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누가사 사치오
1. 개요
기누가사 사치오는 1965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내야수로 활약한 일본의 야구 선수이다. 1970년부터 1987년까지 2215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으며, 1984년 센트럴 리그 MVP,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하고, 1996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6년 도루왕, 1984년 타점왕을 차지했으며, 500홈런-200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2018년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 이름 | 기누가사 사치오 |
|---|---|
| 원어 이름 | 衣笠 祥雄일본어 |
| 별명 | 데쓰진 (철인)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지 |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
|---|---|
| 생년월일 | 1947년 1월 18일 |
| 사망일 | 2018년 4월 23일 |
| 신장 | 175cm |
| 체중 | 73kg |
| 利き腕 | 오른손 |
| 타석 | 오른손 |
| 수비 위치 | 3루수, 1루수, 포수 |
| 고등학교 | 헤이안 고등학교 |
|---|---|
| 프로 입단 | 히로시마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5년 ~ 1987년) |
| 드래프트 순위 | 알 수 없음 |
| 첫 출장 | 1965년 5월 16일 |
| 마지막 출장 | 1987년 10월 22일 |
| 코치 경력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4년 ~ 1987년) |
| 타율 | 0.270 |
|---|---|
| 안타 | 2,543 |
| 타점 | 1,448 |
| 홈런 | 504 |
| 도루 | 266 |
| 연속 경기 출장 | NPB 기록 2,215경기 |
| 올스타 | 13회 (1971년, 1974년~1977년, 1980년~1987년) |
|---|---|
| 베스트 나인 | 3회 (1975년, 1980년, 1984년) |
| 도루왕 | 1976년 (센트럴 리그) |
| 골든 글러브 | 3회 (1980년, 1984년, 1986년) |
| MVP | 1984년 (센트럴 리그) |
| 타점왕 | 1984년 (센트럴 리그) |
| 쇼리키 마쓰타로상 | 1984년 |
| 국민 영예상 | 1987년 |
| 영구 결번 | 히로시마 도요 카프 #3 |
| 헌액 | 199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
| 자격 | 경기자 헌액 |
| 대표팀 | 일본 국가대표 |
|---|
-
교토시의 야구 선수 -
김성근 (야구인)
김성근은 일본 태생의 대한민국 야구인으로, 선수 시절 좌완 투수, 은퇴 후 여러 프로 팀에서 감독을 맡아 하위팀을 상위권으로 이끌며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 3회를 달성했으나, 혹독한 훈련 방식으로 명장과 혹사 논란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
교토시의 야구 선수 -
히라노 요시히사
히라노 요시히사는 일본프로야구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투수로 활약한 선수로, 오릭스 복귀 후 NPB 통산 200세이브와 150홀드를 동시에 달성한 최초의 투수이자 NPB와 MLB 통산 250세이브를 기록한 베테랑 투수이다. -
히로시마 카프 선수 -
고바 다케시
고바 다케시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 감독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시절 팀을 리그 우승 4회, 일본 시리즈 우승 3회로 이끌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장이다. -
히로시마 카프 선수 -
우에다 도시하루
우에다 도시하루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 시절 일본 시리즈 3연패를 이끈 명장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명구회 -
기타벳푸 마나부
기타벳푸 마나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213승을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로, 일본시리즈 우승과 MVP 수상, 명예의 전당 헌액 등 화려한 선수 경력 이후 야구 해설가, 지도자, 유튜버로 활동했다. -
명구회 -
후루타 아쓰야
후루타 아쓰야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전 포수로서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으로 MVP를 수상하고 도루 저지율 신기록을 세웠으며, 선수회 회장으로서 파업을 주도하여 선수 권익 신장에 기여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을 역임했다.
2. 프로 입단 전
진주군 병사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내가 혼혈이 아니었다면 프로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야구와의 만남은 그의 출생과 관련이 깊다.
