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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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란국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괴뢰국이다. 동쪽의 발해를 의미하는 중국식 명칭을 사용했으며, 936년 거란에 병합되었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시도했으나, 일본은 발해에 대한 충성심으로 동란국의 사절을 거절했다. 동란국은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야율배와 야율웃욕이 왕으로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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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운십육주는 당나라 시대에 설치된 16개의 주로, 중국 중부 농업 평원과 북쪽 유목민 초원 지대를 나누는 산맥을 따라 위치하며 만리장성이 있던 곳으로, 요나라의 지배를 거쳐 명나라 때 한족 영토로 회복되었다. - 요나라 - 조복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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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란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국명 | 동단국 |
| 현지 이름 | 東丹 |
| 다른 표기 | 東丹國 |
| 존속 기간 | 926년 ~ 930년 (실질) |
| 존속 기간 | 926년 ~ 936년 (명목) |
| 수도 | 헤이룽장성 후한 (Hūhán 忽汗) |
![]() | |
| 정치 |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지도자 칭호 | 국왕 |
| 국왕 | 야율배 (926년 ~ 930년) |
| 국왕 | 야율완 (930년 ~ 936년) |
| 언어 및 종교 | |
| 공용어 | 중세 한국어 거란어 |
| 종교 | 불교 도교 유교 샤머니즘 |
| 역사 | |
| 성립 | 926년 |
| 멸망 | 요나라에 병합 (936년) |
| 이전 및 이후 | |
| 이전 | 발해 |
| 이후 | 요나라 |
| 현재 국가 | |
2. 역사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상경용천부(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에 동란국을 설치하였다. 야율아보기가 죽자 동생인 야율덕광(요 태종)이 거란의 왕위를 이었다. 후당 원정에서 돌아온 야율덕광은 야율배를 수도 후한에서 랴오닝으로 옮기게 하였다. 위협을 느낀 야율배는 930년 후당으로 망명했고, 동란국은 936년 거란에 병합되었다.[5]
동란국은 발해와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929년 동해 너머로 외교사절단을 보냈으나, 교토의 일본 황궁은 발해가 아닌 것을 알고 동란국의 사절을 거절하였다.[7]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융성한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는 중원으로의 침략을 반복하는 가운데,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만주에 근거지를 둔 발해 원정을 계획했다. 925년, 반란이 그치지 않고 국내의 혼란이 계속되던 발해를 향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동정하여, 이듬해 926년에는 발해의 도읍인 홀한성을 함락시키고, 마지막 발해왕 대인선을 포로로 잡았다.
아보기는 발해의 영토를 그대로 통치하기 위해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개칭하고, 장남 야율배를 국왕으로 임명하여 동란국을 건국했다. 야율배는 인황왕으로 불렸고, 거란의 중신 야율우지 등이 동단 차상으로 야율배를 보좌했지만, 부여성에서 태조 야율아보기가 급사하면서 동단왕 야율배는 태조의 유해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거란 황제위는 927년 차남 야율요골(거란 태종)이 계승했다.
황태자였지만 거란 황제가 되지 못한 야율배는 이를 원망했고, 야율요골도 형이 모반을 꾀할 것을 두려워하여 형제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928년, 야율요골은 요동의 동평군(현재의 요녕성요양시)을 거란 동경으로 승격시키고, 동단의 도읍을 천복성에서 요양성으로 옮기도록 야율배에게 명령했다. 야율배는 신종한 발해인들을 데리고 요양으로 옮겨가면서 동단은 점차 축소되었고, 거란에 의한 직접 통치로 이행된 것으로 보인다.
아우 요골에 의한 암살을 두려워한 야율배는 의무려산에 은거했지만, 930년, 몰래 후당의 도읍 개봉으로 망명한다. 이로 인해 동단은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1990년대에, 각지에서 야율우지 등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동단의 관직이 계승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단의 존속은 분명해졌다.
