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리 미쓰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모리 미쓰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로, 나가노현 마쓰모토 시립 고등학교와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선수 시절에는 마이니치 오리온스, 긴테쓰 버팔로스에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며 1965년에는 타율 .271을 기록했다. 1966년 은퇴 후에는 긴테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쿠르트 스왈로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등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으며, 지도자 생활 틈틈이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은퇴 후에는 시즈오카현 이즈시에서 펜션을 운영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다이마이 오리온스 선수 - 스기시타 시게루
스기시타 시게루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 코치, 감독으로 투수로서 활약했으며,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6년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일본 시리즈 MVP와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다이마이 오리온스 선수 - 도이 쇼스케
도이 쇼스케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고쿠테쓰 스왈로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이마이 오리온스에서 유격수로 활동했고, 은퇴 후 일본과 대만, 한국 프로 야구팀 코치를 맡아 지도자로서 KBO 리그 발전에 기여하며 한국 야구계에 영향을 미쳤다. - 마이니치 오리온스 선수 - 사토 헤이시치
사토 헤이시치는 홋카이도 출신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퍼시픽 리그 첫 우승에 기여했고 1951년 올스타전에도 출전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였다. - 마이니치 오리온스 선수 - 고 쇼세이
고 쇼세이는 가노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활약하며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은 대만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요미우리와 한신에서 모두 주력 선수로 활약, 2년 연속 수위 타자 및 최우수 훈장 선수 수상, 은퇴 후 사업가, 귀화 후 이시이 마사유키로 개명,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긴테쓰 버펄로스 선수 - 노모 히데오
노모 히데오는 독특한 투구폼으로 유명하며 NPB와 MLB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일본의 前 프로 야구 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로, 일본 선수들의 메이저 리그 진출 붐을 일으킨 선구자이다. - 긴테쓰 버펄로스 선수 - 백인천
백인천은 중화민국 출신의 대한민국 야구 선수 및 감독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하며, KBO 리그에서 1982년 최고 타율을 기록하고, LG 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고모리 미쓰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선수명 | 고모리 미쓰오 |
원어명 | 小森 光生 |
로마자 표기 | Mitsuo Komori |
![]() | |
국적 | 일본 |
출신지 |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
생년월일 | 1931년 11월 2일 |
신장 | 174cm |
체중 | 71kg |
수비 위치 | 내야수, 외야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54년 |
첫 출장 | 1954년 |
마지막 경기 | 1966년 |
선수 경력 | |
선수 |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4년 ~ 1961년) 긴테쓰 버펄로스 (1962년 ~ 1966년)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감독 및 코치 | 긴테쓰 버펄로스 (196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8년 ~ 1971년) 야쿠르트 스왈로스 (1974년 ~ 1981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82년 ~ 1984년) |
학력 | |
출신 학교 | 나가노현 마쓰모토 시립 중학교 (구제) 마쓰모토 시립 고등학교 (학제 개혁에 따라 재편) 와세다 대학 |
2. 선수 경력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년차부터 주전 3루수로 활약하며 규정 타석을 채웠으나, 이후 2루수, 외야수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기용되었다. 1962년 긴테쓰 버펄로스로 이적 후에도 3루수, 외야수, 2루수로 활약했고, 1965년에는 개인 최고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아마추어 시절
구제 마쓰모토 시립 중학교(학제 개혁으로 1948년부터 마쓰모토 시립 고등학교로 재편) 시절인 1946년 전후 첫 하계 고시엔 대회에 대기 선수로 벤치에 들어갔고, 이 대회 8강전에서 도쿄 고등 사범 부속 중학교에게 패했다. 1949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3루수로 출전하여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사사키 신야 등이 소속된 쇼난 고등학교에게 9회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11] 졸업 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도쿄 6대학 리그에서 재학 중 네 차례 우승했다. 히로오카 다쓰로와 ‘키스톤 콤비’를 이뤄 화려한 수비 플레이로 인기를 누렸다. 리그 통산 78경기에 출전하여 290타수 74안타, 0홈런, 44타점, 타율 2할 5푼 5리를 기록했다. 히로오카 이외의 대학 동기로는 투수 후쿠시마 가즈오가 있다.2. 2. 프로 선수 시절
