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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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안쿄는 794년 일본의 간무 천황에 의해 건설되어 1869년까지 존재했던 고대 일본의 수도이다. 중국 당나라의 장안을 본떠 건설되었으며,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형태를 갖추었다. 헤이안쿄는 간무 천황이 덴무 천황 세력을 지지하는 사찰과 귀족들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가오카쿄에서 천도하면서 건설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도시 구조는 바둑판 형태의 도로망과 주요 시설들로 구성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의 규모가 확장되고 쇠퇴하는 과정을 겪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수도의 지위를 잃었지만, 현재까지도 교토는 일본의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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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무 천황은 781년부터 806년까지 재위하며 수도를 두 번 옮기고 에미시 정벌을 단행했으며, 적극적인 정치 개혁과 불교 발전을 도왔고,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어머니를 두었으며, 3명의 천황을 배출했다.
헤이안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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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헤이안쿄 |
한자 표기 | 平安京 |
로마자 표기 | Heian-kyō |
별칭 | 다이안나이리 (大内裏) |
의미 | 평화롭고 평온한 수도 |
역사 | |
건설 | 794년 |
수도 이전 | 나가오카쿄에서 이전 후쿠하라쿄로 잠시 이전 (일시적) |
수도 역할 | 일본 수도 (794년 ~ 1868년) |
현재 도시 | 교토시 |
건축 및 구조 | |
위치 | 현재의 교토 |
계획 도시 | 격자형 도시 계획 |
특징 | 중국식 도시 계획 모방 궁궐 및 주요 관청 위치 |
문화적 중요성 | |
중요성 | 헤이안 시대의 정치, 문화 중심지 |
영향 | 일본 역사 및 문화에 큰 영향 |
기타 정보 | |
참고자료 | Archaeology of East Asia: the Rise of Civilisation in China, Korea and Japan 교토시 가미교구청: 가미교구의 성립 史料 京都の歴史 第4巻 市街・生業 (교토시, 1980)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John Whitney Hall, 1988) Pre-modern East Asia, to 1800 :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Patricia Ebrey, Anne Walthall, 2014) |
2. 명칭
보통 음독으로 '헤이안쿄'라고 읽지만, 간혹 '타이라노미야코'라고 훈독되기도 했다. 본래 도읍지의 이름은 그 지명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카도노쿄(葛野京)가 되어야 했지만, 후지와라의 도읍지를 '아라마스노미야코(新益京)'라고 불렀던 것처럼 본래의 명명 방법을 따르지 않고 '헤이안쿄(平安京)'라고 명명되었다. 나가오카쿄(長岡京)에서의 소동으로 천도(遷都)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읍에서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고 편안한 도읍", "평안(平安)"(훈독은 "타이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헤이안 시대의 한시 문장에는 문학적인 우아한 명칭으로 "낙양(洛陽)", "장안(長安)"이라고 부르는 예가 보인다. 이 "낙양(洛陽)"에서 후에 "라쿠츄(洛中)", "입락(入洛)", "죠라쿠(上洛)" 등의 말이 생겨났다.
3. 역사
간무 천황은 784년 헤이조쿄에서 나가오카쿄로 천도했지만,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16] 793년, 와케노키요마로의 건의에 따라 재천도를 선언하고, 야마시로국 북부의 가도노와 오타기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했다.
794년 10월 22일, 간무 천황은 새로운 도읍지에 도착했고, 11월 8일에 "이 도시의 이름을 헤이안쿄로 정한다"고 선포했다.[15] 헤이안쿄는 현재의 교토시 중심부에 해당하며,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도시의 배치는 헤이조쿄를 본땄으며,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헤이안 궁)을 두고, 그 아래로 주요 도로인 스자쿠 대로(주작대로)를 배치했다.
