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빈다굽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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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빈다굽타는 굽타 제국 황제 찬드라굽타 2세와 드루바데비의 아들로, 바사르 점토 인장에 따르면 "마하라자"로 불렸다. 만드사우르 비문은 그를 칭송하며, 데오가르 비문은 고빈다굽타가 사원을 건립했음을 시사한다. 그의 정치적 지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며, 굽타 왕조의 공식 계승과는 다르게 고빈다굽타가 독립적인 통치자였는지, 총독 또는 섭정이었는지, 쿠마라굽타에게 반란을 일으켰는지 등 여러 추측이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고빈다굽타가 쿠마라굽타의 동생이었고 굽타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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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빈다굽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칭호 | 마하라자 |
아버지 | 찬드라굽타 2세 |
어머니 | 드루바데비 |
왕조 | 굽타 |
종교 | 힌두교 |
출생일 | 4세기 |
사망일 | 5세기 |
통치 정보 | |
직위 | 티라부크티 총독 |
통치 기간 | ? ~ ? |
기타 | |
산스크리트어 표기 | (고빈다굽타) |
2. 정보의 출처
고빈다굽타에 대한 정보는 주로 바사르에서 발견된 점토 인장, 만드사우르 비문, 데오가르 다샤바타라 사원 비문에서 얻을 수 있다.
바사르 점토 인장에서는 고빈다굽타가 굽타 제국 황제 찬드라굽타 2세와 드루바데비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장에는 드루바-스바미니 여왕(아마도 드루바데비와 동일인)이 "위대한 왕 중의 왕" 찬드라굽타의 아내이자 "위대한 왕"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다.[1]
만드사우르 비문은 고빈다굽타의 아들이 발행한 것으로, 고빈다굽타를 칭송하며 그가 파괴한 왕들이 그의 발에 머리를 숙였고, 인드라조차 그를 두려워했다고 주장한다.[1] 또한 비슈누만큼 유명했고, 아들들과 닮았다고 묘사한다.[2]
데오가르 다샤바타라 사원 안뜰 기둥의 비문에는 "Keshavapura-svami-padaya Bhagavata Govindasya danam"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학자 V. S. 아가르왈라는 고빈다굽타가 사원을 건립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2]
2. 1. 바사르 점토 인장
바사르의 고대 바이샬리 도시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 인장에 따르면, 고빈다굽타는 굽타 제국 황제 찬드라굽타 2세와 그의 아내 드루바-데비의 아들이었다. 이 점토 인장은 드루바-스바미니 여왕(아마도 드루바-데비와 동일인)을 ''마하라자디라자''(“위대한 왕 중의 왕”) 찬드라굽타의 아내이자 ''마하라자''(“위대한 왕”)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칭하고 있다.[1]고빈다굽타는 바사르 점토 인장에서 ''마하라자''로 불린다.[2] 고빈다굽타가 발행한 주화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굽타 가계도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1]
2. 2. 만드사우르 비문
만드사우르에서 발견된 비문은 고빈다굽타의 아들이 발행한 것으로, 고빈다굽타를 칭송한다.[1] 이 비문의 날짜는 서기 467년경이다.[2]비문은 고빈다굽타에 의해 파괴된 왕들이 그의 발에 머리를 숙였고, 신들의 왕인 인드라조차도 그를 두려워했다고 주장한다.[1] 또한 고빈다굽타는 고빈다 신만큼 유명했고, 디티와 아디티의 아들들과 닮았다고 말한다. 힌두 신화에서 디티는 다이티야 또는 악마들의 어머니이며, 아디티는 데바들의 어머니이다. 시인은 고빈다굽타를 육체적인 힘에 있어서는 악마들과, 그리고 영적인 미덕에 있어서는 신들과 비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2]
2. 3. 데오가르 비문
데오가르 다샤바타라 사원 안뜰 기둥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Keshavapura-svami-padaya Bhagavata Govindasya danam"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1] 학자 V. S. 아가르왈라는 이 구절을 고빈다굽타가 사원을 건립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2]3. 정치적 지위
바이샬리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 도장에 따르면, 고빈다굽타는 굽타 황제 찬드라굽타 2세와 그의 아내 드루바데비의 아들이었다. 이 도장에는 황후 드루바-스바미니가 찬드라굽타 마하라자디라자("황제")의 아내이자, 고빈다굽타 마하라자("대왕")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다.[1] 고빈다굽타가 발행한 동전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굽타 왕조의 계보에도 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빈다굽타의 아들이 발행한 만드사우르 비문(467년)에는 고빈다굽타를 칭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문에는 그에게 패배한 왕들이 그의 발에 머리를 숙였고, 신들의 왕인 인드라조차도 그를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빈다굽타는 고빈다 신만큼 유명했고, 힌두 신화에 나오는 아들들과 닮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데오가르 비문에는 '케샤바푸라-스바미-파다야 바가바타 고빈다시야 다남'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학자 V. S. 아가르왈라는 이를 고빈다굽타가 사원을 의뢰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빈다굽타의 정확한 정치적 지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하며,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한다.
