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노 도요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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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야노 도요토시는 기비씨의 후예로, 십삼경과 사서에 정통했던 인물이다. 그는 대책에 갑제로 급제하고, 황태자 아테 친왕(후의 헤이제이 천황)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종4위하 식부대보까지 올랐다. 후지와라노 약코의 권세에 침묵하고, 구스코의 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하리마노카미를 지냈다. 만년에 닌토쿠 천황의 지하 신하가 되기를 청했고, 65세에 사망하여 닌토쿠 천황릉 근처에 장례를 치르고 정4위하로 추증되었다. 그의 한시 작품은 료운슈에 13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오노노 미네모리 등 당대의 인물들이 그에게 질문할 정도로 학문적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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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노 도요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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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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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헤이안 시대 초기 |
출생 | 덴표쇼호(天平勝寶) 3년 (751년) |
사망 | 고닌(弘仁) 6년 6월 27일 (815년 8월 5일) |
관위 | 종4위하(從四位下)·하리마노 가미(播磨守), 증정4위하(贈正四位下) |
주군 | 간무 천황(桓武天皇)→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사가 천황(嵯峨天皇) |
씨족 | 가야노 아소미(賀陽朝臣) |
기타 정보 | |
개명 | 알려진 정보 없음 |
별명 | 알려진 정보 없음 |
시호 | 알려진 정보 없음 |
신호 | 알려진 정보 없음 |
계명 | 알려진 정보 없음 |
묘소 | 알려진 정보 없음 |
부모 | 알려진 정보 없음 |
형제 | 알려진 정보 없음 |
아내 | 알려진 정보 없음 |
자녀 | 알려진 정보 없음 |
특기 사항 | 알려진 정보 없음 |
2. 출신 가문
가야씨(賀陽氏)는 가야노 오미(賀陽臣) 또는 가야노 아소미(賀陽朝臣)라고도 불렸다. 기비씨의 후예이며, 가미쓰미치씨(上道氏)와 같은 계통의 씨족이다. 비추국 가야군(賀陽郡)을 본거지로 한 호족이었다. 가야 국조(加夜國造) 자리를 세습했던 가문이며, 가야군의 군사(賀陽郡司)나 기비쓰 신사의 신관(神官)도 세습했다.[11]
경서와 사서에 정통하여 관리 등용 시험인 대책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2] 문장박사를 거쳐 엔랴쿠 16년(797년)에는 동궁학사가 되어 훗날 헤이제이 천황이 되는 아테 친왕(安殿親王)을 가르쳤다.[2]
3. 경력
헤이제이 천황이 즉위한 후 종4위하 식부대보까지 승진하며 중용되었으나, 천황의 총애를 받은 후지와라노 구스코가 권력을 장악하고 인재를 배척하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침묵을 지켰다고 전해진다.[2] 헤이제이 천황이 양위하고 헤이조쿄로 거처를 옮겼을 때도 그를 따르지 않고 헤이안쿄에 남았으며,[2] 다이도 5년(810년) 약코의 변이 일어난 후 식부대보 관직에서 물러났다.[2]
이후 그의 재능을 아낀 사가 천황에 의해 하리마노카미로 임명되었으나, 고닌 4년(813년) 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우지의 별장에서 여생을 보냈다.[2] 고닌 6년(815년) 향년 65세로 사망하였으며, 사가 천황은 닌토쿠 천황릉 근처에 묻히도록 허락하고 정4위하의 관등을 추증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2]
그는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도 인정받아, 칙찬 한시집인 《료운슈》 편찬에 참여하였으며[4], 《료운슈》와 《게이코쿠슈》에 다수의 한시 작품을 남겼다.[5]
3. 1. 학문적 성취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정통하였으며, 관리 등용 시험인 대책(對策)에 갑제(甲第)로 급제하였다.[12][2] 이시카미노 야쿠시에 의해 게이테이에 초청받아 배우며 수년에 걸쳐 많은 서적을 폭넓게 연구했다. 그의 글재주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높던 석도융(釋道融)이나 단카이노 미후네(淡海三船)조차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받았다.[12][2]
문장박사를 지냈으며,[2] 칙찬 한시집인 『료운슈』(凌雲集) 편찬 과정에서는 오노노 미네모리 등이 "당대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에게 자문하기도 했다.[4] 『료운슈』에는 그의 한시 작품 13수가 실렸는데, 이는 사가 천황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5] 또한 다른 칙찬 한시집인 『게이코쿠슈』(経国集)에도 그의 시 5수가 수록되어 있다.
