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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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레오 8세는 로마 출신으로, 교황 요한 12세 재위 시 평신도였음에도 로마 공립학교 책임자를 역임했다. 963년 오토 1세에 의해 교황으로 지명되었으나, 요한 12세가 폐위된 후 로마에서 봉기가 일어나 오토 1세에게 피신했다. 요한 12세가 복귀하여 레오 8세를 폐위시키고 파문했으나, 요한 12세 사후 오토 1세의 지원으로 다시 교황으로 즉위했다. 이후 베네딕토 5세가 폐위되고, 오토 1세의 비호 아래 교황직을 수행하며 황제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그의 교황 재임에 대한 정통성 논란이 존재하며, 대립 교황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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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8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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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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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레오 8세 |
본명 | 레오 |
출생 | 약 915년 |
출생지 | 교황령 로마 |
사망 | 965년 3월 1일 (약 50세) |
사망 장소 | 교황령 로마 |
직책 | |
교황 | 로마 주교 |
재임 시작 (대립 교황) | 963년 12월 6일 |
재임 종료 (대립 교황) | 964년 2월 26일 |
재임 시작 (교황) | 964년 6월 23일 |
재임 종료 (교황) | 965년 3월 1일 |
선임자 | 베네딕토 5세 |
후임자 | 요한 13세 |
종교 | |
소속 교회 | 가톨릭 교회 |
2. 생애 초기
로마의 클리부스 아르젠타리우스 인근 지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요한으로, 사도좌 수석 서기관을 지냈다.[15][1] 레오 본인은 평신도였으나, 교황 요한 12세 재임 시절 로마 공립 필경사 학교의 감독관(''프로토스크리니우스'')을 맡았다.[1] 963년, 교황 요한 12세는 레오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했다. 당시 오토 1세는 이탈리아의 베렌가리오 2세를 움브리아의 성 레오 성에서 포위하고 있었다.[16] 사절단은 교황령의 도시들에게 교황 대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한 오토 1세의 행동을 비판하고, 교황청의 부패를 바로잡으려는 교황의 노력을 설명하여 황제를 안심시키는 임무를 맡았다.[16][2]
2. 1. 교황 선출 과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기 위해 로마에 입성했을 당시, 레오는 교황청의 교황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있었다.[17][3] 오토 1세에 의해 소집된 시노드에서는 티볼리로 달아난 요한 12세를 교회법을 무시하고 폐위시켰으며, 새로운 후임자를 모색했다. 황제의 추천에 따라 963년 12월 4일 평신도였던 레오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8][4]레오는 당시 평신도였기 때문에,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인 시코에 의해 단 하루 만에 수문품, 독서품, 시종직,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을 모두 받아 사제가 되었으며, 이틀 후인 963년 12월 6일에는 주교로 서임되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19][5]
한편, 권좌에서 쫓겨난 요한 12세는 로마 내에 여전히 많은 동조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로마 귀족들에게 봉기를 일으켜 오토 1세를 물리치고 레오 8세를 죽일 것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막대한 뇌물을 약속했다. 964년 1월 초, 로마인들이 실제로 봉기를 일으켰으나 오토 1세의 군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레오 8세는 로마 귀족들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며 오토 1세를 설득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로마 귀족 가족들을 풀어주도록 하였다.[20][6] 그러나 오토 1세가 964년 1월 12일경 로마를 떠나자마자 로마인들은 다시 봉기했고, 레오 8세는 964년 2월경 로마를 탈출하여 오토 1세에게 피신해야 했다.[21][7]
그 해 2월, 로마로 돌아온 요한 12세는 즉각 시노드를 소집하여 964년 2월 26일 레오 8세를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파문하였다.[22][8] 레오 8세는 오토 1세 곁에 머물렀다. 964년 5월 요한 12세가 선종하자, 로마인들은 후임자로 교황 베네딕토 5세를 선출하였다. 이에 오토 1세는 레오 8세를 데리고 군대를 이끌고 와서 로마를 포위 공격했다. 결국 로마인들이 오토 1세에게 항복하면서, 레오 8세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으로 다시 복위하였다.
