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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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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즈키성은 아카마쓰 씨 일족인 고즈키 가게모리에 의해 1336년에 축성된 일본의 성이다. 가키쓰의 난 이후 야마나 씨와 아카마쓰 씨의 공방이 벌어졌으며, 1557년 아카마쓰 마사모토가 입성하여 서하리마를 지배했다. 1577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이후 우키타 나오이에, 아마고 가쓰히사 등이 입성했지만, 모리 데루모토의 공격으로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며 폐성되었다. 현재는 토루, 석벽, 해자 등의 유구가 남아 있으며, JR 고즈키역에서 도보로 방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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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키성
지도 정보
성곽 정보
성산
성산
이름상월성
별칭고즈키조
소재지효고현
종류연곽식 산성
축성 연도엔겐 원년 (1336년)
축성자고즈키 가케모리
주요 인물고즈키 씨
아카마쓰 씨
아마고 가쓰히사
폐성 연도덴쇼 6년 (1578년)
현황토루, 석벽, 공호
좌표34
건축 정보
천수각 구조미건조

2. 역사

엔겐 원년(1336년), 아카마쓰 씨 일족인 고즈키 가게모리에 의해 고즈키성이 축성되었다. 가키 원년(1441년) 가키의 난으로 아카마쓰 미쓰스케에 가담한 고즈키 가게노리[1]와 그의 조카 고즈키 가게이에 등이 막부 군의 추격을 받아 고즈키 씨의 적류는 멸망[2]했다.

이후 야마나 씨와 아카마쓰 씨의 공방이 벌어졌으며, 고지 3년(1557년), 아카마쓰 마사모토가 오키시오 성에서 고즈키 성으로 입성했다. 그의 아들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사요, 아코, 잇토, 이세이, 시소의 5군을 영유하며 "서播磨殿(니시하리마도노)"이라고 불렸다. 덴쇼 5년(1577년)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3] 그 후, 우키타 나오이에에 속했던 고즈키 가게사다[4]가 입성했지만, 히데요시의 공격과 그 부하인 에바라 지카쓰구의 모반으로 함락되었고, 아마고 가쓰히사 등 아마고 당이 들어왔다. 덴쇼 6년(1578년), 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대군에 포위되었고, 구원하러 온 하시바 히데요시도 미키 성 공략을 위해 철수하면서 고립된 아마고 가쓰히사는 모리 씨에게 항복하고 자결했다. 이때 야마나카 유키모리도 붙잡혀 빈고국 도모로 이송되던 중 빗추국 다카하시에서 주살되었다. 그 후, 고즈키 성은 폐성되었다.

현재는 토루, 석벽, 해자 등의 유구가 남아 있으며, 혼마루에는 아카마쓰 씨의 공양탑, 산기슭에는 아마고 씨의 공양탑이 남아있다.

2. 1. 남북조 시대 ~ 무로마치 시대

엔겐 원년(1336년) 아카마쓰 씨 일족인 고즈키 가게모리가 다이헤이 산에 성을 축조하였다.[1] 가키쓰 원년(1441년)에 일어난 가키쓰의 난에서 아카마쓰 미쓰스케에 가담한 고즈키 가게노리와 그의 조카 고즈키 가게이에 등이 막부 군에 토벌되어 고즈키 가문은 멸문되었다.[2] 이후 야마나 씨와 아카마쓰 가문 간에 다툼이 계속되었다. 고지 3년(1557년) 아카마쓰 마사모토가 오키시오 성에서 고즈키 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아들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사요, 아코, 잇토, 이세이, 시소 5개 군을 영지로 하리마 서부를 장악하여 “니시하리마도노”(西播磨殿)라고 불렸다. 덴쇼 5년(1577년) 고즈키 성은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 하시바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고,[3] 하리마 일대는 오다 세력이 장악하였다. 그 후, 우키타 나오이에에 속했던 고즈키 가게사다[4]가 입성했지만, 히데요시의 공격과 부하인 에바라 지카쓰구의 모반으로 함락되었고, 아마고 가쓰히사 등 아마고 당이 들어왔다. 다음 해인 덴쇼 6년(1578년) 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대군이 성을 포위하였고, 원군으로 오려고 한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은 하리마 동부의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의 모반으로 철퇴하였다. 고립된 아마고 가쓰히사는 모리 씨에게 항복하고 자결하였다. 이때 야마나카 유키모리도 포박되어 빈고국 도모로 이송되던 중 빗추국 다카하시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고즈키 성은 폐성되었다.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덴쇼 5년(1577년),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고즈키 성이 함락되었고, 하리마 일대는 오다 세력이 장악하였다.[3] 이후 아마고 가쓰히사가 고즈키 성에 입성하였다. 덴쇼 6년(1578년) 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대군이 성을 포위하였고, 원군으로 오려던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은 하리마 동부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의 모반으로 철퇴하였다. 고립된 아마고 가쓰히사의 아마고 가문 부흥군은 모리 가문에 항복했고 가쓰히사는 자결하였다. 이때 아마고 가문의 부장 야마나카 유키모리도 포박되어 다카하시강변에서 처형되었다.[2] 그 후, 고즈키 성은 폐성되었다.

3. 남아 있는 구조물

현재 성루, 석벽, 빈 해자 등의 구조물이 남아있다. 그 외에도 혼마루에는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공양탑과 산기슭에는 아마고 가쓰히사의 공양탑이 남아 있다.

4. 관광


  • '''교통''': JR 서일본 고즈키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이다.
  • '''주변 문화시설 및 관광 명소''': 고즈키성 공원 역사자료관

참조

[1] 문서 景盛の孫とされる
[2] 문서 ただし、上月氏自体が完全に滅んだわけではなく、上月満吉(みつよし)がその後の長禄の変で功績を挙げて赤松氏の再興に貢献するなど、以後も一門出身の人物が散見される
[3] 서적 信長公記-戦国覇者の一級資料 中公新書 2018
[4] 문서 上月氏一門の出身。妙寿尼の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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