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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항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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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시작된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차별에 저항하여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 운동이다. 이 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약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학생들의 독립 운동 참여를 이끌었고, 3·1 운동과 동등한 수준의 민족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이 운동은 학생 독립 운동 기념일 제정, 기념관 건립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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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생 항일 운동
기본 정보
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광주학생 항일운동 당시의 격문을 다룬 내용이다.
명칭광주 학생 항일 운동
전체한국의 독립 운동
날짜1929년 11월 3일 - 1930년 5월
지역대한민국 전역, 간도, 미국, 일본, 중국
원인6·10 만세 운동
한일 학생 차별 교육
박기옥 희롱 사건
종류항의, 시위, 농성
결과신간회 해소, 학생 운동 탄압
참여 단체 및 학교
주요 단체성진회
신간회
근우회
소녀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학생전위동맹
학생전위동맹
조선청년총연합회
조선노동총동맹
참여 학교광주중학교
광주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고등학교
경신학교
중동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협성실업학교
실천여학교
동덕여고보
배화여고
진명여고
근화여고
정신여고
전남사범학교
기타미국, 중국, 일본, 만주 등의 독립 단체 및 학생도 참여
주요 인물
항일 운동 참여자박준채
허정숙
장재성
장석천
허헌
김병로
조병옥
황상규
이경채
오쾌일
왕재일
신경애
안창호
김철수
김상환
윤창하
강달모
이원혁
이일신
강대성
김용창
이항발
한경석
권유근
정종근

2. 운동의 배경

3·1 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 정부는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1] 1920년 임시 정부 주도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는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일본 제국을 상대로 거둔 가장 성공적인 전투 중 하나로 여겨진다.[2] 그 결과, 일본 제국과 조선총독부는 잔혹하게 탄압했고, 독립 운동은 교착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1927년 독립을 위한 새로운 비밀 조직인 신간회가 결성되면서 독립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비밀리에 활동하게 되었다. 신간회는 국내의 여러 좌익-우익 지도자들이 합작하여 만든 민족단일당으로, 한국 내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포용하면서 일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나주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 슈조 등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등을 희롱한 것을[9][10] 계기로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가 후쿠다를 때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때 경찰이 박준채와 조선인 학생만을 체포하여 학생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2. 1. 일제의 우민화 정책과 민족 차별

당시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싸우던 박준채


당시 일제는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20년간의 한반도 식민 지배가 안정적 수준으로 확고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 본토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면서 동아시아 전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고등교육을 제한하고, 직업 교육과 일본어, 일본사 교육 등을 실시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 활동을 금지하고, 조선인 학생에 대한 무시와 교육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조선 학생들을 억압하였다. 결국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 그리고 우민화 정책을 당하면서 항일 의식을 갖게 되었다. 광주 소재 각 고등보통학교(중고통합과정)에는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 학생 조직이 생성되어 있었다. 일본인 학생들에 의한 조선인 학생 차별과 멸시 역시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1]

2. 2. 국내 독립 운동 세력의 단일화

1926년 4월 25일, 순종의 사망으로 6·10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6년 연말,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내에서는 일본에 의한 자치주의에 현혹되지 말고, 흩어진 민족의 역량을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홍명희, 송진우 등의 여러 지도자들에게도 반영되었고 민흥회 등에 반영되었다. 사회주의그룹에서도 정우회선언 등을 통해 분열적 종파주의로부터 좌우합작으로 나아갈 것이 결의되었다. 그 결과 1927년 2월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를 회장으로 동아일보의 송진우를 비롯해 허헌, 김병로, 한용운 등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익-우익의 지도자들이 합작하여 민족단일당인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터지게 되는 1929년의 연초에는 신간회의 지회가 144개, 회원은 3만 9천여 명에 달해 각 지역의 청년, 노동, 농민운동을 지도해 갔다.

광주 지역에서도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으며, 1927년 11월 전남청년연맹에서 광주청년동맹이 분리되어 결성되었다.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의 주요 임원들은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학생조직의 배후 인물이었다.

3.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진행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나주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등을 희롱한 사건이 발생했다.[9][10] 이를 계기로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경찰은 조선인 학생들만 체포하여 학생들의 불만을 샀다. 11월 3일,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 경찰과 친일적 보도를 한 "광주일보"에 항의했고, 학생 간 충돌이 다시 발생하여 경찰이 조선인 학생들을 검거했다.