헤이안 고등학교에서는 포수로 활약하며 동기인 에이스 우에키 카즈토모와 배터리를 이뤄 1964년 고시엔 대회에 봄, 여름 두 차례 출전했다. 봄의 선발 대회에서는 준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도사고에 패했다. 여름의 선수권 대회에서도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고치고에 패하며 탈락했다. 고등학교 동기로는 포수와 외야수를 겸했던 우메무라 요시히코가 있다.
2.1. 유년 시절
교토부에서 흑인 미군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주둔한 진주군 병사였으며, 기누가사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교토 시립 라쿠토 중학교 입학 당시 유도에 관심이 있어 유도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유도부가 없어 야구부에 들어갔다. 이후 헤이안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고시엔 대회에 포수로 출전했다.
2.2. 학창 시절
교토부에서 흑인 미군과 현지인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입학 당시 유도에 관심이 있어서 유도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중학교에 유도부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야구부에 입단했다. 헤이안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4년에 고시엔 대회에서 수비 포지션인 포수로 출장하는 등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남기기도 했다.
진주군의 병사로 일본에 주둔 중이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내가 혼혈이 아니었다면, 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프로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되고 싶다고 생각했겠지만요"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야구와의 만남은 그의 출생과 무관하지 않다.
고등학교에서는 포수로서 동기 에이스 우에키 카즈토모와 배터리를 이루며 1964년 봄여름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봄의 선발은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에이스 시마무라 세이(게이오대-일본 강관)를 보유한 도사고에 아깝게 패했다. 여름의 선수권은 마찬가지로 준준결승에서, 이 대회에서 우승한 고치고의 미츠우치 카즈키(시바공대-가네보 화학)에게 막혀 패배했다. 다른 고등학교 동기로 포수, 외야수 우메무라 요시히코가 있다.
3. 선수 시절
기누가사 사치오는 고교 졸업 후 1965년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 시라이시 가쓰미 감독의 방침에 따라 내야수로 전향했다. 1968년부터 1루수로 1군에 정착했으며, 1975년에는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맹활약했다. 그해 5번 타자로 4번 타자 야마모토 고지와 함께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올스타전에서 야마모토와 2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한 장면은 현재까지도 일본 야구계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빨간 헬멧'(赤ヘル일본어)의 주포로 활약한 기누가사는 1976년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고, 1983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16번째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1984년에는 타점왕을 석권함과 동시에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센트럴 리그 MVP와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히로시마 황금시대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야마모토 고지와의 영문 이니셜을 딴 'YK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만화 철인 28호에서 유래한 '철인'(鉄人일본어)이라는 별명처럼, 기누가사는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1970년 10월 19일부터 1987년 은퇴 경기까지 2215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루 게릭의 세계 기록을 경신한 것으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로부터 국민영예상을 받았다. 히로시마 구단은 그의 업적을 기려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3.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입단
衣笠 祥雄일본어는 1965년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했다. 같은 해 포수로 6경기에 선발 출전했지만, 시라이시 가쓰미 감독의 방침에 따라 1루수로 전향했다. 1967년에는 10월부터 선발로 출전하여 4경기에 3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1968년에는 개막부터 5번 타자로 발탁되어 1군에 정착했다. 같은 해 처음으로 규정 타석(14위, 타율.276)을 채웠고, 21홈런을 기록했다.
3.2. '철인'의 탄생
鉄人일본어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기누가사 사치오는 1970년 10월 1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부터 1987년 10월 22일 은퇴 경기까지 2215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이는 루 게릭이 뉴욕 양키스 시절 세운 종전 세계 기록 2131경기를 훨씬 뛰어넘는 기록이다. 1987년 6월 13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2131경기 연속 출장으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공로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국민영예상을 받았다. 히로시마 구단은 기누가사의 업적을 기려 그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기누가사는 만화 철인 28호에서 유래한 '철인'이라는 별명처럼, 견갑골 골절상을 입고도 경기에 출전할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보였다. 1980년 8월 2일에는 1247경기 연속 출장으로 일본 신기록을 세웠고, 1987년 6월 11일에는 루 게릭의 기록과 타이를, 이틀 뒤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신기록을 달성했다.