3. 2. 관직 생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정통하였으며, 관리 등용 시험인 대책(對策)에 우수한 성적(갑제, 甲第)으로 합격하였다. 이시카미노 야쿠시에게 발탁되어 그의 학당인 운테이(芸亭)에서 배우며 수년간 다양한 서적을 폭넓게 연구했다. 그의 글재주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높던 석도융(釋道融)이나 단카이노 미후네(淡海三船)조차 따르기 어렵다는 평을 들었다.[2]
문장박사를 거쳐 엔랴쿠 16년(797년)에는 동궁학사가 되어 당시 황태자였던 아테 친왕(安殿親王, 훗날의 헤이제이 천황)을 가르쳤다. 이때 그의 위계는 외종5위하였다. 헤이제이 천황이 즉위한 후에는 중용되어 종4위하 관등과 식부대보(式部大輔)의 직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천황의 총애를 등에 업은 후지와라노 약코(藤原藥子)가 권력을 휘두르며 유능한 인재들을 배척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며 침묵을 지켰다고 전해진다.[2] 이후 헤이제이 천황이 상황으로 물러나 다이도(大同) 4년 12월(810년 1월)에 헤이조쿄(平城京)로 거처를 옮겼을 때에도, 그는 상황을 따르지 않고 수도인 헤이안쿄(平安京)에 남았다.[2] 다이도 5년(810년) 9월에 약코의 변(藥子の變)이 일어났을 때 직접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았으나, 사건 이후 식부대보 관직에서 물러났다.[2]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재능을 아낀 사가 천황(嵯峨天皇)의 부름을 받아 하리마노카미(播磨守)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고닌(弘仁) 4년(813년)에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우지(宇治)에 있는 별장에서 여생을 보냈다.[2]
우지에서 병상에 있을 때, 그 지역 노인에게서 닌토쿠 천황(仁德天皇)과 그의 동생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가 아버지 오진 천황(應神天皇) 사후 서로에게 황위를 양보했다는 미담을 듣고 깊이 감동하였다. 그는 좌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소닌(藤原園人)에게 청하여 자신을 닌토쿠 천황의 "지하지신(地下之臣, 저승의 신하)"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했다.[2] 이는 당시 헤이제이 상황과 사가 천황 사이의 대립을 닌토쿠 형제의 고사에 빗대어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3]
고닌(弘仁) 6년(815년) 6월 27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65세였다. 최종 관위는 하리마노카미 종4위하였다.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사가 천황은 닌토쿠 천황릉(仁德天皇陵)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고, 정4위하의 관등을 추증(贈位)하며 국화(國華, 나라의 명예)로서 높이 기렸다.[2]
한편, 그는 문인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본 최초의 칙찬 한시집인 《료운슈(凌雲集)》 편찬 당시 오노노 미네모리(小野岑守) 등 편찬자들이 "당대의 뛰어난 재능"이라 칭하며 그에게 자문했다고 한다.[4] 《료운슈》에는 그의 한시 작품이 오노노 미네모리와 같은 13수가 실려 있는데,[5] 이는 사가 천황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또한 《게이코쿠슈(經國集)》에도 그의 작품 5수가 수록되어 있다.
