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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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손찬은 후한 말의 무장으로, 뛰어난 무예와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북방에서 세력을 떨쳤다. 그는 요서군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백마의종'을 이끌고 '백마장사'로 불렸다. 유우와의 갈등, 원소와의 대립 속에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유우를 살해하고 독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유비, 조운 등 주요 인물들과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원소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역경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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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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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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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공손찬 |
본명 | 공손찬 |
로마자 표기 | Gongsun Zan |
자 | 백규 (伯珪), 백규 (伯圭) |
출생지 | 유주 요서군 영지현 |
사망일 | 199년 4월 |
사망지 | 하간국 역현 |
사망 원인 | 자살 |
국적 | 후한 |
직업 | 장군, 정치인, 군벌 |
관직 | 요서군 문하서좌 → 요동속국장사 → 탁현령 → 기도위 → 항로교위 겸 속국장사(중랑장?) → 분무장군 → 전장군 |
작위 | 도정후 → 계후 → 역후 |
친척 | 공손월 (사촌) 공손범 (사촌) |
자녀 | 공손속 |
관직 정보 | |
관직 | 유주자사 (자칭) |
임기 시작 | 193년 |
임기 종료 | 199년 3월 |
군주 | 헌제 |
관직 (2) | 전장군 |
임기 시작 (2) | 192년 |
임기 종료 (2) | 199년 3월 |
군주 (2) | 헌제 |
관직 (3) | 분무장군 |
임기 (3) | 189년 – 192년 |
군주 (3) | 헌제 |
기타 정보 | |
주요 적대 세력 | 유우 원소 |
관련 활동 | 유주에서 독자 세력화 |
2. 생애
공손찬은 요서군 문하서좌(門下書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려한 용모와 큰 목소리, 뛰어난 말재주와 총명함으로 여러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면서도 실수하지 않아 태수의 인정을 받아 사위가 되었다. 이후 탁군 사람 노식에게 경전을 배우며 유비와 동문수학하며 깊이 교우하였다.[62] 효렴으로 추천되어 랴오둥의 주서(長史)로 임명되었다.[7]
공손찬은 북방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수십 기를 이끌고 선비족 수백 기와 맞서 싸워 수십 명을 살상하고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탁현령(涿―)으로 전임되었다.[7] 중평 연간(184년 ~ 189년), 양주(涼州)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을 위해 유주(幽州)에서 오환돌기(烏桓突騎) 3,000명의 도독을 맡았으나, 군량 지급 지연으로 오환족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장순, 장거, 오환족이 연합하여 187년에 난을 일으켰다.[68] 공손찬은 이들과 싸워 기도위(騎都尉)로 승진했으나, 반란군의 세력이 강성하여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 기주(冀州)까지 피해를 입었다. 188년, 석문(石門)에서 장순 등을 크게 격파하고 추격했으나, 관자성(管子城)에서 구력거 등에게 포위되어 이백여 일을 버티다 퇴각하였다.[66] 이후 장순이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난이 진압되었고, 공손찬은 항로교위(降虜校尉)에 속국장사를 겸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70] 그는 흰 말을 타고 전투에 임했으며, 항복한 오환족 중 기마술에 능한 병사들을 백마에 태워 "백마의종(白馬義從)"이라 불렀다. 이민족들은 "백마장사(白馬長史)"를 두려워했다.