그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은 1996년 칼 립켄 주니어가 2632경기를 달성하며 깨졌지만, 여전히 일본 야구 역사에 큰 족적으로 남아있다.
3.3. 주요 기록 및 수상
| 연도 | 기록 | 내용 | 비고 |
|---|---|---|---|
| 1965년 | 첫 출장 | 5월 1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7차전 (주니치 스타디움), 9회초에 사사키 가쓰토시의 대타로 출장 | |
| 1965년 | 첫 선발 출장 | 7월 25일, 다이요 훼일즈와의 1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장 | |
| 1965년 | 첫 안타 | 7월 25일, 다이요 훼일즈와의 1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말에 오이카와 노부시로부터 | |
| 1965년 | 첫 득점 | 7월 25일, 다이요 훼일즈와의 1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말에 오키츠 타츠오의 2점 적시 2루타로 기록 | |
| 1965년 | 첫 홈런・첫 타점 | 8월 22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말에 무라야마 미노루로부터 솔로 홈런 | |
| 1972년 | 100홈런 | 7월 18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4차전 (오카야마현 야구장), 3회말에 에가와 유타카로부터 2점 홈런 | 역대 35번째 |
| 1974년 | 150홈런 | 6월 9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9차전 (주니치 스타디움), 8회초에 미사와 아츠시로부터 좌월 역전 결승 3점 홈런 | 역대 68번째 |
| 1975년 | 1000경기 출장 | 4월 24일, 다이요 훼일즈와의 3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5번・3루수로 선발 출장 | 역대 178번째 |
| 1976년 | 1000안타 | 5월 22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7차전 (나고야 구장), 4회초에 미사와 아츠시로부터 중전 안타 | 역대 95번째 |
| 1976년 | 200홈런 | 8월 28일, 다이요 훼일즈와의 20차전 (가와사키 구장), 1회초에 네모토 타카시로부터 중견수 왼쪽으로 선제 솔로 홈런 | 역대 25번째 |
| 1976년 | 사이클링 히트 | 7월 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6차전 (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 | 역대 28번째, 1회 선두 타자 홈런으로 사이클링 히트 달성은 NPB 사상 최초 |
| 1978년 | 250홈런 | 6월 8일,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와의 9차전 (가와사키 구장), 2회초에 타무라 마사오로부터 2점 홈런 | 역대 14번째 |
| 1978년 | 1500경기 출장 | 9월 25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2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7번・3루수로 선발 출장 | 역대 60번째 |
| 1980년 | 1500안타 | 4월 9일,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와의 2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말에 노무라 오사무로부터 중전 안타 | 역대 37번째 |
| 1980년 | 300홈런 | 6월 1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9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회말에 후지사와 키미야로부터 솔로 홈런 | 역대 13번째 |
| 1980년 | 1000삼진 | 9월 6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회말에 에모토 타케노리로부터 | 역대 6번째 |
| 1981년 | 3000루타 | 7월 21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2회초에 쿠도 카즈히코로부터 솔로 홈런 | 역대 17번째 |
| 1982년 | 1000타점 | 4월 4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에 미즈타니 히로아키로부터 2점 홈런 | 역대 14번째 |
| 1982년 | 350홈런 | 4월 10일,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와의 2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말에 노무라 오사무로부터 좌월 3점 홈런 | 역대 11번째 |
| 1982년 | 1000득점 | 6월 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0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5회말에 야마모토 코지의 적시타로 득점 | 역대 17번째 |
| 1982년 | 2000경기 출장 | 8월 29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2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번・3루수로 선발 출장 | 역대 18번째 |