936년, 후진에게 연운 16주를 할양한 거란 황제는 계속 존속하던 동단의 관제를 축소하고, 947년에는 국호를 요로 개칭한다. 이후에도 요에 복속된 발해인은 주로 요의 동경인 요양에 집주했지만, 천민의 기록 사료는 점차 감소하여, 10세기 말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요가 여진이나 고려를 공격했을 때, 황제의 권한 강화를 목표로 동단국의 실권은 황제 등 중앙 권력에 접수된 것으로 보인다.
동단 국민의 주체를 구성하는 발해인은 풍부한 항해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발해인의 상선은 멀리 양절로의 연안에 이르렀으며, 거란과 동단 및 인접 국가와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도 동단 국내의 발해인이었다. 남당의 사신이 화물을 휴대하고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먼저 동단국의 동경에 이른 후, 유주로 향했다[9].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4개 왕조 기간(진고조 시대를 제외) 동안 거란과 중원의 관계는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지만, 산동, 등주 방면과 요하 하류의 교통 무역은 거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동단 국내의 발해인의 주도 하에 지속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단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9]。
이 시기에,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켰다고 추정되지만, 화산쇄설류나 토석류로 인명 피해와 기록이 소실된 것으로 보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10]
2. 1. 건국 배경
926년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상경용천부(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에 동란국을 설치하였다.[3] 동란국은 '동쪽의 단국(발해)'이라는 뜻으로, 중국식 이름이다.[3] 거란어로는 "단국"(Dan Gur)이라고 불렸다.[4]야율아보기가 죽고 동생 야율덕광(요 태종)이 거란의 왕위를 이었다. 야율덕광은 후당 원정에서 돌아온 후, 야율배에게 수도를 후한에서 요동의 요양으로 옮기게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야율배는 930년 후당으로 망명했다.[5] 동란국은 936년 거란에 병합되었으나,[5] 일부 역사학자들은 982년에 병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6]
동란국은 발해와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929년 외교사절단을 보냈으나, 교토의 일본 황궁은 이들을 발해 사절단이 아니라 하여 거절하였다.[7]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융성한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는 중원 침략을 반복하는 가운데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만주에 근거지를 둔 발해 원정을 계획했다. 925년 발해를 향해 군사를 이끌고 동정하여, 926년 발해의 도읍 홀한성을 함락시키고, 마지막 발해왕 대인선을 포로로 잡았다.
야율아보기는 발해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개칭하고, 장남 야율배를 국왕으로 임명하여 동란국을 건국했다. 야율배는 인황왕으로 불렸고, 거란의 중신 야율우지 등이 동단 차상으로 야율배를 보좌했다. 그러나 부여성에서 야율아보기가 급사하면서 야율배는 야율아보기의 유해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거란 황제위는 927년 차남 야율요골(거란 태종)이 계승했다.
황태자였지만 거란 황제가 되지 못한 야율배는 이를 원망했고, 야율요골도 형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형제 관계가 긴장되었다. 928년 야율요골은 요동의 동평군(현재의 랴오닝성 요양시)을 거란 동경으로 승격시키고, 동단의 도읍을 천복성에서 요양성으로 옮기도록 야율배에게 명령했다. 야율배는 신종한 발해인들을 데리고 요양으로 옮겨가면서 동단은 점차 축소되었고, 거란에 의한 직접 통치로 이행된 것으로 보인다.
야율요골의 암살을 두려워한 야율배는 의무려산에 은거했지만, 930년 후당의 도읍 개봉으로 망명했다. 이로 인해 동단은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1990년대에 야율우지 등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동단의 관직이 계승된 사실이 밝혀져 동단의 존속이 분명해졌다.
936년 후진에게 연운 16주를 할양한 거란 황제는 계속 존속하던 동단의 관제를 축소하고, 947년에는 국호를 요로 개칭했다. 이후에도 요에 복속된 발해인은 주로 요의 동경인 요양에 집주했지만, 천민의 기록 사료는 점차 감소하여, 10세기 말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요가 여진이나 고려를 공격했을 때, 황제의 권한 강화를 목표로 동단국의 실권은 황제 등 중앙 권력에 접수된 것으로 보인다.