헤이안쿄 건설은 궁궐부터 시작되었으며, 요도, 오이쓰 등의 항구가 도시 옆 강가에 설치되어 전국에서 물품을 수집하는 중계 기지 역할을 했다. 헤이안쿄에 도착한 물품은 동시장과 서시장이라는 두 개의 대형 시장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나가오카쿄 주민들을 괴롭혔던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자연 하천이 없는 대신 인공 운하(현재의 호리카와와 니시호리카와) 두 개를 만들어 물 공급을 확보하고 홍수를 방지했다.[9] 이전 수도인 나가오카쿄와 마찬가지로 헤이안쿄에서도 동쪽과 서쪽 사찰을 제외하고는 불교 사찰 건설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후 장안성에 비교되던 우쿄구는 가쓰라 강이 형성한 습지와 겹쳐 개발이 더디었고, 10세기에 율령 제도가 쇠퇴하면서 농지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반면 낙양성에 비교되던 사쿄구는 귀족들의 거주지로 발전하면서, '낙양'이라는 호칭이 헤이안쿄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후 교토는 '경락(京洛)'이라 불리며 '상락(上洛)'이라 불리게 되었다.[29] 빈민들은 도시 동쪽 경계 너머 가모 강가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980년에는 라조몬(나성문)이 무너져 재건되지 않으면서 도시가 동쪽으로 확장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가마쿠라 막부와 에도 막부의 출현과 함께 헤이안쿄는 권력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는 오닌의 난으로 도시의 거의 절반이 불타 버리는 등 큰 쇠퇴를 겪었고, 상경(上)과 하경(下)으로 나뉘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재통합되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가 도쿄로 개칭되면서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하지만 메이지 천황의 지시에 따라 황궁은 보존되었고, 천황의 자리를 표시했던 高御座|다카미쿠라일본어는 교토 어소에 남아 있다.[25]
3. 1. 건설 배경
간무 천황은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며 792년(엔랴쿠 11년) 1월과 5월에 사냥을 명목으로 후보지였던 산세국 가즈노군 우타무라를 방문했다.[16] 이듬해인 793년(엔랴쿠 12년)에는 후지와라노 코구로마로와 키 코사미 등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확인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이곳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되어 신도시 건설 계획과 천도 계획이 시행되었고, 동시에 나가오카쿄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당시 헤이안쿄는 산세국의 가즈노와 아이타쿠 두 군에 걸쳐 있는 지역(현재의 교토시 중심부)에 건설되었다. 헤이안쿄는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계획되었다.
헤이안쿄의 도시 배치는 기본적으로 중국 수·당의 낙양성이나 장안성을 본보기로 하였고, 장안을 본뜬 일본의 헤이조쿄·나가오카쿄를 계승한 것이었다. 도시 전체는 정사각형으로 좌우 대칭이며, 도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직교하도록 설계되었다. 시가지 중앙에는 주작대로를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고, 정치의 중심이 되는 대내리는 주작대로 북쪽, 도읍의 북쪽 변에 설치되었다("북궐형"). 주작대로에 의해 나뉜 경역의 동쪽과 서쪽을 각각 좌경·우경이라고 불렀다("좌·우"는 내리에서 바라본 좌우이다). 또한 후에는 대내리 남쪽을 동서로 달리는 이조대로의 북쪽을 "상변"(上辺), 남쪽을 "하변"(下辺), 그리고 "상경"(上京), 남쪽을 "하경"(下京)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지형과 맞물려 현대 교토에서 북쪽으로 가는 것을 "상루"(上ル), 남쪽으로 가는 것을 "하루"(下ル)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지역의 선정은 중국에서 전래된 음양도(풍수)에 기반한 사신상응 사상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다. 이 사신이란 북쪽·현무, 동쪽·청룡, 서쪽·백호, 남쪽·주작의 영수를 말하는데, 선지를 정할 때 이것을 "산", "강", "길", "늪"에 대입하여 각각을 후나오카야마, 가모가와, 산인도, 오구라 이케와 같은 구체적인 지물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정설이 되고 있지만, 현재는 부정하는 연구자도 적지 않다. 헤이안쿄가 헤이조쿄와 달리 사신상응의 땅으로 지어진 것이 불명확하고, 사신을 산, 강, 길, 늪으로 하는 것은 주택의 풍수에서 볼 수 있는 생각으로, 원래 도시의 풍수로서 점지를 해야 할 도읍의 사신과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헤이안쿄의 범위는 현대 교토 시가지보다 작고, 북쪽 끝의 일조대로는 현재의 이마데가와도리와 마루타마치도리의 중간에 있는 일조도리, 남쪽 끝의 구조대로는 현재의 JR교토역 남쪽, 동사의 남쪽을 통과하는 구조도리, 동쪽 끝의 동경극대로는 현재의 데라마치도리에 해당한다. 서쪽 끝의 서경극대로의 추정지는 JR사가노선화원역이나 한큐교토선서경극역을 남북으로 잇는 선이다.