이에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격분하여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고 일본의 통치 정책을 비판하며 데모를 벌였다. 이 데모는 성진회(醒進會)가 주도했으며, 250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체포되고 동맹 휴학이 결성되었다.

신간회김병로 등의 조사단을 파견하여 사건의 실태를 알리려 했으나, 노선 대립으로 해산되어 실패했다. 이 운동은 1930년까지 조선 각지에서 이어졌으며, 총 4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3. 1. 나주역 사건과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이광춘,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를 목격한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일본인 학생들은 듣지 않고 난투극이 벌어졌다.[15][16] 난투극에는 일본인 학생 50명과 한국인 학생 30명이 참여했는데, 한국인 학생이 사기 면에서 더 유리했다.[17][18]

1929년 11월 당시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당한 이광춘 (왼쪽)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일본인 학생 편을 들었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집단 항의했다. 당시 일본 기업인들이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수탈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던 상황에서, 이 사건은 학생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1929년 11월 3일, 허정숙은 광주로 내려와 학생들을 면담하고 경성 지역 여학생과 여성 운동가들에게 시위를 촉구하였다.

3. 2. 제1차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 3일)

1929년 11월 3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은 일본에게는 메이지 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明治節)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월 3일 즉,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본 천황의 생일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서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하굣길에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 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신문사에 몰려들어가서 항의할 정도로 그들의 반일감정은 폭발하기 시작했다.[19][20]

그런데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한편 장재성, 최규창 등은 일제에 대항할 자세한 행동 방향을 제시한다.[21]

:1. 우리의 투쟁 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2.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3. 광주중학생과 대치 중인 광주고보생을 해산시키지 말고 광주고보로 집합시켜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4.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5. 우리는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그리하여 장재성의 주도로 학생들은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광주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히 적(일제)을 물리치자는 내용의 행진가를 부르는 가두시위를 하였다. 일제는 항일 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구속,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탄압을 하였고, 심지어는 개인 의원인 태양 의원에서 치료받던 학생들을 도립병원장이 치료할 가치도 없다면서 비하하는 망언을 하여 공분을 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도 일제의 학생운동 탄압과 차별을 비판하는 기사를 보도할 정도였다.

3. 3. 제2차 광주시위운동 (1929년 11월 12일)

1929년 11월 12일, 장재성은 광주 학생들을 설득하는 유인물을 작성, 오쾌일이 등사판을 이용하여 박기석의 집에서 약 1,000장을 인쇄하였다. 오쾌일은 오전 8시경 광주고보와 광주농고 학생들을 통해 유인물을 배포했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다.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22][23] 일제는 학생 250여 명과 사회운동단체 간부들을 검거했다.

일제 경찰에 구속된 학생들에게는 학교 당국의 가혹한 처벌이 잇따랐다. 대부분 무기정학, 퇴학 처분을 받아 광주학생운동 가담자들은 탄압받았고, 중등학교 교실이 텅 빌 지경이었다. 일제는 12월 28일까지 언론을 통제하여 학생운동의 확산을 막고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각종 탄압에 대한 소문이 커지면서 응축되었던 항일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 만세!,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구호를 사용, 러시아혁명 이후 유행하던 사회주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 경찰은 이를 사상운동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원동력은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맞서야 한다는 분노와 우리 민족의 독립적 삶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기에서 비롯된 건강한 청년 정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3]

3. 4. 여성계의 항의 운동

허정숙(여성 운동의 지도자)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이 터지자 허정숙 등은 경성부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을 찾아다니며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며 동맹휴학과 시위를 홍보, 독려하였다. 1930년 1월 15일 경에는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페미니스트들과 이화학당, 배화여전 출신 인사들은 경성 각급 학교의 대표들이 만나는 자리에도 특별히 참석하여 광주에서의 조선인 여학생의 성추행 사실을 알리고, 일본인들의 부당한 대우에 항거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주변의 남학교 학생들과도 연대하여 휴학, 시위할 것을 부탁하였다.