1954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프로 1년 차부터 3루수로 활약하며 규정 타석(45위, 타율 0.208)을 채웠다.[4] 1957년에는 가쓰라기 다카오에게 3루수 자리를 내줬지만, 이후 2루수, 외야수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기용됐다. 1960년에는 부상으로 선발 출전 경기가 4경기에 불과했고, 그 해 다이요 웨일스와의 일본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 1961년에는 주로 우익수로서 48경기에 선발 출전하며 부활했다.1962년 긴테쓰 버펄로스로 이적하여[4] 3루수, 외야수, 2루수로 활약했다. 1963년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대타로 출전하여 상대 투수 다카하시 에이이치로에게서 만루 홈런을 쳤다. 1965년에는 개막 이후부터 우익수 자리를 차지하며 개인 최고 타율인 0.271을 기록했고, 5번 타자로도 11경기에 기용됐다. 1966년에는 기타가와 고이치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4]
3. 지도자 경력
고모리 미쓰오는 긴테쓰 버펄로스(1967년 1군 코치), 히로시마 도요 카프(1968년~1970년 1군 코치, 1971년 2군 코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1974년~1975년 1군 코치, 1976년~1981년 2군 감독),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1982년~1984년 1군 수비·주루 코치)에서 감독 및 코치를 역임했다.[4] 후지 TV·닛폰 방송 해설자(1972년~1973년)로도 활동했다.
히로시마 코치 시절에는 기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고지, 미즈타니 지쓰오, 미무라 도시유키 등을 지도하여 팀의 A클래스 진입에 공헌했다. 야쿠르트 2군 감독 시절에는 1980년에 팀을 이스턴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4년 다이요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야구계를 떠나 시즈오카현 이즈시에서 펜션을 운영했다.[4]
3. 1. 코치 스타일
긴테쓰 코치 시절에는 고다마 아키토시 선수 겸임 감독을 지원하며, 야수로 전향한 이세 타카오에게 세키네 준조·네모토 리쿠오의 타격 이론을 가르쳤다.[6] 고모리는 이세에게 빈 스윙 자세부터 테이크 백, 스텝까지 끈질기게 반복하게 했지만, 스윙은 시키지 않았다.[6] 체중을 싣는 방법이나 비트는 방법을 유지하면서 톱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이세는 하반신이 단련되어 하반신으로 볼을 잡는 의식이 생겼다.[6]히로시마 코치 시절에는 젊은 선수 육성을 최우선으로 둔 팀 만들기를 내건 네모토에게 스카우트되어[7], 세키네 준조, 히로오카 다쓰로와 함께 젊은 선수들에게 팀 플레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가르쳤다.[8] 고모리의 지도 아래 팀 전원이 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1970년에는 리그에서 독보적인 팀 109도루를 기록했다.[9]
4. 은퇴 이후
1984년에 다이요 코치직에서 물러난 이후 야구계와 관계를 맺지 않고 시즈오카현 이즈시에서 펜션을 운영했다.[4] 후지 TV·닛폰 방송 야구 해설자(1972년 ~ 1973년)를 맡기도 했다.
5. 상세 정보
고모리 미쓰오는 와세다 대학 출신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이다. 히로오카 다쓰로와 함께 유격수와 3루수를 맡아 이른바 ‘키스톤 콤비’를 이뤄 화려한 수비 플레이로 인기를 얻었다.[4]
- 선수 경력
- 구제 마쓰모토 시립 중학교 시절 하계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 와세다 대학 시절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에서 네 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 1954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4]
-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며, 3루수, 2루수, 외야수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 1962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로 이적,[4] 1966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 1963년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대타 만루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 1965년에는 개인 최고 타율 0.271을 기록하며 5번 타자로도 11경기에 기용됐다.
- 지도자 경력
- 은퇴 후 긴테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쿠르트, 다이요 등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다.[4]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치 시절 기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고지 등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여 팀의 A클래스(1~3위) 진입에 기여했다.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와세다 콰르텟’(早稲田カルテット일본어)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 팀을 이스턴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 기타 경력
- 후지 TV, 닛폰 방송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1972~1973년).
- 1984년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 시즈오카현 이즈시에서 펜션을 운영했다.[4]
- 통산 1000경기 출장: 1965년 8월 5일 (역대 100번째)
5. 1. 출신 학교
- 나가노현 마쓰모토 미스즈가오카 고등학교
- 와세다 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