경내는 동서남북으로 달리는 대로·소로에 의해 40장(약 120미터) 사방의 "마치"로 나뉘어 있었다.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있는 마치를 4열 모은 것(북쪽 변의 2열은 제외)을 "조", 남북 방향의 열을 4개 모은 것을 "방"이라고 부르고, 같은 조·방에 속하는 16개의 마치에는 각각 번호가 붙여져 있었다(조방제). 이에 따라 각 마치는 "우경오조삼방십사정"과 같이 불렸다.
도로의 폭은 소로에서도 4장(약 12미터), 대로에서는 8장(약 24미터) 이상이었다. 주작대로는 28장(약 84미터)의 폭이었다.[30]
3. 2. 헤이안쿄 건설
간무 천황은 792년(엔랴쿠 11년) 1월과 5월에 사냥을 명목으로 야마시로 국 오타기와 가도노 지역을 찾았다. 이듬해인 793년(엔랴쿠 12년)에는 후지와라노 오구로마로와 좌대변인 키노코사미 등을 파견해 이 지역을 다시 확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이곳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되어, 신도시 건설 계획과 천도 계획이 시행되었고, 동시에 나가오카쿄의 철거가 시작되었다.[16]
당시의 헤이안쿄는 야마시로국의 가도노군과 오타기군에 걸쳐 있었으며, 현재 교토시 중심부에 해당한다. 헤이안쿄는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도시 배치는 헤이조쿄를 본땄으며,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헤이안 궁)이 있었다. 황궁 아래로는 주요 도로인 스자쿠 대로(주작대로)가 뻗어 있었고, 헤이안쿄 동쪽에는 우쿄, 서쪽에는 사쿄가 위치했다.
그러나 이후 장안성에 비교되던 우쿄가 쇠퇴하고 낙양성에 비교되던 사쿄가 발전하면서, '낙양'이라는 호칭이 헤이안쿄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후 교토가 '경락(京洛)'이라 불리며 '상락(上洛)'이라 불리게 되었다.[29]
경내는 동서남북으로 뻗은 대로와 소로에 의해 40장(약 120미터) 사방의 정(町)으로 구획되었다. 동서 방향으로 늘어선 정을 4열씩 모은 것(북변의 2열은 제외)을 조(条), 남북 방향의 정을 4열씩 모은 것을 방(坊)이라고 불렀으며, 같은 조·방에 속하는 16개 마을에는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이를 조방제라고 한다. 이에 따라 각 마을은 '우쿄오조삼방십사정(右京五条三坊十四町)' 따위의 고유 주소를 갖게 되었다.
길폭은 소로도 4장(약 12미터)이었고, 대로는 8장(약 24미터) 이상이었다. 주작대로는 폭이 28장(약 84미터)이었다.[30]
헤이안쿄 건설은 궁궐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도시의 나머지 부분이 건설되었다. 천황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궁궐 중심 건물인 대극전은 주작대로 북쪽 끝에 건설되어 도시 어디에서든 보이도록 했다. 요도, 오이쓰 등의 항구가 도시 옆 강가에 설립되어 전국에서 물건을 수집하여 도시로 보내는 중계 기지 역할을 했다. 헤이안쿄에 도착한 물품들은 동시장과 서시장 두 개의 대형 시장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체계는 안정적인 식량 및 물품 공급을 제공하여 인구 증가를 촉진했다. 또한 나가오카쿄 주민들을 괴롭혔던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도 취해졌다. 헤이안쿄 중앙에는 자연 하천이 없었지만,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인공 운하(현재의 호리카와와 니시호리카와) 두 개를 만들어 물 공급을 확보하고 홍수를 방지했다.[9] 이전 수도인 나가오카쿄와 마찬가지로 헤이안쿄에서는 동쪽과 서쪽 사찰을 제외하고는 불교 사찰 건설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쿠카이와 같은 승려들은 불교 경전에 정통하고 정치적 권력에 관심이 없는 유능한 인물이었기에 환영받았다.
