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스테파노 2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테파노 2세는 752년 교황 자카리아의 후임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그는 롬바르드족의 위협과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 속에서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와 동맹을 맺고 도움을 요청했다. 754년 피핀을 프랑크 왕으로 축성하고, 롬바르드족을 격퇴한 후 라벤나를 포함한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했는데, 이는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다. 이로써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통치자로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긴밀한 관계는 서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핀의 기증은 756년과 774년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715년 출생 - 잠삼
당나라 시인 잠삼은 가주의 지사를 지낸 데에서 잠가주라고도 불리며, 서역 군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변방의 풍경과 애환을 담은 비분강개한 시를 창작하여 당대 시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 757년 사망 - 장순 (당나라)
장순은 당나라의 군인이자 관료로서 안사의 난 때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수양성을 방어하며 당에 충성했으나, 함락 후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고, 그의 식인 행위에 대한 논쟁과 국가에 대한 헌신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 757년 사망 - 안록산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안록산은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 쇠퇴의 원인을 제공한 반란 지도자였으나, 2년 후 아들에게 암살당했다. - 8세기 대주교 - 교황 하드리아노 1세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772년부터 795년까지 재임한 95대 교황으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략에 맞서 프랑크 왕국과 협력하여 격퇴하고 교황권 강화, 성상 숭배 논쟁 관여, 교황 문서 작성 기준 변경 등 교황권 위상 강화에 힘썼다. - 8세기 대주교 - 교황 레오 3세
레오 3세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재임한 로마 출신 교황으로, 카롤루스 대제와의 협력을 통해 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고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반대파의 테러 시도와 필리오케 논쟁 속에서도 교회를 이끌었다.
교황 스테파노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칭호 | 로마 주교 |
직함 | 교황 |
이름 | 스테파노 2세 |
로마자 표기 | Stephanus II |
다른 이름 | 스테파노 |
출생 연도 | 714년 |
출생지 | 동로마 제국 로마 |
사망 연도 | 757년 4월 26일 (43세) |
사망 장소 | 교황령 로마 |
선종일 | 757년 4월 26일 |
재임 기간 | |
임기 시작 | 752년 3월 26일 |
임기 종료 | 757년 4월 26일 |
선임자 | 자카리아 |
후임자 | 바오로 1세 |
교회 관련 정보 | |
소속 교회 | 가톨릭교회 |
추기경 임명 전 | 750년 이전 |
추기경 임명자 | 자카리아 |
2. 교황 선출 배경
751년, 롬바르드 왕 아이스툴프는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고 로마 공작령으로 관심을 돌렸다.[1] 로마 귀족이자 오르시니 가문의 일원이었던 스테파노는[2][3] 752년 3월 26일 교황 자카리아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선출 직전, 스테파누스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급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8세기 중반, 교황과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성상 파괴 운동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4] 동로마 제국은 남쪽의 아바스 왕조, 북서쪽의 불가르족 등 외부 세력의 위협에 직면하여 로마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4] 콘스탄티누스 5세 코프로니모스 황제는 스테파노 2세의 지원 요청에 대해, 다른 게르만 부족을 랑고바르드족에 대항하도록 하라는 소극적인 조언만을 할 수 있었다.[4]
스테파노 2세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격퇴한 프랑크 왕국의 피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5] 754년, 스테파노 2세는 직접 파리로 가서 피핀 3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6]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에게 기름 부음 예식을 거행하여 그의 왕위를 축복했고, 피핀은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롬바르드족을 격퇴할 것을 약속했다.[7] 피핀은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반도 원정을 감행하여 롬바르드족을 격파하고, 로마와 라벤나 사이의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는 피핀의 기증으로 불리며, 훗날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다.
3.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4.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
5. 피핀의 기증과 교황령 성립
스테파노 2세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에게 기름 부음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 예식은 대관식으로 발전하여 1789년 앙시앵 레짐이 종식될 때까지 역대 프랑스 군주들의 의식으로 지속되었다.
