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마케도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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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마케도니아인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에 거주했던 민족으로, 그들의 기원은 "키가 크고 날씬하다"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들은 그리스 세계와 야만 유럽의 경계에 위치하여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에 정복당하기까지, 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와 독자적인 문화를 융합하여 발전시켰다. 마케도니아의 정체성은 그리스인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고대 사료와 현대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 문화, 예술은 주변 지역과 교류하며 독특한 특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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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마케도니아인 | |
---|---|
일반 정보 | |
명칭 | 마케도니아인 |
로마자 표기 | Makedones |
언어 | |
사용 언어 | 고대 마케도니아어 코이네 그리스어 |
종교 | |
주요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민족적 기원 | |
기원 | 그리스인 |
2. 어원
민족명칭 마케도네스(Μακεδόνες)는 "키가 큰, 날씬한"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형용사 마케드노스(μακεδνός)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도리아인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이기도 하다.[22]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길다" 또는 "키가 크다"를 의미하는 형용사 마크로스(μακρός)와 가장 유사할 가능성이 높다.[22] 이 이름은 원래 "고지대 사람들", "키가 큰 사람들" 또는 "키가 크게 자란 남자들"을 의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22]
wikitext
3. 역사
마케도니아 왕국의 확장은 3단계 과정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리스 세계와 야만 유럽의 경계에 위치한 변방 왕국으로서, 마케도니아인들은 먼저 인접한 북쪽의 이웃들다양한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및 트라키아 부족들을 복속시킨 다음, 남부 및 중앙 그리스의 국가들을 상대로 했다. 그 후 마케도니아는 주요 목표인 페르시아 정복을 위해 범헬레니즘 군사력을 이끌었고이를 놀라운 쉽게 달성했다.[23][24][25][26]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기원전 323년 바빌론 분할 이후, 아탈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및 셀레우코스와 같은 ''디아도코이'' 계승국들이 세워지면서 그리스와 서아시아, 그리고 헬레니즘화된 지중해 분지의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27] 알렉산드로스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과 함께, 마케도니아인들은 중앙 아시아까지 동쪽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28]
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계속 통치하면서(기원전 323-146년), 크레타 동맹 및 에페이로스 동맹과 같은 그리스 동맹을 형성했다(이전에는 에페이로스 왕국).[29] 그러나 그들은 종종 아카이아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그리고 헬레니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갈등을 겪었으며, 이들은 에게 해 지역과 그리스 본토의 전쟁에 개입했다.[30]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215년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후, 경쟁국 로마 공화국은 일련의 전쟁을 그리스 동맹국인 페르가몬 및 로도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싸우는 것으로 대응했다.[31]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1-168년) 이후,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페르세우스 아래에서 폐지하고, 왕국을 4개의 보호국 공화국으로 대체했다.[32] 사칭자 안드리쿠스에 의한 왕정의 짧은 부활은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50-148년)으로 이어졌고, 그 후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로마 속주를 설립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복속시켰다.[33]
3. 1. 초기 역사
마케도니아 왕국의 확장은 3단계로 이루어졌다. 그리스와 야만 유럽의 경계에 위치한 마케도니아는 먼저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부족들을 복속시킨 후, 남부 및 중앙 그리스 국가들을 상대했다. 이후 범헬레니즘 군사력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복을 달성했다.[23][24][25][26]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기원전 323년 바빌론 분할 이후 디아도코이 계승국들이 세워지면서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27] 알렉산드로스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으로 마케도니아인들은 중앙 아시아까지 식민지를 건설했다.[28]
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계속 통치하며(기원전 323-146년) 그리스 동맹을 형성했지만,[29] 아카이아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헬레니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갈등을 겪었다.[30] 기원전 215년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후, 로마 공화국은 일련의 전쟁을 통해 마케도니아를 견제했다.[31]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1-168년) 이후, 로마는 마케도니아 왕조를 폐지하고 왕국을 4개의 보호국 공화국으로 대체했다.[32]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50-148년) 이후 로마는 마케도니아 로마 속주를 설립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복속시켰다.[33]
그리스 신화에서 마케돈은 마케도니아의 이름의 유래가 된 영웅이며, 헤시오도스의 ''여인들의 목록''에 언급되어 있다.[253] 마케도니아인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증거는 기원전 5세기 중반 헤로도토스의 저작에 나타난다.[34] 마케도니아인들은 호메로스의 ''선박 목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마케도니아"라는 용어 자체도 늦게 등장한다. ''일리아스''는 헤라가 올림푸스 산을 떠나 피에리아 산맥과 에마티아를 거쳐 아토스 산에 도달했다고 진술한다.[35] 이는 스트라보의 ''지리학''에서도 반복된다.[36] 고고학적 증거는 미케네 그리스가 기원전 14세기 초부터 마케도니아 내륙과 접촉하거나 침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7][38]
