 | 국회의원 |
| 재임 시작 | 1996년 6월 12일 |
| 재임 종료 | 2024년 8월 6일 |
| 이전 국회의원 | 무지부르 라흐만 하울라데르 |
| 다음 국회의원 | 미정 |
| 선거구 | 고팔간지-3 |
| 재임 시작 | 1991년 2월 27일 |
| 재임 종료 | 1996년 2월 15일 |
| 이전 국회의원 | 카지 피로즈 라시드 |
| 다음 국회의원 | 무지부르 라흐만 하울라데르 |
| 선거구 | 고팔간지-3 |
| 직위 | 야당 대표 |
| 총리 | 칼레다 지아 |
| 재임 시작 | 2001년 10월 10일 |
| 재임 종료 | 2006년 10월 29일 |
| 이전 야당 대표 | 칼레다 지아 |
| 다음 야당 대표 | 칼레다 지아 |
| 총리 | 칼레다 지아 |
| 재임 시작 | 1991년 3월 20일 |
| 재임 종료 | 1996년 3월 30일 |
| 이전 야당 대표 | 압두르 랍 |
| 다음 야당 대표 | 칼레다 지아 |
| 대통령 | 후세인 모하마드 에르샤드 |
| 재임 시작 | 1986년 5월 7일 |
| 재임 종료 | 1988년 3월 3일 |
| 이전 야당 대표 | 아사두자만 칸 |
| 다음 야당 대표 | 압두르 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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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여자 정치인 -
칼레다 지아
칼레다 지아는 방글라데시 국민당 당수로서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하며 교육, 경제, 행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부정부패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던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 -
방글라데시의 여자 정치인 -
타라나 할림
타라나 할림은 방글라데시의 배우이자 정치인으로, 1976년 연예계에 데뷔하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으며, 문화 단체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2009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방글라데시의 의회 의원 -
칼레다 지아
칼레다 지아는 방글라데시 국민당 당수로서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하며 교육, 경제, 행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부정부패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던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 -
방글라데시의 의회 의원 -
압둘 하미드
압둘 하미드는 방글라데시의 정치인으로, 국회의원 7선, 국회 부의장, 국회의장을 거쳐 2013년부터 2023년까지 방글라데시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독립 전쟁 기여 공로로 독립 훈장을 수훈받았다. -
방글라데시의 망명자 -
타슬리마 나스린
방글라데시 출신 작가이자 의사이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타슬리마 나스린은 여성 억압 현실을 바탕으로 여성 권리와 이슬람 비판적 시각을 담은 글로 논란이 되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위협으로 망명 생활을 하며 표현의 자유와 여성 인권을 옹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방글라데시의 망명자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인도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작곡가, 철학자이자 예술가로, 191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국가를 작사·작곡하고 샨티니케탄에 비슈바바라티 대학교를 설립했다.
2. 생애
방글라데시의 국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장녀로 태어났다. 1975년 쿠데타로 아버지와 가족이 처형되었을 때 영국에 있어 살아남았다. 1981년 귀국하여 아와미 연맹의 당수가 되었고, 1983년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 쿠데타 이후 반정부 운동을 이끌며 여러 차례 가택연금을 당했다.
에르샤드 정권 붕괴 후 1991년 선거에서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에 패했지만, 1996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에 취임했다. 2001년 선거에서 다시 패배했으나, 2008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2009년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총리 재임 중에는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강권화가 진행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시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여성 정부 수반이었다.
2024년 대규모 시위로 인해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인도로 망명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셰이크 하시나는 1947년 9월 28일 동벵골(현 방글라데시) 다카 사단 퉁기파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방글라데시의 국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고, 어머니는 셰이크 파질라투네사 무지브이다. 하시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어머니와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퉁기파라에서 자랐다.
