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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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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분큐 개혁은 1862년, 쇄국 체제에서 개방으로의 전환과 존왕양이 운동의 격화로 인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막부 개혁을 위해 추진되었다.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가 교토로 상경하여 칙사를 통해 막부 개혁을 요구했고, 이는 막부의 권위 약화와 조정의 권위 상승을 가져왔다. 개혁의 주요 내용은 쇼군 후견직 신설, 참근교대 완화, 서양 학문 연구 장려, 군사 개혁 등이었다. 분큐 개혁은 막부의 권력을 분열시키고, 존왕양이파와 공무합체파 간의 대립을 격화시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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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큐 개혁
개요
시대에도 시대 후기
시기분큐(文久) 연간(1861년~1863년)
주도 세력조정, 공무합체파
주요 인물고메이 천황, 가지이 히로치카, 구제 히로치카, 이와쿠라 도모미, 시마즈 히사미쓰
목적막정 개혁, 공무합체 강화
배경
시대적 상황에도 시대 말기, 막부의 권위 실추, 존왕양이 사상의 확산
정치적 배경안세이 대옥 이후 막부와 조정을 잇는 공무합체론 대두
사회적 배경덴포 대기근 이후 사회 불안 심화, 농민 봉기 빈발
주요 내용
정치 개혁산킨코타이 완화
분큐의 무사 실시
막부 해군 창설 노력
쇼군 후견직 폐지
인사 개혁안도 노부마사 실각
히토쓰바시 요시노부 옹립 시도
군사 개혁서양식 군제 도입 시도
주요 경과
분큐 2년 (1862년)사카시타 문 밖의 변 발생
데라다야 사건 발생
분큐 3년 (1863년)야마토 행행 감행
8월 18일의 정변 발생
조슈 정벌 단행 결정
결과 및 영향
정치적 결과막부 권위 회복 실패 및 권력 약화
고메이 천황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
존왕양이운동 격화
사회적 영향막부 정치에 대한 불신 심화, 메이지 유신의 간접적 계기 마련

2. 배경

19세기 중반, 일본은 200년 이상 지속된 쇄국 정책으로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와 존왕양이 운동의 격화, 쇼군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히토쓰바시 파와 난키 파의 파벌 다툼 등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쓰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에치젠 번의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등 개혁적인 다이묘들은 막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리아키라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이 나오스케안세이 대옥으로 인해 개혁은 좌절되었다.[1]

나리아키라 사후, 사쓰마 번의 실권을 장악한 시마즈 히사미쓰는 형의 유지를 이어 막부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1862년 히사미쓰는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하여, 고메이 천황에게 막부 개혁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당시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막부는 히사미쓰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2. 1. 존왕양이 운동의 격화

안세이 대옥 이후 칩거에 몰린 도쿠가와 요시키,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등이 다시 표면으로 복귀하면서 막부의 개혁이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히사미쓰와의 의견 차이가 드러나 대립하게 되었고, 히사미쓰는 귀국 도중 생맥 사건을 일으켰다.[4]

개혁의 필요성은 있었지만, 도자마 다이묘의 아버지[4]의 압력, 그리고 그 전까지 정치적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조정의 압력으로 개혁을 강요당한 것은 막부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와 더불어 조정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상승했고, 막부는 이듬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 대한 상락 요구의 칙명에도 굴복했다. 쇼군 상락을 계기로 막부의 권력은 에도와 교토로 분열되었고, 막부 붕괴에 이르기까지 분열 상태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그 수명을 단축시켰다.

한편, 교토에서도 히사미쓰의 행동과 데라다야 사건 등의 영향으로 사쓰마 번·아이즈 번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무합체파(막정 개혁파)와 조슈 번, 마키 이즈미 등의 지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존왕양이파 사이에서 교토 정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었다. 칙명의 성공으로, 그 전까지 정치적 발언을 봉쇄당했던 소장 공경(公卿)도 발언력을 증대시켜,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니조 나리유키 등 공무합체파와 산조 사네토미·오네노코지 긴토모를 비롯한 존왕양이파 공가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듬해 8·18 정변, 그 다음 해의 금문의 변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 개혁의 전개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등 개혁적인 다이묘들은 이전부터 막부 정국의 개혁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리아키라의 급사와 이이 나오스케안세이 대옥과 같은 개혁 탄압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형 나리아키라 사후 사쓰마 번의 실권을 장악하고 형의 유지를 이어 막부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862년, 히사미쓰는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하여 조정에 칙사를 내려 막부 개혁을 요구했다. 이는 막부 건립 이래 전례 없는 일이었으며,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된 상황이었다.[1]

한편, 교토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히사미쓰의 상경을 막부 타도의 기회로 오해했다. 히사미쓰는 막부 정치 개혁과 공무합체를 추구했기에 이들과 마찰을 빚었고, 데라다야 사건을 통해 자번의 급진파를 숙청해야 했다.[1]

3. 1. 조정과의 협상

시마즈 히사미쓰는 형 시마즈 나리아키라 사후 번주가 된 친자식 시마즈 다다요시를 보좌하는 국부(부성공)의 입장이 되어, 나리아키라의 유지를 이어받아 율병 상경을 감행했고, 조정에서 칙사를 내리게 하여 막부 정치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시도했다. 분큐 2년(1862년) 3월 16일 가고시마를 출발한 히사미쓰의 군대는 4월 13일에 입경했다. 번주의 아버지이지만, 도자마 다이묘이면서 무위무관(無位無官)인 ‘시마즈 사부로’가 군사를 이끌고 교토에 들어와 막부에 무단으로 귀족과 접촉하는 등의 행위는 막부가 건재했던 시절이라면 용서받지 못할 폭거였지만,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권위가 실추하고 있던 막부 체제에서 그것을 저지할 힘은 없었다.