동단 국민의 주체를 구성하는 발해인은 풍부한 항해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발해인의 상선은 멀리 양절로의 연안에 이르렀으며, 거란과 동단 및 인접 국가와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도 동단 국내의 발해인이었다. 남당의 사신이 화물을 휴대하고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먼저 동단국의 동경에 이른 후, 유주로 향했다[9].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4개 왕조 기간(진고조 시대를 제외) 동안 거란과 중원의 관계는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지만, 산동, 등주 방면과 요하 하류의 교통 무역은 거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동단 국내의 발해인의 주도 하에 지속적으로 발전했으며, 동단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9]。
이 시기에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켰다고 추정되지만, 화산쇄설류나 토석류로 인명 피해와 기록이 소실된 것으로 보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10]
2. 2. 야율배의 통치와 망명
926년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상경용천부(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에 동란국을 설치하였다.야율아보기가 죽자 동생인 야율덕광(요 태종)이 거란의 왕위를 이었다. 후당 원정에서 돌아온 야율덕광은 야율배에게 수도를 후한에서 랴오닝으로 옮기게 하였다. 위협을 느낀 야율배는 930년 후당으로 망명했다.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동란국은 929년에 동해를 건너 외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교토의 일본 조정은 옛 발해 정권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동단에서 온 사절단을 거부했다.[7]
야율배는 아우 요골(요 태종)에 의한 암살을 두려워하여 의무려산에 은거했지만, 930년 몰래 후당의 도읍 개봉으로 망명했다.
2. 3. 멸망과 요나라로의 병합
926년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상경용천부(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에 동란국을 설치하였다.[3] 야율아보기가 죽자 동생인 야율덕광(요 태종)이 거란의 왕위를 이었다. 후당 원정에서 돌아온 야율덕광은 야율배를 수도 후한에서 랴오닝으로 옮기게 하였고, 위협을 느낀 야율배는 930년 후당으로 망명했다.[5] 이후 동란국은 936년 거란에 병합되었다.[5]928년, 야율요골(거란 태종)은 요동의 동평군(현재의 요녕성요양시)을 거란 동경으로 승격시키고, 동단의 도읍을 천복성에서 요양성으로 옮기도록 야율배에게 명령했다. 야율배는 신종한 발해인들을 데리고 요양으로 옮겨가면서, 동단은 점차 축소되었고, 거란에 의한 직접 통치로 이행된 것으로 보인다.
야율요골에 의한 암살을 두려워한 야율배는 의무려산에 은거했지만, 930년 몰래 후당의 도읍 개봉으로 망명한다. 이로 인해 동단은 사실상 멸망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1990년대에 각지에서 야율우지 등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동단의 관직이 계승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단의 존속은 분명해졌다.
936년, 후진에게 연운 16주를 할양한 거란 황제는 계속 존속하던 동단의 관제를 축소하고, 947년에는 국호를 요로 개칭한다.
