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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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양부는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에 위치했던 역사적인 행정 구역이다. 919년 요나라가 발해인과 한족을 이주시키면서 동평군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동경, 요양로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요나라 시기에는 동경도의 일부였으며, 금나라 시대에는 동경로, 원나라 시대에는 요양로, 명나라 시대에는 요동위가 설치되었다. 1912년 중화민국에 의해 봉천부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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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라의 부 - 대정부
대정부는 요나라 시기에 츠펑 시 닝청 현 칭이 진에 위치했던 administrative division으로, 요나라 시기에는 외교 중심지였으며 금나라 시기에는 북경로에 속하여 중경으로 불렸고, 원나라 시기에는 대녕로의 중심지였으나 명나라 시기에 폐지되었다. - 금나라 - 여진
여진은 동북아시아의 투구스계 민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금나라를 건국하여 북송을 정복했으나 멸망 후 여러 부족으로 분열, 누르하치에 의해 만주족으로 재통합되어 청나라를 건국했다. - 금나라 - 정강의 변
정강의 변은 1125년부터 1127년까지 금나라의 침입으로 북송이 멸망한 사건으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황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어 중국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2. 역사
919년(요 태조 신책 4년), 거란이 발해인과 중국인들을 요양으로 이주시킨 뒤 방치되어 있던 옛 요양성을 재건하면서 동평군(東平郡)을 설치하고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928년(요 태종 천현 3년), 동단국이 천복성에서 요양성으로 옮겨지면서 동평군은 남경으로 승격되었다. 938년 (천현 13년), 남경은 동경으로 개칭되었고, 요양부가 설치되었다. '''동경 요양부'''는 동경도에 속했으며, 요양, 선향, 학야, 석목, 자몽, 흥요, 숙신, 귀인, 순화의 9개 현을 관할했다[1]。
1029년 대연림이 요양부를 점령해 흥료국을 건국했으나, 고려의 지원 거부와 내부 배신으로 1030년 멸망했다. 1116년 고영창이 금나라에 점령당하기 전 4개월간 대발해국을 세우기도 했다.
금나라 시대에는 동경 요양부가 동경로에 속했으며, 요양, 학야, 의풍, 석성의 4개 현과 장의진을 관할했다[2]。
1288년 (지원 25년), 원나라에 의해 동경 요양부는 '''요양로'''로 개칭되었다. 요양로는 요양등처행중서성에 속했으며, 요양현과 개주, 의주의 2주 1현을 관할했다[3]。1290년 고려의 끈질긴 요구와 저항으로 평안도 지역에 설치되었던 동녕부가 요양 일대로 옮겨졌다.
1371년 (홍무 4년), 명나라에 의해 정요중위에 정요도위가 설치되었다. 1375년 (홍무 8년), 정요도위는 요동도지휘사사로 개칭되었다. 요동도지휘사사는 산동성에 속했으며, 25위와 자재주, 안락주를 관할했다[4]。
1653년 (순치 10년), 청나라에 의해 요양부가 설치되었다. 1657년 (순치 14년), 요양부의 부치는 성경성으로 이전되었고, 요양부는 '''봉천부'''로 개칭되었다. 봉천부는 성경장군에 속했으며, 승덕, 개원, 철령, 해성, 개평, 요양주, 복주, 금주청의 1청 2주 5현을 관할했다[5]。
1912년, 중화민국에 의해 봉천부는 폐지되었다.
