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YZ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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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XYZ 방어전은 스페인 내전 중 국민파의 발렌시아 공세를 공화국이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이다. 아라곤 전투 이후 프랑코는 발렌시아를 목표로 진격을 결정했고, 이에 맞서 공화국은 XYZ 방어선을 구축했다. 1938년 7월, 국민파의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XYZ 방어선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발렌시아 점령에 실패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공화국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에브로 전투를 준비할 시간을 벌었으며, 결과적으로 XYZ 방어전은 공화국에게 전략적 이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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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YZ 방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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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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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XYZ 방어전 |
관련 전쟁 | 스페인 내전 중 동부 공세 |
장소 | 스페인 동부 하발람브레 산맥 일대 |
기간 | 1938년 5월 18일 ~ 1938년 5월 24일 |
결과 | 공화파의 승리, 에브로 전투의 시작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스페인 제2공화국 |
교전국 2 | 스페인 민족주의 동맹, 이탈리아, 독일 |
지휘관 | |
공화국군 지휘관 | 레오폴도 메넨데즈 로페즈 소장, 카를로스 로메로 대령, 에르네스토 고메즈 대령, 구스타보 듀란 대령 |
민족주의 동맹군 지휘관 | 호세 솔차가 소장, 호세 엔리케 바렐라 대령, 하파엘 가르시아 발리뇨 대령, 안토니오 아란다 마타 대령, 마리오 베르티 준장 |
병력 규모 | |
공화국군 병력 | 보병 120,000여 명 (6개 군단) |
민족주의 동맹군 병력 | 보병 125,000여 명 (5개 군단), 전투기 417대, 대포 1,000문 이상 |
피해 규모 | |
공화국군 피해 | 5,000명 미만의 사상자 |
민족주의 동맹군 피해 | 20,000명 이상의 사상자 |
2. 역사적 배경
아라곤 전투 이후 프랑코는 독일과 측근들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혼란에 빠진 공화군을 분쇄하고 바르셀로나를 점령하는 대신 발렌시아로 남하하기로 결정하였다.[8][9] 이같은 결정은 프랑코가 자신이 무리하게 카탈루냐로 진격할 경우 프랑스 제3공화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으나,[10] 리드루에호가 기록한 것처럼 (프랑코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한다는 것은 곧 그렇게 하기 위해 불필요한 협상과 양보가 수반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기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조기 종결과 달리) 전쟁을 길게 끌수록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며 (이것이) 더 잔인하지만 더 효과적인 방법 이라고 여기는듯 했다. 라는 인식역시 한몫을 하고 있었다.[9]
이같은 결정에 따라 4월 25일부터 호세 바렐라 대령이 이끄는 카스티야 군단과 아란다 마타 대령 휘하의 갈리시아 부대, 가르시아 발리뇨 대령이 지휘하는 제 1 나바라 사단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4일에 걸친 전투끝에 그들은 첫번째 목표인 알리아가(Aliaga)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악천후로 인하여 더이상의 전진은 불가능 하였다.
2. 1. 아라곤 공세와 국민파의 발렌시아 진격 결정
아라곤 전투 이후 프랑코는 독일과 측근들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혼란에 빠진 공화군을 분쇄하고 바르셀로나를 점령하는 대신 발렌시아로 남하하기로 결정하였다.[8][9] 이같은 결정은 프랑코가 자신이 무리하게 카탈루냐로 진격할 경우 프랑스 제3공화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으나,[10] 리드루에호가 기록한 것처럼 라는 인식역시 한몫을 하고 있었다.[9]이같은 결정에 따라 4월 25일부터 호세 바렐라 대령이 이끄는 카스티야 군단과 아란다 마타 대령 휘하의 갈리시아 부대, 가르시아 발리뇨 대령이 지휘하는 제 1 나바라 사단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4일에 걸친 전투끝에 그들은 첫번째 목표인 알리아가(Aliaga)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악천후로 인하여 더이상의 전진은 불가능 하였다.