2. 4. 일본과의 관계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상경용천부(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에 동란국을 설치하였다. 동란국은 발해와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929년 동해 너머로 외교사절단을 보냈으나, 교토의 일본 황궁은 발해가 아닌 것을 알고 거절하였다.[7]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동란국은 929년에 동해를 건너 외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교토의 일본 조정은 옛 발해 정권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동란국에서 온 사절단을 거부했다.[7]
『일본기략』은 다이고 천황의 엔초 7년(929년) 12월에 동란국의 사절이 단고국다케노군 오쓰하마(현재의 교토부교탄고시)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이는 동란국이 랴오양시로 천도한 이후의 시기이므로, 천도 후에도 동란국의 지배가 동해 연안에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절은 이전에 두 번이나 발해국 사절로 일본에 왔었던 배구[11]였다. 친교가 있었던 후지와라노 마사카즈가 존문사(存問使)로 파견되었다.[11] 배구는 국명이 바뀐 이유에 대한 질문에 발해가 거란에게 정복된 것을 알리고 신왕의 비도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교토의 조정은 주군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새 주군의 험담을 하는 것은 불온하다며 입경을 허가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동란국은 발해의 후계자로서 일본과의 통교를 유지하려는 의향이 있었지만, 조정은 이를 거부했다. 마사카즈는 배구에 동정하여 후에 회상한 한시를 『부상집』에 남겼다.[11]
3. 국명
"동란국"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거란의 동부"를 줄인 것이라는 설이 한때 유력했다. 그러나 거란 문자 해독 연구가 진척되면서 "동단국"이 키타이어로 Dan guru라고 불렸다는 점, 또한 발해국의 키타이어 명칭도 Dan guru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이신 교로 울라 희춘은 한문 사료에서 "거란"을 "단"으로 줄여 쓰는 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동단국"이라는 명칭은 키타이어에 의한 발해국의 명칭 Dan guru(=단국)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동쪽의 거란국"의 약호가 아님을 밝혔다.
4. 발해 유민과 부흥 운동
925년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침략하여 926년 수도 홀한성(현재의 흑룡강성목단강시녕안시 발해진)을 함락시키고 대인선을 포로로 잡았다.[9] 아보기는 발해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장남 야율배(야율돌욕)를 왕으로 임명하여 동란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발해 유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각지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936년 후진에게 연운 16주를 할양한 거란은 동란국의 관제를 축소했고, 947년에는 국호를 요로 고쳤다. 이후 발해인은 요의 동경인 요양에 주로 거주했지만, 10세기 말에는 관련 기록이 점차 감소한다.[9]
이 시기 백두산이 크게 폭발하여 인명 피해와 기록 소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10]
4. 1. 주요 발해 부흥 국가
| 국가명 | 존속 기간 | 건국자 | 비고 |
|---|---|---|---|
| 동란국 | 926년~936년 | 야율배 | 거란의 괴뢰국 |
| 후발해 | 926년~? | 대씨(대인선의 동생) | |
| 정안국 | 938년~986년 | 열만화 | |
| 연파국 | 975년~995년 | 연파 | |
| 올야 | 995년~1114년 | 오소도 | |
| 흥료국 | 1029년~1030년 | 대연림 | |
| 고욕국 | 1115년 2월~7월 | 고욕 | |
| 대발해(대원국) | 1116년 1월~5월 | 고영창 |
5. 역대 국왕
- 야율돌욕 (926년 - 930년)
- 야율웃욕 (930년 - 936년)
6. 연호
감로 (926년 ~ 936년)
참조
[1]
웹사이트
契丹文dan gur本義考 あわせて「東丹国」の国号を論ず
http://www.apu.ac.jp[...]
[2]
서적
한국사 이야기 4-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3]
서적
中国古代王朝和政权名号探源
华中师范大学出版社
2000-11
[4]
논문
Bohai/Parhae Identity and the Coherence of Dan gur under the Kitan/Liao Empire
2016
[5]
서적
中国古代王朝和政权名号探源
华中师范大学出版社
2000-11
[6]
논문
The Kitai Dynasty's governance of Bohai and the structure of Dongdanguo as seen from Yelu-Yuzu's Epitaph
https://ci.nii.ac.jp[...]
2008
[7]
웹사이트
The Kitai Dynasty’s governance of Bohai and the structure of Dongdanguo as seen from Yelu-Yuzu’s Epitaph
http://ci.nii.ac.jp/[...]
[8]
서적
愛新覚羅烏拉熙春女真契丹学研究
松香堂書店
2009-02-11
[9]
뉴스
Original meaning of Dan gur in Khitai scripts: with a discussion of state name of the Dong Dan Guo
http://www.ritsumei.[...]
立命館大学人文学会
2008-12
[10]
뉴스
巨大噴火の爪痕
http://www.museum.to[...]
東北大学総合学術博物館
[11]
서적
渤海国の謎
講談社現代新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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