1954년 하시나의 아버지가 정부 장관이 되면서 가족은 다카의 민토 로드 3번지로 이사했다. 1950년대에 그녀의 아버지는 정치 활동 외에도 알파 보험 회사에서 일했다. 1960년대에 가족은 아버지가 지은 다나몬디 32번 도로의 집으로 이사했다. 하시나는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구금되었던 시절에 대해 회상하며, 아버지의 잦은 투옥과 정치 활동으로 인해 함께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셰이크 하시나는 퉁기파라 마을의 초등학교에 다녔다. 가족이 다카로 이주한 후에는 아짐푸르 여자학교와 베굼 바드루네사 여자대학에 다녔다. 이후 에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에덴 대학 학생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67년, 핵 과학자 M. A. 와제드 미아와 결혼했다. 하시나는 다카 대학교에서 벵골 문학을 전공하여 1973년 졸업했다. 학생연맹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로케야 홀 여성 부서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시나는 이슬람교 수니파 신자이다.
1975년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와 가족 대부분이 암살되었지만, 당시 서독에 체류 중이었던 하시나는 여동생과 함께 살아남았다.
2.2. 가족의 암살과 망명
1975년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가족 대부분이 암살되었지만, 당시 서독에 있던 셰이크 하시나와 여동생 셰이크 레하나는 살아남았다. 다카 대학교 학생 지도자로 유명했지만, 지아우르 라흐만 대통령에 의해 방글라데시 입국이 금지되었다. 이후 인도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만, 1981년 귀국하여 아와미 연맹 당수가 되었다.
하시나의 가족은 남편, 자녀, 여동생 셰이크 레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1975년 8월 15일 방글라데시 쿠데타로 인해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암살당하는 사건 당시 살해당했다. 당시 하시나와 레하나는 유럽을 방문 중이었고, 서독 주재 방글라데시 대사의 집에 피신한 후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로부터 정치 망명을 제안받아 6년 동안 인도 뉴델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83년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되자, 하시나는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가 되어 반대 운동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가택연금을 당했다.
2.3. 정치 경력
1975년 쿠데타로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을 때, 셰이크 하시나는 영국에 있어 살아남았다. 이후 군부가 파견한 첩자들을 피해 인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81년 아와미 연맹 의장으로 선출되어 귀국하였으며, 아와미 연맹을 이끌고 후세인 무하메드 에르샤드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1980년대 내내 구금과 석방을 반복했으며, 1984년과 1985년에는 가택 연금에 처해지기도 했다.
하시나와 아와미 연맹은 1986년 방글라데시 총선에 참여했다. 그녀는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야당 대표를 역임하며 에르샤드에 맞서 8개 정당 연합을 이끌었다. 1987년 12월, 에르샤드는 하시나와 아와미 연맹이 중립적인 정부 하에서 새로운 총선을 요구하며 사퇴하자 의회를 해산했다.
에르샤드 대통령이 이끄는 군사 독재 정권이 무너진 후, 1991년 방글라데시 총선에서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에 패했지만, 1996년 방글라데시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2001년 의회 선거에서 다시 칼레다 지아의 민족주의당에 패배해 물러났다.
2007년에 예정된 선거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연기되었고, 구 군사정권의 잔당인 국민당 정권의 탄압으로 강요죄 등의 누명을 씌워 구속시켰으나 국민의 반발이 극심하여 국민당 정권은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결국 선거는 2008년 12월에 실시되었고 아와미 연맹을 중심으로 에르샤드 등을 결집한 정당 연합 ‘대연합’이 압승을 거두고, 2009년 1월 6일에 셰이크 하시나가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
2008년 6월 11일, 하시나는 청각 장애, 시력 저하, 고혈압 등의 지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았다.
2012년,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파키스탄군과 지원 단체인 라자카르스가 저지른 방글라데시 학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지시하고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했다. 2013년 6월 27일, 하시나와 다른 24명의 방글라데시 장관과 치안 요원에 대한 소송이 인권 침해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기되었다.
2014년 5월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방글라데시 국기에 대해 "아버지는 일본의 일장기를 참고했다"고 말했다. 2016년에는 다카 레스토랑 습격 인질 테러 사건과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테러가 잇달아 발생했다. 하시나 정권이 낳은 일당 우위 정당제는 과격파의 테러 행위를 증가시켰다고 비난받고 있다.
