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랑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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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랑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고랑포와 개성 지역에서 시작된 전투이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고랑포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다. 국군은 13연대 3대대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으나,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임진강선으로 후퇴했다. 이후 한강 도하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여 많은 병력이 피해를 입었으며, 북한군은 김포 지역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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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랑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분쟁 | 고랑포 전투 |
| 전체 | 한국 전쟁 |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
| 장소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고랑포, 청단 |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대한민국 성공적인 철수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 |
| 대한민국 |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고한조 제1대대장 대위 고임현 대리 대위 6월 25일부터 정영홍 제2대대장 소령 김재명 제3대대장 소령 전성호 제12연대장 대령 김점곤 제12연대장 중령 6월 26일부터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2대대장 소령 이무중 제3대대장 소령 김익열 제13연대장 대령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윤천봉 제2대대장 소령 유재성 제3대대장 소령 노재현 제6포병대대장 소령 장치은 공병대대 소령 최영희 제15연대장 대령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박희동 제20연대 제3대대장 소령 유해준 서울 특별연대장 중령 김병화 보도교도대장 소령 김응용 육사교도대장 소령 유재흥 제7사단장 준장 경찰 김기태 장단경찰서 경비주임 김기태 경위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최광 제1사단장 소장 황석 제1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2연대장 대좌 이창권 제3연대장 총좌 현학봉 포병연대장 대좌 방호산 제6사단장 소장 김후진 제13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14연대장 대좌 김현기 제15연대장 대좌 임해민 포병연대장 총좌 |
| 병력 규모 | |
| 대한민국 | 제1보병사단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제1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
| 피해 규모 | |
| 사상자 1 | 알 수 없음 |
| 사상자 2 | 알 수 없음 |
| 한국 전쟁 관련 정보 상자 | |
| 전역 상자 | 국경 전투 및 제1차 서울 전투 |
| 내용 | 개성-문산 고랑포 봉일천 김포반도 오류동 의정부 동두천 포천 춘천-홍천 강릉 내촌-태릉 창동 미아리 한강 인도교 폭파 서울 점령 인민군의 한강 도하 |
2. 배경
1948년 1월 초, 국군 제1사단이 38도선에 최초로 경비대를 파견하면서 고랑포 전투의 배경이 시작되었다. 당시 문산 북쪽 임진강 나루에는 소수의 미군만 배치되어 있었고,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북한군의 침범이 잦았다. 이에 초대 여단장 송호성 준장은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보병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미군과 합동으로 근무하게 했다.[1]
1948년 2월 5일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부임했고, 그해 가을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11월에 사단은 수원에 위치한 제11연대를 문산으로 이동시켜 미 제7사단 32연대로부터 38도 분계선 경비 임무를 인수받았다.
그러나 당시 38도 분계선 경비는 주요 간선도로 요지에 경비 초소만 설치했을 뿐, 전술적으로 유리한 요충지는 비어 있는 무방비 상태였다. 반면 북한군은 이러한 요충지를 미리 점거하여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1]
1950년 4월 22일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고랑포에서 청단에 이르는 100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은 사단의 방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삼는 새로운 방어 계획을 구상했다.