794년 10월 22일, 간무 천황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고 11월 8일 "이 도시의 이름을 헤이안쿄로 정한다"고 선포했다.
3. 3. 헤이안쿄의 발전과 쇠퇴
간무 천황은 784년 헤이조쿄에서 나가오카쿄로 천도했지만, 793년 다시 천도를 선포하고 새로운 도읍지로 야마시로국의 가도노와 오타기를 선택했다. 794년 10월 22일, 간무 천황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고 11월 8일 "이 도시의 이름을 헤이안쿄로 정한다"고 선포했다. 헤이안쿄는 현재 교토시 중심부에 해당하며,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도시 배치는 헤이조쿄를 본땄으며,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헤이안궁)가 있었고, 주요 도로인 스자쿠 오지(주작대로)가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헤이안쿄 건설은 궁궐부터 시작되었고, 요도와 오이쓰 등의 항구가 도시 옆 강가에 설립되어 전국에서 물품을 수집하는 중계 기지 역할을 했다. 동시장과 서시장 두 개의 대형 시장을 통해 물품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인공 운하 두 개를 만들어 물 공급을 확보했다.
헤이안쿄는 동쪽의 사쿄구가 발전하고 서쪽의 우쿄구가 쇠퇴하면서 '낙양'이라는 호칭이 헤이안쿄의 대명사가 되었다. 10세기에 율령 제도가 쇠퇴하면서 우쿄 지역은 황폐해져 농지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귀족들은 사쿄 지역에 모여 살았다. 빈민들은 도시 동쪽 경계 너머 가모 강가에 정착하면서 도시가 동쪽으로 확장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980년에는 라조몬(나성문)이 무너져 재건되지 않았고, 헤이안쿄의 원래 경계는 동쪽으로 확장되어 중세 초기와 현대 교토의 거리를 형성했다.
가마쿠라 막부와 에도 막부의 출현으로 헤이안쿄는 권력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는 오닌의 난으로 도시의 절반이 불타는 등 쇠퇴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으로 재통합되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가 도쿄로 개칭되면서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하지만 황궁은 보존되었고, 천황의 자리를 표시했던 高御座|다카미쿠라일본어는 교토 궁궐에 남아 있다.
3. 4.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가 간토를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헤이안쿄는 권력의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는 오닌의 난으로 도시의 거의 절반이 불타는 등 큰 쇠퇴를 겪었다. 그 후 헤이안쿄는 상경(上)과 하경(下)으로 나뉘어 그 중요성이 더욱 낮아졌다.