허정숙 등은 이화여전 외에도 동덕여대, 배화여전, 근화여자상업학교, 경성보육학교, 정신여학교, 실천여학교, 태화여자미술학교, 숙명여자고보 등의 여학생 수백 명이 이에 동조하여 거사를 계획하도록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여학생들을 통해 인근 남자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독려, 호소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 밀정에게 정보가 입수되어 허정숙과 여학생들은 경성에서의 항일동맹휴교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30년 1월 경성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 경성 항일학생 시위 주도, 조선공산당 재건 등의 혐의, 유언비어 날조 및 선동 혐의 등으로 '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의 배후 조종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는 탄압을 받자 허정숙1930년대 중반 옌안으로 망명하게 된다.

4. 학생독립운동의 전국 확산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나주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 슈조 등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등을 희롱한 사건[9][10]을 계기로,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와 일본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조선인 학생들만 체포하면서 학생들의 불만이 커졌다. 11월 3일, 광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며 데모를 벌였다. 이 시위는 학생들이 조직한 "성진회(醒進會)"가 주도했으며, 250명의 조선인 학생이 체포되고, 조선인 학생들은 동맹 휴학으로 일본에 항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대로 결성된 신간회는 현지에 김병로 등을 파견하여 진상 규명과 대중 보고 대회를 준비했으나, 노선 대립으로 인해 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1930년까지 조선 각지에서 계속되었으며, 총 4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11] 1953년 대한민국은 이날을 기념하여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다.

4. 1. 서울 및 전국으로의 확산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였던 장석천은 1929년 11월 16일 서울로 올라와 조병옥, 김병로 등 신간회 중앙간부들에게 제2차 시위의 전말을 보고하고,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곽양훈, 차재정 등에게 광주 학생들의 항일 시위를 전국 항일 시위 운동으로 확산할 것을 역설했다. 이 두 모임에서 서울 시내 각 학교에 이미 조직되어 있는 비밀독서회 조직을 통해 시위 운동을 서울로 확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장석천은 특별히 휘문고보 5년생이었던 후배 장홍염을 설득하여 장홍염이 서울 시내의 주요 조선인 학교들의 학생운동가들을 접촉하였다. 장홍염 자신은 1년 전에 'ㄱ당 사건'에 관련되어 수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처지였다.[3] 11월 20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29년 12월 3일 서울의 각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광주 학생들의 시위 운동에 대한 전말과 독립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이 모두 뿌려졌다.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서울 지역의 조직 주동자들이 잡혀 갔지만, 1929년 12월 9일부터 서울 지역 학교들의 항일 시위가 시작되었다. 12월 9일에는 경신학교 학생 300여 명, 보성고보 학생 400여 명, 중앙고등보통학교 700여 명,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 협성실업학교 학생 15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같은 날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2월 13일까지 서울 지역에서만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동맹 휴학에 참여하였고, 그 중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서울 지역에서만 45명이 구속되고, 이 가운데 35명이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신간회는 이 광주 학생 시위 운동을 전국적 항일 독립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0일 권동진(3.1운동 시 33인 중 1인), 허헌,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 조병옥, 홍명희, 한용운, 주요한 등이 대책 회의를 갖고, 12월 13일 광주 학생 사건 진상 발표회를 갖고, 곧바로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 운동을 갖고, 지방 지회에도 동일한 행동을 하도록 지시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4. 2. 체포와 투옥, 참가 규모

일본 경찰의 탄압과 신간회 주요 간부 체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전국 각지, 심지어 만주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일제 총독부의 초기 기록에는 194개 학교가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이후 조사에 따르면 광주광역시교육청은 2006년에 총 320개 학교를 확인하였다. 학생독립운동기초자료발굴팀 등은 350여 개의 조선인 관련 학교가 참여하였고,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해외 학교나 단체까지 포함하면 참여 규모는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3]

참여 인원 또한 학생이 중심이었지만, 각종 청년 단체, 노동 단체, 신간회, 해외 독립운동 단체, 해외 피압박 민족 해방 운동 관련 옹호 및 지지 운동 단체, 반제 동맹, 중국 공산당, 중국 국민당의 기관들, 재만 한족 연합회 등 다양한 단체들이 참여하거나 지지하였다. 이러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국제적 성격과 규모는 1929년 세계 정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5. 영향 및 역사적 의의

