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공손월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공손월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군벌 공손찬의 종제이다. 공손찬이 원소와 대립하며 원술과 연합했을 때 원술에게 파견되어 유화 체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1년, 원술 휘하에서 손견과 함께 양성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했고, 이 사건은 공손찬이 원소에게 더욱 강경하게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공손찬의 동생으로 등장하며, 기주 분할을 요청하러 갔다가 원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1년 사망 - 화웅
    화웅은 후한 말 동탁 휘하의 무관으로, 정사에서는 손견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에게 죽는 인물로 묘사된다.
  • 191년 사망 - 장온 (후한)
    장온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환관 조등의 제자였으며 사공과 사도를 역임했고, 황건적의 난 당시 주준을 옹호하며 양주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동탁과의 갈등으로 191년에 처형당했다.
  • 공손씨 - 공손룡
    공손룡은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변론가이자 철학자로, 명가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며, '백마비마설'과 '견백론' 등의 독특한 논리를 통해 이름과 실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논리학과 변론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 공손씨 - 공손술
    공손술은 전한 시대 인물로, 신나라 멸망 후 촉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성가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후한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성가가 멸망했다.
  • 공손찬과 주변 인물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 공손찬과 주변 인물 - 조운 (촉한)
    조운은 상산군 출신으로 유비의 부하가 되어 창술에 능한 용맹함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유선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고, 사후 대장군 순평후의 시호를 받았다.
공손월
기본 정보
후한 시대의 영토 (189년)
후한 시대의 영토 (189년)
인물 정보
이름공손월(公孫越)
성씨공손(公孫)
월(越)
시대후한
활동 시기후한 말기
출생불명
사망191년
사인전투 중 전사
주요 활동원술 휘하의 파견 장수
가계
부모불명
형제공손찬
상세 정보
소속공손찬
원술
관직기도위(騎都尉)
봉호없음
친척공손범, 공손속, 공손강, 공손공 (종형제)
생애
초기 생애공손월은 공손찬의 친족이었다.
원술 휘하초평(初平) 2년(191년), 원술은 공손월을 손견에게 보내 함께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양양을 공격하던 중, 유표의 장수 황조가 내놓은 화살에 맞아 손견이 전사하자 공손월도 전사했다. 원술은 손견의 죽음을 슬퍼하며 손견의 아들 손책에게 병사를 돌려주었다. 공손찬은 원술이 공손월을 죽였다고 의심하며 원술과 사이가 틀어졌다.

2. 생애 및 활동

이름공손월
시대후한 시대
생몰년출생년도 미상 - 191년 (초평 2년)
자・별호〔불상〕
본관・출신지 등유주 요서군 영지현
직관〔불상〕
작위・호칭 등-
진영・소속 등공손찬원술
가족・일족일족:공손찬 (종형), 공손범 (형제?, 종형제?), 공손속 (공손찬의 아들)



191년(초평 2년), 원술유우의 아들 유화를 부하로 삼았다. 그러나 유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공손찬은 공손월을 원술 휘하로 파견하여 유화를 체포하려 했다. 결국 유화는 도망쳐 원소에게로 달아났기에, 공손찬과 유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같은 해, 원소 진영의 주앙(『삼국지』 위서 공손찬전. 한편, 『후한서』 공손찬전에 따르면 주흔으로 기록됨)이 양성의 손견의 진지를 빼앗자, 원술은 손견과 공손월에게 명하여 주앙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공손월은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공손월의 죽음은 공손찬의 원소에 대한 대결 자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2. 1. 초기 활동

후한 말기 군벌 공손찬의 종제(사촌 형제)였다.

공손찬이 기주로 진출하여 한복을 공격해 격파하자, 한복의 힘이 약해졌다. 이 틈을 타 여러 세력들이 기주를 공격하였고, 당시 한복의 객장이었던 원소는 영내의 위협 세력을 모두 격파해 제거하고 한복을 협박해 기주를 차지했다.[1] 공손찬은 원소와 사이가 나쁘던 원술과 연합했고, 공손월에게 1천 명의 기병을 주어 원술에게 파견했다.[2]

2. 2. 원술과의 동맹 및 죽음

원소와 사이가 나빴던 원술공손찬에게 1천 명의 기병을 주어 손견과 함께 양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양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2] 공손찬은 공손월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공손월이 죽게 된 것은 모두 원소의 탓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공손찬의 남진이 시작되었다.[3]

191년(초평 2년), 원술은 유우의 아들 유화를 부하로 삼았다. 그러나 유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공손찬은 공손월을 원술 휘하로 파견하여 유화를 체포하려 했다. 결국 유화는 도망쳐 원소에게로 달아났기에, 공손찬과 유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같은 해, 원소 진영의 주앙(『삼국지』 위서 공손찬전. 한편, 『후한서』 공손찬전에 따르면 주흔으로 기록됨)이 양성의 손견의 진지를 빼앗자, 원술은 손견과 공손월에게 명하여 주앙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공손월은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공손월의 죽음은 공손찬의 원소에 대한 대결 자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3. 평가 및 영향

공손월의 죽음은 당시 군벌 간의 세력 다툼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특히 원소공손찬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공손월은 원술에게 파견되어 손견과 함께 원소에게 탈취당한 양성을 공격했으나, 양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3] 공손찬은 공손월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원소에게 책임을 물었는데, 이로 인해 공손찬의 남진(南進)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된다.[3]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공손찬의 명으로 기주 분할을 원소에게 요청하는 사자가 되었지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원소 군의 기습을 받아 화살에 맞아 죽었다.[1]

5. 가계

관계이름비고
종형(사촌 형)공손찬
형제(혹은 종형제)공손범
조카공손속공손찬의 아들


참조

[1] 서적 삼국지 권6 원소전(袁紹傳) "3세기"
[2] 서적 삼국지 권8 위서 제8 2공손도4장전
[3] 서적 삼국지 권8 위서 제8 2공손도4장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