2021년 5월, 하시나는 다크 바반이라는 이름의 방글라데시 우체국 신설 개소식 연설을 했다. 하시나는 연설에서 방글라데시의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위한 우편 서비스의 더욱 발전을 촉구했다. 하시나는 디지털 전환의 지속과 신선 식품을 우송하기 위한 우체국 창고의 냉각 장치 건설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2022년 7월, 방글라데시 재무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제재의 결과로 외화 보유고 고갈을 들었다.
2024년 6월, 셰이크 하시나는 인도 수도 뉴델리를 공식 방문했고, 그 기간 동안 방글라데시와 인도는 인도가 방글라데시 영토를 통과하여 동북부 주로의 철도 회랑을 허용하는 것을 포함한 10개의 양자 협정에 서명했다. 서명은 국가 주권 문제로 발전하여 방글라데시에서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여론은 "하시나는 인도에 영토를 넘긴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2.4. 2024년 사임과 망명
2024년 8월 5일, 대규모 시위대가 총리 관저를 에워싸자 셰이크 하시나는 사임했다. 그녀의 사임은 육군참모총장인 와케르-우즈-자만 장군이 발표했다. 같은 날 하시나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동차, 헬리콥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이용해 인도로 탈출했다. 그녀는 사임 연설 없이 떠났다.
보도에 따르면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공군 C-130 수송기를 이용해 인도 가자이아바드의 힌던 공군기지로 이동했으며, 인도 국가안보보좌관 아짓 도발과 다른 고위 군 관계자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인도 외무장관 S. 자이샨카르는 인도 의회에서 "그녀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인도로의 일시적인 입국 승인을 요청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아들 사지브 와제드는 처음에 그녀가 정계에 복귀하지 않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전에 "잠시 델리에 머물 계획"이라고 말했지만, 8월 7일에는 그녀와 아와미 리그가 방글라데시 정치계에서 계속 활동할 것이며 선거가 공표되면 귀국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셰이크 하시나가 시위대에 의해 도피해야 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사임서를 제출할 수 없었다며, 그녀가 여전히 총리라고 주장했다.
하시나는 런던으로 가기를 바랐지만, 영국은 망명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벨라루스 또는 카타르에서 임시 거주를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카가 핀란드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핀란드가 가능한 목적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사지브 와제드가 미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 정부가 방글라데시에서의 그녀의 통치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녀가 미국에서 망명을 추구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2024년 8월 현재 하시나는 인도의 비밀 장소에서 삼엄한 경비 속에 거주하고 있다. 사지브 와제드는 그녀의 사임으로 이어진 시위가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 않고 외국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8월 11일 인도 언론에 발표된 성명에서 그녀는 미국이 자신의 사임에 영향을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이전에도 미국이 방글라데시 국회에서 자신을 축출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와제드는 이 성명이 "거짓되고 날조된 것"이라고 부인하고 하시나는 "다카를 떠나기 전후로 어떤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미국의 개입 의혹을 부인했다.
8월 13일, 하시나는 와제드 조이가 발표한 성명에서 축출 이후 처음으로 확인된 성명을 통해 시위 중 발생한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 경찰과 아와미 리그도 "테러 공격"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3. 정책 및 업적
하시나는 1996년 6월부터 2001년 7월까지 방글라데시 총리로 첫 번째 임기를 수행했다. 주요 정책 및 업적은 다음과 같다.
* 인도와 갠지스강 물 분배에 관한 30년 기한의 조약을 체결했다.
*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범에 대한 면책 특권을 부여한 면책법을 폐지했다.
* 통신 산업을 민간 부문에 개방했다.
* 1997년 12월, 치타공 구릉 지대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치타공 사단 지역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유네스코 평화상을 수상했다.
* 아슈라얀-1 프로젝트를 설립하여 주거 취약 계층을 지원하고 이웃 국가들과의 양자 관계를 개선했다.
* 1998년 방반두 다리 건설을 완료했다.
* 1999년 민간 부문 강화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새로운 산업 정책(NIP)을 시작했다.