3·1 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해방 때까지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1] 1920년 임시 정부 주도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는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일본 제국을 상대로 거둔 가장 성공적인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 일본 제국과 조선총독부의 잔혹한 탄압으로 독립 운동은 교착 상태에 놓였으나, 1927년 비밀 조직 신간회 결성으로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 신간회는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포용하며 일본에 맞섰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약 5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되었으며, 약 54,000명이 참여했다. 만주, 간도, 기린, 중국 상하이, 베이징, 일본, 미국 등 해외로 확산되어 집회와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학생 독립 운동 정신은 비밀 결사 운동, 1940년대 징병과 곡물 수탈 저항 운동, 1943년 5월 제2차 학생 독립 운동 등으로 계승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학생들이 독립 운동의 핵심임을 확인시켜 주었고, 1920년대 말 침체된 민족 해방 운동을 고취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3·1 운동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대표적인 민족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1. 학생 운동의 기폭제

1929년 11월 12일, 장재성이 이끄는 학생 단체는 항쟁 참여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등사물을 배포했다. 이후 광주농업고등학교와 광주여자고등학교 등 몇몇 학교 학생들이 일본 통치에 반대하며 동맹 휴업을 결의했다. 당국은 항쟁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지만, 이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항쟁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의 구호에는 민족주의사회주의적 시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3]

신간회 광주 지부장 장석천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격화되자 서울로 가서 신간회 지도부에 이 사건을 보고했다. 그는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이 운동이 전국적인 독립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신간회는 서울 및 다른 주요 도시에서 시위를 준비했지만, 서울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시위 시작 전에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교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조병옥, 한용운, 송진우 등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323개 학교로 확산되었다.

1929년 11월 3일에 시작된 학생 운동은 약 5개월 동안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약 54,0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 운동은 만주, 간도, 기린, 중국 상하이, 베이징, 일본, 미국 등 해외로 확산되어 집회와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학생 독립 운동 정신은 비밀 결사 운동, 1940년대의 억압적인 징병과 곡물 수탈에 대한 저항 운동, 1943년 5월의 제2차 학생 독립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은 학생들이 독립 운동의 핵심 구성원임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1920년대 말 노동/농민 운동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민족 해방 운동을 고취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광주 독립 운동은 3·1 운동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가장 대표적인 민족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5]

이러한 학생들의 노력은 민족 독립 운동을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5] 1953년, 대한민국 국회는 학생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매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이후 2006년, 이 명칭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되었다.

5. 2. 민족 독립 운동의 고취

3·1 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 정부는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1] 1920년에는 임시 정부가 주도하여 청산리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는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일본 제국을 상대로 거둔 가장 성공적인 전투 중 하나로 여겨진다.[2] 그 결과, 일본 제국과 조선총독부는 잔혹한 탄압으로 대응했고, 이로 인해 독립 운동은 교착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1927년 독립을 위한 새로운 비밀 조직인 신간회가 결성되면서 독립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비밀리에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신간회는 한국 내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포용하면서 일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격화되자, 신간회 광주 지부의 지부장 장석천은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신간회 지도부에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는 두 차례의 회의를 통해 이 운동이 전국적인 독립 투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 이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신간회는 서울 및 다른 주요 도시에서 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비록 서울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시위를 시작하기 전에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몇몇 학교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는 조병옥, 한용운, 송진우 등 다른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참여로 이어졌다. 결국 참여 학교는 323개에 달했다.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최초의 학생 운동은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여 약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54,000명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 운동은 만주, 간도, 기린, 중국 상하이, 베이징, 일본, 미국 등 해외로 확산되어 집회와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학생 독립 운동의 정신은 비밀 결사 운동, 1940년대의 억압적인 징병과 곡물 수탈에 대한 저항 운동, 1943년 5월의 제2차 학생 독립 운동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은 학생들이 독립 운동의 핵심 구성원임을 확인시켜주는 계기였으며, 1920년대 말 노동/농민 운동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민족 해방 운동을 고취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광주 독립 운동은 3·1 운동과 동등한 수준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가장 대표적인 민족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3. 3.1 운동과 동등한 위상

3·1 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 정부는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1] 1920년에는 임시 정부가 주도하여 청산리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는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일본 제국을 상대로 거둔 가장 성공적인 전투 중 하나로 여겨진다.[2]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최초의 학생 운동은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여 약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54,000명이 이 운동에 참여했으며, 만주, 간도, 기린, 중국 상하이, 베이징, 일본, 미국 등 해외로 확산되어 집회와 시위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학생 독립 운동의 정신은 비밀 결사 운동, 1940년대의 억압적인 징병과 곡물 수탈에 대한 저항 운동, 1943년 5월의 제2차 학생 독립 운동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학생들이 독립 운동의 핵심 구성원임을 확인시켜주는 계기였으며, 1920년대 말 노동/농민 운동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민족 해방 운동을 고취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광주 독립 운동은 3·1 운동과 동등한 수준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가장 대표적인 민족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4. 기념 사업

1953년, 대한민국 국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기리기 위해 매년 11월 3일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이후 2006년, 이 명칭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되었다.[11][6]

6. 주요 관련 장소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여러 장소에서 전개되었으며, 주요 장소는 다음과 같다.