2. 1. 38선 경비 임무
1948년 1월 초, 국군 제1사단은 38도 분계선에 최초로 경비대를 파견하였다. 당시 문산 북쪽 임진강 나루에는 소수의 미군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북한군의 침범이 잦았다. 이에 초대 여단장 송호성 준장은 경계 강화를 위해 보병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미군과 합동 근무를 시켰다.[1]1948년 2월 5일, 이응준 대령이 제2대 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가을부터 주한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11월에 사단은 수원에 있던 제11연대를 문산으로 이동시켜 미 제7사단 32연대로부터 38도 분계선 경비 임무를 인수받았다. 이로써 고랑포 서쪽의 서부 38도 분계선 경비를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1]
당시 38도 분계선 경비는 주요 간선도로 요지에 경비 초소만 설치했을 뿐, 전술적으로 유리한 요충지는 비어 있어 무방비 상태였다. 반면 북한군은 이러한 요충지를 미리 점거하여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1]
1950년 4월 22일,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사단 전 지역을 순시하였다. 그는 고랑포-청단에 이르는 100km의 정면을 방어하기 위한 기존 작전계획이 사단의 방어 한계를 초과한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방책을 강구했다.[1]
북한군의 주공 방향이 고랑포 부근이 될 것으로 판단한 백선엽 사단장은 사단의 주 전력을 임진강선으로 전환하면 방어 정면이 20여km로 축소될 뿐만 아니라,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임진강의 자연 장애물로 보완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1]
이에 따라 사단은 임진강 선에 새로운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사단 병력은 10,100명 내외였으며, 장비는 105mm 곡사포(M3) 15문, 57mm 대전차포 18문, 81mm 박격포 36문, 60mm 박격포 54문, 그리고 편제상의 2.36인치 로켓포와 각종 기관총 43정을 보유하고 있었다.[1]
그러나 제11연대가 장비한 공용화기의 30%가 육군 본부 지시에 따라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 사이에 후방 기지창으로 후송 정비되어, 연대는 주로 개인 화기만 보유하게 되었다.[1]
2. 2. 전력 약화
1950년 4월 22일,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사단 전 지역을 살펴본 결과, 고랑포-청단에 이르는 100km의 정면을 방어하는 것은 사단의 방어 한계를 초과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의 주 공격 방향을 고랑포 부근으로 예상하고, 사단의 주 전력을 임진강선으로 전환하면 방어 정면이 20여km로 축소되고 병력 및 화력의 열세를 임진강의 자연 장애물로 보완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당시 사단 병력은 10,100명 내외였으며, 장비는 105mm 곡사포(M3) 15문, 57mm 대전차포 18문, 81mm 박격포 36문, 60mm 박격포 54문, 그리고 편제상의 2.36인치 로켓포와 각종 기관총 43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1연대가 장비한 공용화기의 30%가 육군본부 지시에 따라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 사이에 후방 기지창으로 후송 정비되어, 연대는 주로 개인화기만을 보유하게 되었다.[1]
3. 작전 계획
1950년 5월 초,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 책임 지역 내 38도 분계선 경비와 북한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다.[1] 이에 따라 제13연대는 고랑포-대원리 구간의 38도 분계선 경비를, 제11연대는 임진강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3. 1. 방어 계획
1950년 5월 초,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사단 책임 지역 내 38도 분계선 경비와 북한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다.이에 따라 제13연대는 유재성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로 하여금 고랑포-대원리(28km) 구간의 38도 분계선 경비를 계속 수행하게 하였다. 또한 화석동의 연대본부 지역에 위치한 제1대대를 연대 우일선으로 삼아 마지리(파평산: 적성 남쪽)-금파리 사이에 배치하고, 제2대대를 연대 좌일선으로 금파리 서단-율곡리(208고지) 사이에 배치하여 각각 주진지를 편성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북한군 기계화 부대의 접근로로 예상되는 방어 전면 동서를 횡단하는 320번 도로와 주진지 전방에 돌출된 자하리로부터의 적 접근을 방해하고, 임진강 북쪽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하였다. 제3대대가 임진강 이남으로 철수한 뒤에는 연대 예비로서 금곡리(파평산 측후방) 부근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수색의 제11연대는 사단의 좌일선으로, 예하 제2대대를 연대 우일선으로 삼아 화석동-율곡리 사이에 배치하여 임진강 나루터 서쪽의 예상 도하 지점을 방어하게 하였다. 제1대대는 연대 좌일선으로 임진강교 남안의 마정리 일대에 배치되어 임진강 북쪽 부대의 철수 엄호와 다리를 통한 적의 접근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4. 전투 과정
