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임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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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합임무부대(UNITAF)는 1992년 소말리아 내전과 기아로 인한 인도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794호에 따라 미국 주도로 시작된 다국적 군사 작전이다. UNITAF는 '희망 회복 작전'의 일환으로, 소말리아에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고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국, 대한민국을 포함한 20여 개국이 참여했으며, 1992년 12월 9일 해병대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모가디슈 항구와 공항을 확보했다. UNITAF는 식량 및 구호품 수송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지만, 소말리아 내 무장 세력의 무장 해제를 이루지 못했고, 1993년 5월 4일 제2차 국제 연합 소말리아 활동(UNOSOM II)에 임무를 이양했다. UNITAF는 인도적 위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속한 대응의 필요성을 보여주었지만, 군사적 개입과 장기적인 평화 구축 전략의 조화, 그리고 정치적, 외교적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을 남겼다.

통합임무부대 - [전쟁]에 관한 문서
작전 개요
작전명: 희망 회복 작전 (Operation Restore Hope)
관련 분쟁소말리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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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기동 부대의 활동 모습
날짜1992년 12월 5일 – 1993년 5월 4일
장소소말리아
결과유엔 작전상 성공
소말리아 국민 동맹 정치적 승리
근거유엔 헌장 제7장
관련 유엔 결의유엔 결의 794호
유엔 결의 837호
교전 세력
참여 세력 통일 임무 부대



























적대 세력소말리아 국민 연맹
지휘관 및 지도자
유엔/미국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로버트 B. 존스턴
소말리아 국민 연맹모하메드 아이디드
병력 규모
통일 임무 부대38,000명 (미군 25,000명 포함)
피해 규모
통일 임무 부대사망: 82명
미국: 43명 사망
파키스탄: 24명 사망
말레이시아: 6명 사망
벨기에: 3명 사망
이탈리아: 3명 사망
오스트레일리아: 1명 사망
캐나다: 1명 사망
그리스: 1명 사망
부상: 약 300명
미국: 153명 부상
파키스탄: 75명 이상 부상
이탈리아: 36명 부상
말레이시아: 23명 부상
오스트레일리아: 3명 부상
벨기에: 2명 이상 부상
튀르키예: 4명 부상
소말리아 국민 연맹수천 명의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 (아이디드 측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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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인도주의적 재앙과 내전으로 소말리아가 초토화되자, 1992년 4월 국제 연합은 UNOSOM I을 창설했다. 그러나 소말리아 군벌들의 비협조와 적대로 UNOSOM I은 임무 수행과 병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2년 말, 소말리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군벌들은 더 작은 군벌로 분열되었고, UNOSOM 개입에 반대하며 유엔군을 공격하거나 구호 선박 정박을 방해하고 수송기를 격추하기도 했다. 구호 요원들은 약탈과 위협에 시달렸다. 11월,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장군은 안보리를 무시하고 평화유지군 철수를 요구하며, 추가 파병 시 적대적 대응을 선언했다.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유엔 헌장 제7조에 의거, 아이디드 무력화를 위해 병력 파견을 결정했다.

UNOSOM FV107 시미터
UNOSOM FV107 시미터

부트로스갈리는 UNOSOM보다 더 큰 규모의 병력 파병이 필요하며, 유엔 안보리가 이를 지휘, 통제할 기술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규모 개입을 유엔 회원국 지휘 하에 편성하되, 안보리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평화 유지에서 분쟁 후 평화 재건으로 파병 목적을 변경했다. 1992년 12월 3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794호를 채택, 군사력 사용을 승인했다.

UNITAF는 인도적 지원 확보를 위한 군사 작전이었으나,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목표로 인해 국가 재건 계획에는 부적합했다. UNITAF의 우선 목표는 계획 수립이 아닌 안보 확립이었다.

2.1. 소말리아 내전과 인도주의적 위기

1991년 바레 정권이 붕괴된 후, 소말리아는 극심한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통일 소말리아 회의가 분열되면서 무장 조직 간의 권력 다툼과 무력 충돌이 수도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중남부에서 전개되었다. 정치 투쟁 외에도 범죄 행위가 만연하여 사회 질서가 붕괴되었고, 하루에 3,000명이 굶어 죽는 등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다.

1992년 UNOSOM의 개입에 반대하는 군벌도 있었으며, 유엔군이 사살당하거나 구호 선박이 공격받는 일도 있었다. 수송기가 격추되기도 했으며, 구호 요원들은 약탈과 위협에 시달렸다. 같은 해 11월, 소말리아 장군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는 안보리를 공식적으로 무시하고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추가 파병 시 적대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선언했다.