니컬러스 해먼드(Nicholas Hammond)는 마케도니아인들이 그리스 암흑기 이전부터 오레스티아 고원에 거주해 왔으며, 다른 그리스 민족을 낳은 것과 동일한 (원시 그리스) 인구 집단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39][40][41] 마케도니아 부족들은 할리아크몬 강 상류의 오레스티스에서 몰로소스족의 압력 때문에 할리아크몬 강 하류의 피에리아 고원으로 이동했다.[42] 올림푸스 북쪽의 새로운 피에리아 고향에서 마케도니아 부족들은 원시 도리아인과 섞였다.[43] 일부 전통은 도리아인의 고향을 테살리아 서부의 핀두스 산맥에 두었고, 헤로도토스는 이를 마케도니아 핀두스까지 더 북쪽으로 밀어붙여 그리스인들이 ''마케드논''(Mακεδνόν)이라고 불리다가 도리아인이라고 불렸다고 주장했다.[44][45] 아놀드 J. 토인비는 마케도네스족이 중앙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로 북쪽으로 이주했으며, 도리아인의 고향을 프티오티스에 두었다.[46]
마케도니아의 확장은 아르게아드 왕조에 의해 주도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왕조의 창시자인 페르디카스가 테메노스의 후손이라고 말했다.[47] 그는 두 형과 함께 아르고스를 떠나 일리리아를 거쳐 상 마케도니아의 도시인 레바에아로 갔다.[48] 이곳에서 형제들은 지역 통치자의 양치기로 일했다. 꿈을 꾼 후 형제들은 베르미오 산맥 기슭에 있는 미다스 정원 근처의 마케도니아의 다른 지역으로 도망쳐 나머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49] 투키디데스의 설명은 헤로도토스의 설명과 유사하며, 이 이야기가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유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50] 즉, 이것은 마케도니아인들이 왕국의 기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대한 설명이다.[51] 후대 역사가들은 카라노스[52][53][54] 또는 테메노스의 아들인 아르켈라오스를 창립 왕으로 소개하여 왕조 전통을 수정했다.[55]
가장 초기의 자료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왕족을 "테메니데"라고 불렀다. 후대의 자료에서는 "아르게아데"라는 용어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아피아누스는 아르게아데라는 용어가 지배 왕조의 이름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주요 부족을 지칭한다고 말했다.[56][57] "아르게아드"와 "아르고스인"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Argīvus''[58]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Argeio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아르고스 출신"을 의미하며,[59][60] 호메로스에서 처음 증명되었으며, 그리스인("Ἀργείων Δαναῶν", ''아르고스 다나오스'')을 지칭하는 집단적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61] 헤로도토스가 쓴 것처럼 왕족과의 가장 일반적인 연결은 펠로폰네소스의 아르고스와의 연결이다.[62] 아피아누스는 이를 오레스티아 아르고스와 연결한다.[56] 유스티누스에 의해 언급된 또 다른 전통에 따르면, 카라누스가 마케도니아의 수도를 에데사에서 아이가이로 옮긴 후 도시의 이름을 시민들에게 적용하면서 이름을 채택했다.[63] ''일리아스''(16.417)에는 아르게아스라는 인물이 언급되어 있다.[57]
헤로도토스의 가계도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아피아누스는 페르디카스 이후 여섯 명의 상속자가 연속으로 통치했다고 말했다: 아르게우스, 필리포스, 아에로푸스, 알케타스, 아민타스, 알렉산더.[64] 아민타스 1세 ()는 페르시아의 파이오니아 침공과 마케도니아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종속국이 되었을 때 통치했다.[65][66] 알렉산더 1세 ()가 진정한 역사적 인물이다. 이러한 계승과 약 25~30년의 평균 통치를 바탕으로 마케도니아 왕조의 시작은 전통적으로 기원전 750년으로 추정된다.[57][67] 해먼드는 테메니데가 실제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도착하여 마케도니아의 지도력을 맡았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한다.[49]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펠로폰네소스 기원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68]
현대 학자들은 해먼드가 처음 제시한 전통적 관점에 몇 가지 불일치를 지적했다.[76] 201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창건 시기를 기원전 6세기로 재설정하는 대안적 모델이 제시되었다.[77] 이 학자들에 따르면, 해먼드의 주장, 즉 독자적인 마케도니아 ''민족''이 에게 문명 이후 할리아크몬 계곡에 존재했다는 것을 뒷받침할 직접적인 문학적, 고고학적, 언어학적 증거가 부족하다. 해먼드의 해석은 "추측성 재구성"으로 비판받아 왔다.[78]
마찬가지로, 이주의 역사성, 정복 및 인구 추방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피에리안족과 보티아인족의 강제 추방에 대한 설명은 피에리안족과 보티아인족의 이름이 마케도니아 지역의 이름과 유사하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형성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에오르데아인족 절멸에 대한 설명은 그러한 지명적 일치가 부재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75] 아르게아드 왕조의 마케도니아 정복은 고전 마케도니아 수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학적 토포스로 볼 수 있다. 이주에 대한 이야기는 지역 간 지배 엘리트들 간의 복잡한 계보 연결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동시에, 지배 왕조가 그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신화적 조상들을 영웅화하며, 피지배자들과 거리를 두는 데 사용되었다.[51][79]
초기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갈등은 역사적 현실이었으며, 목축 전통은 인구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철기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사이의 마케도니아에서 어떠한 중대한 단절도 나타내지 않는다. 물질 문화의 전반적인 연속성,[80] 정착지,[81] 그리고 그리스 이전의 인명은 초기 마케도니아 확장의 alleged 민족 청소 설명과 모순된다.[82]
마케도니아의 국가 형성 과정은 이피로스, 일리리아, 트라키아, 테살리아의 이웃 국가들과 유사했다. 지역 엘리트들은 토지와 자원을 조직하기 위해 서로 다른 공동체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지역 유력자들은 종종 도시와 같은 정착지에 기반을 두었지만, 동시대 역사가들은 그들을 "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치적이지 않은 ''폴리스''로 인정하지 않았다.[83]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이 지역 전역에서 유사한 매장 의식과 부장품을 공유하는 예외적으로 부유한 매장들이 나타난다. 이는 공통된 이념, 관습, 종교적 믿음을 공유하는 새로운 지역 지배 계급의 부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77] 공통의 지리, 생활 방식, 방어적 이해관계는 민족 언어학적으로 다양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정치적 연맹의 창설을 필요로 했을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마케도니아 민족 정체성의 통합으로 이어졌다.[77][84]