5. 1. 피핀의 기증
스테파노 2세와 피핀의 동맹이 맺어지기 전, 로마는 라벤나 총독부에 속한 행정구역 중 하나인 로마 공국의 중심 도시였다. 키에르시에서 프랑크 귀족들은 마침내 랑고바르드족에 대해 군사 행동을 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 전승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의 영토를 점령한 피핀은 점령지 일부를 교황에게 기증한다는 약속을 문서로 작성했다고 한다. 교황이 피핀으로부터 기증받은 이 땅은 훗날 교황령이라고 불리게 된다. 피핀이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문서는 《피핀의 기증》이라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전해져오고 있지 않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 피핀의 기증을 출처로 밝힌 인용 문구가 작성되어 있기는 하다.[1]
756년 피핀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아이스툴프 왕에게 그가 정복했던 영토를 모두 포기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후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생드니 대성당의 수도원장 풀라드가 프랑크군의 점령 하에 놓인 과거 라벤나 총독부의 영토, 심지어 내륙 지방인 포를리와 같은 도시들을 방문하여 그곳 성문의 열쇠들을 모아 피핀에게 전달하였으며, 피핀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열쇠들을 헌납하는 예식을 통해 교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당시 스테파노 2세가 기증받은 영지 중에는 랑고바르드족이 점령한 로마냐와 스폴레토, 베네벤토, 펜타폴리스, 마르케 등의 영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핀의 기증을 통해 교황은 티레니아해에서부터 아드리아해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중부의 광활한 영토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처음으로 교황의 현세적 주권이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피핀으로부터 기증받은 영토가 매우 광대하고 산악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세 시절의 교황들은 효율적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새로 건국된 교황령의 많은 군소 자치도시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통치를 받던 시절의 유산을 그대로 보존하여, 각 도시마다 성을 쌓아 행정과 군사 등을 집중하였다.
756년 피핀은 로마를 방문하여 자신의 기증을 다시 한 번 공적으로 확인하였으며, 774년 카롤루스 대제 역시 자신의 부친이 체결한 기증을 재확인하였다.[8]
5. 2. 교황령의 성립과 한계
교황 스테파노 2세와 피핀의 동맹 이전, 로마는 라벤나 총독부에 속한 로마 공국의 중심 도시였다. 754년 키에르시에서 프랑크 귀족들은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군사 행동에 동의했다. 가톨릭 전승에 따르면, 피핀은 랑고바르드족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한다는 약속을 문서로 작성했고, 이 영토는 훗날 교황령이 되었다. 이 문서는 《피핀의 기증》이라고 불리지만,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 피핀의 기증을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다.
756년, 피핀은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툴프에게 정복한 영토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생드니 대성당의 수도원장 풀라드가 프랑크군 점령 하의 옛 라벤나 총독부 영토와 포를리 등의 도시를 방문, 성문 열쇠를 모아 피핀에게 전달했고, 피핀은 성 베드로 무덤 위에 열쇠를 헌납하며 교황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스테파노 2세가 기증받은 영토에는 랑고바르드족이 점령했던 로마냐, 스폴레토, 베네벤토, 펜타폴리스, 마르케 등이 포함되었다. 이 기증으로 교황은 티레니아 해에서 아드리아 해에 이르는 이탈리아 중부의 광활한 영토 통치자가 되었고, 교황의 세속 주권이 처음으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피핀에게서 기증받은 영토는 매우 넓고 산악 지대여서, 중세 교황들은 중앙 집권적 통치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새로 건국된 교황령 내의 많은 군소 자치 도시들은 랑고바르드 왕국 시절의 유산을 보존하여, 각 도시마다 로카를 중심으로 행정과 군사를 집중했다.[1]
6. 카롤루스 대제 시대의 재확인
7. 평가 및 의의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와 스테파노 2세의 동맹, 그리고 피핀의 기증은 중세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 교황의 세속 권력 강화: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통치자로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강화: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긴밀한 관계는 이후 서유럽의 역사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교황령의 기원: 피핀의 기증은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19세기까지 존속하며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민의힘은 이러한 교황의 세속 권력 강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의 분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참조
[1]
간행물
Pope Stephen (II) III."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7-09-12
[2]
서적
The Popes: A History
[3]
서적
Papal Genealogy
McFarland & Company
[4]
간행물
States of the Church."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7-09-12
[5]
서적
From Plato to NATO: The Idea of the West and Its Opponents
Simon and Schuster
2010-05-11
[6]
서적
European Perceptions of Islam and America from Saladin to George W. Bush
Palgrave Macmillan
2008-12-23
[7]
서적
Western Empires, Christianity and the Inequalities between the West and the Rest
Penguin UK
2014-09-30
[8]
서적
The Carolingians: A Family Who Forged Europ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9]
서적
Breve Storia dei papi, da San Pietro a Paolo VI
[10]
서적
Breve Storia dei papi, da San Pietro a Paolo VI
[11]
간행물
Pope Stephen II
https://en.wikisourc[...]
Robert Appleton Compan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