| 1983년 | 3500루타 | 7월 10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3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2회초에 쿠도 카즈히코로부터 좌중간으로 선제 솔로 홈런 | 역대 12번째 |
| 1983년 | 2000안타 | 8월 9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5회말에 고바야시 시게루로부터 좌전 안타 | 역대 16번째 |
| 1983년 | 300 2루타 | 9월 1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9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4회초에 노무라 오사무로부터 | 역대 24번째 |
| 1983년 | 400홈런 | 9월 15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2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미야모토 켄지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 역대 9번째 |
| 1985년 | 4000루타 | 7월 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0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6회초에 후쿠마 오사무로부터 좌중간 2루타 | 역대 9번째 |
| 1985년 | 450홈런 | 7월 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0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8회초에 야마모토 카즈유키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 역대 8번째 |
| 1986년 | 350 2루타 | 5월 1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말에 니시모토 세이로부터 우익선 2루타 | 역대 16번째 |
| 1986년 | 2500경기 출장 | 8월 1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번・1루수로 선발 출장 | 역대 4번째 |
| 1986년 | 1500삼진 | 8월 1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에 미야코 유지로로부터 | 역대 최초 |
| 1987년 | 2500안타 | 6월 14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1차전 (도쿠야마시 야구장), 4회말에 에모토 코이치로부터 솔로 홈런 | 역대 4번째 |
| 1987년 | 500홈런 | 8월 1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말에 오바나 타카오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 역대 5번째 |
* 2215경기 연속 출장 (1970년 10월 19일 - 1987년 10월 22일) ※일본 기록
* 678경기 연속 풀 이닝 출장 (1974년 4월 17일 - 1979년 5월 27일)
* 통산 9404타수 ※센트럴 리그 기록
* 통산 161사구 ※센트럴 리그 기록
* 통산 267병살타 ※센트럴 리그 기록
* 최다 안타: 1회 (1972년) ※1994년부터 표창
* 22년 연속 시즌 도루 (1966년 - 1987년) ※히로세 스미코와 타이기록
* 20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 (1968년 - 1987년) ※역대 4위 타이
* 13년 연속 시즌 20홈런 이상 (1974년 - 1986년) ※역대 3위 타이
* 5경기 연속 홈런 (1971년 6월 6일 - 6월 10일)
* 2경기 연속 초구 선두 타자 홈런 (1977년 10월 4일 - 10월 5일)
* 1이닝 2사구: 1976년 8월 31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6차전 (나고야 구장), 3회초에 아오야마 히사토・카나이 마사유키로부터 ※일본 기록
* 대타의 대타 만루 홈런: 1973년 10월 10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 ※NPB 사상 최초
* 동일 구장에서 1000안타 (히로시마 시민 구장 ※동 구장에서는 야마모토 코지도 달성)
* 동일 구장에서 200홈런 (히로시마 시민 구장 ※동 구장에서는 야마모토 코지도 달성)
* 통산 자이언츠전 최다 홈런: 101개
* 올스타전 출장: 13회 (1971년, 1974년 - 1977년, 1980년 - 1987년)
4. 은퇴 이후
TBS와 아사히 신문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니혼 TV에도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했다. 현역 시절부터 은퇴 후까지 히로시마 현 구레시의 된장 제조 회사인 ‘마스야 된장’의 CF 모델로도 활동했다.
199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8년 4월 23일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1세.
은퇴 후 1988년부터 2018년 중반까지 30년 이상 도쿄 방송 (TBS)의 야구 해설가를 맡았고, 아사히 신문사에서 칼럼을 연재하며 연예 활동도 병행했다. 니혼 TV 계열 '오후는 ○○ 오모잇키리 텔레비전'에 코멘테이터로 출연했고, 소니의 PC·VAIO 애호가로도 소개되었다.
현역 시절부터 은퇴 후까지 히로시마현구레시에 있는 된장 메이커 '마스야미소'의 CM 모델을 맡았다.