2. 2. 국민파의 공세와 공화군의 저항
아라곤 전투 이후 프랑코는 바르셀로나 점령 대신 발렌시아로 남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프랑스의 군사적 개입을 우려한 오판과 전쟁을 장기화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4월 25일, 호세 바렐라 대령의 카스티야 군단, 아란다 마타 대령의 갈리시아 부대, 가르시아 발리뇨 대령의 제 1 나바라 사단이 남하하여 알리아가를 점령했으나, 악천후로 진격이 중단되었다.[9] 5월 1일, 국민주의자들은 세 방향으로 공세를 재개했다. 바렐라는 테루엘에서, 아란다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르시아 발리뇨는 산악 지대를 통과하는 중앙 열을 이루어 진격했다.[9]
국민주의자들은 3월과 4월의 악천후, 마에스트라고의 험준한 지형, 그리고 프랑스에서 보강된 새로운 무기(I-16 10형, 그루먼 FF 전투기, 대공포)로 강화된 공화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2][9] 6월 13일, 카스테욘 데 라 플라나가 함락되었지만, 사군토에서 진격이 멈췄다.[11] 알프레도 킨델란 장군은 작전 포기를 건의했고, 독일 콘도르 군단은 전선에서 철수했다.[5][6]
프랑코는 공격을 계속하여 7월 25일까지 발렌시아 점령을 명령했다.[6] 7월 초, 국민주의자들은 마리오 베르티 장군의 이탈리아 자원군단 (CTV) 3개 사단[5]과 호세 솔차가 장군의 투리아 군단 4개 사단으로 전력을 강화했다.[6] 또한 900문의 대포와 400대의 항공기, 약 50대의 이탈리아 중형 폭격기 (BR.20, SM.79, SM.81)를 보유했다.[5][6] 이에 맞서 공화국군은 레반테 군의 레오폴도 메넨데스 장군 휘하 6개 군단을 배치했다.[13]
7월 5일, 가르시아 발리뇨의 공격은 시에라 데 에스파다에서 저지되었다.[14] 7월 13일, 국민주의자들의 마지막 공세가 시작되었다. 솔차가 군단은 테루엘에서 남쪽으로, 바렐라 군단과 CTV는 동쪽 측면에, 가르시아 발리뇨 부대는 해안을 따라 진격했다.[15] 모라 데 루비엘로스와 사리온에서 저항이 있었으나, 시에라 델 토로의 공화국 방어선이 무너졌다. 국민주의자들은 97km 전선을 따라 32km 진격했으나, 비베르에서 시에라 데 에스파단까지 뻗어 있는 XYZ선 요새에 저지되었다.[16]
3. XYZ 방어선의 구축
XYZ 방어선은 스페인 레반테 지역의 하발람브레(Javalambre) 산맥을 기점으로 하여 토로(Toro) 산맥과 알메나라(Almenara) 고원을 거쳐 지중해안에까지 연결되어 공화파의 제2 수도였던 발렌시아를 수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 방어선은 빌바오의 철의 고리(Iron circle)나 마지노 선과는 다르게 스페인 동부의 복잡하고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간단한 참호선과 위장된 벙커들로만 이루어졌고 적의 공중 폭격이나 대규모 포격에도 최대한 버텨낼 수 있도록 처리되어 있었다.