2. 1. 고대 ~ 발해
919년(요 태조 신책 4년), 거란이 발해인과 중국인들을 요양으로 이주시킨 뒤 방치되어 있던 옛 요양성을 재건하면서 동평군(東平郡)을 설치하고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926년(요 태조 천현 원년)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란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발해 땅을 간접 지배하고자 했으나, 태조 사후 요나라 조정의 내분과 여러 차례의 발해 부흥운동으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6]928년(요 태종 천현 3년), 발해 유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란국의 수도를 홀한성에서 요양부로 옮기면서 수많은 발해인들이 요양부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가 유도부가 남경 석진부로 승격된 후 '''동경(東京)'''으로 불리게 되었다.[6]
1029년(요 성종 태평 9년), 발해 왕손 대연림이 요양부를 점령해 흥료국을 건국했으나, 고려의 지원 거부와 내부 배신으로 1030년(요 성종 태평 10년) 멸망했다. 1116년(천조제 천경 6년) 1월, 동경의 소년 10여 명에게 동경유수 소보선(蕭保先)이 살해당하자 호부사 대공정(大公鼎)이 동경유수를 대행했다.[6]
대공정은 부유수 고청명과 함께 해족, 한족 군인들을 동원해 주동자들을 색출해 참수했으나, 발해인 고영창이 금나라에 점령당하는 4개월간 고영창의 대발해국을 차지하게 되었다.[6]
천복성(天福城)이라고도 불린 요양부의 부성은 높이 3길, 너비가 30리 가까이 되는 거대한 성이었다. 동북쪽 모퉁이에 궁성이 있는데, 궁성의 높이는 3길에 망루가 있었고 남쪽으로 3개의 문이 있었다. 궁성 담장 북쪽에 양국황제(讓國皇帝)의 어용전(御容殿)이 있었다. 궁성 내엔 전각 2채가 있었지만, 후궁전은 없었다. 내성사의 부관과 판관이 궁성을 지켰다. 동란국을 세웠을 때 남겨진 남경의 비명은 궁문 남쪽에 있었다. 본성은 9개의 속현을 통치했다.[6]
동경도의 수많은 행정구역들처럼 거란이 발해의 행정구역들을 모두 폐지하고 요동에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여러 행정구역의 연혁들이 혼합되었다. 이 때문에 해당 사서의 건치 연혁이 이전 사서에서 언급한 동일 행정구역에 대한 언급과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678년(청나라 강희제 강희 17년) 편찬된 역사지리서 독사방여기요에는 현성의 대략적인 위치가 언급되어 있으며, 본 문서에서 언급되는 요양부의 속현 위치는 해당 서적의 부분을 인용하여 작성되었다.[6][7]
2. 2. 흥료국과 대발해국
919년(요 태조 신책 4년), 거란이 발해인과 중국인들을 요양으로 이주시킨 뒤 방치되어 있던 옛 요양성을 재건하면서 동평군(東平郡)을 설치하고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926년(요 태조 천현 원년)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그 땅에 동란국이라는 괴뢰국을 두어 발해 땅을 간접 지배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 사후 요나라 조정에서 일어난 내분과 여러 차례 일어난 발해 부흥운동으로 인해 동란국을 통한 발해 지역 통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928년(요 태종 천현 3년), 태종은 발해 유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란국의 수도를 홀한성에서 요양부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발해인들이 요양부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가 유도부가 남경 석진부로 승격된 이후 '''동경(東京)'''으로 불리게 되었다.
1029년(요 성종 태평 9년), 발해의 왕손이던 대연림이 요양부를 점령해 흥료국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의 지원 거부, 내부 배신으로 인해 1030년(요 성종 태평 10년)에 멸망했다. 1116년(천조제 천경 6년) 1월, 동경의 소년 10여 명에게 동경유수 소보선(蕭保先)이 살해당하자 호부사 대공정(大公鼎)이 동경유수를 대행했다.
