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대구 학생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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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28 대구 학생 의거는 1960년 2월 28일, 자유당 정권의 억압에 항거하여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이다. 야당 유세 참석을 막기 위한 일요일 등교 지시에 반발하여 시작되었으며, 경북고등학교 등 대구 시내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대구 시내를 행진하며 민주주의를 외쳤고, 이 사건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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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대구 학생의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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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2·28 대구 학생 의거 |
날짜 | 1960년 2월 28일 |
지역 |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현 대구광역시) |
원인 | 민주당 유세장 접근 방해 |
목적 | 부당한 등교 지시 철회 |
종류 | 항의, 시위 |
결과 | 4·19 혁명으로 발전 |
참여 세력 | |
시위대 | 경상북도 지역 학생 |
진압 세력 | 경찰 |
주요 인물 | |
주도 인물 | 미상 |
규모 | |
시위 참여 인원 | 1,200여명 |
피해 | |
체포된 인원 | 120여명 |
2. 발단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은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대구 유세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 당국은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등교를 명령했고, 이는 2·28 대구 학생 의거의 발단이 되었다.[1]
1960년 2월 28일은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였던 장면 박사의 유세일이었다. 당국은 학생들이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등교 지시를 내렸고, 이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1]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2·28 운동은 고등학생들이 주도하였으며, 계획적인 조직 시위의 민족 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 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1]
3. 사건 개요
경북고등학교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치른다는 이유로, 대구 시내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곳은 토끼 사냥, 영화 관람 등 황당한 이유로 일요 등교를 지시했다.[1]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이 모여 부당한 일요 등교 지시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은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1]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향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나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1]
당시 경상북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말했지만,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서 보호하고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들도 있었다.[1]
1,2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고, 그 중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했다.[1]
4. 결의문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릴 학도요, 조국을 괴뢰가 짓밟으려 하면 조국의 수호신으로 가 버릴 학도이다.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부여된 권리를 위하여 싸우련다.한국어
— 2.28민주운동 결의문[1]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2시 55분,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자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1]
5. 운동 주체
2·28 대구 학생의거에는 다음의 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6. 2.28 의거의 영향
2·28 대구 학생의거는 고등학생들이 주도한 계획적인 조직 시위였다. 이는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이자 해방 이후 학생 운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1]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기본조약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
당시 대구는 1,200여 명의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1954년 사사오입 개헌, 1958년 진보당 사건, 그리고 1960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등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대한 분노가 컸던 시기였다.[1]
6. 1. 3.15 마산 의거에 미친 영향
2·28 대구 학생의거는 3·15 마산 의거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2.28 운동이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2·28 운동은 고등학생들이 주도한 계획적인 조직 시위였으며, 6·10 만세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6. 2. 4.19 혁명의 기폭제
2·28 운동은 고등학생들이 주도하여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를 벌인 학생 운동이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이 시기 대구는 1,200여 명의 학생들이 "민주화 함성"을 외치는 도가니로 변했다. 발췌 개헌(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 진보당 사건(1958년) 등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대한 분노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긴장감이 고조된 시기였다.[1]
6. 3.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2·28 운동은 고등학생들이 주도하여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를 벌인 학생 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이 운동은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대한민국 전후 시기에 발생한 최초의 학생 운동이 되었다. 특히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4·19 혁명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1]
당시 대구는 1,200여 명의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1954년 사사오입 개헌, 1958년 진보당 사건, 1960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등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대한 분노가 컸던 시기였다.[1]
7. 기념 사업
- 1961년 4월 10일: 매일신문 주도로 대구시민 성금을 모아 명덕로터리에 2.28대구학생기념탑을 건립하였다.
- 1990년 2월 28일: 2.28대구학생기념탑이 두류공원으로 이전되었다.
- 1999년 2월 28일: 문희갑 대구시장이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 대구중앙초등학교 부지에 2.28민주의거기념공원 조성을 선포하였다.
- 경북고등학교에 2.28기념탑과 작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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