2.2. 국제 연합의 초기 대응과 실패

1992년 4월, 국제 연합은 소말리아의 인도적 재앙과 내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UNOSOM I을 창설했다. 그러나 소말리아 지역 군벌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적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UNOSOM I은 임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고, 병력 유지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1992년 소말리아 군벌의 상황.
1992년 소말리아 군벌의 상황.


1992년 마지막 몇 달 동안 소말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군벌들은 더 작은 군벌들로 분열되었고, 이들은 다시 또 다른 군벌로 나뉘었다. 식량 배분 협의도 다른 지역 군벌과의 협력이 없으면 무의미해졌다. 일부 군벌들은 UNOSOM의 개입에 반대하며 유엔군을 사살하고, 구호 선박의 정박을 금지하거나 공격했다. 수송기가 격추되기도 하고, 구호 요원들은 약탈, 위협, 탈취에 시달렸다.

1992년 11월, 소말리아 장군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는 안보리를 공식적으로 무시하고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또한, 소말리아에 유엔군이 추가 파병될 시 적대적으로 반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과 평화 유지에 대한 좌절감이 커지자,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는 안보리에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는 정치적 방식이 실효가 없다고 판단하여, 아이디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유엔 헌장 제7조에 따라 국제적 평화와 안보를 위해 공군, 육군, 해군을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부트로스갈리는 단순한 평화유지가 아닌 유엔군 파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2.3. 미국의 개입 결정

1992년 하반기, 소말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군벌들은 더 작은 군벌로 분열되었고, 이들은 다시 더 작은 군벌로 분열되었다. 한 군벌과의 식량 분배 합의는 다른 군벌의 영토를 통과해야 할 때 무의미해졌다. 일부 군벌들은 UNOSOM I의 개입에 반대하며 유엔군을 공격하고 구호 선박의 정박을 막거나 수송기를 격추하기도 했다. 11월,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장군은 안보리를 무시하고 평화유지군 철수를 요구하며, 추가 유엔군 파병에 적대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과 국제사회의 압력이 커지자,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안보리에 무력 사용을 포함한 강력한 대응을 제안했다. 그는 유엔 헌장 제7조에 따라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평화 유지를 넘어선 군사력 사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UNOSOM FV107 시미터
UNOSOM FV107 시미터


그러나 부트로스갈리는 UNOSOM의 권한으로는 그러한 조치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소말리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유엔 사무국이 지휘, 통제할 수 없는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회원국의 지휘 하에 대규모 개입군을 구성하되, 안보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1992년 12월 3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794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소말리아에서의 인도적 구호 작전을 위한 군사력 사용을 승인했다. 안보리는 참여 군대의 "통합 지휘 및 통제"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왼쪽)이 소말리아 특수부대의 전투를 보기 위해 소말리아를 방문했다. 오른쪽은 토머스 미콜라치크 여단장이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왼쪽)이 소말리아 특수부대의 전투를 보기 위해 소말리아를 방문했다. 오른쪽은 토머스 미콜라치크 여단장이다.


결의안 794호 채택 이전, 미국은 유엔에 소말리아에 상당한 군사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며, 이 병력이 유엔의 지휘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결의안은 미국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1992년 11월 29일 사무총장의 서한을 언급하며 회원국의 지원을 환영했다. 1992년 12월 4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희망 회복 작전" 개시를 발표하고, 미국군은 결의안 794호에 따라 활동하게 되었다.

3. 희망 회복 작전 (Operation Restore Hope)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794호에 따라 1992년 12월 4일 희망 회복 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국제 연합에 소말리아에 대한 상당한 군사 지원을 제공했으며, 소말리아 내 군벌들에게는 미군이 유엔의 지휘를 받지 않음을 통고했다.

CIA 소속 래리 프리드먼은 특수활동부 요원으로, 소말리아 분쟁 중 미군 첫 사상자로 기록되었다. 그는 대전차 지뢰 폭발로 사망했으며, 정보 훈장을 받았다.

1992년 12월 9일, 미국 해병대가 소말리아 해변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모가디슈 항구와 모가디슈 국제공항을 신속하게 확보했다.

모가디슈 국제 공항의 미군 해병대
모가디슈 국제 공항의 미군 해병대

미국과 이탈리아의 경장갑차
미국과 이탈리아의 경장갑차


작전은 1992년 12월 6일에 시작되었으며, 네이비 씰과 해군 특수전 임무 부대 TRIPOLI 소속의 특수전 전투정 승무원들이 상륙 해변, 공항 및 항구 인근에서 해양 측량 및 정찰 조사를 3일 동안 실시했다. 12월 8일에는 제4심리전 부대가 모가디슈에 전단을 살포했다. 12월 9일, 제15해병 원정대는 모가디슈 시와 주변 지역에 대한 통합 진입 방식의 상륙 작전을 수행했다.