마케도니아는 끊임없이 갈등하는 시골 민족 집단에 의해 인구 구성되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하초풀로스의 마케도니아 기관에 대한 연구는 마케도니아 국가 형성이 베르기나의 아르게아다이, 신도스의 파에오니아/에도니족, 이치네와 펠라, 그리고 테르마이 만과 서부 할키디키의 혼합된 마케도니아-야만인 식민지를 포함한 도시와 같은 중심지에 기반을 둔 지역 엘리트들의 통합을 통해 발생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85] 테메니데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외교적 능력과 베르기나 자체의 물류적 중심성 때문에 새로운 마케도니아 국가의 전반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아르게아드 왕조가 아닌 중심지는 점차 의존적인 동맹이 되었고, 아르게아드는 마케도니아의 하부 및 동부 영토에 대한 통제를 점차적으로 주장하고 확보할 수 있었다.[85] 이 통제는 필리포스 2세 ()에 의해 완전히 통합되었다.[87]
3. 2. 발전과 확장
마케도니아 왕국의 확장은 3단계 과정으로 설명된다.[23][24][25][26] 그리스 세계와 야만 유럽의 경계에 위치한 변방 왕국이었던 마케도니아는, 먼저 인접한 북쪽의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부족들을 복속시켰다.[23][24][25][26] 이후 남부 및 중앙 그리스 국가들을 상대했다. 마케도니아는 범헬레니즘 군사력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복을 달성했다.[23][24][25][26]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기원전 323년 바빌론 분할 이후, 아탈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등 ''디아도코이'' 계승국들이 세워지면서 그리스와 서아시아, 헬레니즘화된 지중해 분지의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27] 알렉산드로스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으로 마케도니아인들은 중앙 아시아까지 동쪽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28]
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계속 통치하면서(기원전 323-146년), 크레타 동맹, 에페이로스 동맹 (에페이로스 왕국)과 같은 그리스 동맹을 형성했다.[29]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헬레니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갈등을 겪으며, 에게 해 지역과 그리스 본토 전쟁에 개입했다.[30] 기원전 215년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후, 로마 공화국은 일련의 전쟁을 통해 페르가몬, 로도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상대했다.[31]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1-168년) 이후,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페르세우스() 아래에서 폐지하고, 왕국을 4개의 보호국 공화국으로 대체했다.[32] 사칭자 안드리쿠스에 의한 왕정의 짧은 부활은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50-148년)으로 이어졌고,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로마 속주를 설립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복속시켰다.[33]
스트라보와 투키디데스는 에마티아와 피에리아가 대부분 트라키아인(피에레스, 파에오니아인), 보티아이인, 일부 일리리아인 및 에피루스 부족들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69] 헤로도토스는 브리게스가 마케도니아인과 함께 아나톨리아로 대규모 이주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다고 진술한다.[70]
만약 민족적으로 구분되는 마케도니아 부족 집단이 확산 이전에 피에리아 고지대에 살고 있었다면, 첫 번째 정복은 베르기나를 포함한 피에리아의 산기슭과 해안 평원이었을 것이다.[7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부족들은 베르미온 산 근처의 기지에서 확장을 시작했을 수 있다.[72] 투키디데스는 마케도니아의 확장을 특히 아르게아드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정복 과정으로 묘사한다.[73]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현재 마케도니아의 해안 지역은 페르디카스 2세의 아버지 알렉산더 1세와 그의 조상들에 의해 처음 획득되었으며, 이들은 피에리아에서 피에리아인을 격파하고 추방했다.[73] 또한 보티아이인을 보티아에서 추방했으며, 내륙에서 펠라와 바다까지 악시오스 강을 따라 뻗어 있는 파에오니아의 좁은 지대를 획득했다.[73] 악시오스를 넘어 스트리몬까지의 영토를 미그도니아라고 부르며, 에도니를 몰아냈다.[73] 그들은 현재 에오르다이아에서 에오르디를 추방했으며, 안테무스, 그레스토니아, 마케도니아 본토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73]
알렉산더 1세 선조에 의한 확장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것은 어렵지만, 투키디데스의 내용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정복은 피드나와 디움을 포함한 피에리아와 보티아이아였다. 두 번째 단계는 피에리아와 보티아이아의 지배를 통합하고, 메토네와 펠라를 점령했으며, 에오르다이아와 알모피아에 대한 지배를 확장했다. 해먼드에 따르면, 세 번째 단계는 기원전 550년 이후에 일어났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이 미그도니아, 에도니스, 낮은 파에오니아, 비살티아, 크레스토니아를 장악했을 때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는 기원전 520년에 일어났을 수도 있고,[74] 세 번째 단계는 마케도니아인들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약화된 파에오니아 국가를 활용한 기원전 479년 이후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75] 투키디데스는 페르디카스 2세 통치까지 축적된 영토 범위를 설명한다. 해먼드는 마케도니아 확장의 초기 단계는 군사적이었으며, 광범위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인구를 진압하거나 몰아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3. 3. 헬레니즘 제국과 분열
마케도니아 왕국의 확장은 3단계 과정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리스 세계와 야만 유럽의 경계에 위치한 변방 왕국으로서, 마케도니아인들은 먼저 인접한 북쪽의 이웃들다양한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및 트라키아 부족들을 복속시킨 다음, 남부 및 중앙 그리스의 국가들을 상대로 했다. 그 후 마케도니아는 주요 목표인 페르시아 정복을 위해 범헬레니즘 군사력을 이끌었고이를 놀라운 쉽게 달성했다.[23][24][25][26]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기원전 323년 바빌론 분할 이후, 아탈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및 셀레우코스와 같은 ''디아도코이'' 계승국들이 세워지면서 그리스와 서아시아, 그리고 헬레니즘화된 지중해 분지의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27] 알렉산드로스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과 함께, 마케도니아인들은 중앙 아시아까지 동쪽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28]