공손찬은 유우와 갈등하며 세력을 키웠다. 유우는 은혜와 신망으로 이민족을 회유하려 한 반면, 공손찬은 무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6] 191년(초평 2년), 원소의 남하 제안에 따라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을 공격하려 했고, 한복은 기주목 자리를 원소에게 넘겼다.[72] 황건적이 발해군을 거쳐 흑산적과 합치려 하자, 동광현(東光縣)에서 이들을 대파하고 분무장군(奮武將軍)에 계후(薊侯)가 되었다.[74] 헌제의 군사적 지원 요청에 유우는 기병 수천 명을 파병했으나, 공손찬은 원술과 연합하여 유화를 잡아두라고 귀띔했다.[14] 유우는 이민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공손찬은 무력 진압을 주장하며 유우가 선비족에게 주는 은상을 약탈했다.[19]
192년 봄,[66] 원소와 계교 남쪽에서 격돌하였다. 공손찬은 3만 명의 보병과 1만 명의 기병, 백마의종으로 맞섰으나, 원소의 장수 국의에게 패배하였다.[76] 그러나 최거업이 이끄는 원소군을 거마수(巨馬水)에서 크게 격파하고 남진하여 평원국에 이르렀다가 용주(龍湊)에서 패배하고 유주로 돌아왔다.[77] 전해로 하여금 청주를 점거하게 했으나 2년간 원소군과 공방을 거듭하며 양군 모두 피폐해졌다. 1993년, 조정의 중재로 원소와 화해했다.[66]
공손찬은 유우를 살해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유우가 무력을 남용하는 것에 근심하여 출병을 불허하고 군량 지급을 줄이자, 공손찬은 더욱 엇나갔다. 유우와 공손찬은 서로를 비방하는 상주를 올렸고, 공손찬은 계현(薊縣)에 작은 성을 쌓고 유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66] 겨울, 유우가 십만 명을 이끌고 공손찬을 습격했으나, 공손찬은 정예병 수백 명으로 바람의 방향대로 불을 놓으며 돌진해 크게 무너트렸다. 유우는 상곡군 거용현(居庸縣)으로 도주했으나,[79] 공손찬은 3일 만에 거용현을 공략하고 유우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80]
유우의 부하들은 염유를 오환사마(烏丸司馬)로 추대하고 공손찬에게 복수하려 했다. 염유는 오환, 선비, 한족 수만 명을 모았고, 원소 진영의 유화와 국의도 합세하여 군세가 십만에 달했다. 195년(흥평 2년), 포구수(鮑丘水)에서 패배한 공손찬은 역경(易京)으로 철수해 방어 태세를 다졌다.[25]
유비와 조운은 공손찬이 유우를 살해한 사건으로 인해 공손찬과 관계를 단절했다. 유비는 공손찬에게 돌아가지 않고 서주에 머물렀으며, 조운 역시 공손찬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198년(건안 3년), 원소가 대대적으로 침공해오자, 공손찬은 흑산적에게 원병을 청하고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나가 원소의 후방을 공격하려 했으나, 장사 관정의 간언으로 출정을 철회했다.[66] 199년 봄, 흑산적 두령 장연이 십만 명을 이끌고 공손찬을 구원하려 했으나, 원소의 복병에 대패하고 성으로 쫓겨났다. 원소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 누각 아래에 나무 기둥을 댄 후 불을 붙여 누각들을 무너뜨렸다.[66] 패배를 직감한 공손찬은 누이, 아내, 자녀들을 죽이고 자신은 분신자살했다.[37]
공손찬은 말년에 거만하고 자만하게 굴었다.[23] 학식이 풍부한 학자들을 멀리하고, 평민 출신 중 거만하고 대담한 사람들과 어울렸다.[24] 역경성은 10년치 병량을 비축하고 여러 겹의 성벽을 갖춘 견고한 성이었으나, 저의와 유화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원소의 공격에 역경이 함락되고 공손찬은 자결했다.
2. 1. 출신과 초기 관직 생활
요서군의 문하서좌(門下書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용모가 수려하고 목소리가 컸으며 말재주도 있는데 총명하기까지 하여 여러 업무를 한꺼번에 보고하면서도 잊거나 틀린 부분이 없었다.[61] 태수가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고는, 구씨산(緱氏山)에 있던 탁군 사람 노식에게 보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여기서 유비와 동문수학하며 깊이 교우하였다.[62] 이후 군의 상계리(上計吏)로 근무하였다.장인의 후임 태수[63] 유기(劉基, 劉其)[64]가 죄를 지어 죄인용 수레[함거, 檻車]로 소환되었다. 공손찬은 스스로 그 시중들기를 원했는데 법률에서는 관리들이 가까이 따라붙는 것을 불허했으므로 외양을 꾸며 병사를 사칭해서는 수레 곁에서 모시며 낙양까지 따라갔다. 유기는 한나라의 최남단인 일남군으로의 유배형이 선고되었다. 공손찬은 돼지고기와 술을 들고 북망산(北芒山)으로 가 조상들께 제사 지냈다. 술을 올리며 “예전엔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지금은 누군가의 신하인지라 응당 일남으로 가야 합니다. 일남의 습하고 더운 기운으로 인해 혹여 못 돌아올지도 몰라 이렇게 하직 인사드립니다.”라고 말하고 강개한 모습으로 재배하였다. 이에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행히 가던 도중 유기가 사면받았다.[5]
공손찬은 효렴으로 추천되었고 랴오둥의 주서(長史)로 임명되었다.[7]
2. 2. 북방 이민족과의 전투와 백마장사
공손찬은 효렴에 천거된 후, 수십 기(騎)를 이끌고 성채 밖으로 나갔다가 선비족 수백 기와 마주쳤다. 그는 비어있던 정(亭)으로 물러나 부하들을 독려한 후, 양인모(兩刃矛)라는 양 끝에 날이 달린 모(矛)를 쥐고 돌진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였다. 비록 따르던 기병의 절반을 잃었지만 위기를 모면하였고, 이후 탁현령(涿―)으로 전임되었다.[7]중평 연간(184년 ~ 189년), 양주(涼州)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유주(幽州)에서 오환돌기(烏桓突騎) 3,000명을 지원하게 되었고, 공손찬이 그 도독을 맡았다. 그러나 군량 지급이 지연되자 오환족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66] 어양군 사람 장순(張純)은 오환돌기 통솔을 청했지만 공손찬에게 밀려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67] 이 기회를 틈타 장거(張擧), 오환족과 함께 187년에 난을 일으켰다.[68] 공손찬은 이들과 싸워 기도위(騎都尉)로 승진했으나, 반란군의 세력이 워낙 강성하여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 기주(冀州)까지 피해를 입었다.