  • '''구 나주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상지이다. 나주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에게 대항한 배경에는 당시 영산포에 근거지를 둔 일본인들이 나주 평야에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고, 읍내 상권 또한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이 있었다.[3]
  •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관''': 1967년 광주광역시 동구 광동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2004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으로 이전하여 재개관하였다.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의 전개 과정을 종합적으로 전시하고 있다.[3]
  • '''구동 공원 (현 광주공원)''': 광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1929년 11월 3일(음력 10월 3일) 메이지 천황 생일 기념식에서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 간의 충돌이 발생한 장소이다. 학생들은 기미가요 제창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침묵으로 항의했다.[3]
  • '''광주교''': 1907년에 건설된 광주교는 당시 남쪽에서 오가는 모든 사람과 차량이 광주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이용하던 다리였다. 1922년1935년 두 차례의 재건축을 거쳐 콘크리트 다리가 되었다.[7]
  • '''구 광주역''': 약 300명의 학생들이 "대한 독립 만세", "일본 제국주의 타도",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과 함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3]
  • '''구 일본인 소학교 (현 광주중앙초등학교)''': 1907년에 일본인 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13년에 현재의 광주중앙초등학교 위치에 교사를 열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당시 거리 시위가 일어난 장소였다.[3]
  • '''구 전남도청''':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충돌 이후 오후 2시에 가두시위가 재개된 장소 중 하나이다. 시위대는 충장로를 따라 시위했고, 전남도청 남쪽 골목길과 병원을 향해 계속 시위를 벌였다.[7]
  • '''부동교''': 1929년 11월 12일, 학생 시위대가 광주중학교를 공격하려 했으나, 경찰과의 유혈 충돌을 피하여 금동광주천을 건너 광주교를 따라 내려와 광주고등학교로 돌아갔다. 당시 부동교 아래에는 작은 시장이 있었고, 수천 명의 군중이 이곳에 모여 거리 시위를 벌였다.[3]
  • '''광주제일고등학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상지이며, 독립을 염원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광주에서 항일 시위를 주도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이다. 교내에는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탑"(1954년 건립)과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관(1997년 건립)이 있다.[8]

6. 1. 구 나주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상지였다. 나주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에게 대항한 배경에는 당시 영산포에 근거지를 둔 일본인들이 나주 평야에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고, 읍내 상권 또한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이 있었다. 이 지역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옛 나주역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다.[3]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나주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 슈조 등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등을 희롱한 것을[9][10] 계기로,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가 후쿠다를 때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때 경찰이 박준채와 조선인 학생만을 체포하여 학생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6. 2.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관

1967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 동구 광동에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2004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관은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건립되었다. 2005년 11월,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의 전개 과정을 종합적으로 전시하며 다시 문을 열었다.[3]

6. 3. 구동 공원 (현 광주공원)

광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구동공원(현 광주공원)은 1912년에서 1913년 사이에 성거산 정상에 조성되었으며, 광주신사 1,200평이 광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3] 1929년 11월 3일(음력 10월 3일)은 일본의 국경일인 메이지 천황의 생일이었다. 학생들은 일본의 공휴일을 기념해야 한다는 현실 속에서 기미가요 제창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침묵으로 항의했다. 기념식 이후,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 간의 충돌이 발생했고, 최 씨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입히는 등 폭력 사태로 번졌다.[3]

6. 4. 광주교

1907년에 건설된 광주교는 당시 징검다리와 부실한 나무 다리뿐이던 시절에 가장 현대적인 채색된 나무 다리였다. 당시 남쪽에서 오가는 모든 사람과 차량은 이 다리를 통해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광주교는 일제에 의해 우리에게 '신사로 가는 길'이자 '시장의 길'로 여겨졌다.[7] 1922년과 1935년 두 차례의 재건축을 거쳐 콘크리트 다리가 되었다.