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계속 통치하면서(기원전 323-146년), 크레타 동맹 및 에페이로스 동맹과 같은 그리스 동맹을 형성했다(이전에는 에페이로스 왕국).[29] 그러나 그들은 종종 아카이아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그리고 헬레니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갈등을 겪었으며, 이들은 에게 해 지역과 그리스 본토의 전쟁에 개입했다.[30]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215년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후, 경쟁국 로마 공화국은 일련의 전쟁을 그리스 동맹국인 페르가몬 및 로도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싸우는 것으로 대응했다.[31]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1-168년) 이후,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페르세우스() 아래에서 폐지하고, 왕국을 4개의 보호국 공화국으로 대체했다.[32] 사칭자 안드리쿠스에 의한 왕정의 짧은 부활은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50-148년)으로 이어졌고, 그 후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로마 속주를 설립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복속시켰다.[33]
3. 4. 로마의 속주화
마케도니아 왕국의 확장은 3단계로 묘사된다. 마케도니아인들은 먼저 인접한 북쪽의 파이오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남부 및 중앙 그리스 국가들을 상대했다. 이후 페르시아 정복을 위해 범헬레니즘 군사력을 이끌었다.[23][24][25][26]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기원전 323년 바빌론 분할 이후 ''디아도코이'' 계승국들이 세워지면서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27] 알렉산드로스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과 함께, 마케도니아인들은 중앙 아시아까지 동쪽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28]
마케도니아인들은 헬레니즘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계속 통치하면서(기원전 323-146년) 그리스 동맹을 형성했다.[29] 그러나 그들은 아카이아 동맹,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헬레니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갈등을 겪으며 에게 해 지역과 그리스 본토의 전쟁에 개입했다.[30] 기원전 215년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후, 로마 공화국은 일련의 전쟁을 그리스 동맹국과 함께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싸웠다.[31]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1-168년) 이후,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폐지하고, 왕국을 4개의 보호국 공화국으로 대체했다.[32] 사칭자 안드리쿠스에 의한 왕정의 짧은 부활은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50-148년)으로 이어졌고, 그 후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로마 속주를 설립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복속시켰다.[33]
4. 문화와 사회
마케도니아는 초기 철기 시대부터 뚜렷한 물질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88] 전형적인 발칸 매장, 장식, 그리고 도자기 형태가 철기 시대의 대부분 동안 사용되었다.[88] 이러한 특징들은 트라키아, 에피로스, 일리리아 지역과 유사한 광범위한 문화적 친족 관계와 조직 구조를 시사한다.[89][90] 이것이 반드시 이러한 지역들 간의 공유된 문화적 정체성이나 어떠한 정치적 충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91] 기원전 6세기 말, 마케도니아는 남부 그리스의 영향에 개방되었는데, 비록 후기 미케네 시대부터 남부와의 작지만 감지할 수 있는 소통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92] 기원전 5세기까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문화권"의 일부가 되었으며, 남부 그리스 도시 국가의 전형적인 많은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93] 고전 그리스의 물건과 관습은 선택적으로 채택되어 독특한 마케도니아 방식으로 사용되었다.[94] 또한, 이란 문화에서 온 문화적, 경제적 영향은 기원전 5세기부터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매장지에 페르시아 무덤 부장품이 포함되고, 필리포스 2세 재위 기간 동안 페르시아 양식의 왕좌와 같은 왕실 관습을 채택한 것이 그 예이다.[95]
[[File:Lion_of_Amphipolis_BW_2017-10-05_09-38-25.jpg|thumb|right|upright|암피폴리스의 사자는 기원전 4세기의 대리석 묘지 조각으로, 북부 그리스의 암피폴리스에 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서 복무한 장군인 미틸레네의 라오메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120]
기원전 5세기까지 마케도니아인과 나머지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그리스 판테온의 동일한 신들을 숭배했다.[121] 마케도니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종종 얽혀 있었다. 예를 들어, 암피폴리스 시의 국가 원수는 그리스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제도 겸임했다. 카산드리아에서도 유사한 체제가 존재했는데, 도시의 창시자인 카산드로스를 기리는 숭배 사제가 명목상 시의 지도자였다.[122] 이집트에서 온 외래 숭배는 왕실에 의해 장려되었는데, 예를 들어 테살로니키의 사라피스 신전이 있었고,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사모트라케 신전 단지의 카베이로이 신비 종교에 봉납을 했다.[123] 이 장소는 또한 로마인과의 피드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가 도망쳐 피난처를 받은 곳이기도 했다.[124] 제우스의 주요 성소는 디온에 있었고, 베리아의 또 다른 성소는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졌으며,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가 숭배의 주요 사제의 요청에 따라 시 정부의 문제에 개입했을 때 특히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123]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은 올림포스 12신을 숭배했는데, 특히 제우스, 아르테미스,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를 숭배했다. 이러한 숭배의 증거는 기원전 4세기 초부터 존재하지만, 그 이전 시대의 마케도니아 종교 관습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125] 초기부터 제우스는 마케도니아 판테온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125] 마케도니아인의 신화적 조상인 마케돈은 제우스의 아들로 여겨졌으며, 제우스는 마케도니아 주화에 두드러지게 등장한다.[125] 제우스 숭배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마케도니아인들의 영적 중심지인 피에리아의 디온에 있었는데, 기원전 400년부터 아르켈라오스 왕이 제우스를 기리기 위해 매년 축제를 열어 호화로운 제물과 운동 경기를 개최했다.