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수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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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토수호직은 에도 막부 말기인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가 주도한 분큐 개혁의 일환으로 설치된 직책이다. 교토의 치안 유지와 고쇼, 니조 성의 경비를 담당했으며,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활동으로 악화된 치안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대 교토수호직에는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임명되었으며, 교토 쇼시다이, 마치부교, 미마와리구미 등을 지휘했다. 1867년 대정봉환으로 막부의 지배가 형식적으로 종언되면서 폐지되었다. 교토의 치안 유지에 기여했으나, 존왕양이파의 활동을 완전히 억제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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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치 배경
시마즈 히사미쓰[15]가 주도한 분큐 개혁의 일환으로 마련된 새로운 직위이다. 당시 에도 막부의 권위가 하락함에 따라 교토에는 전국에서 존왕양이파 급진 지사들이 모여들어 치안 악화가 우려되었다. 원래 에도 막부에서는 교토 쇼시다이와 교토 마치부교가 교토의 치안 유지 책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격파에 의한 천주(요인 암살)나 강도 행각 등의 소란이 횡행하여 소사대와 봉행소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판단되어, 막부에서 교토의 치안 유지와 고쇼, 니조 성의 경비 등을 담당하는 역할로 설치한 것이다.
1862년(분큐 2년), 시마즈 히사미쓰[15]가 주도한 분큐 개혁의 일환으로 교토수호직이 설치되었다. 당시 에도 막부의 권위가 하락함에 따라 교토에는 존왕양이파 급진 지사들이 모여들었고, 이로 인해 치안 악화가 우려되었다. 원래 교토 쇼시다이(所司代)와 교토 마치부교(町奉行)가 교토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과격파에 의한 요인 암살 및 강도 행각 등의 소란이 횡행하여 기존 조직만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이에 막부는 교토의 치안 유지와 고쇼, 니조 성의 경비 등을 담당하는 교토수호직을 신설하였다.
분큐 개혁의 일환으로 시마즈 히사미쓰[15]가 교토수호직을 설치했다. 당시 에도 막부의 권위가 하락함에 따라 교토에는 존왕양이파 지사들이 모여들어 치안 악화가 우려되었다. 원래 교토 쇼시다이와 교토 마치부교가 교토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과격파의 요인 암살 및 상가 약탈 등의 소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이들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에 막부는 교토 시내 (라쿠추)의 치안 유지 및 고쇼, 니조 성의 경비 등을 담당하는 역할로 교토수호직을 설치하였다.
3. 설치 과정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1862년(분큐 2년) 9월 24일 초대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다.[16] 가타모리는 당초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번의 재정 악화와 가신들의 반대를 이유로 임명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아이즈 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의 '아이즈 번은 막부를 수호해야 할 존재'라는 가훈을 언급하며 설득하자 결국 교토수호직 임명을 수락하였다. 이 때문에 책임감을 느낀 가신들은 아이즈 번 에도 영주의 저택에서 "이제 아이즈 번은 망할 것"이라며 통곡했다고 한다.
4. 주요 임무 및 활동
교토수호직은 교토 쇼시다이, 교토 마치부교, 교토 미마와리야쿠를 산하에 두었으며, 교토 미마와리구미도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쇼시다이, 마치부교, 아이즈 번사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정규 부대로서 신센구미를 지배하에 두고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했다.
4. 1. 신센구미와의 관계
신센구미는 교토수호직의 비정규 부대로서 치안 유지 활동을 담당했다. 교토수호직은 신센구미를 지휘, 감독하며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사사키 타다사부로가 신센구미를 교토수호직에 소개했다.[8]
5. 조직 및 관할 구역
교토수호직은 교토 쇼시다이, 교토 마치부교, 교토 미마와리야쿠를 산하에 두었다.[16] 교토 미마와리구미도 교토수호직의 지배하에 있었다.[16] 쇼시다이, 마치부교, 아이즈 번사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호직의 위탁을 받은 비정규 부대 신선조가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구고구령취조장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교토수호직의 관할 구역(재직 중에 지급되는 지행)은 112개 촌락, 50,184석에 달했다.
6. 역대 교토수호직
아이즈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분큐 2년 9월 24일 (1862년)에 교토수호직에 취임했다.[5] 처음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번 재정은 이미 우라가, 에조치 경비 임무를 맡아 궁핍한 상태였고, 가신들도 취임에 반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슌가쿠가 호시나 마사유키의 ‘아이즈 번은 쇼군가를 수호해야 할 존재’라는 가훈[7]을 언급했기 때문에 마침내 취임을 승낙했다.
7. 폐지
게이오 3년(1867년) 10월,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에도 막부의 지배를 형식상 종식시켰다.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에 따라 섭관, 막부와 함께 교토 수호직, 교토 쇼시다이가 폐지되면서 교토 수호직은 설치된 지 6년 만에 폐지되었다.[3]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조정의 적으로 지목했다.[3]
8. 연표
- 1862년(분큐 2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교토수호직 부임. 곤카이코묘지에 둔영 설치.[11]
- 1863년(분큐 3년): 신센구미 교토수호직 관할.[12] 8월 18일 정변 단행. 야마토 천주조 거병, 이쿠노의 난 진압 참여.[13]
- 1864년(겐지 원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서 마쓰다이라 슌가쿠로 일시 교체, 가타모리 복직. 하고시의 변(금문의 변) 참전.[14]
- 1867년(게이오 3년): 대정봉환으로 교토수호직 폐지.[13]
9. 평가 및 영향
교토수호직은 에도 막부 말기 혼란스러웠던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고 왕실을 보호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당시 교토에는 존왕양이파 급진 지사들이 모여들어 치안이 악화되고 있었는데, 교토 쇼시다이와 마치부교만으로는 이들을 막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이즈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이끄는 교토수호직은 곤카이코묘지를 본진으로 삼아 1,000명의 병력을 교토에 상주시켰다.[16]
하지만 교토수호직은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활동을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또한, 막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사사키 타다사부로[8]의 소개로 교토수호직은 신센구미를 지휘하며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서적
Select Documents on Japanese Foreign Policy, 1853-1868
1955
[3]
서적
国史大辞典 第四巻
吉川弘文館
1984
[4]
서적
幕末政治と薩摩藩
吉川弘文館
2004
[5]
서적
京都大事典
淡交社
1984
[6]
서적
敗者から見た明治維新 松平容保と新選組
日本放送出版協会
2003
[7]
웹사이트
会津家訓(かきん)15カ条 {{!}} 八重が学んだ「精神」 {{!}} 八重のふるさと、福島県
http://www.yae-motto[...]
2018-09-22
[8]
서적
敗者から見た明治維新 松平容保と新選組
日本放送出版協会
2003
[9]
서적
京都新選組案内ー物語と史跡
創元社
2004
[10]
서적
京都新選組案内ー物語と史跡
創元社
2004
[11]
서적
京都の歴史7
[12]
서적
京都守護職始末1
[13]
서적
国史大辞典第四巻
[14]
서적
京都守護職始末2
[15]
문서
사쓰마번주 시마즈 모치히사의 부친
[16]
문서
교토시 사쿄구 구로타니 정 12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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