하시나 정부는 경제 개혁을 통해 국가 평균 GDP 성장률 5.5%를 달성했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5%로, 다른 개발도상국(10%)보다 낮게 유지했다. 제5차 5개년 계획(1997-2002)에서는 실업 청년과 여성에게 신용과 훈련을 제공하는 빈곤 완화 프로그램을 강조했다. 식량 생산량은 1900만 톤에서 2650만 톤으로 증가했고, 빈곤율은 감소했다. 하천 침식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주택 기금이 설립되었고, 'Ekti Bari Ekti Khamar' 계획을 통해 빈곤층의 소득 증대를 꾀했다.
1999년, 하시나 정부는 민간 부문 강화 및 외국인 직접 투자 유치를 위한 새로운 산업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경제의 25%를 산업 기반으로, 국가 노동력의 20%를 산업 부문에 고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여성 고용 및 국산 기술 개발, 지역 원자재 기반 산업 등 소규모, 가내 수공업 및 노동 집약적 산업 설립을 장려했다. 외국인 투자자가 정부 승인 없이 방글라데시 기업 지분 100%를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일부를 제외한 모든 경제 부문을 민간에 개방했다.
사회 취약 계층 보호를 위한 사회 보장 제도도 마련되었다. 40만 명의 노인에게 매달 수당을 지급하고, 이후 미망인, 고통받는 여성, 버려진 여성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정부 지원으로 장애인 재활 및 훈련을 위한 국가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아슈라얀-1 프로젝트는 노숙자에게 숙소와 일자리를 제공했다.
하시나는 자티야 상사드에서 "총리 질의응답 시간"을 최초로 도입했다. 자티야 상사드는 면책법을 폐지하여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범들을 기소할 수 있게 했다. 정부는 법 제정을 통해 4단계 지역 정부 시스템(그람 파리샤드, 질라 파리샤드, 우파질라 파리샤드)을 도입했다.
하시나 정부는 통신 산업 자유화를 통해 민간 기업 4곳에 휴대전화 서비스 제공 라이선스를 부여했다. 이는 국가 독점을 해체하고 가격 인하 및 접근성 확대로 이어졌다. 방글라데시 통신 규제 위원회를 설립하여 통신 산업을 규제했다.
정부는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여성 발전 국가 정책을 수립했다. 안전 및 고용 보장, 교육 및 숙련 노동력 창출, 여성 차별 및 억압 철폐, 인권 확립, 빈곤 퇴치, 사회 경제적 발전 참여를 목표로 했다. 1997년 12월, 모든 유니온 파리샤드 선거에 여성을 위한 3석을 마련했다. 1999년에는 아동 권리와 양육 환경 개선을 위한 국가 행동 계획을 승인했다.
하시나는 세계 소액 신용 정상 회의(워싱턴 D.C.), 세계 식량 정상 회의(로마), 의회 연합 회의(인도), OIC 정상 회의(파키스탄), 제9차 SAARC 정상 회의(몰디브), 제1차 D-8 정상 회의(터키), 제5차 세계 노년층 회의(독일), 영연방 정상 회의(영국), OIC 정상 회의(이란) 등 다수의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도 방문했다.
방글라데시는 벵골 만 다부문 기술 경제 협력 이니셔티브(BIMSTEC)와 D-8 경제 협력 기구(D-8)에 가입했다.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 처음으로 5년 임기를 모두 채운 총리가 되었다.
2008년 방글라데시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변화를 위한 헌장'이라는 선거 공약을 발표하고, 비전 2021 이행을 약속했다. 주요 공약은 다음과 같다.
* 물가 안정
* 부패방지위원회 강화 및 고위 인사 재산 신고 의무화를 통한 부패 척결
* 2013년까지 발전량 7,000메가와트로 증대
* 농업 부문 활성화 및 빈곤층 안전망 확대
* 좋은 거버넌스 구축, 테러 및 종교 극단주의 억제
* 1971년 전쟁범죄자 기소
* 독립적이고 공정한 사법부 보장
* 선거 제도 개혁
* 국가인권위원회 강화 및 행정부 비정치화
2012년, 하시나는 무하마드 유누스와 갈등을 겪었다. 노르웨이 다큐멘터리가 그라민 은행 자금 유용 의혹을 제기한 후, 유누스는 돈을 반환했지만 정부와 언론의 감시가 강화되었다. 유누스는 법원 판결로 은행 지배권을 잃고 하시나 등을 비판했으나, 하시나는 법원 판결에 따른 해임이었다고 반박했다.