대공정은 부유수 고청명과 함께 해족, 한족 군인들을 동원해 주동자들을 색출해 참수했으나, 발해인 고영창이 금나라에 점령당하는 4개월간 고영창의 대발해국을 세우기도 했다.[6][7]
2. 3. 금나라 시대
919년(요 태조 신책 4년), 거란이 발해인과 중국인들을 요양으로 이주시킨 뒤 방치되어 있던 옛 요양성을 재건하면서 동평군(東平郡)을 설치하고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928년(요 태종 천현 3년), 발해 유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란국의 수도가 홀한성에서 요양부로 옮겨졌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발해인들이 요양부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유도부가 남경 석진부로 승격된 이후 '''동경(東京)'''으로 불리게 되었다.[6][7]1029년(요 성종 태평 9년), 발해의 왕손이던 대연림이 요양부를 점령해 흥료국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의 지원 거부, 내부 배신으로 인해 1030년(요 성종 태평 10년)에 멸망했다. 1116년(천조제 천경 6년) 1월, 동경의 소년 10여 명에게 동경유수 소보선(蕭保先)이 살해당하자 호부사 대공정(大公鼎)이 동경유수를 대행했다. 대공정은 부유수 고청명과 함께 해족, 한족 군인들을 동원해 주동자들을 색출해 참수했으나, 발해인 고영창이 금나라에 점령당하는 4개월간 고영창의 대발해국이 차지하게 되었다.[6][7]
천복성(天福城)이라고도 불린 요양부의 부성은 높이 3길, 너비가 30리가까이 되는 거대한 성이었다. 동경도의 수많은 행정구역들처럼 거란이 발해의 행정구역들을 모두 폐지, 요동에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여러 행정구역의 연혁들이 혼합되었다. 이로 인해 해당 사서의 건치 연혁이 이전 사서에서 언급한 동일 행정구역에 대한 언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6][7]
동경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급은 중급, 동경유수사가 부의 민정을 맡았다. 1144년(금 희종 황통 4년) 2월에 동경신궁을 설립하고 침전(寢殿)은 보녕전(保寧殿), 연전(宴殿)을 가혜전(嘉惠殿), 전후 정문을 각각 천화문(天華門), 건정문(乾貞門)으로 칭했다. 같은 해 7월, 종묘와 효령궁(孝寗宮)을 세웠다.[6][7]
1161년(해릉양왕 정륭 6년), 해릉양왕의 종제인 완안오록이 요양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212년(금 위소왕 숭경 원년) 몽골 제국의 장군 제베에게 함락되었고 이듬해인 1213년 거란의 장교 야율유가가 세운 동요의 수도가 되었다.[6][7]
흰토끼, 사고보(師姑布), 쥐털, 흰쥐의 가죽, 인삼, 흰바곳뿌리가 난다. 본부에는 40,604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고 4개의 속현이 있는데, 속현 중 1개의 속진을 두었다.[8]
2. 4. 원나라 시대
1269년(쿠빌라이 칸 지원 6년), 동경총관부(東京總管府)가 설치되었고 광녕부가 격하되면서 요양로에 속했다.[9] 1278년(쿠빌라이 칸 지원 15년), 광녕을 분리해 행로사를 두고 본성에 속하게 했다.[9] 1280년(쿠빌라이 칸 17년), 파사부, 의주, 개주를 폐지해 본로에 소속시켰다.[9] 1287년(쿠빌라이 칸 24년) 요양등처행중서성이 분리되자 본성의 중심지가 되었다.[9] 1288년 동경에서 요양로로 개명되었고 파사부는 폐지되어 순검사(巡檢司)로 개명되었다.[9] 요양로는 3,708호 33,231명을 거느렸다.[9] 1현 2주를 관할했다.[9]1290년 고려의 끈질긴 요구, 저항으로 평안도지역에 설치되었던 동녕부가 요양일대로 옮겨졌다.[9] 1370년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던 우라산성을 점령했던 동북면 원수 이성계가 동년 11월, 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함께 요양로를 점령했다. 하지만 복합적인 문제로 인해 고려는 요양을 포기하면서 명나라로 귀속되었다.[9]