3. 3. 구스코의 변과 그 이후
헤이제이 조(平城朝)에서는 중용되어 종4위하(從四位下)·식부대보(式部大輔)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천황의 총애를 등에 업은 후지와라노 약코(藤原藥子)가 권세를 휘두르며 우수한 인재들이 배척받는 상황에서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상황의 추이에 몸을 맡기며 침묵을 지켰다고 전해진다.[2] 이후 헤이제이 천황이 양위하고 다이도(大同) 4년 12월(810년 1월) 헤이조쿄(平城京)로 거처를 옮겼을 때도, 도요토시는 따라가지 않고 헤이안쿄(平安京)에 남았다.[2]
다이도(大同) 5년(810년) 9월에 일어난 구스코의 변(藥子の變)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 이후 식부대보 관직에서 물러났다.[2]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재능을 아낀 사가 천황(嵯峨天皇)의 부름으로 하리마노카미(播磨守)로 임명되었다.[2] 하지만 고닌(弘仁) 4년(813년) 병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 이후 우지(宇治)의 별장에서 여생을 보냈다.[2]
우지에서 병상에 있을 때, 그 지역 노인에게서 닌토쿠 천황(仁德天皇)과 그의 동생 우지노와키이라쓰코(菟道稚郎子)가 아버지 오진 천황(應神天皇) 사후 서로에게 황위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동하였다.[2] 이에 좌대신 후지와라노 소닌(藤原園人)에게 청하여 자신을 닌토쿠 천황의 "지하(地下)의 신하", 즉 저승에서의 신하로 삼아달라고 하였다.[2] 이는 헤이제이 상황과 사가 천황 사이의 대립을 이 고사에 비추어 생각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3]
고닌(弘仁) 6년(815년) 6월 27일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종 관위는 하리마노카미(播磨守) 종사위하(從四位下)였다. 사가 천황은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닌토쿠 천황릉(仁德天皇陵) 근처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고, 정4위하(正四位下)의 증위(贈位)를 내려 국화(國華, 국가의 명예)로서 존경을 표했다.[2]
4. 만년과 죽음
다이도 5년(810년) 9월에 발생한 약코의 변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변 이후 식부대보의 관직을 사임했다[2]。곧 재능을 아낀 사가 천황의 요청으로 하리마노카미에 임명되었으나, 고닌 4년(813년) 병으로 인해 사임하고 이후 우지의 별장에서 여생을 보냈다[2]。
우지에서 병석에 누워 있던 중, 현지의 원로로부터 닌토쿠 천황과 그의 동생 우지노와키이라츠코가 아버지 오진 천황 사후 서로 황위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동하였다. 그는 좌대신 후지와라노 소닌에게 청하여 닌토쿠 천황의 "지하(地下, 저승)의 신하(臣)"가 되기를 원했다[2]。이는 헤이제이 상황과 사가 천황 사이의 대립이었던 약코의 변을 이 고사에 비추어 생각한 행동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3]。
고닌 6년(815년) 6월 27일 졸거(卒去)하였다. 향년 65세였다. 최종 관위는 하리마노카미 종4위하였다[2]。그의 죽음에 사가 천황은 정4위하의 위계를 추증하고 국화(國華, 나라의 명예)로서 숭앙하였으며[2], 《일본후기》에 따르면 도요토시의 소원대로 칙명(勅旨)에 의해 "능하(陵下)"에 매장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한다[6]。
일반적으로 '능(陵)'은 천황릉을, '묘(墓)'는 황족의 무덤을 가리키므로, 여기서 '능'은 닌토쿠 천황릉으로 해석된다[6]。하지만 문맥상 우지노와키이라츠코의 무덤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7][8]。메이지 22년(1889년), 궁내성(현재의 궁내청)이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마루야마 고분(丸山古墳)을 우지노와키이라츠코의 무덤(宇治墓)으로 지정할 때, 후자의 해석에 따라 당시 '우키후네(浮舟)의 고적(古跡)'으로 불리던 작은 토분(塚)을 가야노 도요토시의 무덤으로 보고, 우지묘(宇治墓)의 '이(い)'호 배총(陪塚)으로 지정하여 현재 "전 가야노 도요토시 묘(傳 賀陽豊年墓)"로 불리고 있다[9][7][10]。
5. 무덤