고랑포와 개성 지역에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포성과 함께 북한군(조선인민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38도선 경비 진지와 주변 부락은 순식간에 포연에 휩싸였다.[1]
이전에도 여러 차례 포격이 있었기에 단순 위협 사격으로 여겨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포격은 거세졌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1]
기습을 받은 국군 경비 부대는 북한군의 우세한 전력에 밀려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분산되었다. 사단은 문산의 제13연대에게 주 진지 점령을 명령하고, 수색의 제11연대를 투입하여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1]
고랑포-대원리 간 38도선 경비 임무를 맡은 제13연대 3대대는 아곡동에 지휘소를 두고, 제10중대(우측), 제11중대(좌측), 제9중대(예비대)를 배치했다.[1]
새벽 4시 30분,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사내동 중대본부에서 포성을 듣고 깨어, 112고지(고랑포 북동쪽 2km) 경비 중인 제1소대로부터 적 공격 보고를 받았다. 박 중위는 대대에 보고 후 증원을 위해 출동했으나, 고랑포 시내에서 북한군 선두 부대와 교전했다. 60mm 박격포와 소총으로 대응했으나, 옅은 안개로 조준이 어려웠다. 안개가 걷히자 임진강을 건너는 북한군을 발견, 53고지에서 적기를 흔드는 것을 확인하고 화력을 집중했으나, 적의 반격에 직면했다.[1]
제11중대는 1소대를 대덕산(236고지)에, 2소대를 154고지와 주변 무명봉우리에 분산 배치했다. 새벽 4시 30분, 대덕리 일대에 포탄이 떨어져 비번 근무 소대원들이 뛰쳐나왔고, 박구서 중사가 경계 분초 확인 중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1]
아곡동 대대 숙영지에서 제9, 12중대는 전투 준비 중이었다. 유재성 소령은 91고지와 181고지 동쪽 무명봉우리를 점령, 장단 도로를 통제하고 철수 엄호 및 적에게 타격을 주려 했다. 그러나 북한군 전차 7대가 남하하고, 장단경찰서 트럭 1대가 전차포에 파괴되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다.[1]
김일하 병장은 당시 국군이 북한군 전차와 아군 장갑차를 구분 못해 혼란스러워했다고 증언했다. 제9중대장 이종근 중위는 로켓포와 박격포로 전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북한군 1개 중대가 공격해 왔다. 유재성 소령은 특공대를 조직해 전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2차례 모두 실패 후 병력을 85고지로 철수시켰다.[1]
대대 병력은 오후 5시 동판리에서 제10중대와 합류, 일월봉(191고지)에서 재배치 후 밤 10시 30분 나룻배로 임진강을 건너 금곡리에 집결했다.[1]
4. 1. 조선인민군의 기습
고랑포와 개성 지역에서는 새벽부터 내린 비가 가랑비로 바뀌며 땅을 적시고 있었다. 이때 갑작스러운 포성이 울리며 38도선 경비 진지와 주변 부락이 북한군(조선인민군)의 포격에 휩싸였다.[1]이러한 포격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기에 단순한 위협 사격으로 여겨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포격은 더욱 거세졌다. 곧이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1]
불의의 기습을 받은 경비 부대는 북한군의 우세한 전력에 밀려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에 사단은 문산의 제13연대에게 주 진지를 점령하도록 명령하고, 수색의 제11연대를 투입하여 임진강에서의 방어전을 준비했다.[1]
고랑포에서 대원리 사이의 38도선 경비 임무를 맡은 제13연대 3대대는 아곡동(장단 북쪽)에 지휘소를 두고, 예하 중대를 배치했다. 제10중대는 우측, 제11중대는 좌측에 배치되었고, 제9중대는 대대본부 근처에 예비대로 배치되었다.[1]
새벽 4시 30분,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사내동(고랑포 서남쪽 3km) 중대본부에서 포성을 듣고 잠에서 깼다. 제1소대는 112고지(고랑포 북동쪽 2km)에서 주변 도로를 경비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남북 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다.[1]
112고지에서 2차 보고를 받은 박형수 중위는 대대에 보고하고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 중대본부 병력으로 출동 준비를 했다. 이때 대대장 윤재성 소령은 전화로 "최선을 다해 고랑포 지역을 사수하라"고 지시했다.[1]
박형수 중위는 중대를 이끌고 112고지로 향했으나, 고랑포 시내에서 북한군 선두 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중대는 급히 임진강변으로 이동, 59고지 앞 능선에 배치되어 60mm 박격포로 대응했다.[1]