188년,[66] 공손찬은 석문(石門)에서 장순 등을 크게 격파하고 잡혀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는 추격을 계속했으나 너무 깊이 들어가 관자성(管子城)에서 구력거 등에게 포위당했다. 식량이 부족하여 말(馬)을 잡아먹고, 말까지 동나 쇠뇌와 방패를 먹는 등 이백여 일을 처절하게 버텼으나, 결국 사졸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뿔뿔이 흩어져 퇴각하였다. 비와 눈이 많이 와 구덩이에 빠져 죽은 이가 열에 대여섯이나 되었으나, 적들도 굶주렸으므로 유성(柳城)으로 돌아갔다. 189년 3월,[66] 장순의 객(客) 왕정(王政)이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에게 장순의 머리를 보내옴으로써 난이 진압되었다. 공손찬은 항로교위(降虜校尉)에 속국장사를 겸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70]
공손찬은 전투 시 항상 흰 말을 탔으며, 항복한 오환족 중에서 기마술에 능한 병사들을 골라 백마에 태우고 "백마의종(白馬義從)"이라 불렀다. 이민족들은 백마를 두려워하며 "백마장사(白馬長史)"를 피하라고 서로에게 경고했다.
2. 3. 유우와의 갈등과 반목
유우는 은혜와 신망으로 이민족을 회유하려 한 반면, 공손찬은 무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둘은 대립하였다. 공손찬은 유우의 통제를 받아야 했음에도 세력을 키웠고, 부하들이 민간에 피해를 끼치는 것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았다.[66]191년(초평 2년), 원소가 공손찬에게 남하를 제안했다. 공손찬은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을 공격하려 했고, 한복은 기주목 자리를 원소에게 넘겼다.[72] 황건적이 발해군을 거쳐 흑산적과 합치려 하자, 공손찬은 동광현(東光縣)에서 이들을 대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분무장군(奮武將軍)에 계후(薊侯)가 되었다.[74]
헌제는 유화를 통해 유우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원술은 유화를 억류하고 유우에게 군대를 요구했고, 유우는 기병 수천 명을 파병했다. 공손찬은 원술의 야심을 알고 유우를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공손찬은 원술에게 공손월과 천여 기를 보내 연합을 맺고 유화를 잡아두라고 귀띔했다. 이로 인해 공손찬과 유우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다.[14]
유우는 유주 자사로 재임하며 이민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조정은 그가 무력 없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우는 장순을 죽이면 평화적으로 상황이 해결될 것이라 보고 부족들에게 사신을 보냈다. 구력거 등 오환 지도자들은 유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공손찬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사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부족들은 유우와 은밀히 만났고, 유우는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12][13]
이민족에게 은혜를 베푸는 유우와 달리, 공손찬은 무력 진압을 주장하며 유우가 선비족에게 주는 은상을 약탈했다. 유우는 공손찬에게 회견을 요청했으나, 공손찬은 항상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19]
2. 4. 원소와의 확전