하시나 정부는 국제범죄재판소를 설치하여 1971년 방글라데시 대학살 관련 용의자들을 조사하고 기소했다.
하시나 3기에는 2016년 7월 다카 테러를 포함한 국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하시나 정부의 정치적 탄압과 민주적 공간 축소가 극단주의 단체 번성 및 이슬람주의 단체의 폭력적 반발을 야기했다고 분석했다.
2017년 3월, 방글라데시 최초의 잠수함 두 척이 취역했다. 같은 해 9월, 하시나 정부는 약 100만 명의 로힝야 난민에게 피난처와 지원을 제공하고, 미얀마에 폭력 중단을 촉구했다. 방글라데시 국민 대다수는 정부 결정을 지지했고, 하시나는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
하시나는 정의의 여신상을 대법원 앞에서 철거하라는 요구를 지지했는데, 이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 굴복한 것으로 평가된다.
2021년 5월,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우체국 새 본사인 다크 바반(Dak Bhaban) 개관식에서 방글라데시 코로나19 범유행 대응을 위한 우편 서비스 추가 개발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서비스 디지털 전환 지속과 냉장 시설 구축을 통한 부패하기 쉬운 식품 우편 발송 허용이 포함된다.
2022년 1월, 정부는 자티야 상사드에서 보편적 연금 제도를 설립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18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방글라데시 시민(해외 거주자 포함)이 매월 생활비를 받을 수 있다.
2021-22 회계연도 말, 방글라데시 외채는 958억 6천만 달러로 2011년 대비 238%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은행 부문에서 대규모 부정이 발생하여, 부실 대출 금액이 2009년 230 미만에서 2019년 2500를 넘었다([국제통화기금|IMF]] 자료).
2022년 7월, 재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제재로 외환 보유고가 고갈되었다는 이유였다. 2023년 1월, IMF는 총 47억 달러(확대 신용 공여 33억 달러, 회복력 및 지속가능성 기금 14억 달러) 지원에 합의했다. IMF는 이 지원이 거시경제 안정 유지, 취약 계층 보호, 포용적이고 친환경적인 성장 촉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2년 12월,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여 물가 상승과 총리 사퇴를 요구했다.
같은 달 28일,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최초의 대중 급행 철도 시스템인 다카 메트로 철도 1단계(우타라-아가르가온 구간)를 개통했다.
2023년 G20 뉴델리 정상회의에서 하시나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양자 회담을 갖고 연결성 및 상업적 연계 등 인도-방글라데시 협력 다변화를 논의했다.
4. 논란 및 비판
2004 다카 수류탄 테러에서 하시나는 암살 위기에 처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아이비 라만(Ivy Rahman) 등 24명이 살해되었다. 2018년 첫 공판이 열렸고, 타리크 라만(Tarique Rahman) 등 여러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하시나의 측근이자 전 재무장관인 샤 아엠에스 키브리아(Shah A M S Kibria)도 2004년 실렛(Sylhet)에서 수류탄 공격으로 암살당했다.
2006년 10월, 셰이크 하시나와 아와미 연맹은 로기 보이타 운동을 시작했는데, 수천 명의 아와미 연맹 당원들이 며칠 동안 다카의 여러 거리를 갈고리와 노로 점거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와 파괴 행위, 약탈이 발생했으며 일용품 가격도 급등했다.
2007년 5월, 경찰은 이슬람 사회복지위원회 사무실을 파괴하고 방화하고 약탈한 혐의로 아와미 연맹 및 그 산하 단체 지도자와 활동가 19명에 대해 기소장을 제출했지만, 이들은 2011년 6월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시나는 2006~2008년 방글라데시 정치 위기 동안 군부 지원 임시 정부에 의해 뇌물 수수 및 갈취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1998년 발전소를 건설하기 전에 사업가 타줄 이슬람 파룩에게 뇌물을 강요한 혐의를 받았다. 2007년 4월 18일, 정부는 하시나가 선동적인 발언을 했고 그녀의 귀국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녀의 귀국을 금지했다. 2007년 4월 22일 살인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2007년 4월 23일 체포 영장이 취소되었고, 2007년 4월 25일 하시나의 입국 금지가 해제되었다.