[125]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에 대한 숭배도 두드러졌다. 헤라클레스를 묘사한 주화는 기원전 5세기부터 등장한다.[125] 이는 마케도니아 아르게아드 왕조가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추적하여 베르기나와 펠라의 마케도니아 수도에서 그에게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다.[125] 많은 봉헌 부조와 헌납물 또한 아르테미스 숭배의 중요성을 증명한다.[126] 아르테미스는 종종 사냥꾼으로 묘사되었으며, 젊은 여성들이 성인식을 치르는 과정에 들어갈 때 수호 여신 역할을 했으며, 헤라클레스 키나기다스(사냥꾼)가 그것을 마친 젊은 남성들을 위해 했던 것과 유사했다.[126]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 세계의 다른 곳에서 인기가 있었던 일부 신들특히 포세이돈과 헤파이스토스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거의 무시되었다.[125]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이 숭배했던 다른 신들은 아레스와 동일시되는 전쟁의 신인 타울로스, 아테나와 동일시되는 기가, 아르테미스와 동일시되는 사냥의 여신인 고조리아,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는 사랑의 여신인 자이레네, 빛의 신인 잔도스 등 지역 판테온의 일부였다.[127] 마케도니아의 종교 생활과 숭배에 주목할 만한 영향은 이웃 테살리아였다. 두 지역은 많은 유사한 문화적 제도를 공유했다.[128] 그들은 태양신 숭배와 같은 외래 종교의 영향을 포용하고 개방적이었다.[3] 기원전 4세기까지 마케도니아와 일반 그리스 종교 정체성의 상당한 융합이 있었지만,[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는 유난히 다양한 종교 생활을 특징으로 했다.[3] 이러한 다양성은 저주 태블릿으로 입증되는 마법에 대한 믿음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것은 그리스 문화 관행의 중요하지만 비밀스러운 측면이었다.[130]
마케도니아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통치자들을 위해 마련된 호화로운 장례였다.[131] 마케도니아 엘리트들은 살아있는 동안 신전을 짓기보다는 죽었을 때 호화로운 무덤을 지었다.[131] 이러한 전통은 청동기 시대부터 그리스 전역과 중서부 발칸 반도에서 시행되어 왔다. 마케도니아 매장은 무기, 금으로 된 죽음의 가면 등 미케네와 유사한 물건을 포함하고 있다.[94] 6세기부터 마케도니아 매장은 특히 호화로워졌으며, 에게해 연안 도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더 넓은 경제적, 정치적 네트워크로 마케도니아의 통합을 반영하여 다양한 그리스 수입품을 전시했다. 매장에는 전례 없는 부와 예술적 스타일의 보석과 장신구가 포함되었다. 이 마케도니아 "전사 매장" 스타일의 절정은 남중부 일리리아와 서부 트라키아의 유적지와 매우 유사하여 엘리트 매장의 ''코이논''을 만들었다.[132] 호화로운 전사 매장은 7세기부터 남부 및 중부 그리스에서 중단되었으며, 성소에 헌물을 바치고 신전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133] 기원전 6세기부터 화장이 전통적인 매장 의식을 대체했다.[77]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가장 호화로운 무덤 중 하나는 필리포스 2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베르기나에 있다. 이 무덤에는 사냥 장면과 그리스 숭배 인물을 묘사한 매우 정교한 예술 작품과 다양한 무기 등 호화로운 부장품이 들어 있다.[134] 이것은 종교적 경건과 지적 기술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고전 시대에 중부 그리스 사회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되었던 전사 사회의 지속적인 전통을 보여준다.[133] 베르기나의 세 개의 왕실 무덤에서 전문 화가들은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신화적 장면(무덤 1)과 왕실 사냥 장면(무덤 2)으로 벽을 장식했고, 무기, 갑옷, 음주 용기 및 개인 물품을 포함한 호화로운 부장품은 화장 전에 장식된 금 관에 묻힌 죽은 자의 유골과 함께 보관되었다.[135] 일부 부장품과 장식은 다른 마케도니아 무덤에서도 흔했지만, 베르기나에서 발견된 일부 물품은 관모, 사치품, 무기와 갑옷 등 왕족과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었다.[136] 학자들은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가 1977-1978년에 유해를 발견한 이후 무덤 점유자의 정체성에 대해 논쟁해 왔지만,[137] 최근 연구와 법의학적 검사를 통해 묻힌 사람들 중 적어도 한 명이 필리포스 2세라는 결론을 내렸다(무덤 2).[138] 무덤 1 근처에는 죽은 자의 숭배를 위한 신전인 ''헤로온''의 지상 유적이 있다.[139] 2014년, 그리스에서 발견된 가장 큰 고대 무덤인 마케도니아 카스타 무덤이 암피폴리스 밖에서 발견되었다. 이 도시는 기원전 357년 필리포스 2세에게 점령된 후 마케도니아 왕국에 편입되었다.[140][141][142] 무덤 점유자의 신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고학자들은 그것이 알렉산드로스의 측근인 헤파이스티온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143]
마케도니아 군주의 신격화는 필리포스 2세의 죽음으로 시작되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살아있는 신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한 것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144] 그는 이미 이집트인들의 라의 아들로서 이집트인들에게 호루스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여겨졌다(알렉산드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왕조를 위해 장려할 믿음)).[145] 그러나 기원전 334년 그의 신성을 암시하는
4. 1. 사회 계층
마케도니아 사회는 말과 소를 소유하는 것이 부와 명성의 주요 원천인 귀족 가문이 지배했다는 점에서 테살리아 및 트라키아와 유사했다.[90] 귀족들은 왕 다음으로 권력과 특권을 누렸으며, 행정부에 충원되거나 군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181]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계승한 헬레니즘 왕국,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에서는 귀족이 되려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더 큰 사회 이동성이 제공되었다.[106]상부 마케도니아 주민들의 생활 방식은 이웃인 에피루스와 일리리아의 주민들과 거의 다르지 않았으며, 농업을 보완하는 계절별 이주에 종사했다. 어린 마케도니아 남성들은 염소와 양과 같은 가축을 기르는 이주 생활 방식의 부산물로, 사냥과 무술 전투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96] 말 사육과 소 사육도 일반적인 활동이었다.[96] 고지대 부지는 지역 사회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나, 험난한 지형에서 자원 경쟁은 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고 해안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의 비교적 부유한 저지대 정착지로 약탈을 유발했다.[97] 1983년부터 아야니에서 발굴된 유물은 기원전 2천년기부터 사회 조직의 존재를 증명하며, 여기에는 흑백 도자기의 가장 오래된 조각, 미케네 도자기와 함께 발견된 기원전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본 등이 포함된다.[98][99][100]
[[파일:Facade_of_Philip_II_tomb_Vergina_Greece.jpg|thumb|left|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무덤 입구().]