이후 베네딕토 5세는 교황 예복을 입은 채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레오 8세 앞으로 불려 나왔다. 레오 8세는 베네딕토 5세에게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데 어째서 베드로좌에 앉으려 했는지 추궁하였다. 베네딕토 5세는 “만약 제가 죄를 지었다면,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선처를 구했다.[23][9] 오토 1세로부터 복종을 맹세하면 목숨은 보존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베네딕토 5세는 레오 8세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24][10] 레오 8세에 의해 소집된 시노드에서는 베네딕토 5세의 주교 서품을 무효화하고, 그의 어깨에 걸친 팔리움을 강제로 벗겨냈으며, 그의 주교 지팡이는 레오 8세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오토 1세의 중재 덕분에 베네딕토 5세는 부제품만은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았다.[25][11] 시노드 이후 로마 귀족들은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레오 8세에게 순명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오토 1세는 964년 6월 말에 로마를 떠났다.[26]
3. 교황 재위 기간
오토 1세의 지원으로 교황직에 복위한 이후, 레오 8세의 남은 재위 기간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교황 칙서를 발표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오토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부 칙서에서는 황제에게 이탈리아 왕국의 후계자를 선택할 권리와 교황을 지명할 권한을 부여했으며, 모든 교황, 대주교, 주교는 황제로부터 서임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레오 8세가 교황령의 모든 영토를 사도좌에 피핀과 샤를마뉴가 기증한 것과 같이 오토 1세에게 넘겨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레오 8세가 자신을 후원한 황제에게 여러 권리를 양보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특히 서임권과 관련된 칙서들은 후대의 서임권 투쟁 기간 동안 그 내용이 완전히 조작되었거나 최소한 상당 부분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현재로서는 원래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12]
레오 8세는 965년 3월 1일에 사망했으며, 교황 요한 13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교황 연대기''(Liber Pontificalis)는 그를 존경스럽고, 정력적이며, 명예로운 인물로 묘사했다. 로마의 ''클리부스 아르젠타리우스(Clivus Argentarius)'' 주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인 descensus Leonis Prothi|데센수스 레오니스 프로티lat가 있었다.
3. 1. 요한 12세와 베네딕토 5세와의 갈등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기 위해 로마에 입성했을 당시, 레오는 이미 교황청의 교황 서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17][3] 오토 1세가 소집한 시노드는 티볼리로 달아난 요한 12세를 교회법을 무시하고 폐위시켰으며, 새로운 후임자를 찾았다. 황제의 추천에 따라 963년 12월 4일, 당시 평신도였던 레오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8][4] 평신도였던 레오는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 시코에 의해 단 하루 만에 수문품, 독서품, 시종직,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을 모두 받아 성직자가 되었고, 이틀 후인 963년 12월 6일에는 주교로 서임되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19][5]하지만 폐위된 요한 12세는 로마 내에 여전히 많은 지지자를 두고 있었다. 그는 로마 귀족들에게 오토 1세를 몰아내고 레오 8세를 살해하면 막대한 뇌물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봉기를 부추겼다. 964년 1월 초, 로마인들이 실제로 봉기를 일으켰으나 오토 1세의 군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레오 8세는 로마 귀족들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며 오토 1세를 설득하여, 로마 주요 가문 출신 인질들을 풀어주도록 하였다.[20][6] 그러나 오토 1세가 964년 1월 12일경 로마를 떠나자 로마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레오 8세는 964년 2월 로마를 탈출하여 오토 1세에게 피신해야 했다.[21][7]
그 해 2월, 로마로 돌아온 요한 12세는 즉시 시노드를 소집하여 964년 2월 26일 레오 8세를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파문하였다.[22][8] 레오 8세는 오토 1세 곁에 머물렀다. 964년 4월(또는 5월) 요한 12세가 사망하자, 로마인들은 후임자로 교황 베네딕토 5세를 선출하였다. 이에 오토 1세는 레오 8세를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포위 공격했다. 로마인들이 결국 항복하면서 레오 8세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으로 복위하였다.
이후 베네딕토 5세는 교황 예복을 입은 채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레오 8세 앞으로 끌려 나왔다. 레오 8세는 베네딕토 5세에게 자신이 살아있는데 어째서 감히 베드로좌에 앉으려 했는지 물었다. 베네딕토 5세는 “만약 제가 죄를 지었다면,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답하며 선처를 구했다.[23][9] 오토 1세로부터 복종하면 생명을 보존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베네딕토 5세는 레오 8세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24][10] 레오 8세가 소집한 시노드는 베네딕토 5세의 주교품을 무효화하고, 그의 어깨에 걸친 팔리움을 강제로 벗겨냈으며, 그의 주교 지팡이는 레오 8세에 의해 부러뜨려졌다. 다만 오토 1세의 중재 덕분에 베네딕토 5세는 부제품 직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25][11] 시노드 이후 로마 귀족들은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레오 8세에게 순명할 것을 맹세했으며, 오토 1세는 964년 6월 말 로마를 떠났다.[26]
3. 2. 오토 1세와의 관계 및 정책
963년, 당시 평신도이자 교황 서기관이었던 레오는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다. 당시 오토 1세는 이탈리아의 베렌가리오 2세를 상대로 움브리아의 성 레오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요한 12세는 이 사절단을 통해 교황령 도시들에 황제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 오토 1세의 행동을 비판하는 한편, 교황청 개혁 노력을 설명하며 황제를 안심시키려 했다.[16]이후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기 위해 로마에 입성했고, 이때 레오는 교황 서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17] 오토 1세가 소집한 시노드는 티볼리로 피신한 요한 12세를 교회법을 무시하고 폐위시킨 후, 963년 12월 4일 오토 1세의 추천으로 평신도였던 레오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18] 레오는 단 하루 만에 여러 성직 품계를 거쳐 사제가 되었고, 이틀 뒤인 963년 12월 6일 주교로 서임되어 교황좌에 올랐다.[19]