1288년 (지원 25년), 원나라에 의해 동경 요양부는 '''요양로'''로 개칭되었다. 요양로는 요양등처행중서성에 속했으며, 요양현과 개주, 의주의 2주 1현을 관할했다.[3]
2. 5. 명나라 시대
1371년(명 태조 홍무 4년) 2월, 명나라는 요동위(遼東衛)를 설치하였다. 1373년(홍무 6년) 11월에는 정요좌위와 정요우위를 분리 신설하였다. 1375년(홍무 8년) 2월, 요동위는 정요후위로 개명되었고, 1376년(홍무 9년) 10월 정요후위의 치소가 요양성 북쪽으로 옮겨졌다. 1384년(홍무 17년) 정요위는 중위로 개편되었다.[4]요양 지역은 서남쪽에 수산(首山), 남쪽에 천산(千山), 동남쪽에 안평산(安平山)이 위치하고 있다. 특히 안평산에는 철광이 존재한다.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흐르는데, 새외에서 발원하여 해주위에서 바다로 유입된다. 서북쪽에는 혼하(渾河)가 있으며, 소요수(小遼水)라고도 불린다. 동북쪽에 있는 태자하(太子河)는 대량수(大梁水) 혹은 동량수(東樑水)라고도 불리며, 하류에서 요수로 합류한다. 동쪽에 있는 압록강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쪽의 봉황성(鳳凰城)은 봉황산(鳳凰山) 동남쪽에 위치하며, 1481년(성화 17년)에 축성되었다. 조선의 사신들이 이 성을 지나갔다. 또한 남쪽에는 진강보성(鎮江堡城)이, 동남쪽에는 연산관(連山關)이 존재했다.[1]
1371년(홍무 4년), 명나라는 정요중위에 정요도위를 설치하였다. 1375년(홍무 8년), 정요도위는 요동도지휘사사로 개칭되었다. 요동도지휘사사는 산동성에 속했으며, 25위와 자재주, 안락주를 관할했다.[4]
2. 6. 명나라 이후 ~ 현대
1288년 (지원 25년), 원나라에 의해 동경 요양부는 '''요양로'''로 개칭되었다. 요양로는 요양등처행중서성에 속했으며, 요양현과 개주, 의주의 2주 1현을 관할했다.[3]1371년 (홍무 4년), 명나라에 의해 정요중위에 정요도위가 설치되었다. 1375년 (홍무 8년), 정요도위는 요동도지휘사사로 개칭되었다. 요동도지휘사사는 산동성에 속했으며, 25위와 자재주, 안락주를 관할했다.[4]
1653년 (순치 10년), 청나라에 의해 요양부가 설치되었다. 1657년 (순치 14년), 요양부의 부치는 성경성으로 이전되었고, 요양부는 '''봉천부'''로 개칭되었다. 봉천부는 성경장군에 속했으며, 승덕, 개원, 철령, 해성, 개평, 요양주, 복주, 금주청의 1청 2주 5현을 관할했다.[5]
1912년, 중화민국에 의해 봉천부는 폐지되었다.
3. 행정 구역 변천
919년 (요 태조 신책 4년), 거란이 발해인과 중국인들을 요양으로 이주시킨 뒤 옛 요양성을 재건하면서 동평군(東平郡)을 설치하고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928년 (요 태종 천현 3년), 동란국의 수도가 홀한성에서 요양부로 옮겨졌고,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938년 (천현 13년), 남경은 동경(東京)으로 개칭되었고, 요양부가 설치되었다.
금나라 시대에는 동경로에 속했으며, 요양, 학야, 의풍, 석성의 4개 현과 장의진을 관할했다.[2]
1288년 (지원 25년), 원나라에 의해 동경 요양부는 '''요양로'''로 개칭되었다. 요양로는 요양등처행중서성에 속했으며, 요양현과 개주, 의주의 2주 1현을 관할했다.[3]
1371년 (홍무 4년), 명나라에 의해 정요중위에 정요도위가 설치되었다. 1375년 (홍무 8년), 정요도위는 요동도지휘사사로 개칭되었다. 요동도지휘사사는 산동성에 속했으며, 25위와 자재주, 안락주를 관할했다.[4]
1653년 (순치 10년), 청나라에 의해 요양부가 설치되었다. 1657년 (순치 14년), 요양부의 부치는 성경성으로 이전되었고, 요양부는 '''봉천부'''로 개칭되었다. 봉천부는 성경장군에 속했으며, 승덕, 개원, 철령, 해성, 개평, 요양주, 복주, 금주청의 1청 2주 5현을 관할했다.[5]
1912년, 중화민국에 의해 봉천부는 폐지되었다.