제2대대, 제9해병 연대 상륙팀 (BLT) (2/9)는 모가디슈 항구와 국제공항에 대한 공격을 수행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제1 해병 사단의 제1대대 7해병 등이 공항 확보 직후 도착했다. BLT 2/9의 일부 병력은 바이도아와 바르데라, 키스마요 항구에서 상륙 작전을 수행했다. 통합 헬리콥터 부대가 공중 지원을 제공했다.

한편, 소말리아 파벌들은 소말리아 민족 화해 회의를 통해 내전 종식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고, 1993년 3월 27일 아디스아바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이후에도 내전이 계속되면서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미국 정부가 미국 정유 회사에 소말리아 원유를 공급하기 위해 군사 개입을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당시 세계 은행과 국제 연합은 소말리아를 원유 생산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과 국제 연합 군대는 원유가 집중된 소말릴란드 지역에는 파병하지 않았다.

3.1. 작전 목표 및 UNITAF 구성

인도 육군 T-72 전차가 UN의 평화 유지 작전을 위해 유엔 마크를 달고 있다.
인도 육군 T-72 전차가 UN의 평화 유지 작전을 위해 유엔 마크를 달고 있다.

통합임무부대(UNITAF)의 주된 목표는 소말리아 내에서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UNITAF의 활동으로 기아 구제에 일정 부분 효과를 보았으며, 특히 기아가 심각했던 바르데라에서는 사망자 수가 크게 감소했다.

UNITAF는 미국 중부사령부가 주도하여 소말리아의 안정과 인도적 지원을 위해 설립된 다국적군이었다. 제1해병원정군이 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초기에는 CJTF 소말리아로 불렸으나 UNITAF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미국 해병대, 육군, 공군, 해군 장교들이 사령부에 참여했고, 특수 작전 부대도 포함되었다.

UNITAF에는 20여 개국이 참여했으며, 총 37,000명의 병력 중 미군이 25,000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한민국도 UNITAF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참여 국가 및 병력 구성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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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병력 구성
미국약 25,000명 (전체 병력의 대다수)
오스트레일리아제1 왕립 호주 연대 (1993년 1월~5월)
방글라데시, 벨기에, 보츠와나, 캐나다, 이집트 (1개 대대), 에티오피아, 프랑스 (여단 본부 및 1개 대대), 독일, 그리스 (와지드 의료 부대), 인도 육군 (바이도아 여단 본부 및 3개 대대), 아일랜드 (수송 부대), 이탈리아, 쿠웨이트, 모로코, 뉴질랜드, 나이지리아, 노르웨이,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스페인, 스웨덴, 튀니지, 터키, 아랍에미리트, 영국, 짐바브웨해당 국가 병력
대한민국해당 국가 병력


미국 중부사령부의 통제하에 작전이 수행되었지만, 참여 국가 간의 관계는 항상 원만하지는 않았다. 작전 방식과 임무 범위를 두고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군은 평화 유지를 위해 지역 군벌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프랑스 외인 부대는 무장 해제 과정에서 과도한 폭력을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3.2. 작전 전개

1992년 12월 9일, 미국 해병대네이비 실 특수부대가 소말리아 해안에 상륙하면서 희망 회복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모가디슈 항구와 모가디슈 국제공항을 신속하게 확보하고, 바이도아와 바르데라 등 주요 도시와 거점을 장악하여 인도적 지원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초기에는 군벌들의 큰 저항 없이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작전 개시 전,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794호에 따라 소말리아 내 군벌들에게 미군이 유엔의 지휘를 받지 않음을 통고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희망 회복 작전 개시를 발표하며, 미군이 결의안 794호에 따라 활동할 것임을 밝혔다.

작전은 다음과 같은 4단계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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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내용
1모가디슈의 공항과 항구, 발도글과 바이도아의 공항을 제압하여 육군 부대 수용 태세 구축.
2해병대와 육군 주력 부대를 2개 공항에서 받아 오도르, 베레트윈, 잘랄락시 확보.
3남부로 작전을 전개하여 키스마요 항구와 발데라 공항을 제압, 중남부 구호 환경 정비.
4작전을 PKO에 인계.


1992년 12월 16일에는 발도글과 바이도아의 공항을 확보, 작전의 제1단계를 완료했다. 12월 28일에는 주요 8개 지역을 당초 계획보다 1개월 빨리 제압했다.