6. 5. 구 광주역

약 300명의 학생들이 "대한 독립 만세", "일본 제국주의 타도",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과 함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3]

6. 6. 구 일본인 소학교 (현 광주중앙초등학교)

1907년에 일본인 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13년에 현재의 광주중앙초등학교 위치에 교사를 열었다. 이곳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당시 거리 시위가 일어난 장소였다.[3] 1929년 11월 3일,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의 거리 시위는 충정로와 서석동을 지나 광주사범학교와 광주여자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학생들과 합류했고, 일반 시민들도 시위대를 격려하여 시위 규모는 3만 명에 달했다.

6. 7. 구 전남도청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충돌 이후 오후 2시에 가두시위가 재개되었다. 시내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충장로를 따라 시위하던 학생들은 광주중학교(일본 학교)가 있는 길림동으로 향했다. 그들은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와 '광주중학교(일본 학교) 폐쇄'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7] 시위대는 석성동으로 갔다가 경찰의 제지로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그들은 전남도청 남쪽 골목길과 병원을 향해 계속 시위를 벌였다.

6. 8. 부동교

1929년 11월 12일, 학생 시위대는 광주중학교를 공격하려 했으나, 경찰과의 유혈 충돌을 피하여 금동광주천을 건너 광주교를 따라 내려와 광주고등학교로 돌아갔다.[3] 당시 부동교 아래에는 작은 시장이 있었고, 수천 명의 군중이 이곳에 모여 거리 시위를 벌였다.[3] 그러나 현재는 그 시장은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에는 선남대학교병원이 들어서 있다.[3]

6. 9. 광주제일고등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발상지이며, 독립을 염원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광주에서 항일 시위를 주도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이다. 교내에는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에 건립된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탑"과 1997년에 건립된 광주 학생 독립 운동 기념관이 있다.[8] 1999년 4월 30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학교 캠퍼스 기념관에는 1923년에 창단된 광주일고 야구부의 역사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8]

참조

[1] 서적 Sources of Korean Tradition, vol. 2, From the Six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ie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2] 웹사이트 청산리전투 https://archive.toda[...] 2011-08-07
[3] 뉴스 [그때 오늘] 광주에서 터져나온 일제하 최대의 학생 독립운동 http://article.joins[...] 2009-11-02
[4] 웹사이트 학생독립운동이란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의의 http://gsim.gen.go.k[...]
[5] 웹사이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http://gsim.gen.go.k[...]
[6] 간행물 9월의독립운동가: 심훈 http://www.ksilbo.co[...] 2001-08-31
[7] 웹사이트 오월길 > 5·18 사적지 > > http://518road.518.o[...]
[8] 뉴스 School Spirit May Be Metaphysical for South Korean Baseball Players https://www.nytimes.[...] 2015-10-02
[9] 문서 그 자리에 있던 조선인 여학생 이광춘의 증언에 따르면, 후쿠다가 비틀거리며 박기옥이 아닌 다른 여학생과 부딪힌 것이 사건의 발단이라고 한다.
[10] 서적 若き抗日の群像 文芸社
[11] 서적 若き抗日の群像 文芸社
[12] 문서 참여자 및 운동에 도움을 준 독립 운동가 포함
[13] 웹인용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대해서 아시나요? https://if-blog.tist[...] 2020-11-03
[14] 웹인용 [이달의 이슈 & 우표] 오늘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 - 지난시간여행 상세보기 - 시간여행 - 한국우표포털서비스 K-stamp https://stamp.epost.[...]
[15] 웹인용 독립기념관 [Vol.11]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불씨가 되다 http://www.i815.or.k[...]
[16]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
[17] 웹인용 [역사 속의 인물] '나주역 사건' 주역 박준채 https://www.imaeil.c[...] 2013-10-30
[18] 웹인용 광주학생운동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http://www.grandcult[...]
[19] 웹인용 불의에 항거한 광주학생독립운동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http://www.grandcult[...]
[20] 웹인용 주요독립활동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https://theme.archiv[...]
[21] 웹인용 영암의 아들 최규창,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다 https://ncms.ncultur[...]
[22] 웹인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3] 웹인용 현충시설정보서비스 http://27.101.2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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