가야노 도요토시의 임종 무렵 일화는 《일본후기》 고닌(弘仁) 6년(815년) 6월 27일 기록에 남아있다. 이에 따르면, 도요토시는 병으로 교토부 우지의 별장에 머물던 중, 닌토쿠 천황과 그의 동생 우지노 와키이라츠코가 서로에게 황위를 양보했다는 미담을 듣고 깊이 감동했다. 그는 죽어서 "지하의 신하(地下之臣)"가 되기를 소망했고, 천황의 특별한 허가(칙지, 勅旨)를 받아 "능 아래(陵下)"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6]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능(陵)'은 천황의 무덤을, '묘(墓)'는 황족의 무덤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능'은 닌토쿠 천황의 능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6] 하지만 문맥상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묘를 가리킨다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7][8]
메이지 22년(1889년), 궁내성(현재의 궁내청)은 교토부 우지시에 있는 마루야마 고분(丸山古墳)을 우지노 와키이라츠코의 묘(우지 묘, 宇治墓)로 공식 지정했다. 이때 우지노 와키이라츠코 묘 설에 근거하여, 당시 '우키후네(浮舟)의 옛터'로 불리던 작은 흙무덤이 가야노 도요토시의 무덤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후 이 무덤은 우지 묘의 '이'(い)호 배총(陪冢, 딸린무덤)으로 지정되어 현재 '전 가야노 도요토시 묘(傳賀陽豊年墓)'로 불리고 있다.[9][7][10]
6. 인물
도요토시는 굳건한 신념으로 신의를 지키며,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또한 지기(知己) 이외의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높은 신분을 싫어했다. 어느 날 친구인 오노 나가미를 방문했을 때에는 "공(公)"이라는 글자를 써 "백안대삼공(白眼対三公)"(멸시하는 눈으로 대신을 대한다)이라는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천작(天爵: 타고난 덕)은 넘치지만 인작(人爵: 벼슬)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12][2]
7. 관직력
《일본후기》에 따른다.
연도 | 날짜 (연호) | 관직/위계 |
---|---|---|
시기 미상 | 시기 미상 | 외종5위하 (外從五位下), 문장박사 (文章博士) |
797년 | 엔랴쿠 16년 2월 9일 | 겸 동궁학사 (東宮學士) |
시기 미상 | 시기 미상 | 종5위하 (從五位下) |
806년 | 엔랴쿠 25년 4월 18일 | 겸 음양두 (陰陽頭) |
시기 미상 | 시기 미상 | 종4위하 (從四位下), 식부대보 (式部大輔) |
808년 | 다이도 3년 5월 14일 | 겸 시모쓰케노카미 (下野守) |
810년 | 다이도 5년 9월 16일 | 하리마노카미 (播磨守) |
815년 | 고닌 6년 6월 27일 | 졸거 (하리마노카미 종4위하), 증 정4위하 (贈 正四位下) |
참조
[1]
서적
佐伯[1994: 167]
[2]
서적
日本後紀』弘仁6年6月27日条
[3]
서적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4]
서적
『凌雲集』序
[5]
문서
[6]
서적
『日本後紀 中 全現代語訳(講談社学術文庫1788)』
講談社
2006
[7]
서적
石田茂輔「宇治墓」(「菟道稚郎子皇子」項目内)『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8]
서적
佐藤宗諄「賀陽豊年」『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小学館
[9]
서적
『宮内庁書陵部陵墓地形図集成』
学生社
1999
[10]
서적
『陵墓地形図集成 縮小版』
宮内庁書陵部陵墓課編、学生社
2014
[11]
서적
사에키(佐伯)[1994: p.167]
[12]
서적
《일본후기(日本後紀)》 고닌(弘仁) 6년 6원 27일 조.
[13]
서적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14]
서적
『日本後紀 中 全現代語訳 (講談社学術文庫1788)』
고단샤(講談社)
2006
[15]
서적
石田茂輔 「宇治墓」(「菟道稚郎子皇子」항목내)『국사 대사전(国史大辞典)』
요시카와 홍문관(吉川弘文館)
[16]
서적
佐藤宗諄 「賀陽豊年」『일본 대백과 사전 (Nipponica)(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쇼가쿠칸(小学館)
[17]
서적
『궁내청 서릉부 능묘 지형도 집성(宮内庁書陵部陵墓地形図集成)』
学生社
1999
[18]
서적
능묘 지형도 집성 축소판(陵墓地形図集成 縮小版)
궁내청 서릉부 능묘과(宮内庁書陵部陵墓課) 편, 学生社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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