히사미쓰는 대납언, 근위충방과 의주, 나카야마 다다야스, 오기마치 산조 사네나루 등의 귀족 공작을 움직여 건의백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안세이 대옥 처분자의 사면과 복권, 전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대로 취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장군 후견인으로 하는 것, 극단적인 존왕양이파 낭인 단속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히사미쓰의 건의백서는 고메이 천황에게 받아들여져 5월 9일, 칙사로 오하라 시게토미를 에도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칙서는 히사미쓰의 의견이 크게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6월 7일, 히사미쓰 등 사쓰마 병사 1000명이 동행하여 오하라 시게토미는 에도에 들어와 막부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국정을 전면 위임했던 막부에게 조정으로부터 개혁 지시가 내려진 것은 전대미문의 사태였고, 막부는 혼란스러워 했지만, 결국 그 대부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4. 개혁의 내용

분큐 개혁은 크게 인사 개혁과 제도 개혁으로 나눌 수 있다.

인사 개혁으로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보좌하기 위해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에,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를 정사총재직에 임명했다. 또한 교토의 치안 유지를 위해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교토 수호직에 임명했다.

제도 개혁으로는 산킨코타이를 완화하여 다이묘의 부담을 줄이고, 서양 학문 연구를 추진하였다. 막부 육군을 설치하고 서양식 병제(삼병 전술)를 도입하는 등 군사 개혁을 단행하고, 복제 개혁을 통해 의례를 간소화했다. 오구리 타다마사는 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지만,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이 패배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4. 1. 인사 개혁

젊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보좌하는 역할로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에 임명했다. 전 에치젠 번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를 신설된 '''정사총재직'''에 임명했다. 여기까지는 칙서에 의한 개혁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교토에서 존왕양이 과격파의 대두로 악화된 치안을 단속하기 위해 기존의 교토 쇼시다이 위에 '''교토 수호직'''을 신설하고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임명했다(교토 쇼시다이는 폐지되지 않았다).

4. 2. 제도 개혁


  • 산킨코타이(참근교대) 완화 - 그때까지 격년 교대제였던 다이묘의 산킨코타이를 3년에 한 번으로 개정하고, 에도 체류 기간도 100일로 했다. 또한 인질로서 에도에 있던 다이묘의 처자식에 대해서도 귀국을 허가하게 되었다(다이묘 증인 제도의 완화). 이는 막부 제도 확립 이래의 근본 제도의 변혁이며, 막부 권력의 저하를 의미하며,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3].
  • 서양 학문 연구의 추진 - 그전까지의 반서 조사를 양서 조사로 고쳐, 서양 학문 연구를 지원함과 동시에 에노모토 다케아키, 니시 슈 등을 네덜란드로 유학시켰다.
  • 군사 개혁 - 막부 육군의 설치, 서양식 병제(삼병 전술)의 도입, 병부령(하타모토로부터 석고에 따라 농병 또는 금을 징수)의 발포 등이 이루어졌다.
  • 「복제 변혁의 령」 발포 - 4월 15일에 발포되었으며, 막부 초기 이래 예복에 사용되어 온 나가노시, 나가바카마가 폐지되어, 보다 실용적인 복장에 의한 형식적인 복장・의례의 간소화가 이루어졌다.

5. 개혁의 영향

도자마 다이묘였던 히사미쓰의 압력과, 그전까지 정치적 실권을 갖지 못했던 조정의 압력으로 개혁을 강요당한 막부는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4] 이로 인해 조정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상승했지만, 막부는 이듬해 도쿠가와 이에모치 장군의 상경 요청 칙명에 굴복하게 된다. 장군의 상경을 계기로 막부의 권력은 에도와 교토로 분열되었고, 이는 막부 붕괴까지 이어져 막부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한편 교토에서는 히사미쓰의 행동과 데라다야 사건 등의 영향으로 사쓰마 번, 아이즈 번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무합체파(막부 정치 개혁)와 조슈 번의 마키 이즈미 등 지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존왕양이파 사이에 교토 정계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었다. 또한 칙명의 성공으로, 이전까지 정치적 발언을 삼갔던 소장파 공경들도 발언권을 증대시켜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니조 나리유키 등 공무합체파와 산조 사네토미, 아네가코지 긴토모를 비롯한 존왕양이파 귀족 간의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듬해 8월 18일의 정변, 2년 후 금문의 변 등으로 이어졌다.

참조

[1] 문서 당시의 일반적인 서열에서는, ある藩의 藩主의 父로 그 藩의 소속이며 前藩主도 아닌 인물은, 그 藩의 [[一門]]이나 [[家老]]와 동격, 즉 [[陪臣]]이라는 것이 된다.
[2] 문서 이 인원수는 藩主와 거의 동격인 것으로, 이것도 藩主의 父라는 것 뿐인 無位無官의 인물의 행렬로서는 막부 건재할 적에는 용서되지 않는 규모였다.
[3] 서적 러시아인의 본 막말 일본 [[吉川弘文館]] 2009
[4] 문서 히사미츠는 "무위무관의 시마즈 사부로"에서 탈피하고자 막부에 엽관운동을 벌였지만, 이때는 실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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