192년 봄,[66] 원소는 몸소 나서 계교(界橋) 남쪽 20리 지점에서 격돌하였다. 공손찬은 3만 명의 보병으로 방진(方陳)을 형성하고 1만 명의 기병은 좌우익에 5천 명씩 배치했으며 백마의종은 중견(中堅)으로서 역시 두 부대로 나누었다. 원소는 국의의 정예병 8백 명을 선봉으로 삼고 이를 강노 1천 장(張)으로 받쳤으며 자신은 그 뒤에서 보병 수만 명으로 진을 쳤다. 공손찬은 국의의 군세가 적은 것을 보고 기병을 풀어 공격하였다. 국의 부대는 방패 아래로 몸을 낮추고 있다가 거리가 가까워지자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 달려들었다. 강노도 빗발치니 공손찬군은 엄강 등 천여 명이 죽고 나머지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계교까지 돌격해오는 국의를 다리 위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이마저 막지 못하고 본영의 아문(牙門)까지 내주는 등 전군이 궤주하였다.[76]원소의 장수 최거업이 수만 명으로 탁군 고안현(故安縣)을 에워쌌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공손찬이 보병과 기병 3만 명으로 추격하여 거마수(巨馬水)에서 칠팔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승세를 타고 남진하여 평원국에 이르렀는데 용주(龍湊)에서 또 깨지고 유주로 되돌아왔다.[77] 전해로 하여금 청주를 점거하게 했는데 2년간 원소군과 공방을 거듭하여 양군이 모두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약탈에 시달렸다. 1993년, 조정으로부터 태복(太僕) 조기가 와 공손찬과 원소를 화해시켰다.[66]
2. 5. 유우 살해와 몰락
유우는 공손찬이 무력을 남용하는 것에 근심했으며, 원소를 꺾으면 더욱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 봐 우려하여 출병을 불허하고 군량 지급도 줄였다. 그러나 공손찬은 더욱 엇나갔다. 공손찬은 이민족들을 재물로 달래면 달랠수록 오히려 한나라를 낮잡아 볼 것이라 생각하여[78] 유우가 이민족들에게 주는 재물도 번번이 노략하였다. 유우와 공손찬은 서로를 비방하는 상주를 올렸다. 공손찬은 계현의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 즉 경(京)을 축조하고는 유우의 부름에도 매번 병을 핑계 대며 나아가지 않았다.[66]겨울, 유우가 십만 명을 이끌고 공손찬을 습격하였다. 유주종사(―從事) 공손기(公孫紀)가 이 사실을 밤중에 미리 알려주었다. 당시 공손찬의 부곡들은 밖에 흩어져 있었고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터라 동쪽 성벽을 파서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유우의 병사들이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고 민가에 피해가 갈까 불도 못 지르게 했다는 것을 알고는 가려 뽑은 정예병 수백 명으로 바람의 방향대로 불을 놓으며 돌진해 크게 무너트렸다. 유우는 상곡군 거용현(居庸縣)으로 도주해 오환과 선비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79] 공손찬은 3일 만에 거용현을 공략하고 유우와 그 처자식을 사로잡아 계현으로 개선하였다.[66]
마침 황제의 사자 단훈(段訓)이 당도하여, 공손찬은 전장군에 오르고 역후(易侯)에 봉해졌으며 유주, 병주, 청주, 기주를 독(督)할 수 있는 가절(假節)도 받았다. 공손찬은 이전에 원소 등이 유우를 옹립하려 했던 일을 들먹이며 유우가 존호를 참칭하려 했다고 무고하고는 유우를 처형하라고 단훈을 위협하였다.[66] 하늘을 향해서도 ‘유우가 천자가 될 만하다면 비를 내려 그를 구하소서!’라고 빌어봤지만 날씨는 온종일 쨍쨍했다.[80] 결국 유우를 참하고 단훈을 유주자사로 추천하였다.
유우의 종사 선우보·제주(齊周), 기도위 선우은(鮮于銀) 등은 유주의 군사를 규합해 공손찬에게 복수하고자 평소 은덕과 신망이 높던 염유를 오환사마(烏丸司馬)로 추대하였다. 염유는 오환, 선비, 한족 수만 명을 불러 모았고 공손찬이 둔 어양태수 추단(鄒丹)을 노현(潞縣) 북쪽에서 쳐부수어 추단 등 4,000여 명을 베었다. 오환의 초왕(峭王) 소복연(蘇僕延)도 7,000여 기를 데리고 합류했으며 원소 진영에 있던 유화와 국의도 힘을 보태니 그 군세가 십만에 달했다.
195년(흥평 2년), 포구수(鮑丘水)에서 또 패배하여 2만 명을 잃고 역경(易京)으로 철수해 방어 태세를 다졌다. 이에 앞서 항간에는 ‘연나라의 남쪽, 조나라의 북쪽 가장자리, 중앙은 맞지 않지만 가치는 숫돌과 같은 곳, 오직 그 가운데서만 난세를 피할 수 있으리’[81]란 동요가 있었다. 공손찬은 하간국 역현이 그에 부합한다 여겨 본거지를 옮긴 터였다. 역경은 십중 해자에, 오륙 장(丈) 높이의 인공 언덕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 위에는 누(樓)가 있었다. 특히 공손찬이 사는 곳의 높이는 십 장에 달했다. 둔전까지 설치해놔서 자급자족도 가능하였다. 국의군이 1년 남짓한 동안 대치해봤다가 양식이 고갈되어 철군하는 것을 공손찬이 뒤쫓아 그 치중을 획득하기도 하는 등 원소도 까다로워했다.