2007년 7월 16일, 하시나는 경찰에 의해 자택에서 체포되어 다카의 지방 법원에 출두했다. 그녀는 갈취 혐의를 받았고 보석이 거부되었으며 국회 건물 내 감옥으로 개조된 건물에 수감되었다. 2007년 7월 17일, 방글라데시 부패방지위원회는 하시나와 할레다 지아 모두에게 1주일 이내에 자산 내역을 제출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2007년 4월 11일, 경찰은 하시나가 2006년 10월 경쟁 정당 지지자 4명의 살해를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살인 혐의를 제기했다. 2007년 9월 2일, 부패방지위원회는 1997년 발전소 건설 계약과 관련하여 하시나에 대해 추가 사건을 제기했다. 그녀는 30의 뇌물을 받고 계약을 최저가 입찰자에게 주지 않은 혐의를 받았다.
2008년 1월 13일, 하시나는 특별 법정에서 여동생 셰이크 레하나와 사촌 셰이크 셀림과 함께 갈취 혐의로 기소되었다. 2008년 6월 11일, 하시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가석방되었다.
2009년 방글라데시 경찰반란으로 인해 방글라데시 군 장교들을 포함하여 56명이 사망했다. 하시나는 반란에 개입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군 장교들의 비난을 받았다.
2013년 6월 27일, 인권 침해 혐의로 하시나와 다른 24명의 방글라데시 장관 및 보안 요원에 대한 소송이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기되었다.
2012년, 그녀는 그라민은행으로부터 계열사로 자금을 이체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노르웨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후 노벨상 수상자이자 그라민은행 설립자인 무하마드 유누스와 불화를 겪었다.
하시나 정부는 국제범죄재판소를 구성하여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1971년 방글라데시 학살에 연루된 용의자들을 조사하고 기소했다.
2014년 방글라데시 총선은 선거를 앞두고 폭력 사태와 야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논란이 되었다. 300석 중 153석이 무투표 당선되었다.
하시나 정부의 정치적 야당 탄압과 민주적, 시민적 공간의 축소는 "극단주의 단체들이 번성할 공간을 조성"했고 "이슬람주의 단체들의 폭력적인 반발을 야기했다."
하시나는 정의의 여신상을 방글라데시 대법원 앞에서 철거하라는 요구를 지지했다. 이는 정부가 종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으로 여겨졌다.
2019년 선거 전, 휴먼 라이츠 워치와 다른 인권 단체들은 정부가 야당에 대한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비난했다.
2021-22 회계연도 말까지 방글라데시의 외채는 95860에 달했는데, 이는 2011년 대비 238% 증가한 수치이다. 이 기간은 또한 국가 은행 부문에서 대규모 부정이 발생한 시기로, IMF에 따르면 2009년 23000c 미만이었던 부실 대출 금액이 2019년에는 250000c를 넘었다.
2022년 12월,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며 물가 상승과 총리 사퇴를 요구했다.
2024년 5월, 셰이크 하시나는 "백인 국가"가 자신의 정부를 전복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며, 만약 "백인 국가"가 방글라데시에 공군기지를 설치하도록 허용한다면 1월 선거에서 문제없이 치를 수 있도록 약속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티모르와 미얀마를 모델로 한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는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2024년 할당제 개혁 시위에서 하시나 총리는 "독립운동가의 손주들이 할당 혜택을 받지 못하면, 그 혜택은 라자카르들의 손주들에게 돌아갈까요?"라고 발언했다. 시위대는 이 발언을 자신들이 라자카르로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고 일부 슬로건에 이를 채택했다. 이후 시위는 경찰, 군대, 그리고 아와미 연맹, 챗라 연맹, 주보 연맹 회원들이 참여하는 폭력 사태로 번져 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만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2024년 8월 5일, 대규모 시위대가 총리 관저를 에워싸자 하시나가 사임했다. 같은 날 하시나는 인도로 탈출했다.