3. 1. 독립 통치자설
굽타 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찬드라굽타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쿠마라굽타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바사르 점토 도장에는 굽타 황후 드루바스바미니가 마하라자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고, 그녀의 또 다른 아들 쿠마라굽타는 언급되지 않았다. 고빈다굽타는 그와 그의 어머니가 살았던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한 티라부크티의 총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지역에서 드루바스바미니가 쿠마라굽타의 어머니가 아니라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2]역사가 D. R. 반다르카르는 바사르 인장을 해석하여 고빈다굽타가 찬드라굽타의 후계자였으며, 411년(찬드라굽타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날짜)과 414년(쿠마라굽타의 가장 이른 날짜)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반다르카르는 나중에 이 이론을 포기했지만, 만드사우르 비문이 발견된 후 다른 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받았다. 이 비문은 고빈다굽타를 과거에 통치했던 장군으로 묘사하여, 그가 강력한 왕이었음을 시사한다.
역사가 빈데슈와리 프라사드 싱하는 찬드라굽타 통치 말년에 고빈다굽타가 중부 인도로 옮겨져 서부 말와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고빈다굽타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은 다음과 같다:
- 고빈다굽타는 독립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만드사우르 비문에 포함된 찬송가적 묘사는 그가 통치자였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총독과 같은 높은 직위에 있었을 수도 있고, 쿠마라굽타의 노년기에 섭정을 했을 수도 있다.
- 고빈다굽타는 왕위 계승자였지만 그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그로 인해 다음 계승자인 쿠마라굽타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 역사가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르는 쿠마라굽타가 왕위 계승자이며 원래 바이샬리를 통치하도록 지정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부재시 그 자리는 그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으로 활동한 고빈다굽타에게 할당되었다.
- 고빈다굽타는 쿠마라굽타 또는 그의 후계자 스칸다굽타에 반란을 일으켜 짧은 기간 동안 독립 왕국을 세웠다. 예를 들어, 그는 스칸다굽타가 후나족과 싸우기 위해 수도를 떠났을 때 왕좌를 장악했을 수 있다. 고빈다굽타의 독립 왕국은 서부 말와 지역에 위치했을 수 있다.
- 화폐학자 P.L. 굽타에 따르면 고빈다굽타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했으며 그의 형제 쿠마라굽타에 의해 전복되었을 수 있다. 찬드라굽타의 마지막 연대는 서기 412년-413년(굽타 93년)이며, 쿠마라굽타의 마지막 연대는 서기 415년(굽타 96년 빌사드 비문)이다. 따라서 고빈다굽타는 서기 413년에서 415년 사이에 왕좌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 반다르카르는 후에 고빈다굽타와 쿠마라굽타가 동일인물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이 두 번째 이론은 쿠마라굽타의 동전 중 일부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 동전들은 "고"라고 쓰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R. C. 마줌다르는 이 기호가 나라심하굽타의 동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약한 증거라고 일축한다.
현대 역사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빈다굽타가 쿠마라굽타의 남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는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고 굽타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
3. 2. 총독 또는 섭정설
굽타 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찬드라굽타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쿠마라굽타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바사르에서 발견된 점토 인장에는 굽타 왕조의 왕비 드루바스바미니가 "마하라자"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녀의 또 다른 아들인 쿠마라굽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빈다굽타는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한 티라-부크티 지역의 총독이었으며, 그와 그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그 지역에서 왕비가 쿠마라굽타의 어머니가 아닌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유를 설명해준다.[2]고빈다굽타의 정치적 지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존재한다.
- 독립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는 설: 만드사우르 비문에 찬양적인 묘사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주권 통치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총독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었거나, 쿠마라굽타의 노년에 섭정 역할을 했을 수 있다.
- 상속자였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는 설: 고빈다굽타는 왕위 계승자였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쿠마라굽타가 왕위를 이었다.
- 쿠마라굽타가 부재한 동안 섭정을 했다는 설: 역사가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양가르는 쿠마라굽타가 왕위 계승자였고, 원래 바이샬리를 통치하도록 임명되었으나, 쿠마라굽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고빈다굽타가 섭정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고빈다굽타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 역할을 했다.
