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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라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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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MS 라코니아는 1911년 진수된 쿠나드 라인의 영국 증기선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무장 상선으로 개조되어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순찰 임무를 수행했으며, 동아프리카 전선에도 투입되었다. 1916년 민간 여객선으로 복귀하여 운항하던 중, 1917년 2월 독일 잠수함 U-50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12명이 사망했고,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8년 아일랜드 해안에서 잔해가 발견되었으며, 은괴 등 인양된 물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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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라코니아 - [배(Ship)]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RMS 라코니아, 뉴욕에서
RMS 라코니아, 리버풀에서 텐더 스커미셔와 함께
함명RMS 라코니아
함명 유래펠로폰네스의 라코니아
선주큐나드 라인
건조스완 헌터, 월센드
진수일1911년 7월 27일
인수일1911년 12월 12일
처녀 항해1912년 1월 20일
최후1917년 2월 25일 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
특징
함종오션 라이너
동력월센드 슬립웨이 & 엔지니어링 컴퍼니의 8기통 4단 팽창 엔진
추진트윈 프로펠러
수용량승객:
1등석 300명
2등석 350명
3등석 2,200명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코니아''는 1914년에 무장 상선 순양함으로 개조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주요 활동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3]

2. 1. 무장 상선으로 개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코니아 호는 1914년에 무장 상선 순양함으로 개조되었다. 이 배는 6인치 포 8문을 장착했고, 한동안 수상 비행기 2대를 갑판에 탑재하기도 했다. 라코니아 호는 남대서양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이먼스 타운에 주둔하며 1915년 4월까지 남대서양과 인도양을 순찰했다. 이후에는 잔지바르에 주둔하는 본부선으로 사용되었으며,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탕가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했다. 주로 순찰 임무를 수행했지만, 한 차례 탕가 포격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아프리카 기지에서 계속 복무하며, 더반케이프타운에서 영국령 동아프리카 육군 병력을 수송하는 임무도 여러 차례 수행했다. 라코니아 호는 1916년 6월 호송선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이때 케이프타운에서 대량의 금괴를 운송했다. 이후 데번포트에서 퇴역했다.[3]

2. 2. 주요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코니아''는 1914년에 무장 상선 순양함으로 개조되었다. 약 15.24cm 포 8문을 장착했고, 한동안 갑판에 수상 비행기 2대를 탑재하기도 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이먼스 타운에 주둔하며 1915년 4월까지 남대서양과 인도양을 순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 뒤 잔지바르에서 본부선으로 활동하며 독일령 동아프리카탕가 점령 작전에 참여했다. 주로 순찰 임무를 맡았으나, 탕가 포격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아프리카 기지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더반케이프타운에서 영국령 동아프리카로 향하는 병력을 수송하는 항해를 여러 차례 수행했다.

1916년 6월, ''라코니아''는 호송선과 함께 영국으로 귀환했다. 이 과정에서 케이프타운에서 대량의 금괴를 운송했으며, 데번포트에서 퇴역했다.[3]

3. 민간 여객선 복귀 및 침몰

1916년 7월 쿠나드 라인으로 반환되어 같은 해 9월부터 민간 여객선으로 다시 운항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7년 2월 25일, 미국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중 아일랜드 해역에서 독일 제국잠수함 U-50이 발사한 어뢰에 맞아 침몰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 공격으로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특히 미국 시민의 희생은 미국 내 반독일 감정을 고조시키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배에 탑승했던 ''시카고 트리뷴'' 기자 플로이드 기번스의 생생한 보도는 이 사건의 파장을 더욱 키웠다.

3. 1. 민간 여객선 복귀

1916년 7월, 라코니아 호는 쿠나드사로 반환되었고, 같은 해 9월 9일에 다시 민간 여객선으로서 운항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7년 2월 25일 비극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라코니아 호는 어빈 선장의 지휘 아래 승객 75명(1등석 34명, 2등석 41명)과 승무원 217명을 태우고 미국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아일랜드 남부 패스트넷 록에서 북서쪽으로 약 6nmi 떨어진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 U-50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첫 번째 어뢰는 엔진실 뒤쪽 우현에 명중했지만 배는 즉시 침몰하지 않았다. 하지만 20분 뒤, 두 번째 어뢰가 다시 우현 엔진실을 강타했고, 결국 라코니아 호는 오후 10시 20분에 침몰했다.