4. 전투 경과
18일부터 23일까지, 에르네스토 구에메스 대령과 카를로스 로메로 대령이 이끄는 두 공화국 군단이 지키는 XYZ 방어선은 국민주의자들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4] 공화국 진지는 위치가 좋고 참호가 잘 구축되어 국민주의자들에 비해 상당한 전술적 이점을 가졌다. 기관총 진지는 교차 사격을 위해 설치되어 공격을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많은 진지가 숨겨져 있어 탐지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포병이나 항공기가 폭격하기 어려웠다. 공화국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보병 공격과 격렬한 폭격이 사용되었지만, 방어군은 잘 계획된 참호와 보호된 보급선을 활용하여 국민주의자들에게 막대한 피해(약 2만 명의 사상자)를 입히면서, 자신들은 비교적 적은 피해(5천 명의 사상자)만 입었다.[15][2][4] 국민주의자들의 공세는 발렌시아에서 40km도 채 안 되는 곳에서 멈췄다.[2][4]
7월 24일, 공화국은 북부에서 에브로 전투를 시작하여 8개 국민주의 사단과 중포를 끌어들여 더 이상의 공격을 방어선에서 막았다.[17]
4. 1. 국민파의 공세와 XYZ 방어선에서의 저지
XYZ 방어선은 스페인 레반테 지역의 하발람브레 산맥을 기점으로 하여 토로 산맥과 알메나라 고원을 거쳐 지중해안에까지 연결되어 공화파의 제2 수도였던 발렌시아를 수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9] 이 방어선은 빌바오의 철의 고리(Iron circle)나 마지노 선과는 다르게 스페인 동부의 복잡하고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간단한 참호선과 위장된 벙커들로만 이루어졌고 적의 공중 폭격이나 대규모 포격에도 최대한 버텨낼 수 있도록 처리되어 있었다.[9]
국민주의자들의 공세는 4월 25일에 호세 엔리케 바렐라 장군의 카스티야 군단, 안토니오 아란다의 갈리시아 군단, 그리고 가르시아 발리뇨의 부대로 시작되었지만, 4월 27일에 진격이 중단되었다.[9] 국민주의자들은 3월과 4월의 비가 오는 날씨로 인해 공세가 늦어져 어려움을 겪었다.[9] 5월 1일, 국민주의자들은 세 방향으로 공세를 이어갔다. 즉, 바렐라는 테루엘에서, 아란다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르시아 발리뇨는 그들 사이의 산악 지대를 통과하는 중앙 열을 이루어 진격했다. 마에스트라고의 험준한 지형은 공화국군을 도왔고, 그들은 강력한 방어 위치와 결의로 국민주의자들을 격퇴시켰다.[2] 공화국군은 프랑스에서 들여온 새로운 무기로 보강되었다. 4정의 기관총을 장착한 소련 ''수퍼모스카'' (I-16 10형), 40대의 그루먼 FF 전투기, 그리고 대공포였다.
6월 13일, 카스테욘 데 라 플라나는 며칠간의 전투 끝에 가르시아 발리뇨 군단에 함락되었지만, 사군토에서는 시에라 데 에스파단 산맥이 바다와 가까워지면서 진격이 멈췄다.[11] 카스테욘의 함락으로 국민주의자들은 이 전선에 있는 병력에게 탄약과 식량을 수송할 수 있는 지중해 항구를 확보했다.[12] 국민주의자들은 공화국군의 저항에 놀랐고, 알프레도 킨델란 장군은 프랑코에게 작전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독일 콘도르 군단은 지쳐서 결국 전선에서 철수했다.[5][6] 그럼에도 프랑코는 공격을 계속하여 7월 25일까지 발렌시아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6]
7월 초, 국민주의자들은 마리오 베르티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 자원군단 (CTV) 3개 사단[5]과 호세 솔차가 장군의 투리아 군단 4개 사단으로 전선을 강화했다.[6] 또한, 국민주의자들은 이 전선에 900문의 대포와 40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며,[5] 약 50대의 이탈리아 중형 폭격기 (BR.20, SM.79, SM.81)를 새로 받았다.[6] 국민주의자에 맞서, 공화국군은 레반테 군의 레오폴도 메넨데스 장군 휘하에 6개 군단 (팔라시오의 16군단, 가르시아 바예호의 17군단, 비달의 19군단, 듀란의 20군단 및 이바롤라의 22군단, 그리고 궤메스의 A그룹과 로메로의 B그룹)을 가지고 있었다.[13]
7월 5일, 가르시아 발리뇨는 카스테욘에서 공격을 감행했지만, 시에라 데 에스파다에서 듀란 대령과 메넨데스 장군이 이끄는 공화국군에 의해 저지되었다.[14] 국민주의자 공세의 마지막 공세는 7월 13일에 시작되었다. 서쪽에서는 솔차가 군단이 테루엘에서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바렐라 군단과 CTV가 동쪽 측면에 배치되었고, 가르시아 발리뇨 부대는 해안을 따라 진격을 시도했다.[15] 모라 데 루비엘로스와 사리온에서 결연한 저항이 있은 후, 시에라 델 토로의 공화국 방어선이 무너졌다. 국민주의자들은 그 후 비베르에서 시에라 데 에스파단까지 동서로 뻗어 있는 XYZ선 요새에 의해 저지될 때까지 97km 전선을 따라 32km 진격했다.[16]
4. 2. XYZ 방어선 전투 (7월 18일 ~ 23일)