가랑비와 옅은 안개로 시야가 좋지 않아 조준 사격이 어려웠지만, 안개가 걷히자 임진강을 건너는 북한군이 보였다. 처음에는 아군으로 오인했으나, 53고지 정상에서 북한군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보고 적임을 확인,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사격을 집중했다.[1]
한편, 제11중대는 1소대를 대덕산(236고지)에, 2소대를 154고지와 주변 무명봉우리에 분산 배치했다. 새벽 4시 30분, 대덕리 일대에 떨어진 포탄으로 소대원들이 밖으로 나왔고, 박구서 중사가 전방 경계 초소 확인을 위해 나가려다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1]
아곡동의 대대본부와 제9, 12중대는 전투 준비 중이었고, 대대장 천막에는 전방 중대로부터 북한군의 남침 보고가 들어왔다. 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춘양동(대대 숙영지 전방 2km)의 91고지와 181고지 동쪽 무명봉우리를 점령, 장단으로 가는 도로를 통제하여 철수 엄호와 추격하는 적에게 타격을 주기로 결정했다.[1]
제9, 12중대가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 북한군 포탄이 숙영지에 떨어지고 전차 7대가 남하했다. 장단경찰서 소속 트럭 1대가 북한군 전차의 직사포에 파괴되었는데, 이는 장단경찰서 경비주임 김기태 경위가 무장경찰관 21명을 이끌고 고랑포로 가던 중이었다. 생존자는 6명뿐이었다.[1]
제12중대 기관총 반장 김일하 병장은 당시 아군과 북한군 전차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증언했다. 북한군 전차가 경찰 차량을 파괴한 후, 제9중대장 이종근 중위는 로켓포와 81mm 박격포 사격을 지시했으나 전차는 멈추지 않았다.[1]
북한군 1개 중대가 공격해오자, 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제9중대 1소대장 장두철 중위 등 8명으로 특공대를 조직, 공격했으나 모두 전사했다. 다시 특공대를 모집, 김일하 병장 등 7명이 수류탄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대대는 85고지로 철수했다.[1]
대대 병력은 오후 5시 동판리(임진 나루터 대안)에서 제10중대와 합류, 일월봉(191고지)에서 재배치 후 밤 10시 30분 나룻배로 강을 건너 금곡리 부근에 집결했다.[1]
4. 2. 국군의 저항과 후퇴
고랑포와 개성 지역에 가랑비가 내리던 새벽, 포성과 함께 북한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13연대 3대대는 아곡동에 지휘소를 두고, 제10중대를 우일선, 제11중대를 좌일선, 제9중대를 예비대로 배치하여 38도 분계선을 경비하고 있었다.[1]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사내동 중대본부에서 포성을 듣고, 112고지(고랑포 북동쪽 2km)를 경비하던 제1소대로부터 적의 공격 보고를 받았다. 박형수 중위는 대대에 보고 후 증원을 위해 출동했으나, 고랑포 시내에서 적의 선두부대와 마주쳐 교전했다. 60mm 박격포와 소총으로 사격했으나, 엷은 안개로 조준이 어려웠다. 안개가 걷히자 임진강을 도하하는 적을 발견, 53고지에서 적기를 흔드는 것을 확인하고 화력을 집중했으나, 적의 반격에 직면했다.[1]
제11중대는 1소대를 대덕산(236고지)에, 2소대를 154고지와 무명봉우리에 분산 배치했다. 새벽 4시 30분, 대덕리 일대에 떨어진 적 포탄으로 비번 근무 소대원들이 뛰쳐나왔다. 박구서 중사가 경계 분초를 확인하러 나갔다가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1]
아곡동 대대 숙영지에서는 제9중대와 제12중대가 전투 준비 중이었다. 대대장 유재성 소령은 91고지와 181고지 동쪽 무명봉우리를 점령하여 장단 도로를 통제하고, 철수하는 중대를 엄호하며 적에게 타격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북한군 전차 7대가 남하하고, 장단경찰서 소속 트럭 1대가 전차포에 파괴되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1]
김일하 병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국군 병사들은 북한군 전차와 국군 장갑차를 구분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제9중대장 이종근 중위는 로켓포와 박격포로 전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개 중대의 적이 공격해 왔다. 유재성 소령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전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2차례 모두 실패하고 병력을 85고지로 철수시켰다.[1]
대대 병력은 17시경 동판리에서 제10중대와 합세, 일월봉(191고지)에서 재배치 후 나룻배로 임진강을 건너 금곡리에 22시 30분에 집결했다.[1]
5. 결과 및 영향
6월 28일부터 6월 29일 사이, 국군 제1사단은 한강 도하 과정에서 큰 혼란과 피해를 겪었다. 많은 병사들이 배를 타지 못해 개별적으로 행동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화산과 봉성산 등 주요 지점을 장악한 북한군 제6사단은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며 국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1]