2. 6. 유비, 조운과의 관계 단절
유비는 공손찬이 유우를 살해한 사건으로 인해 공손찬과 절교했다. 유비의 관점에서는 공손찬이 유우를 죽인 것은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것과 같았기 때문에, 황족으로서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비는 이 일 때문에 공손찬에게 돌아가지 않고 서주에 머물렀다. 훗날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한 것 역시 원소가 공손찬과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였기 때문이다.이 일로 인해 조운 역시 공손찬을 떠나 도망쳤는데, 공손찬에게는 형의 사망으로 장례를 치른다는 핑계를 대고 떠났으며, 다시는 공손찬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2. 7. 최후: 역경루의 불길
198년(건안 3년), 원소가 대대적으로 침공해왔다. 공손찬은 아들 공손속을 흑산적에게 보내 원병을 청하고, 자신도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나가 서산 옆에서 흑산적과 연계하여 원소의 후방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장사 관정은 굳건하게 수비만 해도 원소가 군대를 돌릴 것이며, 출정하면 중심을 잃은 역경이 위험해진다고 간언했다. 이에 공손찬은 출정을 철회했다.[66]199년 봄, 흑산적 두령 장연이 십만 명을 이끌고 공손찬을 구원하려 했다. 공손찬은 공손속에게 ‘봉화를 올리면 협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으나, 사자 문칙이 원소의 척후병에게 붙잡혔다. 밀서를 입수한 원소는 복병을 숨겨두고 불을 피워 공손찬을 유인하여 대패시키고 성으로 쫓아냈다. 원소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 누각 아래에 구멍을 뚫고 나무 기둥을 댄 후 불을 붙여 누각들을 무너뜨렸다.[66]
원소군이 중앙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반전할 방법이 없자, 공손찬은 누이와 처자를 죽이고 자신은 분신자살했다. 원소의 병사들이 누대로 올라가 공손찬의 목을 베었다. 건안 4년 3월의 일이었다.[66]
이후 공손찬은 거만하고 자만하게 굴었다.[23] 그는 학식이 풍부한 학자들을 멀리하고, 평민 출신 중 거만하고 대담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들과 의형제를 맺고 막대한 재산을 모았으며, 딸을 공손찬의 아들과 결혼시키기도 했다.[24]
유우의 부하들은 선비의 수장 연유와 합세하여 공손찬과 싸웠다. 이들은 유우의 유주 자사 조단이 이끄는 공손찬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그를 죽였다. 원소 역시 군대를 보내 유우의 부하들과 협력하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공손찬의 군대는 자주 패배했고, 결국 역경으로 물러나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25]
당시 지역 아이들 사이에는 장연은 남쪽, 원소는 북쪽으로 진격한다는 말이 돌았다. 공손찬은 이 곳이 역경이라고 믿고 방어 시설을 건설했다. 배송지는 공손찬이 황건적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에 야심이 너무 커져 원소를 상대로 세력을 확장하려 한 것이 실패의 이유라고 평했다.[26][27]
역경 밖에 있던 공손찬의 장수들은 그를 맞아들여달라고 요청했지만, 공손찬은 거절했다. 이는 오히려 장수들이 상관을 죽이고 항복하거나 원소군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원소는 공손찬의 영토 내부로 쉽게 진입했다.[28]
공손찬은 열 개의 해자를 만들고 요새를 건설하여 곡물 비축량을 확보했다. 그는 장수들을 탑 안에 주둔시키고, 도르래를 통해 서면 명령을 전달했다. 그는 아내와 첩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29][30]
공손찬은 부하들에게 휴식을 취하고 농업을 관리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원소는 공손찬에게 관계 개선을 설득하는 편지를 썼지만, 공손찬은 답하지 않고 군사 기지를 더욱 발전시켰다.[31][32]
199년, 원소는 역경을 포위했다. 공손찬은 아들을 흑산적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기병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 기주를 공격하려 했지만, 참모 관경은 요새가 함락될 것이라며 만류했다.[33]
이후 공손찬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가로채였다. 진림은 아들이 쓴 것처럼 꾸며 포위를 풀려는 시도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다.[34][35][36]
원소군은 사자를 붙잡아 신호를 알아내고, 이를 이용해 공손찬을 속였다. 공손찬은 매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지만, 가까스로 성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원소군은 터널을 파고 지하 구조물을 이용하여 중앙 요새에 도달, 불을 질러 무너지게 했다. 패배를 직감한 공손찬은 누이, 아내, 자녀들을 죽인 후 자결했다.[37][38][39][40]
역경성은 10년치 병량을 비축하고 여러 겹의 성벽을 갖춘 견고한 성이었다. 공손찬은 자신의 성루가 천 겹이나 된다고 말했다. 1년여의 대치 끝에 식량이 떨어져 철수하려는 저의와 유화의 군대를 공손찬은 추격하여 대파했다. 그 후에도 원소의 군대를 계속 막아냈다.