3. 5. 아즈치모모야마, 에도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오다 노부나가는 상경(上京)과 하경(下京)으로 나뉘어져 있던 헤이안쿄를 재통합하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는 도쿄로 개칭되어 일본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헤이안쿄는 수도의 지위를 잃었지만, 천황이 도쿄에 있는 동안 예비 수도가 되었다. 그 이후로 천황은 교토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메이지 천황의 지시에 따라 황궁은 보존되었고, 전통적으로 천황의 자리를 표시했던 다카미쿠라(高御座)는 교토 어소에 남아 있다.[25]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나이리 터인 우치노에 정청인 주라쿠다이를 설치하고, 또 교토를 둘러싸는 연장 20km 이상의 오도이를 건설하였다. 히데요시는 간파쿠위를 조카 히데쓰구에게 양위하고 후시미의 시게쓰키에 은거하였다. 곧 히데쓰구가 실각하고 주라쿠다이가 파괴되고 히데요시가 후시미성을 건설하자, 정치의 중심은 교토에서 완전히 후시미로 옮겨지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후시미성에 입성하여 후시미성에서 정이대장군 선하를 받았다. 이에야스는 니조성을 건설하였지만, 이것은 정청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의례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교토가 수도로 복귀하는 일은 없었고, 이후 3대 도쿠가와 이에미쓰까지 후시미성에서 쇼군 선하식을 거행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국정의 중심지는 에도, 상업의 중심지는 오사카로 옮겨졌지만, 교토에는 에도 막부의 기관인 교토쇼시다이가 설치되어 조정과의 교섭과 교토 시정을 담당하였다. 각 번도 번저를 두고 조정 및 각 번 간의 외교를 수행했기 때문에 교토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막부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아 예를 들어 세이코쿠 다이묘가 산킨코타이할 때 교토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막말에는 교토에서의 정정 불안을 고려하여 교토 수호직을 새로 설치하여 지배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3. 6.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가 도쿄로 이름이 바뀌고 일본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헤이안쿄는 수도 지위를 잃었지만, 천황이 도쿄에 머무는 동안 예비 수도가 되었다. 그 후 천황은 교토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의 지시에 따라 황궁은 보존되었고, 전통적으로 천황의 자리를 나타내는 高御座|다카미쿠라일본어는 교토 어소에 남아 있다.[15]
4. 도시 구조
헤이안쿄는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현재 교토시 중심부에 해당한다. 헤이죠쿄를 본떠 도시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가 있었고, 황궁 아래로 주작대로가 뻗어 있었다. 헤이안쿄는 주작대로를 기준으로 동쪽의 사쿄구(좌경)과 서쪽의 우쿄구(우경)으로 나뉜다.
경내는 동서남북으로 뻗은 대로와 소로에 의해 40장(약 120m) 사방의 정(町)으로 구획되었다. 동서 방향으로 늘어선 정을 4열씩 모은 것을 조(条), 남북 방향의 정을 4열씩 모은 것을 방(坊)이라고 불렀다. 같은 조·방에 속하는 16개 마을에는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이를 조방제라고 한다. 각 마을은 '우쿄오조삼방십사정(右京五条三坊十四町)'과 같은 고유 주소를 갖게 되었다.
도로의 폭은 소로가 4장(약 12m), 대로는 8장(약 24m) 이상이었다. 주작대로는 28장(약 84m)의 폭이었다.[30] 호리카와 옆으로 강이 흘렀다.
4. 1. 개요

헤이안쿄(平安京)는 현재 교토시 중심부에 위치하며, 야마시로국의 가도노군(葛野郡)과 오타기군(愛宕郡)에 걸쳐 있었다.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도시 배치는 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헤이죠쿄(平城京)를 본땄으며, 황궁인 다이다이리(大内裏)가 도시 북쪽 경계 중앙에 위치하고, (朱雀大路)가 황궁에서 도시 중앙을 가로질러 뻗어 있었다. 이 대로는 도시를 우쿄구(右京)과 사쿄구(左京)으로 나누었는데, 황제의 시각에서 동쪽이 좌경, 서쪽이 우경이었다. 설계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장안을 본떴으나, 헤이안쿄에는 성곽이 없었다.
헤이안쿄의 경계는 현대 교토보다 작았다. 북쪽 경계는 一条大路|이치조오지일본어로, 현재의 一条通|이치조도리일본어에 해당하며, 今出川通|이마데가와도리일본어(이마데가와 거리)와 丸太町通|마루타마치도리일본어(마루타마치 거리) 사이에 위치한다. 남쪽 경계는 九条大路|구조오지일본어로, 현재 JR 교토역 남쪽의 九条通|구조도리일본어에 약간 못 미치는 곳에 위치한다. 동쪽 경계는 東京極大路|히가시쿄고쿠오지일본어로, 현재의 寺町通|테라마치도리일본어(테라마치 거리)에 해당한다. 서쪽 경계인 西京極大路|니시쿄고쿠오지일본어의 위치는 JR 산인 본선 하나조노역에서 한큐 교토 선 니시쿄고쿠 역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추정된다.
