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영창은 발해인 출신으로, 1116년 요나라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대원국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공격을 받으며 저항했으나, 결국 금나라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황제 - 광종 (고려)
광종은 고려의 제4대 임금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안검법과 과거 제도를 시행하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으나, 후반기에는 공신과 호족들을 숙청하여 비판을 받기도 한다. - 한국의 황제 - 이징옥
조선 초기의 무신 이징옥은 김종서를 따라 여진족 토벌과 북방 개척에 공을 세웠으나,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에 의해 파면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피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으며 무용과 청렴함으로 평가받는다. - 1116년 사망 - 오연총
오연총은 고려 예종 때 요나라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여진 정벌에서 윤관의 부원수로 활약했으며, 신기군 징발 조건 완화와 서경 궁궐 창건 반대 등의 정치적 행보를 보이다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문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1116년 사망 - 칼만 (헝가리)
칼만은 1095년부터 1116년까지 헝가리의 국왕이었으며, 십자군과의 갈등, 크로아티아 정복, 법률 제정 등을 통해 헝가리 사회를 개혁하고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고영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고영창 |
원래 이름 | 고영창(高永昌) |
휘 | 고영창(高永昌) |
다른 이름 | 미상(未詳) |
작위 | 폐하(陛下) |
직업 | 대발해 폐하(大渤海 陛下) |
별칭 | 미상(未詳) |
출생일 | 미상(未詳) |
출생지 | 미상(未詳) |
사망일 | 1116년 5월 |
사망지 | 미상(未詳) |
사망 원인 | 미상(未詳) |
재위 기간 | 1116년 1월~1116년 5월 |
작위 | 대발해 제1대 백제 국왕 |
매장지 | 미상(未詳) |
배우자 | 미상(未詳) |
자녀 | 고씨(高氏) |
친인척 | 미상(未詳) |
부친 | 고씨(高氏) |
모친 | 미상(未詳) |
형제자매 | 미상(未詳) |
후임자 | 대발해 멸망 |
호칭 | 폐하(陛下) |
묘호 | 미상(未詳) |
시호 | 미상(未詳) |
존호 | 고영창 폐하(高永昌 陛下) |
묘소 | 미상(未詳) |
능묘 | 미상(未詳) |
거주지 | 대발해(大渤海) |
국적 | 대발해(大渤海) |
성별 | 남성(男性) |
가문 | 고씨(高氏) |
연호 | 융기(隆基) |
왕조 | 대발해(大渤海) |
종교 | 미상(未詳) |
소속 | 대발해(大渤海) |
목록 | 대발해의 1대 국왕 |
2. 생애
고영창은 발해인 출신으로, 1116년 음력 1월 랴오양에서 대원국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며 연호를 융기라 하였다.[1] 요나라는 대원국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1116년 음력 5월, 금나라는 대원국을 침공했다. 고영창은 금나라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결국 대원국은 멸망하였다. 고영창은 친위대 5,000명을 이끌고 도망쳤으나, 금나라 장수 알로에게 잡혀 처형당했다.[2]
2. 1. 건국 이전
발해인 출신이다. 천경 6년 1월 1일(1116년 1월 17일), 요양부(현재의 랴오닝성랴오양시)에서 요나라의 가혹한 지배에 불만을 품은 발해인이 동경유수 소보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 요양부의 비장이었던 고영창은 이 기회를 틈타 3,000명을 이끌고 반요의 병사를 일으켰다. 요양부를 점령한 고영창은 호부사 대공정, 부유수 고청명 등 요나라 관원을 추방하고, 대발해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대원, 연호를 륭기로 하였다.[2]이후 요나라의 동경도 50여 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륭기 원년 윤1월 4일(1116년 2월 19일)에 소한가노, 장림 등이 이끄는 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1] 고영창은 북방의 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금의 태조는 증원을 칭하며 동경 지역을 점령하고, 요나라 군대의 배후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고영창은 태조로부터 제호의 취소를 명령받았지만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금군에 공격을 받아 요양부를 점령당했고, 고영창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2]
2. 2. 대원국 건국
1116년 음력 1월, 발해 귀족의 후손인 고영창은 랴오양에서 연호를 융기라 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대원국을 건국하였다.[1] 요나라는 대원국을 멸망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1]고영창은 천경 6년 1월 1일 (1116년 1월 17일), 동경요양부 (현재의 랴오닝성랴오양시)에서 요나라의 가혹한 지배에 불만을 품은 발해인이 동경유수 소보선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 기회를 틈타 3,000명을 이끌고 반요의 병사를 일으켰다.[1] 요양부를 점령한 고영창은 호부사 대공정, 부유수 고청명 등 요나라 관원을 추방하고, 대발해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대원, 연호를 융기로 하였다.[2]
2. 3. 요나라와의 전쟁
천경 6년 1월 1일(1116년 1월 17일), 동경요양부(현재의 랴오닝성랴오양시)에서 요나라의 가혹한 지배에 불만을 품은 발해인이 동경유수 소보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 요양부의 비장이었던 고영창은 이 기회를 틈타 3,000명을 이끌고 반요의 병사를 일으켰다. 요양부를 점령한 고영창은 호부사 大公鼎|대공정중국어, 부유수 고청명 등 요나라 관원을 추방하고, 대발해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대원, 연호를 륭기로 하였다.[2]이후 요나라의 东京道|동경도중국어 50여 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륭기 원년 윤1월 4일(1116년 2월 19일)에 소한가노, 张琳 (辽朝)|장림중국어 등이 이끄는 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1] 고영창은 북방의 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금의 태조는 증원을 칭하며 동경 지역을 점령하고, 요나라 군대의 배후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고영창은 태조로부터 제호의 취소를 명령받았지만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금군에 공격을 받아 요양부를 점령당했고, 고영창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2]
2. 4. 금나라와의 갈등 및 최후
고영창은 발해 귀족의 후손으로, 1116년 음력 1월에 랴오양에서 대원국을 건국하고 연호를 융기라 하며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요나라는 대원국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1][2]이후 요나라의 50여 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116년 윤1월 4일(2월 19일) 소한가노, 장림 등이 이끄는 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1] 고영창은 북방의 금에 구원을 요청했다. 금의 태조는 지원하는 척하며 동경 지역을 점령하고, 요나라 군대의 배후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고영창은 태조로부터 황제 칭호를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금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랴오양부를 점령당했고, 고영창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
1116년 음력 5월에 금나라는 대발해를 침공하였고, 고영창은 금나라의 공격을 막았으나, 결국 대발해는 멸망하였다. 대발해가 멸망하면서 고영창은 친위대 5,000명을 이끌고 도망쳤으나, 결국 금나라 장수 알로에게 잡혀 처형당하였다.
참조
[1]
서적
遼史
[2]
웹사이트
고영창
https://terms.naver.[...]
2020-05-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