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매일신문은 1946년 3월 1일 남선경제신문으로 창간된 대구·경북 지역의 일간 신문이다. 1950년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한 후 천주교 대구대교구 유지재단에 인수되었으며, 1960년 매일신문으로 다시 제호를 변경했다. 2·28 대구 학생의거를 보도하고 언론 윤리 위원회법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으며,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영남일보를 인수했다. 1995년 지방지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고, 2022년 코리아와이드에 인수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구광역시의 대중 매체 - 대구일보
대구일보는 1945년 대구, 경북 지역의 우리말 신문인 대구시보로 시작하여 대구신보 폐간, 통합 대구일보 발간, 방송 제휴, 특집 발행, 폐간 및 복간 과정을 거쳐 2001년 재발행되었으며,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대구 지역에서 1만 부 이상 발행되었다. - 대구광역시의 대중 매체 - 성서공동체FM
성서공동체FM은 사단법인 성서공동체가 운영하며 대구 달서구에서 89.1MHz 주파수로 방송하는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으로, 2005년 개국하여 2009년 정식 사업 허가를 받았다. - 코리아와이드 계열사 - 일선교통
일선교통은 1985년 경북고속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구미시 시내버스 회사로, 선산군의 옛 지명인 일선군에서 사명을 따왔으며, 구미버스와 함께 구미시 시내/좌석/리무진 노선에 공동 배차하고 현대자동차 차종을 운행한다. - 코리아와이드 계열사 - 동대구복합환승센터
동대구복합환승센터는 동대구역, 대구 도시철도 1호선 동대구역과 연계되어 고속버스, 시외버스, 철도, 도시철도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의 복합환승센터로, 전국 각지 노선 및 공항버스도 운행한다. - 1946년 창간 -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1946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창간된 대한민국의 종합 일간지로, 과거 언론 탄압과 강제 통합을 겪었으나 한화그룹으로부터 분리 독립 후 사원주주회사로 출범하여 현재는 진보 성향의 언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 1946년 창간 - 닛칸스포츠
아사히 신문과 연계된 일본의 스포츠 신문 닛칸스포츠는 전국 발행망을 통해 스포츠, 연예, 사회 뉴스를 보도하며, 경마 예상과 격투기 보도에 강점을 지니고, 오보 논란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매일신문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매일신문 |
원어명 | 매일신문 |
로마자 표기 | Maeil Sinmun |
한자 표기 | 每日新聞 |
종류 | 지역신문 |
소유주 | 코리아와이드선산 |
창간일 | 1946년 3월 1일 |
언어 | 한국어 |
본사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20 (계산동2가) |
웹사이트 | 매일신문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이창영 |
관련 인물 | 신유길 (전 계명대학교 교수) |
기타 |
2. 발자취
1946년 3월 1일 '''남선경제신문'''을 제호로 대구시 대안동(태평로 7가)에서 창간하였다. 1950년 8월 1일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개칭하였다. 1950년 10월 1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에서 인수하였다. 1955년 9월 14일 주필 최석채가 쓴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가 문제가 되어 자유당 간부 등이 신문사 및 사원을 테러한 '대구매일피습사건'이 있었다. 최석채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12월 7일 사옥을 대구시 남일동 138번지로 이전하였다. 1960년 2월 28일 4·19 혁명을 유발시킨 2·28 대구 학생의거의 선봉이 되었다. 1960년 7월 7일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개칭하였다. 1963년 3월 19일 무사설로 군정 연장을 반대하였다. 1964년 8월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과 함께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반대하여 그 시행을 보류시키는데 앞장섰다. 1965년 12월 18일 간첩의 것으로 의심되는 물품을 보도하였다. 편집국장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79년 7월 25일 제1회 대붕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1980년 11월 30일 지방지 '1도 1사'를 원칙으로 한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영남일보를 인수하였다. 1980년 12월 1일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개칭하였다. 1981년 11월 14일 사옥을 현재의 대구 중구 계산동2가 71번지로 이전하였다. 1988년 3월 1일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개칭하였다. 1989년 4월 영남일보 분리하여 복간하였다. 1995년 11월 17일 지방지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였다. 1997년 4월 1일 제호를 한글로 변경하였고 전면 가로쓰기를 시행하였다. 2009년 8월 4일 지령 2만호 돌파하였다. 2015년 1월 1일 조간으로 전환하였다. 2022년 3월 17일 코리아와이드에 인수되었다.[4]
2. 1. 창간과 초기 역사 (1946~1950년대)
1946년 3월 1일 대구시 대안동(태평로 7가)에서 '''남선경제신문'''을 제호로 창간하였다. 1950년 8월 1일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유지재단에서 인수하였다.1955년 9월 14일 주필 최석채가 쓴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가 문제가 되어 자유당 간부 등이 신문사 및 사원을 테러한 '대구매일피습사건'이 있었다. 최석채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12월 7일 사옥을 대구시 남일동 138번지로 이전하였다.