3. 1. 요나라
919년(요 태조 신책 4년), 거란이 발해인과 중국인들을 요양으로 이주시킨 뒤, 방치되어 있던 옛 요양성을 재건하면서 동평군(東平郡)을 설치하고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926년(요 태조 천현 원년)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그 땅에 동란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발해 땅을 간접 지배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 사후 요나라 조정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발해 부흥운동이 여러 차례 일어나면서 동란국을 통한 발해 지역 통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6][7]928년(요 태종 천현 3년), 태종은 발해 유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란국의 수도를 홀한성에서 요양부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발해인들이 요양부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가 유도부가 남경 석진부로 승격된 이후 '''동경(東京)'''으로 불리게 되었다.[6][7]
1029년(요 성종 태평 9년), 발해 왕손 출신 대연림이 요양부를 점령해 흥료국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의 지원 거부와 내부 배신으로 인해 1030년(요 성종 태평 10년)에 멸망했다. 1116년(천조제 천경 6년) 1월, 동경의 소년 10여 명에게 동경유수 소보선(蕭保先)이 살해당하자 호부사 대공정(大公鼎)이 동경유수를 대행했다.[6][7]
대공정은 부유수 고청명과 함께 해족, 한족 군인들을 동원해 주동자들을 색출해 참수했으나, 발해인 고영창이 금나라에 점령당하는 4개월간 고영창의 대발해국을 세우기도 했다.[6][7]
천복성(天福城)이라고도 불린 요양부의 부성은 높이 3길, 너비가 30리 가까이 되는 거대한 성이었다. 동북쪽 모퉁이에 궁성이 있는데, 궁성의 높이는 3길에 망루가 있었고, 남쪽으로 3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성 담장 북쪽에 양국황제(讓國皇帝)의 어용전(御容殿)이 있었고, 궁성 내엔 전각 2채가 있었지만, 후궁전은 없었다. 내성사의 부관과 판관이 이 궁성을 지켰다. 동란국을 세웠을 때 남겨진 남경의 비명은 궁문의 남쪽에 있었다. 본성은 9개의 속현을 통치했다.[6][7]
그러나 동경도의 수많은 행정 구역들처럼 거란이 발해의 행정 구역들을 모두 폐지하고 요동에 재설치하는 과정에서 여러 행정 구역의 연혁들이 혼합되었다. 이 때문에 해당 사서의 건치 연혁이 이전 사서에서 언급한 동일 행정 구역에 대한 언급과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678년(청나라 강희제 강희 17년) 편찬된 역사지리서 독사방여기요에는 현성의 대략적인 위치가 언급되어 있다. 본 문서에서 언급되는 요양부의 속현 위치는 해당 서적의 부분을 인용하여 작성되었다.[6][7]
3. 2. 금나라
금나라는 동경로의 중심지인 요양부에 중급의 급을 부여하고 동경유수사가 민정을 맡게 했다. 1132년(금 태종 천회 10년) 남경로평주군사사를 동남로도통사로 바꾸고, 병마도부서사를 두었다. 1150년(천덕 2년)에는 도총관부를 설치했다가 유수사로 고쳤다.[8]1144년(금 희종 황통 4년) 2월, 동경신궁을 세우고 침전은 보녕전, 연전은 가혜전, 전후 정문은 각각 천화문, 건정문이라 불렀다. 같은 해 7월에는 종묘와 효령궁을 세웠다.[8]