원소는 공손찬에게 항복을 권고했지만, 공손찬은 답장을 쓰지 않고 군비를 증강했으며, 측근인 관정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고 한다(『한진춘추』[55]). 공손찬은 측근을 멀리하고, 하녀와 측실에 둘러싸여 살았으며, 공문서도 아래에서 끌어올리게 했다고 한다(『영웅기』).
어느 날, 공손찬의 별장이 포위되었지만, 공손찬은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을 구원하면 훗날의 대장들이 구원에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원소가 북진했을 때, 국경선상의 별영은 자멸하거나 원소군에게 격파당했고, 원소군은 곧장 역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영웅기』).
그 후,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공손찬은 돌기병을 이끌고 출격하여 장연·공손속과 합류하여 원소군을 뒤에서 치는 계획을 세웠지만, 관정에게 제지당했다. 공손찬은 밀사를 보내 작전을 세웠지만, 밀사가 붙잡혀 계획이 새어나가 출격했으나 참패를 당했다[56]。원소는 지하도를 파서 역경을 공격하고, 공손찬 등이 거주하는 누각을 무너뜨렸다(『영웅기』). 최후에 공손찬은 거성에 불을 지르고 처자식을 찔러 죽인 뒤, 스스로 자결했다. 건안 4년 3월의 일이었다[57]。
원소는 공손찬과 관정 등의 머리를 허도로 보냈다고 한다(『한진춘추』).
3. 평가
공손찬은 뛰어난 무용으로 백마를 타고 다녔다. 항복시킨 오환족 중 기사에 능한 병사들을 골라 백마에 태워 '백마의종'이라 이름 붙였고, 이민족들은 그를 '백마장사'라 부르며 두려워했다.[58]
공손찬은 관리 자제 중 우수한 인재를 일부러 곤궁에 빠뜨리고 평범한 사람을 중용했다. 그는 "관리의 자제나 훌륭한 인물을 발탁해 부귀하게 해 주어도, 자신이 그러한 관직에 오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내가 잘 해주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유를 밝혔다.[58] 그는 전직 점쟁이, 비단 상인, 지역 유지 등 세 명과 의형제를 맺고 인척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모두 큰 부를 가진 거부였다.[58] 공손찬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는, 그에게 박해받던 명사들이 원소에게 붙었기 때문이다.
공손찬이 총애하던 상인들이 곳곳에서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대군, 광양군, 상곡군, 우북평군은 공손찬에게 반역하여 그들의 장리를 죽이고, 선우보 등과 합류했다.
선우보와 원소에 의해 역경으로 몰린 공손찬은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보였다. 철문을 설치하고 높은 곳에 살면서 7세 이상 남자의 출입을 금지했다. 측첩만이 그를 시중들었고, 문서는 밧줄로 끌어올려 읽었으며, 큰 소리를 내도록 훈련시킨 여성들에게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보고하게 하여 명령을 전달했다. 빈객도 멀리하고 아무도 믿지 않아 부하들이 조금씩 떠나갔다.