하부 마케도니아와 펠라고니아의 충적 평원은 목재와 광물과 같은 천연 자원이 풍부하여 고유한 귀족 계급의 발전을 선호했으며, 그 부는 때때로 고전 그리스 폴리스를 능가했다.[101] 기원전 5세기부터 마케도니아에서 주화 도입이 가속화되었으며, 일부 마케도니아인들은 관개, 간척, 원예 활동을 통해 농업에 종사했다.[102][103] 마케도니아 경제와 국가 재정의 기반은 벌목과 구리, 철, 금, 은과 같은 귀중한 광물 채굴이었다.[104] 이러한 원자재를 완제품으로 전환하여 판매하면서 도시 중심지가 성장하고 전통적인 시골 마케도니아 생활 방식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105]
고전 그리스 폴리스와는 대조적으로, 마케도니아인들은 노예를 거의 소유하지 않았다.[107][108] 테살리아와 달리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67년 로마 정복까지 군주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독재자로 여겨지기도 하고, 시민 병사들의 군대가 귀족 계급에 맞서 중앙 왕을 지원하는 주권 군사 국가로의 진화로 여겨지기도 한다.[109][110] 왕위는 부계 혈통에 따라 세습되었지만, 장자 상속이 확립된 관습으로 엄격하게 준수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111]
후기 청동기 시대 동안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은 독특한 무광택 페인트 식기를 개발했다.[100][112] 기원전 1200년에서 900년 사이에는 라우지츠 문화의 도자기, 장식품 및 매장 형태와 유사성을 보여주는 개별화된 형태의 물질 문화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900년경 이후의 글라시나크 문화를 사용했다.[113]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에게해-지중해 특성의 품목이 널리 존재하게 되었고,[115] 남부 그리스의 영향은 칼키디케의 북부 에게해 식민지, 인접한 테살리아,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해 마케도니아에 침투했다. 이오니아의 영향은 나중에 아테네의 영향으로 대체되었다. 6세기 후반에 지역 엘리트들은 아테네 적색 인물 도자기, 고급 식기, 올리브 오일 및 와인 암포라, 고급 세라믹 향수병, 유리, 대리석 및 귀금속 장식품과 같은 이국적인 에게해 품목을 획득하여 지위의 상징으로 사용했다.[116] 기원전 5세기까지 이 품목은 마케도니아와 중부 발칸 반도 전역으로 널리 퍼졌다.[117] 마케도니아 정착지는 청동기 시대부터 강력한 연속성을 가지며 주거 건축에 대한 전통적인 건축 기술을 유지하고 있다. 기원전 1000년 이후 중앙 및 남부 그리스에서 정착지 수가 감소한 것으로 보이지만, 마케도니아에서는 정착지가 극적으로 증가했다.[118]
4. 2. 경제
고대 마케도니아의 경제는 상부 마케도니아와 하부 마케도니아 간의 차이를 보였다. 상부 마케도니아 주민들은 이웃 에피루스 및 일리리아 주민들과 유사하게 농업과 계절별 이주를 병행했다. 어린 마케도니아 남성들은 사냥과 무술 전투에 참여하며, 가축 사육, 말 사육, 소 사육도 활발했다.[96] 험난한 지형으로 인해 부족 간 갈등과 약탈이 발생하기도 했다.[97] 아야니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기원전 2천년기부터 사회 조직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며, 상부 마케도니아가 고대 그리스와 문화적,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98]하부 마케도니아와 펠라고니아의 충적 평원은 목재와 광물 등 천연 자원이 풍부하여 귀족 계급 발전에 기여했다.[101] 광물 채취는 기원전 5세기부터 마케도니아에서 주화 도입을 가속화했으며, 남부 그리스, 트라키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다.[102] 일부 마케도니아인들은 관개, 간척, 원예 등 농업에 종사했다.[103] 그러나 마케도니아 경제와 국가 재정의 기반은 벌목과 구리, 철, 금, 은과 같은 귀중한 광물 채굴이었다.[104] 이러한 원자재를 완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면서 기원전 5세기 동안 도시 중심지가 성장하고 전통적인 시골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105]
마케도니아 사회는 말과 소를 소유한 귀족 가문이 지배했으며, 이는 테살리아 및 트라키아와 유사했다.[90] 귀족들은 왕 다음으로 권력과 특권을 누렸으며, 행정부와 군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181] 헬레니즘 왕국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더 큰 사회 이동성이 나타났으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에서 두드러졌다.[106] 고전 그리스 폴리스와 달리 마케도니아인들은 노예를 거의 소유하지 않았다.[107][108]

테살리아와 달리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67년 로마 정복까지 군주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독재자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입헌주의자들은 시민 병사들의 군대가 중앙 왕을 지원하는 주권 군사 국가로의 진화를 주장하기도 한다.[110] 왕위는 부계 혈통에 따라 세습되었으나, 장자 상속이 엄격하게 준수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111]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세기경) 동안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은 독특한 무광택 페인트 식기를 개발했다.[100][112] 기원전 1200년에서 900년 사이에는 라우지츠 문화 및 글라시나크 문화와 유사한 물질 문화를 사용했다.[113]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에게해-지중해 특성의 품목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남부 그리스, 테살리아,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해 유입되었다.[115] 6세기 후반에는 아테네 적색 인물 도자기, 고급 식기, 올리브 오일 및 와인 암포라 등 이국적인 에게해 품목을 획득하여 지위 상징으로 사용했다.[116] 기원전 5세기까지 이러한 품목은 마케도니아와 중부 발칸 반도 전역으로 퍼졌다.[117]
마케도니아 정착지는 청동기 시대부터 강력한 연속성을 가지며, 기원전 1000년 이후 중앙 및 남부 그리스와 달리 정착지가 극적으로 증가했다.[118] 이 정착지는 "텔"이라고 하는 강 범람원 근처의 높은 곶을 따라 발전했으며, 서부 마케도니아, 상부 및 중부 할리아크몬 강, 보티아이, 악시오스 양쪽, 동부 마케도니아의 칼키디케 등에서 발견된다.[119]
4. 3. 예술