2024년 9월 10일 기준으로, 하시나는 152건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데, 이는 살인 135건, 반인륜 범죄 및 집단 학살 7건, 납치 3건, 살인 미수 6건, 방글라데시 국민당 행렬 공격 1건을 포함한다. 방글라데시 국제범죄재판소는 하시나와 9명의 고위 정부 및 아와미 연맹 관계자에 대해 집단 학살 및 반인륜 범죄 혐의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파드마 다리 뇌물 수수 스캔들은 집권 아와미리그 정부가 캐나다 건설 회사 SNC-라발린(SNC-Lavalin)으로부터 건설 계약 수주 대가로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는 의혹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후에 허위이자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캐나다 법원은 해당 사건을 기각했다.
2018년, 하시나 정부는 논란이 많은 2018년 디지털 보안법(Digital Security Act, 2018)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정부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인터넷이나 기타 매체를 통한 비판을 다양한 수준의 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 이 법은 방글라데시 국내외에서 국민의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언론 자유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심하게 비판을 받았다.
2022년 12월, 하시나 정부는 "반정부 뉴스"를 보도했다고 비난받은 191개 웹사이트의 폐쇄를 명령했다. 또한 방글라데시 국민당의 타리크 라만이 소유한 다이닉 딘칼의 폐쇄를 명령했다.
2024년 6월,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뉴델리에 국빈 방문을 했고, 그 기간 동안 방글라데시와 인도는 방글라데시 영토를 통과하는 인도의 인도 북동부로 향하는 철도 회랑을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한 10개의 양자 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방글라데시의 주권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하시나를 "인도에 나라를 팔았다"고 비난했다.
국내적으로 하시나는 방글라데시의 주권을 희생하면서까지 인도에 지나치게 가깝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5. 사생활
셰이크 하시나는 투기파라 마을의 초등학교에 다녔다. 가족이 다카로 이주한 후에는 아짐푸르 여자학교와 베굼 바드루네사 여자대학에 다녔다. 이후 에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에덴 대학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7년, 듀럼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방글라데시 핵 과학자 M. A. 와제드 미아와 결혼했다. 다카 대학교에서 벵골 문학을 전공하여 1973년 졸업했다. 1938년 다카 대학교의 여성 기숙사로 설립되어 후에 페미니스트 베굼 로케야의 이름을 딴 로케야 홀에서 생활했다. 학생연맹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로케야 홀 여성 부서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68년, 하시나는 방글라데시의 물리학자이자 작가, 그리고 방글라데시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이었던 M. A. 와제드 미아 (1942–2009)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사지브 와제드와 딸 사이마 와제드가 있다. 사이마의 시아버지는 전 해외교포복지 및 해외취업부 장관이자 지방자치, 농촌개발 및 협동조합부 장관을 지낸 칸다케르 모샤라프 호세인 (1942년생)이다. 하시나의 살아있는 유일한 형제인 셰이크 레하나는 2017년 고팔간지의 퉁기파라 우파질라 단위 아와미 리그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하시나의 조카이자 셰이크 레하나의 딸인 튤립 시디크는 영국의 노동당 정치인이자 국회의원 겸 도시 장관이다.
정치 경력 동안 총 19차례의 암살 시도를 겪었다. 2004년 다카 수류탄 테러 당시 부상으로 인해 청력 장애를 앓고 있다. 1975년 셰이크 무지브 가족의 잔혹한 암살 사건과 이후 암살 시도, 그리고 무지브 가족 구성원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안전 위협이 존재했던 점을 고려하여, 2015년 그녀와 그녀의 자녀들은 방글라데시 정부의 특별경호대를 통해 평생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호를 제공하는 관행은 생명에 대한 높은 안전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드문 일이 아니다. 정부는 또한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평생 무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누스 임시 정부는 이 법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2024년 9월 9일, 이 법을 폐지하는 법령이 발표되었다.