4. 가족 관계
- 아들: 공손속
- 사촌 혹은 육촌 동생: 공손범, 公孫越|공손월중국어
- 公孫越|공손월중국어은 공손찬의 사촌 동생이다. 공손찬은 그를 1,000명의 군대와 물자를 이끌고 군벌 원술을 돕도록 보냈는데, 원술은 이복 형제인 원소와 대리전을 벌이고 있었다. 公孫越|공손월중국어은 191년 양성 전투에서 손견(원술의 대리인)과 함께 주유 (인명)(원소의 대리인)에 맞서 싸우던 중, 빗나간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1] 공손찬은 공손월의 죽음을 핑계로 원소에게 선전포고했다.[1]
-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公孫越|공손월중국어은 공손찬의 동생으로 등장한다. 공손찬은 공손월을 사자로 보내 원소가 한복에게서 빼앗은 기주를 자신과 나누기로 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원소는 거절한다. 공손월이 돌아가는 길에 원소는 부하들에게 동탁의 군사로 위장하여 공손월을 매복, 살해하도록 명령한다. 공손찬은 원소의 계략을 간파하고 그에게 선전포고한다.[1]
- 公孫範|공손범중국어은 공손찬의 사촌 동생이다. 그는 발해군에서 군대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합류했다. 그는 또한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과 함께 원소에 맞서 싸웠다.[1]
- 公孫續|공손속중국어은 공손찬의 아들이다. 역경 전투 (198–199) 동안, 공손찬은 그를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도록 보냈다. 그들이 너무 늦게 도착하여 공손찬은 이미 원소에게 패배하여 가족과 함께 자결했다. 공손속은 나중에 흉노의 일파인 저갈(屠各)에게 죽임을 당했다.[1]
최후에는 처와 다른 아이들도 공손찬에게 살해당했다.[1]
5. 섬긴 사람들
; 친족
최후에는 처와 다른 아이들도 공손찬에게 살해당했다.[1]
; 소속 부하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8
[2]
서적
Di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3]
서적
Sanguozhi vol. 8
[4]
서적
Sanguozhi vol. 32
[5]
서적
Sanguozhi vol. 8
[6]
서적
Sanguozhi vol. 8
[7]
서적
Sanguozhi vol. 8
[8]
서적
Sanguozhi vol. 8
[9]
서적
Sanguozhi vol. 8
[10]
서적
Sanguozhi vol. 8
[11]
서적
Sanguozhi vol. 8
[12]
서적
Sanguozhi vol. 8
[13]
서적
Sanguozhi vo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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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8
[15]
서적
Sanguozhi vol. 8
[16]
서적
Di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17]
서적
Sanguozhi vol. 8
[18]
서적
Sanguozhi vol. 8
[19]
서적
Wei Sh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0]
서적
Wei Sh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1]
서적
Di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2]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3]
서적
Sanguozhi vol. 8
[24]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5]
서적
Sanguozhi vol. 8
[26]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7]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8]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29]
서적
Sanguozhi vol. 8
[30]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31]
서적
Sanguozhi vol. 8
[32]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33]
서적
Sanguozhi vol. 8
[34]
서적
Sanguozhi vol. 8
[35]
서적
Di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36]
삼국지주석
"《獻帝春秋》曰:瓚夢薊城崩,知必敗,乃遣間使與續書。紹候者得之,使陳琳更其書曰:「蓋聞在昔衰周之世,僵戶流血,以為不然,豈意今日身當其衝!」) ''Xiand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37]
삼국지
"(紹侯者得其書,如期舉火。瓚以為救兵至,遂出欲戰。紹設伏擊,大破之,復還守。紹為地道,突壞其樓,稍至中京。) ''Sanguozhi'' vol. 8."
[38]
삼국지
"(瓚自知必敗,盡殺其妻子,乃自殺。) ''Sanguozhi'' vol. 8."
[39]
후한서
"(紹設伏,瓚遂大敗,復還保中小城。自計必無全,乃悉縊其姊妹妻子,然後引火自焚。) ''Houhanshu'' vol. 73."
[40]
삼국지주석
"(《英雄記》曰:袁紹分部攻者掘地為道,穿穴其樓下,稍稍施木柱之,度足達半,便燒所施之柱,樓輒傾倒。)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8."
[41]
삼국지주석
"(瓚每與虜戰,常乘白馬,追不虛發,數獲戎捷,虜相告云「當避白馬」。因虜所忌,簡其白馬數千匹,選騎射之士,號爲白馬義從;一曰胡夷健者常乘白馬,瓚有健騎數千,多乘白馬,故以號焉。)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
[42]
웹사이트
Total War Three Kingdoms: Who are the warlords?
https://nordic.ign.c[...]