헤이안쿄는 정방형 도시로서 풍수 원리에 따라 계획되었다. 丈|조|4=약 3.03m일본어가 기본 측정 단위였다. 40평방 조(丈)가 町|초|4=각 변 121.2미터일본어를 이루었다. 도시는 大路|오지일본어라 불리는 주요 도로와 小路|코지일본어라 불리는 소로로 더 세분되었다. 동서로 이어지는 4줄의 초(町)(북쪽의 처음 2열 제외)를 합쳐 条|조일본어라 불렀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4줄의 초(町)를 坊|보일본어라 불렀다. 같은 조(条)와 보(坊)를 공유하는 초(町)에는 1부터 16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경 5조 2방 14초"(右京五条二坊十四町일본어) 와 같이 주소를 식별할 수 있었다.
소로의 너비는 4조(丈)(丈|조|4=약 12m일본어)였고, 주요 도로는 8조(丈)(丈|조|4=약 24m일본어)가 넘었다. (朱雀大路)는 28조(丈)(丈|조|4=약 84m일본어)의 너비였다. 또한 堀川小路|호리카와코지일본어(호리카와(교토))와 Nishi Horikawa-koji|니시호리카와코지일본어 옆으로 강이 흘렀다.
4. 2. 도로와 구획
헤이안쿄는 동서 4.5km, 남북 5.2k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현재 교토시 중심부에 해당한다. 헤이조쿄를 본떠 도시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가 있었고, 황궁 아래로 주작대로가 뻗어 있었다. 헤이안쿄 동쪽에 우쿄구, 서쪽에 사쿄구가 위치했다.경내는 동서남북으로 뻗은 대로와 소로에 의해 40장(약 120m) 사방의 정(町)으로 구획되었다. 동서 방향으로 늘어선 정을 4열씩 모은 것을 조(条), 남북 방향의 정을 4열씩 모은 것을 방(坊)이라고 불렀다. 같은 조·방에 속하는 16개 마을에는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이를 조방제라고 한다. 각 마을은 '우쿄오조삼방십사정(右京五条三坊十四町)'과 같은 고유 주소를 갖게 되었다.
길폭은 소로가 4장(약 12m), 대로는 8장(약 24m) 이상이었다. 주작대로는 28장(약 84m)의 폭이었다.[30] 호리카와 옆으로 강이 흘렀다.
4. 3. 주요 시설
헤이안쿄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시설이 있었다.
- 시장: (朱雀大路)를 기준으로 동쪽에 동시(東市), 서쪽에 서시(西市)라는 두 개의 큰 시장이 7번째 거리인 칠조오지(七条大路, Shichijō-ōji)에 마주보고 있었다.
- 사찰: 도시 남쪽 가장자리에는 동사(東寺, Tō-ji, "East Temple")와 서사(西寺, Sai-ji, "West Temple")라는 두 개의 큰 불교 사찰이 있었다.
- 황실 정원: 다이다이리(大内裏)에 신센엔(神泉苑, Shinsenen)이라는 황실 정원이 인접해 있었다.


- '''평안궁(平安宮)''': 헤이안쿄 북부 중앙에 위치한 궁궐 시설군으로, 천황이 거주하고 정무를 보는 곳이었다. 대내리(大内裏)라고도 불렸다.
- 내리(内裏): 천황의 거처.
- 팔성원(조당원(朝堂院)): 즉위식 등 국가 행사를 거행하는 곳. 팔성원의 정전은 대극전이었다.
- 풍락원(豊楽院): 대규모 연회가 열렸던 곳.
- 중화원(中和院): 신사(神事)를 지내는 곳.
- 진언원(真言院): 불교 의식과 관련된 곳.
- 이관팔성(二官八省)의 정청(政庁), 위부(衛府) 등
헤이안쿄가 쇠퇴하면서 대내리의 건물들은 태정관청 등 네 개의 건물만 남기고 황폐해졌으며, 이후 이들마저 붕괴되어 대내리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새로운 내리인 교토고쇼가 건설되면서 이를 평안궁이라 칭하기도 했다.