감독이나 코치직은 맡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기누가사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언급했다.
소행성(7826) 기누가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히로시마 출신 소설가·영화 감독인 니시카와 미와는 기누가사의 팬으로, 2015년 소설 '오랜 변명'의 주인공 이름을 기누가사의 승낙을 얻어 '기누가사 사치오'로 명명했다.
* 출연 프로그램 (일부)
5. 한국과의 관계
기누가사 사치오는 아버지가 전후 점령기에 일본에 주둔한 흑인 병사라는 문헌이 많지만, 정작 본인은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고 한다. 기누가사는 어머니의 삶을 존중하여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가 카프에 입단했을 때, 영어를 공부하는 모습을 본 선배 오키츠 타츠오가 "아버지를 찾으러 미국에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다"는 거짓말을 언론에 퍼뜨렸고, 이것이 흑인 병사설로 이어졌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국군 이와쿠니 기지는 전선 기지가 되었다. 기누가사는 이와쿠니 기지에 자주 놀러 갔고, 현지에서 친해진 미군 병사들과 술을 마시곤 했다. 어느 날, 함께 술을 마시던 미군 친구가 다음 날 베트남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야구를 하며 즐기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후 야구에 더욱 진지하게 매달리게 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기누가사 사치오는 ‘빨간 헬멧’(赤ヘル일본어) 군단의 중심 타자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황금기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통산 2543안타(역대 5위), 504홈런(역대 7위), 1448타점(역대 10위), 1372득점(역대 5위) 등 꾸준하고 뛰어난 타격 성적을 남겼으며, 팀 동료였던 야마모토 고지와의 이니셜을 딴 ‘YK포’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강타자로 인정받았다.
1970년 10월 19일부터 1987년 10월 22일까지 2215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루 게릭의 기록을 경신한 세계 신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그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철인’(鉄人일본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히로시마 구단은 그의 업적을 기려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기누가사는 항상 풀 스윙으로 타석에 임하는 선수로, 홈런과 타점이 많은 반면 삼진과 범타도 많았다. 시즌 타율 3할을 넘긴 것은 1984년 단 한 번뿐이었으며, 통산 삼진 수는 1587개(당시 일본 기록), 통산 병살타는 267개(센트럴 리그 기록)였다. 그러나 100삼진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한 번도 없었고, 삼진 수가 리그 최다였던 것도 1970년(81개) 한 번뿐이었다.
그는 뛰어난 홈런과 도루 실적을 바탕으로, 타점왕과 도루왕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전 한신 타이거스의 에모토 마사키는 기누가사에 대해 "맞으면 확실히 홈런이 되기 때문에, 전혀 방심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기누가사는 사구를 맞아도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상대 투수를 배려하는 신사적인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오시마 야스노리는 그의 태도에 대해 "대단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연속 경기 출장 세계 기록을 갱신했을 때, "언젠가, 누군가가 이 기록을 깨주길 바란다. 이 기록의 위대함을 정말 아는 것은, 그 사람뿐일 테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기록은 미국에서도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칼 립켄 주니어가 기록을 경신했을 때 미국에 초청받기도 했다.
한편, 기누가사의 세계 기록 갱신 전후에는 "기록 만들기를 위해 출장하는 것뿐"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실제로 1986년과 1987년에는 경기 후반 대타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고, 한 선수의 기록을 위해 팀 성적을 희생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는 그의 연속 출장 기록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으며,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누마키마치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기누가사 야구장"이 있다.
7. 수상 및 영예
1987년 6월 13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2131경기 연속 출장을 달성하며 루 게릭이 보유한 세계 기록을 경신했고, 같은 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은 그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996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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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다하루에 이어 두 번째로 국민영예상을 받은 야구 선수이며, 나가시마 시게오, 마쓰이 히데키가 뒤를 이었다. 2023년 1월 18일, 구글은 기누가사의 76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구글 두들을 게재했다.
8.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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