아르켈라오스 1세 통치기에 마케도니아 엘리트들은 다른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더 많은 관습, 예술 작품, 그리고 예술 전통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심포지엄과 음주 의식과 관련된 더 오래된, 아마도 호메로스 시대의 장례 의식을 유지했는데, 이는 죽은 마케도니아 귀족의 유해를 담았던 장식적인 금속 크라테르와 같은 물건들로 특징지어졌다.[149] 이 중에는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와 그의 측근들의 장면으로 장식되었으며 군 경력이 있었던 귀족에게 속한 기원전 4세기 테살로니키 무덤에서 발견된 대형 청동 데르베니 크라테르가 있다.[150] 마케도니아 금속 공예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6세기부터 아테네 양식의 꽃병 모양을 따랐으며, 마케도니아 무덤에서 발견된 많은 금속 물건 중에는 술잔, 보석, 용기, 왕관, 화관, 그리고 동전이 있었다.[151]현존하는 마케도니아 회화 작품으로는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와 벽화가 있으며, 조각상과 부조와 같은 조각 작품의 장식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스 석관의 부조에는 여전히 색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152]
금속 공예와 회화 외에도 모자이크는 특히 기원전 4세기에 펠라에서 발견된 마케도니아 미술의 또 다른 중요한 형태이다.[151] 펠라의 사슴 사냥 모자이크는 3차원적 특징과 환상주의적 스타일을 통해 회화 작품과 더 넓은 헬레니즘 미술 경향의 영향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사냥이라는 소박한 주제는 마케도니아인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155] 펠라의 유사한 사자 사냥 모자이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동료 크라테로스의 장면을 묘사하거나, 사냥이라는 일반적인 왕족의 오락을 묘사한 일반적인 그림을 보여준다.[155] 신화적 주제의 모자이크에는 표범을 탄 디오니소스의 장면과 테세우스에게 납치된 헬레네의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후자는 마케도니아 회화와 유사한 환상주의적 특징과 사실적인 음영을 사용한다.[155]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6년,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을 기념하는 경기와 볼거리가 열리던 아이가이의 극장에서 그의 친위대 오레스티스의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했다.[157]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연극과 음악 모두를 매우 좋아했다고 전해진다.[167] 그는 특히 고전 아테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좋아했으며, 이들의 작품은 그리스어 학습과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함께 새로운 동방의 백성들을 위한 적절한 고대 그리스의 교육의 일부를 이루었다.[158]
음악 또한 마케도니아에서 널리 사랑받았다. 아고라, 김나지움, 극장, 그리스 신과 여신에게 바쳐진 종교적 성역 및 고대 그리스 사원 외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 제국에서 진정한 그리스 도시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음악 공연을 위한 오데온의 존재였다.[161]
4. 4. 언어
행정적, 정치적 목적으로 아테네 그리스어는 마케도니아와 북부 에게해 지역의 민족-언어적으로 다양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공용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중 언어 사용 구역을 만들었다.[184] 아테네 그리스어는 기원전 5세기 말 아르켈라우스 시대부터 법정, 공식 담론 및 외교의 언어로 표준화되었다.[185] 마케도니아의 정복으로 아테네어가 더욱 널리 퍼졌다.[186] 마케도니아어가 안티고노스 왕조 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지만,[187] 마케도니아와 마케도니아 지배 헬레니즘 세계 전역에서 구두 방언이 되었다.[188] 그러나 마케도니아어는 헬레니즘 시대나 로마 시대에 사멸 언어가 되었고, 코이네 그리스어로 완전히 대체되었다.[189] 예를 들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는 코이네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으며, 그녀의 통치 시기(기원전 51~30년) 또는 그 이전 시점부터 마케도니아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190]
고대 마케도니아어를 분류하려는 시도는 현존하는 고대 마케도니아어 텍스트가 부족하여 방해를 받는다. 주로 구두 언어였으며, 대부분의 고고학적 비문은 마케도니아에서 아테네어와 이후의 코이네 그리스어를 제외하고는 지배적인 문자 언어가 없었음을 나타낸다.[189] 묘비와 공공 비문에서 살아남은 모든 비문 증거는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191] 분류 시도는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헤시키오스의 5세기 어휘집과 몇몇 현존하는 단편적인 비문, 동전, 그리고 고대 출처의 드문 구절에서 수집된 150~200 단어와 200개의 개인 이름으로 구성된 어휘에 기반한다.[189] 어휘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그리스어이며, 도리아 방언과 아이올리아 방언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약간의 일리리아어와 트라키아어 요소가 발견될 수 있다.[189][192]

마케도니아 지명학에서, 대부분의 개인 이름은 그리스어로 인식할 수 있으며 (예: 알렉산드로스, 필리포스, 디오니시오스, 아폴로니오스, 데메트리오스), 일부는 호메로스 시대(예: 프톨레마이오스) 또는 미케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몇몇 비그리스어 이름(일리리아어 또는 트라키아어; 예: "비티스")도 있다. 이 자료는 마케도니아 개인 이름이 주로 그리스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관찰을 뒷받침한다.[189] 마케도니아 지명과 수명은 대부분 그리스 기원이며 (예: 아이가이, 디온, 피에리아, 할리아크몬), 마케도니아 달의 이름과 마케도니아인들이 숭배했던 대부분의 신들의 이름도 그렇다. 해먼드는 이것들이 후대의 차용이 아니라고 말한다.[201]
마케도니아어는 다른 그리스 방언, 특히 북서 그리스어 및 테살리아어와 밀접한 구조적 및 어휘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202][203]
마케도니아어의 위치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이 제안되었으며, 모두 이를 주변 그리스 방언, 밀접하게 관련된 별개의 언어(헬레니즘 언어 참조),[205][208][209] 또는 브리기아어, 북서 그리스어 및 테살리아 그리스어를 통합한 혼성 어구로 광범위하게 간주한다.[210] 파눌라 파파조글루는 마케도니아어, 그리스어 및 브리기아어 사이의 유사성을 토대로 원시 인도유럽어 거대 방언 그룹을 형성했다고 썼으며, 이는 게오르기에프에 따르면 주 그리스 방언이 나타나기 전인 기원전 14~13세기경에 분리되었다. 마케도니아어에 대한 최근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하초풀로스는 사용 가능한 모든 증거가 마케도니아어가 북서 그룹의 그리스 방언이라는 결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215]