2019-06
[43]
비석
『劉寛碑陰』
[44]
서적
『[[陳志 (歴史書)|陳志]]』公孫瓚伝、『[[范書]]』劉寛伝が引く[[謝承]]の『[[後漢書]]』より。
[45]
서적
『太平御覧』が引く『英雄記』
[46]
영웅기
魏志「袁紹伝」が引く『英雄記』によると、冀州を奪うため袁紹が策謀を巡らした結果だとする。
[47]
영웅기
魏志「袁紹伝」が引く『英雄記』によると、公孫瓚は青州の黄巾賊を撃破した後、広宗に駐屯し、郡守や県令を更迭したため、冀州の長吏は挙って門を自ら開いたという。
[48]
영웅기
界橋の戦いについては魏志「袁紹伝」が引く『英雄記』に詳しい。
[49]
영웅기
魏志「袁紹伝」が引く『英雄記』によると、193年に長安から和睦の使者として[[太僕]]の[[趙岐]]が派遣され、袁紹と公孫瓚は和解している。
[50]
위씨춘추
『魏氏春秋』によると、公孫瓚が袁紹に敗れて弱体化していたため、劉虞はすぐに攻撃を加えようとしたが、東曹掾の[[魏攸]]に反対されたため、魏攸が死ぬまでの1年ほど延期になったという。
[51]
위씨춘추
『魏氏春秋』によると、劉虞の許で役人となっていた立派な人物を全て殺害したという。
[52]
전략
『典略』には次の記述がある。「公孫瓚は市場で劉虞を晒して(市場における公開処刑は裏切り者や犯罪者に対しなされることである)言った、「お前が本当に天子になるべき人物ならば、天が雨を降らせ助けてくれるはず」と。時は夏の真っ盛りで終日雨が降らなかったためついに殺害してしまった」
[53]
인용구
公孫瓚は「昔、天下の事態は指で指し示しながら平定できる(=自分が全知全能の人格者、すなわち聖人君子である)と思っていた」と述べている。
[54]
삼국지
公孫瓚の将の[[王門]]が袁紹に寝返ったが、当時は公孫瓚に仕えていた田豫が撃退している(魏志「田豫伝」)。
[55]
한진춘추
『漢晋春秋』に掲載されている袁紹の手紙によると、これ以前に、袁紹に嫌悪された麴義は殺害され、その残党は公孫瓚の援助を要請したが、公孫瓚は見殺しにしたという。
[56]
헌제춘추
死の直前、薊の城が崩壊する夢を見て、子の公孫続に手紙を送ったところ、密使が捕らえられたという(『献帝春秋』)
[57]
후한서
後漢書「献帝紀」
[58]
영웅기
『[[英雄記]]』。同書では、これらのことから「名士を軽んじて、つまらない身分の人物を重用した」と非難されている。
[59]
삼국지
[[유비]]보다는 빨리 태어났다.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60]
서적
《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에서는 伯圭.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에서는 伯珪. 《[[영웅기]]》에서는 伯圭와 伯珪를 혼용하였다. 圭와 珪는 이형동의자이다. 《[[예기]]》 왕제(王制)편에 '[[제후]]는 규찬(圭瓚)을 하사받은 후에야 창주(鬯酒)를 빚는다(諸侯 … 賜圭瓚然後爲鬯)'란 구절이 있어 공손찬의 [[이름]]과 자에 대응된다. 규찬과 창주는 제사에 쓰이는 술잔과 술이다.
[61]
삼국지주석
어환, 《전략》(典略) ; [[배송지]] 주석, 《삼국지》8권 위서 제8 공손찬에서 인용. [[이현 (당)|이현]]도 《후한서》73권 열전 제63 공손찬에 주석하며 인용
[62]
삼국지
《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63]
설명
공손찬을 사위로 삼은 태수의 앞 [[글자]]는 《삼국지》의 판본에 따라 侯(후)와 故(고)가 있다. 태수의 성씨가 후씨일 수도 있고, 그저 옛 태수란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 유기는 공손찬의 장인과는 다른 사람이다.
[64]
영웅기
劉基는 《[[태평어람]]》 권422에 인용된 《[[영웅기]]》, 劉其는 《태평어람》 권526에 인용된 《영웅기》
[65]
삼국지
《삼국지》 공손찬전의 [[광화 (후한)|광화]]는 오기이다.
[66]
후한서
《후한서》73권 열전 제63 유우
[67]
후한기
원굉(袁宏), 《[[후한기]]》25권
[68]
후한서
《후한서》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
[69]
자치통감
《[[자치통감]]》59권 한기 제51 영제 중평 5년
[70]
기타
《삼국지》 공손찬전에서는 도정후에 봉해질 때 [[중랑장]]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그 이유도 속국오환 탐지왕(貪至王)이 내항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전후 관계는 유우가 부임하기 전으로 기술되어 있다. 반면에 《후한기》에서는 장순이 [[살해]]당한 뒤 도정후에 봉해졌다고 하였으며 《후한서》 공손찬전도 관자성 전투 이후에 도정후에 봉해졌다고 하였다.
[71]
서적
후한서 공손찬전
[72]
서적
삼국지 6권 위서 제6 원소
[73]
서적
후한서 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74]
서적
삼국지, 후한서
[75]
서적
후한서, 삼국지, 전략, 오록, 회계전록
[76]
서적
영웅기
[77]
서적
후한서 74권上 열전 제64上 원소
[78]
서적
위씨춘추
[79]
서적
후한기 27권
[80]
서적
전략
[81]
문서
燕南垂趙北際 中央不合大如礪 惟有此中可避世
[82]
서적
영웅기
[83]
서적
구주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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