* 장남인 사제브 와제드 (1971년생)는 미국 텍사스대학교 아링턴캠퍼스에서 컴퓨터 공학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에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세계 젊은 글로벌 리더 2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2014년부터 어머니인 셰이크 하시나의 정보통신기술 문제 자문관을 역임하고 있으며, 아와미 연맹 소속이다.
* 장녀인 사이마 와제드 (1972년생)는 2023년 11월 1일 세계보건기구(WHO) 동남아시아 지역 사무국장으로 무기명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으나, 사이마를 제외한 다른 후보자들은 의사 또는 박사 학위 소지자인 반면, 사이마의 박사 학위는 조부의 이름을 딴 대학에서 받은 명예 박사 학위로 보여 투명성 및 혈연주의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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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상 경력
| 수상 연도 | 상 이름 | 수여 기관 | 비고 |
|---|---|---|---|
| 1997년 2월 6일 | 법학 박사(Doctor of Law) 학위 | 보스턴 대학교 | |
| 1997년 7월 4일 | 명예 법학 박사(Honorary Doctor of Law) 학위 | 와세다 대학 | |
| 1997년 10월 25일 | 명예 인문학 박사(Honorary Doctor of Philosophy) 학위 | 애버테이 던디 대학교 | |
| 1998년 | 펠릭스 우푸에-보이니 평화상(Félix Houphouët-Boigny Peace Prize) | 유네스코 | |
| 1998년 | 마더 테레사 상(Mother Teresa Award) | 전인도 평화협의회(All India Peace Council) | |
| 1998년 | M.K. 간디 상(M.K. Gandhi Award) | 마하트마 M. K. 간디 재단(Mahatma M K Gandhi Foundation) | |
| 1999년 1월 28일 | 명예 문학 박사(Desikottama, Doctor of Literature) 학위 | 비슈바바라티 대학교(Visva-Bharati University) | |
| 1999년 10월 20일 | 명예 법학 박사(Doctor of Law) 학위 |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 | |
| 1999년 12월 18일 | 명예 법학 박사(Honorary Doctor of Law) 학위 | 다카 대학교 | |
| 1999년 | 세레스 메달(The Ceres Medal) | 국제 연합 식량 농업 기구 | |
| 2000년 9월 5일 | 명예 인문학 박사(Doctor of Humane Letters) 학위 | 브리지포트 대학교 | |
| 2000년 4월 9일 | 펄 S. 벅 상(The Pearl S. Buck Award) | 랜돌프 대학교 | |
| 2009년 | 인디라 간디 상(Indira Gandhi Prize) | ||
| 2012년 1월 | 명예 문학 박사(Doctor of Literature) 학위 | 트리푸라 대학교 | |
| 2014년 | 유네스코 평화 나무 상(UNESCO Peace Tree award) | 유네스코 | 여성 권익 신장과 여아 교육 공헌 |
| 2015년 | UN 환경상 (지구의 챔피언) | UN | 기후변화 대응 리더십, 평생 공로상 |
| 2015년 11월 16일 | 명예 대학 박사(Doctor of the University) 학위 | 셰르에방글라 농업대학교(Sher-e-Bangla Agricultural University) | |
| 2018년 5월 26일 | 명예 문학 박사(Doctor of Letters) 학위 | 카지 나줄 대학교(Kazi Nazrul University) | |
| 1996-97년, 1998-99년 | 명예훈장(Medal of Distinction) 및 국가원수 훈장(Head of State Medal) | 라이온스 클럽 국제협회 | |
| 자료 없음 | 폴 P. 해리스 펠로우(Paul P. Harris Fellow) | 로타리 재단(Rotary Foundation) | |
| 자료 없음 | 세계적인 사상가 | 외교정책(Foreign Policy) | |
| 자료 없음 | Planet 50–50 챔피언 | UN 여성(UN Women) | |
| 자료 없음 | 변화의 에이전트 상(Agent of Change Award) | 글로벌 파트너십 포럼(Global Partnership Forum) | |
| 2018년 | 세계 100대 인물(Time 100) | 타임 | |
| 자료 없음 |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 59위 | 포브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