- 반란을 일으켜 독립 왕국을 세웠다는 설: 고빈다굽타는 쿠마라굽타 또는 그의 후계자 스칸다굽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짧은 기간 동안 독립 왕국을 세웠다. 예를 들어 스칸다굽타가 훈족과의 전쟁을 위해 수도를 떠났을 때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빈다굽타의 독립 왕국은 서부 말와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설: 화폐학자 P. L. 굽타는 고빈다굽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형제인 쿠마라굽타에게 쫓겨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찬드라굽타 2세의 마지막 통치 시기는 412년에서 413년 사이이고, 쿠마라굽타의 마지막 통치 시기는 415년이므로, 고빈다굽타는 413년에서 415년 사이에 왕위를 차지했을 수 있다.
- 고빈다굽타와 쿠마라굽타가 동일인물이라는 설: 반다르카르는 후에 고빈다굽타와 쿠마라굽타가 동일한 왕의 두 가지 다른 이름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고"로 읽히는 기호가 있는 쿠마라굽타의 일부 동전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역사가 R. C. 마줌다르는 이 기호가 나르심하굽타의 동전에도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며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고빈다굽타가 쿠마라굽타의 동생이었으며,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고 굽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데 동의한다.
3. 3. 반란설
고빈다굽타가 쿠마라굽타 혹은 그의 후계자인 스칸다굽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짧은 기간 동안 독립적인 왕국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2] 예를 들어 스칸다굽타가 후나족과 싸우기 위해 수도를 떠났을 때 왕좌를 장악했을 가능성이 있다.[2] 고빈다굽타의 독립 왕국은 서부 말와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와 관련된 다른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 독립 통치자 부정설: 고빈다굽타는 독립적인 통치자가 아니었으며, 만드사우르 비문의 찬양적인 묘사는 그가 왕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총독과 같은 높은 직위에 있었거나, 쿠마라굽타의 노년에 섭정을 했을 수도 있다.
- 조기 사망설: 고빈다굽타는 왕위 계승자였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쿠마라굽타가 왕이 되었다.
- 섭정 통치설: 쿠마라굽타가 왕위 계승자였고, 바이샬리를 통치하도록 지정되었으나, 부재 시 고빈다굽타에게 자리가 할당되었고,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으로 활동했다.
- 왕위 찬탈설: 화폐학자 P.L. 굽타는 고빈다굽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형제 쿠마라굽타에게 쫓겨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찬드라굽타 2세의 마지막 연대는 412년-413년(굽타력 93년)이고, 쿠마라굽타의 마지막 연대는 415년(굽타력 96년, 빌사드 비문)이므로, 고빈다굽타는 413년에서 415년 사이에 왕위를 차지했을 수 있다.
- 동일 인물설: 반다르카르는 고빈다굽타와 쿠마라굽타가 동일인물이라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쿠마라굽타의 일부 동전에 '고'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에 기반하지만, 나라심하굽타의 동전에도 나타나므로 증거가 약하다.
3. 4. 동일 인물설
굽타 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찬드라굽타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쿠마라굽타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바사르에서 발견된 점토 인장에는 굽타 왕조의 왕비 드루바스와미니가 마하라자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고, 쿠마라굽타는 언급되지 않았다. 고빈다굽타는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한 티라부크티 지역의 총독이었고, 그와 그의 어머니가 그곳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그 지역에서 드루바스와미니 왕비가 쿠마라굽타가 아닌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유를 설명해준다.[2]역사가 D. R. 반다르카르는 바사르 인장을 근거로 고빈다굽타가 찬드라굽타 2세의 뒤를 이어 411년(찬드라굽타 2세의 마지막 재위 기간)과 414년(쿠마라굽타의 첫 재위 기간)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반다르카르는 나중에 이 이론을 철회했지만, 만드사우르 비문이 발견된 후 다른 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 비문은 고빈다굽타를 과거에 통치했던 장군으로 묘사하여 그가 강력한 왕이었음을 시사한다.
역사가 B. P. 신하는 찬드라굽타 2세 통치 말기에 고빈다굽타가 중앙 인도로 이동하여 서부 말와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
고빈다굽타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은 다음과 같다.
- 고빈다굽타는 독립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만드사우르 비문에 나오는 찬양적인 표현이 그가 왕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총독과 같은 높은 지위에 있었거나, 쿠마라굽타의 노년에 섭정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 고빈다굽타는 왕위 계승자였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쿠마라굽타가 왕위를 계승했다.