1993년 1월 4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평화 회담이 열려 정전 및 평화 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1월 7일, 8일, 11일 3차례에 걸쳐 미국 해병대가 무기 시장과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무기를 압수했다.

1993년 3월 15일부터 아디스아바바에서 국민화해회의가 열렸고, 3월 27일에 아디스아바바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무장 조직의 무장 해제에 대한 전망은 나오지 않았다.

1993년 4월 말에 작전이 종료되어 5월 4일에 지휘권이 미국군에서 제2차 국제 연합 소말리아 활동(UNOSOM II)으로 이양되어 구호 작전이 인계되었다.

희망 회복 작전에서는 현지 무장 세력의 저항이 적었다. 12월 5일, 통일 소말리 회의 간부는 병사들에게 미군 공격을 자제하도록 명령했고, 다음 날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파는 안보리 결의 794에 동의 의사를 표명했다.

3.3. 작전의 성과와 한계

통합임무부대(UNITAF)의 주요 목적은 식량 및 구호품 수송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이 작전은 성공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통합임무부대 주둔이 소말리아의 보안 상황과 구호 물품 지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약 10만 명의 소말리아 국민이 지원을 통해 생존할 수 있었다.

1993년 3월 3일, UNOSOM II은 공식적으로 지휘권을 인계받아 다음 날 작전 수행권을 발동했다. 통합임무부대의 작전은 UNOSOM II를 지원하기 위해 통신, 병참, 정보 지원 및 신속 대응군 파견 등으로 구호 작전을 위한 안전한 환경을 설립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소말리아에서 작전한 항공 요원은 약 60대의 육군 항공기와 1,000명의 승조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말리아 내 적대 단체들의 무장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통합임무부대가 압도적인 병력으로 주둔하여 전투를 억제할 때만 국내 상황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안전한 환경을 창설하는 것은 다각적 측면에서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 국제사회의 참여

국제 사회는 소말리아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통합임무부대(UNITAF)에 병력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제1 왕립 호주 연대(1993년 1월~5월)를 비롯하여, 방글라데시, 벨기에, 보츠와나, 캐나다, 이집트(1개 대대), 에티오피아, 프랑스(여단 본부 및 1개 대대), 독일, 그리스(와지드 의료 부대), 인도 육군(바이도아 여단 본부 및 3개 대대), 아일랜드(수송 부대), 이탈리아, 쿠웨이트, 모로코, 뉴질랜드 (제40 비행대대 RNZAF 병력), 나이지리아, 노르웨이,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스페인, 스웨덴, 튀니지, 터키, 아랍에미리트, 영국, 짐바브웨 등이 UNITAF에 병력을 지원했다. 이들 국가 파견대는 미국 중부사령부의 조정 및 감독을 받았지만, 센트컴과 각 국가 간의 관계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4.1. 기타 국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제1 왕립 호주 연대(1993년 1월~5월), 방글라데시, 벨기에, 보츠와나, 캐나다, 이집트(1개 대대), 에티오피아, 프랑스(여단 본부 및 1개 대대), 독일, 그리스(와지드 의료 부대), 인도 육군(바이도아 여단 본부 및 3개 대대), 아일랜드(수송 부대), 이탈리아, 쿠웨이트, 모로코, 뉴질랜드의 제40 비행대대 RNZAF 병력, 나이지리아, 노르웨이,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스페인, 스웨덴, 튀니지, 터키, 아랍에미리트, 영국, 짐바브웨가 UNITAF에 병력을 파견했다. 이들 국가 파견대는 미국 중부사령부의 조정 및 감독을 받았지만, 센트컴과 기여 국가 간의 관계는 다양했다.

5. UNOSOM II로의 전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93년 3월 26일 결의안 814를 통해 UNOSOM II를 설립했다. UNITAF는 과도기적 기구였으며, 안전한 환경이 복원되면 중단되었던 UNOSOM 임무가 UNOSOM II로 부활될 예정이었다. 1993년 3월 3일, 사무총장은 UNITAF에서 UNOSOM II로의 전환을 실행하기 위한 권고 사항을 안전 보장 이사회에 제출하면서, UNITAF 임무 규모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환경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효과적인 정부나 지역 치안/경찰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사무총장은 안전 보장 이사회가 UNITAF에서 UNOSOM II로 전환할 시기가 되었다고 결정한다면, UNOSOM II는 소말리아 전역에 안전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유엔 헌장 제7장에 따라 강제 집행 권한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UNOSOM II는 UNITAF가 시작한 임무를 완수하고, 소말리아 국민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삶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93년 5월 3일 UNOSOM II는 공식적으로 지휘권을, 5월 4일에는 작전에 대한 책임을 인수했다.

