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렬
1. 개요
김익렬은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육군 보병학교, 국방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으며,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 4연대 작전과장, 제주 9연대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 김달삼과 회담을 진행했으나, 이후 9연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제14연대장으로 보직되었으나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으로 해임되었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임진강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는 제1군단장, 제2군단장, 전투병과 교육사령관, 국방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9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1988년 사망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씨명 | 김익렬 |
|---|---|
| 한자 표기 | 金益烈 |
| 로마자 표기 | Gim Ik-ryeol |
| 출생 | 1921년 |
| 출생지 | 경상남도하동군 |
| 사망 | 1988년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소속 | 대일본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
| 최종 계급 | 소위 (일본 육군) 중장 (한국 육군) |
| 복무 기간 | 1943년 ~ 1945년(일본제국 육군) 1946년 ~ 1969년(대한민국 육군)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 지휘 경력 | 육군 7여단 제9연대장 육군 제 5여단 14연대장 육군제1보병여단 제13연대 육군 제6보병사단 제19연대장 육군 제8보병사단장 육군 제7보병사단장 육군 제1관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 제2군단장 국방대학원장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국장 |
| 근무 | 육군 제2군단 육군본부 |
| 훈장 | 을지무공훈장 |
| 기타 이력 |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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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업인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기업인 -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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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불교도 -
추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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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불교도 -
김희옥
김희옥은 검사 출신 법조인으로서 법무부 차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고 동국대학교 총장,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 KBL 프로농구연맹 총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회장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교육자, 스포츠인, 정치인이다. -
육군보병학교 동문 -
김종필
5·16 군사정변 주역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여와 '김-오히라 메모' 논란, 9선 국회의원, DJP 연합을 통한 총리 재임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지역주의 정치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
육군보병학교 동문 -
임동원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임동원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군과 정부의 요직을 거쳐 나이지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으나, 제2연평해전 발언과 불법 감청 혐의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3. 생애 및 군 경력
김익렬은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4.3사건 당시 제9연대장, 여수 14연대장, 온양 13연대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임진강 전투에서 용전했으며, 미국 공군의 오폭으로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제6사단 19연대장, 제11사단 부사단장, 제5사단 35연대장 및 부사단장, 제8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54년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에 유학했으며, 1955년 제7사단장이 되었다. 1957년부터 국방대학원에 재학, 졸업 후 육군본부 수송감을 역임했다. 1960년 제1관구 사령관, 1961년 전라북도 지구 계엄사무소장을 역임했다. 1962년 제1군단장 및 제2군단장을 역임하고 1963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65년 전투병과 교육사령관, 1967년 국방대학원 원장 겸 합동참모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1969년 예비역으로 편입했다.
3.1. 초기 생애 및 일본군 복무
김익렬은 1919년 6월 5일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태어났다. 고베 상업학교를 수료한 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후쿠지야마(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되어 복무하다가 8.15 해방 후 귀국하였다.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수료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광주 4연대 작전과장을 했으며, 장교 보수 교육을 받은 후 1947년 9월 초 제주도의 제9연대 1대대장으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연대가 창설 중이어서 1대대의 참모는 없고, 2개 중대 뿐인 병력은 연대장이 직접 장악하고 있어서 부연대장으로 행세하였다. 이후 연대장인 이치업 중령이 1948년 2월에 다른 곳으로 전출되자 1948년 2월 1일부로 제9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 3월 15일 중령 진급)
3.2. 국군 임관 및 제주 9연대장 시절
김익렬은 1946년 1월 15일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수료하였다. 임관 후 광주 4연대 작전과장을 했으며, 장교 보수 교육을 받은 후 1947년 9월 초에 제주도의 제9연대 1대대장으로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연대가 창설 중이어서 1대대의 참모는 없고, 2개 중대 뿐인 병력은 연대장이 직접 장악하고 있어서 부연대장으로 행세하였다. 1948년 2월에 연대장인 이치업 중령이 다른 곳으로 전출되자, 김익렬은 2월 1일부로 제9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 3월 15일 중령 진급)
김익렬 연대장은 취임 2개월 만에 4.3 사건을 맞이했는데, 처음에는 경찰과 남로당 간의 사건, 즉 치안사건으로 판단하여 경비대는 수수방관하였다. 그러다가 4월 16일이 되어서야 미 군정으로부터 경비대에 출동 명령이 떨어졌고, 제9연대에게도 17일자로 출동 명령이 내려왔다.
김익렬 연대장은 4.3사건 진압을 위한 병력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딘 군정장관의 지침에 따라 4월 28일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겸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항복을 전제로 단독회담을 가졌다. 5월 5일에는 딘 군정장관이 주재한 4.3사건 대책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이 인신공격을 하자 멱살잡이를 하는 등 몸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합의 내용 |
|---|
김익렬은 이 합의에 대해 “폭도 전원에 대한 무죄사면이나 다름없다” 고 평가하였으며, 이 회담을 평화회담이라고 명명하였다.
5월 3일, 입산자 200~300명이 귀순하겠다고 연락하여 미 고문관 드르스 대위와 미군 및 한국군 9명이 호송하여 하산하던 중 오라리 부근에서 50여 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다. 하산 중이던 주민들은 산으로 도망쳤고, 호송 병사들은 반격하여 5명을 사살하고 부상자 몇 명을 생포하여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제주경찰서 소속 특공대라고 했는데, 경찰 측에 확인하니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하고 경찰과 경비대를 이간시키기 위해 저지른 소행”이라는 답변이 왔다. 이 사건은 경비대와 유격대 간의 신뢰가 깨지는 사건이 되었다.