이 공격으로 승무원 6명과 승객 6명, 총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된 승객 중에는 미국 시민인 메리 호이와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 호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원래 시카고 출신이었다. 미국 시민의 사망은 미국 내 반독일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라코니아 호에는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 플로이드 기번스가 탑승하고 있었다. 그는 어뢰 공격과 침몰 과정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기사는 미국 상원과 하원 양원에서 낭독되었으며, 미국의 참전 결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3. 2. 독일 잠수함 U-50의 공격

1917년 2월 25일,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던 중 아일랜드 패스트넷 서쪽 북서쪽으로 6nmi 떨어진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 U-50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당시 배에는 1등석 승객 34명과 2등석 승객 41명 등 총 75명의 승객과 어빈 선장(Captain Irvine)이 지휘하는 217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첫 번째 어뢰는 엔진실 뒤쪽 우현에 명중했으나 배는 즉시 침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 20분 후, 두 번째 어뢰가 다시 우현 엔진실 부근에 명중하여 폭발했고, 결국 배는 오후 10시 20분에 침몰했다.

이 공격으로 승무원 6명과 승객 6명, 총 12명이 사망했다. 사망한 승객 중에는 미국 시카고 출신의 메리 호이(Mary Hoy) 부인과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 호이(Elizabeth Hoy) 양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시민권자의 사망은 미국 내에서 독일에 대한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라코니아 호에 탑승하고 있던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 플로이드 기번스는 이 사건에 대한 생생한 보도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침몰 경험담은 양원 의회에서 낭독되었고, 미국의 전쟁 참전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3. 3. 인명 피해

1917년 2월 25일, 라코니아 호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던 중 아일랜드의 패스트넷 북서쪽 11km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 U-50에게 어뢰 공격을 받았다. 첫 번째 어뢰는 엔진실 뒤쪽 우현에 맞았지만 배는 침몰하지 않았다. 그러나 20분 뒤 같은 위치에 두 번째 어뢰 공격을 받아 엔진실이 폭발했고, 결국 오후 10시 20분에 침몰했다.

이 공격으로 총 12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 승무원이 6명, 승객이 6명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 시카고 출신의 메리 호이(Mary Hoy)와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 호이(Elizabeth Hoy)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미국 시민의 사망 소식은 독일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을 크게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미국의 참전을 앞당기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당시 배에는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였던 플로이드 기번스(Floyd Gibbons)도 탑승하고 있었다. 그는 라코니아 호 침몰 사건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기사는 미국 의회 양원에서 낭독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국의 전쟁 참전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3. 4. 플로이드 기번스의 보도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 플로이드 기번스는 라코니아 호가 어뢰 공격을 받았을 때 배에 직접 타고 있었다. 그는 침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기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가 작성한 기사는 미국 의회 양원에서 낭독되었으며, 이는 미국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4. 잔해 발견

2008년 11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 본사를 둔 상업적 고고학 회사 오디세이 해양 탐사가 아일랜드 해안에서 약 296km 떨어진 곳에서 RMS 라코니아 호의 잔해를 발견했으며, 이 사실은 2009년 3월에 발표되었다. 영국 정부는 전쟁 보험 제도에 따라 침몰 당시 선박 소유주에게 보험금을 지급했으므로 잔해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는 사실상 잔해가 영국 납세자의 재산임을 의미한다.[4]

오디세이 해양 탐사는 잔해에서 은괴 852개와 은화 132상자를 인양했으며, 추정 가치는 약 300만파운드이었다. 잔해 조사 중에는 배에 탔던 여성 승객의 것으로 보이는 왼쪽 신발 잔해도 발견되었다.

라코니아 호의 잔해 탐사 과정은 디스커버리 채널의 TV 프로그램 ''보물 퀘스트''의 "실버 퀸" 에피소드를 통해 방영되었다.

참조

[1] 간행물 The Latest Cunarder – Launch of the ''Laconia'' at Wallsend https://archive.org/[...] Marine Engineering, Inc., New York—London 2018-01-29
[2] 간행물 The Cunard Liner Laconia http://www.gracesgui[...] 1912-01-26
[3] 웹사이트 A Dundee Master Mariner - His Own Story, serving as a Lieutenant on the Laconia http://ninetradesofd[...] Self 2017-12-30
[4] 뉴스 Battle for the treasure chest that changed the course of the Great War https://www.independ[...] 200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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