5.1. 전환 배경

UNOSOM II의 작전 지역
UNOSOM II의 작전 지역

통합임무부대(UNITAF)는 소말리아에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단기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소말리아의 장기적인 안정과 국가 재건을 위해서는 보다 포괄적인 권한을 가진 유엔 주도의 작전이 필요했다.

1993년 3월 3일,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안전보장이사회에 UNITAF에서 UNOSOM II로의 전환을 권고했다. 그는 UNITAF의 임무 규모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환경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효과적인 정부나 지역 치안/경찰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는 UNITAF에서 UNOSOM II로의 전환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유엔 헌장 제7장에 따라 UNOSOM II에게 소말리아 전역에 안전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강제 집행 권한을 부여했다. UNOSOM II는 소말리아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민주적인 국가 재건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아디스아바바 협정 서명 하루 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UNITAF에서 UNOSOM II로 권력을 이양하는 결의안 814를 통과시켰다. 1993년 5월 3일, UNOSOM II는 공식적으로 지휘권을 인수했고, 1993년 5월 4일에는 작전에 대한 책임을 인수했다.

5.2. UNOSOM II의 임무와 한계

UNOSOM II는 1993년 3월 26일 결의안 814에 의해 설립되어, UNITAF가 시작한 소말리아의 평화와 안정 회복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다. 새로운 임무는 소말리아 국민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삶을 재건하고 민주적인 국가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포함했다.

아디스아바바 협정 서명 하루 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814를 통과시켜 UNITAF에서 UNOSOM II로 권력을 이양했다. 이는 국가 건설 책임을 포함하는 정책 변화를 가져왔다. 1993년 5월 4일, UNOSOM II는 공식적으로 작전 책임을 인수했다.

UNOSOM II는 27개국 연합으로 구성되었지만, 대부분의 의사 결정자는 미국인이었고, 이는 미국이 작전에 상당한 통제력을 갖게 했다. UNOSOM II 사령관 제비크 비르는 1993년 5월까지 본부 핵심 보직이 미국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관련 국가는 유엔 군사 지휘 구조에 거의 대표되지 않았다. 조나단 호위 소말리아 주재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이자 UNOSOM II의 수장은 28명의 미국 장교를 핵심 보직에 배치했다. 1993년 6월 파키스탄인 살해 사건과 UNSCR 837 통과 이후 몇 달 만에 미국은 효과적으로 임무를 주도하게 되었다.

6. 평가 및 교훈

통합임무부대(UNITAF)의 임무는 식량 및 기타 인도적 지원의 전달을 보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받았다.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는 UNITAF 병력 주둔이 "소말리아의 안보 상황과 인도적 지원의 효과적인 제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 내렸다. 역학 조사에 따르면 군사 개입으로 약 10,000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UNITAF는 군사 개입 범위를 크게 늘렸지만, UNOSOM I에 비해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대규모 병력 배치 이전인 1992년 10월에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개입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UNITAF는 기근을 약 한 달 정도 앞당기는 효과를 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독립적인 NGO 난민 정책 그룹의 평가에 따르면, 국제적 지원으로 구조된 약 10만 명 중 1만에서 2만 5천 명의 생명만이 UNITAF와 UNOSOM II의 개입으로 구출되었으며, 알렉스 드 발 교수는 실제 수치가 더 낮을 수 있다고 한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과 미국의 외교관 체스터 크로커 같은 인물들은 개입으로 25만 명의 소말리아인의 생명을 구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관찰자들은 UNITAF가 사망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며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6.1. 긍정적 평가

통합임무부대(UNITAF)의 임무는 식량 및 기타 인도적 지원의 전달을 보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작전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는 UNITAF 병력의 주둔이 "소말리아의 안보 상황과 인도적 지원의 효과적인 제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 내렸다. 역학 조사를 통해 군사 개입으로 약 10,000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UNITAF는 군사 개입의 범위를 크게 늘렸지만, UNOSOM I에 비해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대규모 병력 배치 이전인 1992년 10월에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개입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UNITAF는 기근의 종결을 약 한 달 정도 앞당기는 효과를 냈다고 한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독립적인 NGO 난민 정책 그룹의 평가에 따르면, 국제적 지원으로 구조된 약 10만 명 중 1만에서 2만 5천 명의 생명만이 UNITAF와 UNOSOM II의 개입으로 구출되었으며, 알렉스 드 발 교수에 따르면 실제 수치는 더 낮을 수 있다고 한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과 미국의 외교관 체스터 크로커와 같은 인물들은 개입으로 25만 명의 소말리아인의 생명을 구했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관찰자들은 UNITAF가 사망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며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