4. 4. 헤이안궁의 문
쪽 (방향) | 문 이름 | 거리 이름 |
---|---|---|
남쪽 (동에서 서) | 비복문(Bifuku-mon) 美福門 | 미부(Mibu) |
주작문(Suzaku-mon) 朱雀門 | 주작대로(Suzaku-ōji) | |
황가문(Kōga-mon) 皇嘉門 | 황가문대로(Kōgamon-ōji) | |
서쪽 (남에서 북) | 담천문(Datten-mon) 談天門 | 오이미카도(Ōimikado) |
조벽문(Sōheki-mon) 藻壁門 | 나카미카도(Nakamikado) | |
은부문(Impu-mon) 殷富門 | 고노에(Konoe) | |
상서문(Jōsai-mon) 上西門 | 츠치미카도(Tsuchimikado) | |
북쪽 (서에서 동) | 안가문(Anka-mon) 安嘉門 | |
위감문(Ikan-mon) 偉鑒門 | ||
달지문(Tachi-mon) 達智門 | ||
동쪽 (북에서 남) | 상동문(Jōtō-mon) 上東門 | 츠치미카도(Tsuchimikado) |
양명문(Yōmei-mon) 陽明門 | 고노에(Konoe) | |
대현문(Taiken-mon) 待賢門 | 나카미카도(Nakamikado) | |
욱방문(Ikuhō-mon) 郁芳門 | 오이미카도(Ōimikado) |
4. 5. 헤이안쿄 북변 확장설
헤이안쿄 북쪽 끝의 남쪽 2정(町, 약 200미터) 부분은 "북변(北辺坊)"이라고 불렸다. 헤이안쿄 북쪽 끝 도로는 초기 설계상 현재의 도고문대로(土御門大路) 위치에 있었으나, 이후 북쪽으로 2정 확장되어 현재의 일조대로(一条大路) 위치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이러한 북변 확장설은 타키나미 사다코(瀧浪貞子)의 설[10]이 근거가 된다. 나카야마 타다치카(中山忠親)의 일기 『산괴기(山槐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옛날에는 도고문대로가 궁성(다이내이리(大内裏)) 북쪽에 접해 일조대로라 불렸고, 후에 북변의 2정(약 200미터)을 병합하여 궁성을 확장한 결과, 이 도로가 일조대로라 불리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헤이안쿄는 후지와라쿄(藤原京)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다이내리 북쪽에 공지(북변)를 가진 구조였고, 원래 12문이었던 다이내리가 헤이안쿄 건설 후 2정 북쪽으로 확장되어 14문이 되었으며, 헤이안쿄 북쪽 끝으로 여겨지는 북경극대로(北京極大路)(일본어 위키백과 링크)가 일조대로가 되고, 원래의 일조대로(확장 전 다이내리 북쪽 끝)가 도고문대로가 되었다는 것이 타키나미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헤이안쿄 전체가 북쪽으로 확장되었다는 설[11]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지도에 남아있는 헤이안쿄는 변경 후의 모습이 되고, 북변까지 다이내리가 확장된 시기는 약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지만[12], 『산괴기』의 기록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13] 즉, "옛날"이 초기 헤이안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헤이안쿄 이전의 도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옛날"이란 후기 조영에 의해 궁성이 북쪽으로 확장된 초기 나가오카쿄(長岡京)를 가리키는 것이 적절하다는 비판도 있어[14], 아직 가설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 현대의 헤이안쿄
현대의 헤이안쿄(교토)는 과거의 역사적 유산과 현대적인 발전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1895년(메이지 28년)에는 헤이안 천도 1100년을 기념하여 헤이안 신궁 건립, 시대축제 개최, 제4회 내국 권업 박람회 개최 등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1] 1988년(쇼와 63년)부터 1997년(헤이세이 9년)까지는 헤이안 천도 1200년을 기념하여 교토역 개수, 교토 시영 지하철 도자이선 개통, 교토국제영화제 개최 등 더 많은 사업들이 진행되었다.[1]
5. 1. 헤이안 천도 기념 사업
기념 사업 | 내용 |
---|---|
1100년 기념 사업 (1895년 (메이지 28년)) | |
1200년 기념 사업 (1988년 ~ 19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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