1161년(해릉양왕 정륭 6년), 해릉양왕의 종제 완안오록이 요양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212년(금 위소왕 숭경 원년)에는 몽골 제국의 장군 제베에게 함락되었고, 이듬해인 1213년 거란족 장교 야율유가가 세운 동요의 수도가 되었다.[8]
요양부에서는 흰토끼, 사고보, 쥐털, 흰쥐 가죽, 인삼, 흰바곳뿌리가 생산되었다. 40,604호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4개의 속현과 1개의 속진을 두었다.[8]
3. 3. 원나라
1288년(지원 25년) 원나라에 의해 동경 요양부는 '''요양로'''로 개칭되었다. 요양로는 요양등처행중서성에 속했으며, 요양현과 개주, 의주의 2주 1현을 관할했다.[3] 1290년 고려의 끈질긴 요구와 저항으로 평안도 지역에 설치되었던 동녕부가 요양 일대로 옮겨졌다.1269년 (쿠빌라이 칸 지원 6년), 요양등처행중서성의 중심지인 '''요양로(遼陽路)'''가 본부에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귀덕주, 등주, 부주, 래원군을 폐지해 요양부에 통폐합했고 광녕부, 파사부, 의주, 개주를 4로로 바꾸고 직례성에 소속시켰다. 같은 해 동경총관부(東京總管府)가 설치되었고 광녕부가 격하되면서 요양로에 속했다. 1278년(쿠빌라이 칸 지원 15년), 광녕을 분리해 행로사를 두고 본성에 속하게 했다. 1280년(쿠빌라이 칸 17년), 파사부, 의주, 개주를 폐지해 본로에 소속시켰다. 1287년(쿠빌라이 칸 24년) 요양등처행중서성이 분리되자 본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1288년 동경에서 요양로로 개명되었고 파사부는 폐지되어 순검사(巡檢司)로 개명되었다. 요양로는 3,708호 33,231명을 거느렸고, 1현 2주를 관할했다.[9]
3. 4. 명나라
1371년(명 태조 홍무 4년) 2월, 요동위(遼東衛)가 설치되었다.[4] 1373년(명 태조 홍무 6년) 11월, 정요좌위와 정요우위가 분리 신설되었다. 1375년(명 태조 홍무 8년) 2월, 요동위가 정요후위로 개명되었고, 같은 해 요동도지휘사사로 개칭되었다. 1376년(명 태조 홍무 9년) 10월, 정요후위의 치소가 요양성 북쪽으로 옮겨졌다. 1384년(명 태조 홍무 17년) 정요위를 중위로 삼았다. 요동도지휘사사는 산동성에 속했으며, 25위와 자재주, 안락주를 관할했다.[4]서남쪽에 수산(首山), 남쪽에 천산(千山), 동남쪽에 안평산(安平山)이 있으며, 안평산에는 철광이 존재한다.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는데, 새외에서 들어와 해주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서북쪽에 혼하(渾河)가 있는데, 소요수(小遼水)라고도 한다. 동북쪽에 있는 태자하(太子河)는 대량수(大梁水) 혹은 동량수(東樑水)라고도 불리며, 하류에서 요수로 들어간다. 동쪽에 있는 압록강은 동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동쪽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은 봉황산(鳳凰山) 동남쪽에 있는데, 1481년(성화 17년)에 축성되었다. 조선의 사신들이 이 성을 지나간다. 남쪽에 진강보성(鎮江堡城)이 있고, 동남쪽에 연산관(連山關)이 존재했다.
참조
[1]
서적
遼史
[2]
서적
金史
[3]
서적
元史
[4]
서적
明史
[5]
서적
清史稿
[6]
서적
요사
https://zh.wikisourc[...]
[7]
서적
독사방여기요
https://zh.wikisourc[...]
[8]
서적
금사
https://zh.wikisourc[...]
[9]
서적
원사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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