5. 1. 한강 도하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아침 사이에 각 부대가 행주와 이산포 부근에서 혼란 속에 한강을 도하했으나, 날이 밝자 위험을 느낀 탓인지 차안을 떠난 배들이 대안에 묶인 채 돌아오지 않아 강을 건너지 못한 병력도 적지 않았다.[1]도하 시기를 놓친 이들은 각개행동으로 옮겨 은신처를 찾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적의 공격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1]
6월 28일 밤, 이미 북한군 일부가 김포 비행장을 장악한 듯, 대안의 감제지형인 개화산(130고지)과 그 아래를 남북으로 흐르는 수로와 장방을 점거하여 아군 부대가 접근하자 일제 사격을 가했다.[1]
이 북한군들은 6월 25일 개성에서 영정리(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를 따라온 북한군 제6사단 예하 부대로 추정된다.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도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 통진으로 철수하고, 6월 27일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자 그 뒤를 이어 김포 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인다.[1]
6월 28일 전, 북한군은 행주와 개화동 일대 개활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개화산과 이산포 서북쪽 7km 김포반도 대안 변의 봉성산(129고지)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고, 신전동 138고지를 장악하여 김포가도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1]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 여러 부대가 섞여 질서를 찾지 못하거나 지휘자가 없는 오합지졸은 적의 불시 사격에 강변 갈대밭으로 흩어져 각개행동으로 분산되었다.[1]
5. 2. 한강 방어선 구축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아침 사이에 각 부대가 행주와 이산포 부근에서 혼란 속에서도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으나, 날이 밝자 적으로부터 위험을 느낀 탓인지 차안을 떠난 배들이 대안에서 묶인 채 돌아오지 않아 강을 건너지 못한 병력도 적지 않았다.[1]도하 시기를 놓친 이들은 각개행동으로 옮겨 은신처를 찾은 자도 있었겠으나, 대다수는 적의 공격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1]
6월 28일 밤, 이미 일군의 북한군이 김포 비행장을 장악한 듯, 소규모 부대가 대안의 감제고지인 개화산(130고지)과 그 아래를 남북으로 흐르는 수로와 장방을 점거하여 아군 부대가 접근하자 일제 사격을 가했다.[1]
이 북한군들은 6월 25일 개성에서 영정리(포)로 철수한 제12연대 2대대를 따라온 북한군 제6사단 예하 부대로 추정된다.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도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 통진으로 철수한 후, 6월 27일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자 그 뒤를 이어 김포 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인다.[1]
6월 28일 전, 북한군은 행주와 개화동 일대 개활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개화산과 이산포 서북쪽 7km 김포반도 대안 변의 봉성산(129고지) 등을 점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하고, 신전동 138고지를 장악하여 김포가도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1]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 여러 부대가 섞여 질서를 찾지 못하거나 지휘자가 없는 오합지졸은 적의 불시 사격에 갈대밭으로 뛰어들어 흩어졌다.[1]
6. 참전 부대
고랑포 전투에는 다음과 같은 부대가 참전했다.
'''조선인민군'''에서는 최광 준장이 지휘하는 제1보병사단과 방호산 준장이 지휘하는 제6보병사단이 참전했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백선엽 대령이 지휘하는 제1보병사단이 참전했다.
6. 1. 조선인민군
| 사단 | 지휘관 | 예하 부대 |
|---|---|---|
| 제1보병사단 | 최광 준장 | 제1보병연대 (황석 대좌), 제2보병연대 (김양춘 대좌), 제3보병연대 (이창권 상좌), 포병연대 (현학봉 대좌) |
| 제6보병사단 | 방호산 준장 | 제13보병연대 (김후진 대좌), 제14보병연대 (한일래 대좌), 제15보병연대 (김현기 대좌), 포병연대 (임해민 상좌) |
6. 2. 대한민국 국군
백선엽 대령이 지휘하는 제1보병사단 예하 부대는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World armies
https://archive.org/[...]
Facts on File
2011-08-25
[2]
문서
경찰관 특공대 지휘, 15명 전사 후 군부대로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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