딘 군정장관은 김익렬-김달삼 간 협상안이 탐탁지 않은 데다가 귀순자 총격사건이 발생하자 4.3사건 대책회의의 필요성을 느끼고 5월 5일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이 김익렬 중령과 그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인신공격을 하자, 격분한 김익렬이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육박전을 벌였다. 이를 말리는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하자 급소를 맞았는지 비명을 질렀고,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회의장을 경계하던 헌병들이 개입하여 겨우 두 사람을 떼어 놓았으나 회의는 이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김익렬은 다음날 9연대장직에서 보직해임되었다.
3.3. 제주 4.3 사건
김익렬은 4.3사건 발발 당시 제9연대장으로 취임한 지 2개월 만에 사건을 맞았다. 초기에는 경찰과 남로당 간의 치안 사건으로 판단하여 경비대는 수수방관했다. 그러나 4월 16일 미 군정의 출동 명령이 떨어졌고, 제9연대에도 4월 17일자로 출동 명령이 내려왔다.
김익렬은 4.3사건 진압을 위한 병력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딘 군정장관의 지침에 따라 4월 28일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겸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항복을 전제로 단독회담을 가졌다. 5월 5일에는 딘 군정장관 주재 4.3사건 대책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의 인신공격에 멱살잡이를 하는 등 몸싸움을 벌였고, 다음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김익렬은 4.3사건을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불법행위에 저항한 민중폭동으로 보았다. 그는 제주도 출신 병사들과 지인들로부터 남로당 측의 선전성 정보만 믿고, “대일무역업자들과 그 가족들이 불법밀수혐의로 구속된 가족과 친척들을 구출하기 위해 감행된 실력행사인 동시에 원한에 대한 보복”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경비대 군인들 중에는 공산주의 사상이나 이념을 가지고 군에 자원입대한 사람은 거의 없다”, “제주도에는 공산주의자가 거의 전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김익렬은 자신의 측근인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가 남로당 프락치였고, 부하인 고승옥 상사가 남로당 측에 “연대 병력 800명 중 절반인 400명은 동원 확실성이 있다”고 보고할 정도로 부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한 제주사회도 4.3사건 발발 당시 남로당 당원이 5,000~6,000명이었고, 초여름까지는 30,000명으로 급증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익렬은 딘 군정장관의 “경비대의 공격에 앞서 소요집단 지도자와 접촉해서 항복할 기회를 주라”는 지침에 따라 김달삼과의 회담을 추진했다. 4월 28일 단독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를 이끌어냈다.
| 번호 | 내용 |
|---|---|
| 1 | 72시간 내 전투 행위 금지 |
| 2 | 단계적 무장해제 (무기 자진 반납) |
| 3 | 친일관리 및 경찰 해직/추방, 범죄 서북청년단원 추방 |
| 4 | 경찰 인원 감축 및 개편 |
| 5 | 폭동 참가자 불문에 부침, 살인/방화 범법자는 명단 제출하되 자수/도망은 자유.(이면합의: 김달삼 등 두령급은 일본 탈출 배려, 배 한척 제공) |
| 6 | 다음날 정오까지 모슬포 9연대 영내와 제주읍 비행장에 귀순자 수용소 설치, 추후 서귀포/성산포에도 설치 및 경비대 관리 |
김익렬은 이 합의를 “폭도 전원에 대한 무죄사면이나 다름없다”고 평가하며, 평화회담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5월 3일, 귀순자들이 오라리 부근에서 괴한의 기습사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호송 병사들이 반격하여 5명을 사살하고 부상자를 생포하여 조사한 결과 제주경찰서 소속 특공대로 밝혀졌으나, 경찰은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하여 이간질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경비대와 유격대 간의 신뢰는 깨졌다.
딘 군정장관은 김익렬-김달삼 간 협상안에 불만을 품고, 귀순자 총격사건까지 발생하자 5월 5일 4.3사건 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경비대 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민정장관 안재홍, 제주도 민정관 맨스필드 중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등이 참석했다. 조병옥 경무부장이 김익렬과 그의 부친을 공산주의자라고 인신공격하자, 격분한 김익렬이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육박전을 벌였다. 회의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김익렬은 다음날 9연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3.4. 4.3 사건 이후의 군 경력
김익렬은 1948년 4.3사건 당시 제9연대장으로, 처음에는 이 사건을 경찰과 남로당 간의 치안 사건으로 판단하여 경비대는 수수방관하였다. 그러나 4월 16일 미 군정으로부터 경비대 출동 명령을 받고, 4월 28일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겸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항복을 전제로 단독 회담을 가졌다. 5월 5일에는 딘 군정장관이 주재한 4.3사건 대책회의에 참석했으나, 조병옥 경무부장과의 갈등으로 몸싸움을 벌였고, 다음 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6월 16일 여수의 제14연대장에 보직되었으나, 후임이었던 박진경 대령이 6월 18일 암살되자 암살 배후로 의심받아 7월 15일 제14연대장 직에서 해임되고 서울 특무부대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고, 8월 8일 온양의 제13연대장이 되었다. 특무부대 조사를 받은 것은 김익렬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만약 제14연대장직에 그대로 있었다면 여·순 사건의 반란부대장이 되어 파면되었을 것이다.
김익렬은 제1여단 13연대장이 되면서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되자 백선엽 대령의 제1사단 예하부대가 되었으며, 6.25 전쟁 초전에는 고전했으나 결국 승리 부대가 되었다.
4. 4.3 사건 이후의 활동
김익렬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는 등 군 복무를 하였다. 1967년에는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군에서 물러난 후, 1979년 5월부터 1981년 2월까지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다. 1988년에 사망했으며, 같은 해 12월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6. 대중 매체
MBC 주말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년)에서 배우 이효정이 김익렬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