XYZ 방어선은 스페인 레반테 지역의 하발람브레(Javalambre) 산맥을 기점으로 하여 토로(Toro) 산맥과 알메나라(Almenara) 고원을 거쳐 지중해안에까지 연결되어 공화파의 제2 수도였던 발렌시아를 수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 방어선은 빌바오의 철의 고리(Iron circle)나 마지노 선과는 다르게 스페인 동부의 복잡하고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간단한 참호선과 위장된 벙커들로만 이루어졌고, 적의 공중 폭격이나 대규모 포격에도 최대한 버텨낼 수 있도록 처리되어 있었다.[4]7월 18일부터 23일까지 에르네스토 구에메스 대령과 카를로스 로메로 대령이 이끄는 두 공화국 군단이 지키는 XYZ 방어선은 국민주의자들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공화국 진지는 위치가 좋고 참호가 잘 구축되어 국민주의자들에 비해 상당한 전술적 이점을 가졌다. 기관총 진지는 교차 사격을 위해 설치되어 공격을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많은 진지가 숨겨져 있어 탐지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포병이나 항공기가 폭격하기 어려웠다. 공화국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보병 공격과 격렬한 폭격이 사용되었지만, 방어군은 잘 계획된 참호와 보호된 보급선을 활용하여 국민주의자들에게 막대한 피해(약 2만 명의 사상자)를 입히면서, 자신들은 비교적 적은 피해(5천 명의 사상자)만 입었다.[15][2][4] 국민주의자들의 공세는 발렌시아에서 40km도 채 안 되는 곳에서 멈췄다.[2]
4. 3. 에브로 전투의 영향
XYZ 방어전은 과달라하라 전투보다 공화국에게 훨씬 더 큰 승리였다.[15] 국민군은 카스테욘 주를 점령했지만 발렌시아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4] 공화군은 재편성할 시간을 벌었고, 에브로 강을 건너 공격을 계획했다.[18] 카탈루냐의 공화군 부대는 3월에 재개된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통해 받은 무기로 재무장할 시간을 가졌다.[19]5. 결과 및 영향
XYZ 방어전은 과달라하라 전투보다 공화국에게 훨씬 더 큰 승리였다.[15] 국민군은 카스테욘 주를 점령했지만 발렌시아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4] 공화군은 재편성할 시간을 벌었고, 에브로 강을 건너 공격을 계획했다.[18] 게다가, 카탈루냐의 공화군 부대는 3월에 재개된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통해 받은 무기로 재무장할 시간을 가졌다.[19]
6. 평가
참조
[1]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2]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Reaction, Revolution & Revenge.
Harper Perennial
2006
[3]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1
[4]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1
[5]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1
[6]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7]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8]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55
[9]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10]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Reaction, Revolution & Revenge.
Harper Perennial
2006
[11]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1
[12]
웹사이트
'Time Magazine, June 20, 1938, Brazen Attack'
https://web.archive.[...]
[13]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14]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1
[15]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16]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1
[17]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18]
서적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Books
2006
[19]
서적
The Spanish Civil War. Reaction, Revolution & Revenge.
Harper Perennial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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