또 다른 증거원은 메타언어학과 상호 이해 가능성의 문제이다. 사용 가능한 문헌 증거는 마케도니아어의 정확한 특성에 대한 세부 사항이 없지만, 마케도니아어와 그리스어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분견대 사이에 의사 소통의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충분히 달라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까지 통역관의 사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리비우스는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가 패배한 마케도니아 공동체의 대표들을 소집했을 때, 그의 라틴어 발표가 모인 마케도니아인들을 위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썼다.[224] 하초풀로스에 따르면, 고대 작가가 보존한 마케도니아어의 유일한 직접적 증거는, 아테네 시인 스트라티스가 기원전 4세기에 그의 희극 '마케도니아인'에서 한 인물, 아마도 마케도니아인을 아테네인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등장시키는, 비 아테네 고대 그리스 방언의 구절이다. – ἡ σφύραινα δ’ ἐστὶ τίς;grc (‘스피라이나, 그게 뭐지?’) – κέστραν μὲν ὔμμες, ὡτικκοί, κικλήσκετεgrc (‘그건 너희 아티카인들이 케스트라라고 부르는 거야’).[225] 게오르기오스 지아나키스는 최근 연구를 통해 고대 마케도니아어가 북서 그리스어의 방언 지도 내에서 위치를 확립했다고 썼다.[215]
4. 5. 정체성 논쟁
고대 마케도니아인의 정체성은 고대 사료와 현대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베르기나의 태양은 고대 마케도니아 또는 아르게아드 왕조의 상징으로 제안되었다.호메로스에서 "Argead"라는 용어는 그리스인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61] 알렉산드로스 1세는 헬라노디카이("그리스인 심판")에게 자신이 아르고스 그리스인(신화 속 아르고스의 왕, 테메노스의 후손)임을 증명하여 올림픽 경기 참가를 허용받았다.[231][232]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 1세의 올림픽 참가가 Argead에 의해 조작된 선전이라고 의심한다. Argead의 Argive 계보가 "주류 지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Argead의 헤라클레스 혈통 강조는 왕가를 영웅화하고, 백성에 대한 "신성한 통치 권리"를 확립하는 신성한 족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헬레니즘 시대 이전의 그리스 작가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의 그리스성에 대해 모호함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칼케돈의 트라시마코스는 "우리 그리스인들은 야만인 아르켈라우스에게 노예가 되었다"라고 썼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 2세를 "그리스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과도 관련이 없으며, 심지어 명예롭게 명명될 수 있는 어떤 곳 출신 야만인도 아니고, 마케도니아에서 온 해로운 악당"이라고 비난했다.[244] 그러나 이소크라테스는 필립이 Argead와 Heraclean의 유산을 논함으로써 "진정한" 헬렌이라고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250][251] 아이스키네스 또한 필리포스를 "완전히 그리스인"이라고 공개적으로 묘사했다.[312]

헤시오도스의 ''여인들의 목록''은 마케도니아인들이 마케돈 (제우스와 티아 (데우칼리온)의 아들)의 후손이며, 따라서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의 조카라고 주장한다.[253] 레스보스의 헬라니쿠스는 마케돈이 헬렌의 아들이자 아이올리아인의 조상인 아이올로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마케도니아인들을 아이올리아 그리스어 사용 가족에 확고하게 위치시켰다.[253][258]
헤로도토스는 마케도니아인들을 북부 그리스인 또는 "순수한"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중간 집단으로 여겼다.[261] 투키디데스는 마케도니아인들을 야만인보다 헬레네스에 더 가까운 문화적 연속선상에 위치시키거나,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사이의 중간 범주로 위치시켰다.[267][268]
고대 지리학자들은 마케도니아의 크기와 마케도니아인의 민족성에 대한 견해에 차이가 있었다.[273] 스트라보는 "마케도니아는 물론 그리스의 일부"라고 말하며 마케도니아인의 그리스 민족성을 지지했다.[273][274][275]

이소크라테스는 필립의 그리스 기원을 옹호했지만, 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256] 필립은 마케도니아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국가 연맹오늘날 코린트 동맹이라고 불리는을 단순히 "헬레네스"(즉, 그리스인)라고 명명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포키스인이 추방된 기원전 346년에 독점적인 그리스 대 암피크티오니 협회에서 두 자리를 부여받았다.[280]
기원전 3세기 이후, 특히 로마 시대에 마케도니아인들은 일관되게 그리스인으로 간주되었다.[291] 폴리비오스는 마케도니아인들을 그리스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인접한 비그리스 부족과 구별한다.[272] 리비우스는 마케도니아인, 아이톨리아인, 아카르나니아인은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언급한다.[296]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을 모두 ''야우나''("이오니아인")라고 불렀지만, 마케도니아인을 ''야우나 타카바라'' 또는 "방패처럼 생긴 모자를 쓴 그리스인"과 구별했다.[305]
현대 학술 담론은 마케도니아인의 그리스 세계 내 위치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한 학파는 마케도니아인이 남부 그리스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고대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했던 "진정한 그리스인"이었다고 말한다.[261] 또 다른 관점은 마케도니아인이 원래 헬레니즘화 과정을 거친 비(非)그리스 부족이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314][315]

5. 참고 문헌
다음은 고대 마케도니아인 문서의 "참고 문헌" 섹션에 대한 위키텍스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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