- 역사가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르는 쿠마라굽타가 왕위 계승자였고, 원래 바이샬리를 통치하도록 임명되었으나,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고빈다굽타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고빈다굽타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 역할을 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 고빈다굽타는 쿠마라굽타 또는 그의 후계자 스칸다굽타에게 반란을 일으켜 짧은 기간 동안 독립 왕국을 세웠다. 예를 들어, 스칸다굽타가 후나족과 싸우기 위해 수도를 떠났을 때 왕위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고빈다굽타의 독립 왕국은 서부 말와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화폐학자 P. L. 굽타는 고빈다굽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형제인 쿠마라굽타에게 쫓겨났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찬드라굽타 2세의 마지막 재위 기간은 412년-413년(굽타 연도 93년)이고 쿠마라굽타의 마지막 재위 기간은 415년(굽타 연도 96년, 빌사드 비문)이므로, 고빈다굽타는 413년에서 415년 사이에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 반다르카르는 이후 고빈다굽타와 쿠마라굽타가 동일인물이며, "고"는 고빈다굽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가 R. C. 마줌다르는 이 기호가 나르심하굽타의 동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며, 증거가 부족하다고 반박한다.
현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고빈다굽타가 쿠마라굽타의 동생이었고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으며, 굽타 왕위에 오른 적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3. 5. 기타 가설
굽타 왕조의 공식 기록에는 찬드라굽타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쿠마라굽타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바사르 점토 도장에는 굽타 황후 드루바스바미니가 마하라자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고, 그녀의 또 다른 아들 쿠마라굽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빈다굽타는 그와 그의 어머니가 살았던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한 티라부크티 지역의 총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지역에서 드루바스바미니가 쿠마라굽타의 어머니가 아닌 고빈다굽타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유를 설명해준다.[2]역사가 D. R. 반다르카르는 바사르 인장을 해석하여 고빈다굽타가 찬드라굽타의 후계자였으며, 411년(찬드라굽타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날짜)과 414년(쿠마라굽타의 가장 이른 날짜)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반다르카르는 나중에 이 이론을 포기했지만, 만드사우르 비문이 발견된 후 다른 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받았다. 이 비문은 고빈다굽타를 과거에 통치했던 장군으로 묘사하여 그가 강력한 왕이었음을 시사한다.
역사가 빈데슈와리 프라사드 싱하는 찬드라굽타 치세 말년에 고빈다굽타가 중부 인도로 옮겨져 서부 말와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고빈다굽타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다양한 가설은 다음과 같다.
- 고빈다굽타는 독립적인 통치자가 아니었다. 만드사우르 비문에 나오는 찬양적인 묘사가 그가 왕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총독과 같은 높은 직위에 있었거나, 쿠마라굽타의 노년에 섭정을 했을 수도 있다.
- 고빈다굽타는 왕위 계승자였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다음 계승자인 쿠마라굽타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 역사가 S. 크리슈나스와미 아이얀가르는 쿠마라굽타가 왕위 계승자였으며 원래 바이샬리를 통치하도록 지정되었지만, 그가 부재한 동안 그 자리는 미성년자였던 고빈다굽타에게 할당되었고 그의 어머니가 섭정으로 활동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 고빈다굽타는 쿠마라굽타 또는 그의 후계자 스칸다굽타에 반란을 일으켜 짧은 기간 동안 독립 왕국을 세웠다. 예를 들어, 그는 스칸다굽타가 후나족과 싸우기 위해 수도를 떠났을 때 왕좌를 장악했을 수 있다. 고빈다굽타의 독립 왕국은 서부 말와 지역에 위치했을 수 있다.
- 화폐학자 P. L. 굽타에 따르면 고빈다굽타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했으며 그의 형제 쿠마라굽타에 의해 전복되었을 수 있다. 찬드라굽타의 마지막 연대는 서기 412년-413년(굽타 93년)이며, 쿠마라굽타의 마지막 연대는 서기 415년(굽타 96년 빌사드 비문)이다. 따라서 고빈다굽타는 서기 413년에서 415년 사이에 왕좌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 반다르카르는 후에 고빈다굽타와 쿠마라굽타가 동일인물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두 번째 이론은 쿠마라굽타의 동전 중 일부에 "고"라고 쓰인 것으로 보이는 문자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는 고빈다굽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학자 R. C. 마줌다르는 이 문자가 나라심하굽타의 동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약한 증거라고 일축한다.
현대 역사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빈다굽타가 쿠마라굽타의 남동생이며,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고 굽타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조
[1]
논문
GOVINDAGUPTA OF VAIŚĀLĪ SEAL AND MANDAŚOR INSCRIPTION (A Gupta Emperor between G.E. 93 and 96)
[2]
논문
GOVINDAGUPTA OF VAIŚĀLĪ SEAL AND MANDAŚOR INSCRIPTION (A Gupta Emperor between G.E. 93 and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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