그러나 요한 12세의 지지자들은 964년 1월 초 봉기를 일으켰으나 오토 1세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레오 8세는 오토 1세를 설득해 인질로 잡힌 로마 귀족 가족들을 석방하도록 하기도 했다.[20] 하지만 오토 1세가 964년 1월 12일 로마를 떠나자 다시 봉기가 발생했고, 레오 8세는 964년 2월경 로마를 탈출하여 오토 1세에게 피신했다.[21] 그 사이 로마로 돌아온 요한 12세는 시노드를 열어 964년 2월 26일 레오 8세를 폐위하고 파문했다.[22]
요한 12세가 964년 4월 사망하고 로마인들이 교황 베네딕토 5세를 선출하자, 오토 1세는 레오 8세를 데리고 로마를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레오 8세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으로 복위했다. 복위 후 레오 8세는 베네딕토 5세를 소환하여 그의 교황 선출의 정당성을 문제 삼았다. 베네딕토 5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24] 레오 8세가 주재한 시노드에서 주교품이 무효화되고 팔리움과 주교 지팡이를 박탈당했다. 다만 오토 1세의 중재로 부제품은 유지할 수 있었다.[25] 이후 로마 귀족들은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레오 8세에게 순명을 맹세했으며, 오토 1세는 964년 6월 말 로마를 떠났다.[26]
오토 1세의 강력한 보호 아래 레오 8세의 교황직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 그는 오토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상당한 특권을 부여하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황제에게 후임 교황 및 이탈리아 왕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하고, 모든 교황, 대주교, 주교는 서임 전에 황제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 등이 거론된다. 또한, 피핀과 샤를마뉴가 사도좌에 기증한 교황령 영토 전체를 오토 1세에게 양도했다는 주장도 있다.[27][12] 레오 8세가 자신을 후원한 황제에게 여러 권리를 양보한 것은 분명해 보이나, 이러한 내용을 담은 교황 칙서들은 후대의 서임권 투쟁 과정에서 황제파에 의해 이용되면서 그 내용이 상당 부분 변조되거나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원본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27][12]
4. 사망과 유산
레오 8세는 오랫동안 대립 교황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현재 지위는 여전히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교황 연감''은 레오 8세의 교황 재위 기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설명한다.
: "이 시점, 그리고 11세기 중반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사적 기준, 신학, 교회법의 조화를 이루는 데 어려움이 있어 어떤 측이 성 베드로의 후계자들의 끊임없는 합법적 계승을 보장하는 정통성을 가졌는지 명확하게 결정할 수 없는 선거들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 발생하는 불확실성 때문에 교황 목록에서 연속적인 번호를 부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권장되었다."[13]
레오 8세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베네딕토 5세가 폐위되기 전까지는 대립 교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교황 요한 12세는 자신의 폐위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그 폐위는 효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에 따라 베네딕토 5세의 선출은 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의 기록처럼 베네딕토 5세가 자신의 폐위에 동의했고, 이후 레오 8세의 지위에 대한 별다른 이의 제기가 없었다면, 역사가들은 그가 964년 7월부터 965년 사망할 때까지는 정식 교황으로 볼 수 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14] 이 기간 동안 다른 교황직 주장자가 없었고, 후임 교황 중 '레오'라는 이름을 쓴 첫 교황이 레오 9세였다는 점도 레오 8세가 정식 교황으로 인정받았음을 시사하는 근거로 여겨진다.
5. 교황으로서의 정통성 논란
레오 8세는 오랫동안 대립 교황으로 여겨졌으나, 현재 그의 지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아누아리오 폰티피치오la)은 레오 8세의 재임과 관련하여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 때 우리는 11세기 중반에 재차 반복된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교황의 난립적인 선출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교황 선출에 대해 역사적 기준들과 신학 및 교회법상 규정들을 종합해 볼 때, 어느 쪽이 정통성을 지녔으며 누가 실제로 성 베드로의 온전하고 합법적인 사도적 계승을 보장하는지 여부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몇몇 사안에서 보이는 불확실성 때문에 교황 목록에서 교황의 대수를 표기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28][13]
레오 8세의 최초 선출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비정상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에, 베네딕토 5세가 강제로 폐위되기 전까지는 그가 대립 교황이었다는 것이 현재 받아들여지는 일반적인 견해이다.[14] 또한 요한 12세의 폐위는 그의 동의 없이 이루어져 교회법상 무효일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베네딕토 5세의 선출은 정당한 절차였을 가능성이 크다.[14]
하지만 당시 사건들을 기록한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의 기록에 따르면, 베네딕토 5세는 자신의 폐위를 자유 의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29][14] 이후 레오 8세의 교황 지위에 대해 더 이상 반대가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하여, 역사학자들은 그가 964년 7월부터 선종한 965년까지는 진정한 교황으로 볼 수 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29][14] 또한 레오라는 이름을 사용한 다음 교황이 레오 9세로 명명된 사실 역시 레오 8세가 정식 교황으로 인정받았음을 시사하는 근거로 여겨진다.[29][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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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ives of the Popes: The Pontiffs from St. Peter to Benedict XVI
HarperCollin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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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Annuario Pontificio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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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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