1960년 2월 28일 4·19 혁명을 유발시킨 2·28 대구 학생의거의 선봉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7일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개칭하였다.
2. 2. 민주화 운동과 언론 탄압 (1960~1970년대)
매일신문은 1955년 9월 14일 주필 최석채가 쓴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가 문제가 되어 자유당 간부 등이 신문사 및 사원을 테러한 '대구매일피습사건'을 겪었다. 최석채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60년 2월 28일에는 4·19 혁명을 유발시킨 2·28 대구 학생의거의 선봉이 되었다.1963년 3월 19일에는 군정 연장에 반대하여 무사설로 항의했다. 1964년 8월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과 함께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그 시행을 보류시키는데 앞장섰다. 1965년 12월 18일에는 간첩의 것으로 의심되는 물품을 보도하여 편집국장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2. 3. 언론 통폐합과 복간 (1980~1990년대)
1980년 11월 30일 지방지 '1도 1사'를 원칙으로 한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영남일보를 인수하였다. 1980년 12월 1일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다시 변경하였다가, 1988년 3월 1일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1989년 4월 영남일보 분리하여 복간하였다.2. 4. 디지털 전환과 변화 (1990년대~현재)
1995년 11월 17일 지방지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였다. 1997년 4월 1일 제호를 한글로 변경하였고 전면 가로쓰기를 시행하였다. 2009년 8월 4일 지령 2만호를 돌파하였고, 2015년 1월 1일 조간으로 전환하였다.3. 사시
땀과 사랑으로 겨레의 빛이 되리
4. 지면
매일신문은 주 5일제 신문을 발행한다.[5]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는 신문을 발행하지 않지만, 온라인 서비스는 계속 제공한다.[5]
5. 역대 관계자
- 최석채 (1981~1987)
- 전달출 신부 (1994~1996)
- 정태호 (1959~1960)
- 김상준 (1978~1979)
- 전달출 신부 (1989~1994)
- 최덕홍 주교 (1950~1954)
- 임화길 신부 (1955~1956)
- 주병환 (1956~1957)
- 김영호 신부 (1957~1959/1960~1978)
- 신상도 (1959)
- 김덕룡 (1959~1960)
- 전달출 신부 (1978~1989)
- 김경환 신부 (1989~1992)
- 김부기 신부 (1992~2001)
- 정재완 신부 (2001~2004)
- 조환길 신부 (2004~2007)
- 이용길 신부 (2007~2008)
- 이창영 신부 (2008~2013)
- 여창환 신부 (2013~2018)
- 이상택 신부 (2018~2022)
- 여운동 신부 (2022)
- 정창룡 (2022~)
5. 1. 역대 명예회장
wikitext- 최석채 (1981~1987)
- 전달출 신부 (1994~1996)
5. 2. 역대 회장
정태호는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매일신문 회장을 역임하였다. 김상준은 1978년부터 1979년까지 회장을 역임하였다. 전달출 신부는 1989년부터 1994년까지 회장을 역임하였다.5. 3. 역대 사장
최덕홍 주교가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초대 사장을 역임했다. 임화길 신부가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주병환이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김영호 신부가 1957년부터 1959년, 그리고 1960년부터 1978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신상도가 1959년에 사장을 역임했다. 김덕룡이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전달출 신부가 1978년부터 1989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김경환 신부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김부기 신부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정재완 신부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조환길 신부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이용길 신부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이창영 신부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여창환 신부가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이상택 신부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여운동 신부가 2022년에 사장을 역임했다. 정창룡이 2022년부터 현재까지 사장을 맡고 있다.6. 역대 슬로건
wikitable
슬로건 | 시기 |
---|---|
달리는 신문 매일신문 | 1994 |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신문 | 1995 |
대구경북이 Pick한 뉴스 | 2020 ~ 현재 |
7. 통계
(대구)
(경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