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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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세훈은 퇴계 이황과 함께 이기론을 이끌던 고봉 기대승의 후손으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광주지검 차장검사, 서울지방법원 판사 등을 역임했다.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서울고등법원장, 사법연수원장을 지냈으며, 변호사로 개업하여 활동했다. 1995년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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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장은 1945년 대전 출생으로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임용되어 검사장까지 승진, 주요 검찰 요직을 역임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과 법무부 검찰인사위원장을 지냈으나 권인숙 성고문 사건 관련 논란이 있었다. - 대한민국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 정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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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세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기세훈 |
![]() | |
| 직책 | |
| 직책 | 서울고등법원장 |
| 임기 시작 | 1969년 9월 2일 |
| 임기 종료 | 1973년 3월 27일 |
| 전임 | 민문기 |
| 후임 | 강안희 |
| 개인 정보 | |
| 출생일 | 1914년 1월 1일 |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 |
| 사망일 | 2015년 2월 22일 |
| 본관 | 행주 |
| 자녀 | 기춘석(한양대 의대 명예교수) 기백석(중앙대 의대 교수) 3녀 |
| 학력 | 와세대 대학 법학부 |
| 경력 | 서울가정법원장 청주지방법원장 광주고등법원장 사법연수원장 |
2. 생애
기세훈은 일본 早稲田|와세다일본어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49년 광주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며 여순사건 당시 좌익 누명을 쓴 박찬길 검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1] 이후 서울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1954년부터 10여년간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서울가정법원장, 청주지방법원장, 법원 인사위원장을 지냈다. 1969년 9월 2일 광주고등법원장에서 서울고등법원장에 임명되어 1971년 신설되는 사법연수원장을 겸직하여 1973년까지 재직했다.
서울고등법원장 재직 시 사법파동이 발생하자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비장한 각오로 사법파동 해결 대책을 마련하라"고 말하면서 서울고등법원 전체 법관 명의로 사법권수호 결의문을 전달했다가 1973년 법관 발령에서 대법원 판사 8명과 함께 의원면직됐다. 서울고등법원장을 마친 후 1973년 서울동부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여 한승헌 변호사 등을 변호하면서도 2006년까지 주로 공증 업무를 담당하였다. 1995년 8월 11일에는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제7회 한국법률문화상을 받았다.[11]
2. 1. 출생과 가계
기세훈은 1914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이기론을 이끌던 고봉 기대승의 후손으로 태어났다.[1]2. 1. 1. 가계
기세훈은 1914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이기론을 이끌던 고봉 기대승의 후손으로 태어났다.[1]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과 고봉학원 이사장을 맡았다.[4]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내고,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광주광역시 소재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열고 학술지 ‘전통과 현실’을 펴내며 고봉의 학문에 대해 연구했다.[5] 특히, 고봉 기대승 문집 11책 1질을 다른 후손들과 함께 1971년 1월에 발간하였다.[6]2. 2. 학력
일본 早稲田|와세다일본어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다.2. 2. 1. 학위
早稲田|와세다일본어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97년 2월 전남대학교에서 "초대 법대학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무료변론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13]2. 3. 경력
기세훈은 1914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이기론을 이끌던 고봉 기대승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일본 와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이후 서울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판사,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서울가정법원장, 청주지방법원장, 법원 인사위원장, 광주고등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사법연수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3년 의원면직된 후 변호사로 개업하여 2006년까지 활동했다.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 고봉학원 이사장, 인촌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2. 3. 1. 검사 및 판사 시절
기세훈은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1949년 광주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했다. 여순사건 당시 좌익 누명을 쓴 박찬길 검사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노력하다가[1] 서울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1968년 2월 24일에는 대법원에 의해 주재황 대법원 판사, 강안희 서울형사지방법원장과 함께 법원측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지명되었다.[3]2. 3. 2.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시절
기세훈은 1954년부터 10여년간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1] 전남대학교는 1997년 2월 "초대 법대학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무료변론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기세훈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13]2. 3. 3. 서울가정법원장 시절
1966년 6월 2일, 서울가정법원장으로 재직하던 기세훈은 7세 소녀를 죽인 12세 소녀가 아동보호소에서 탈출하여 사회문제가 되자 "현행법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제일 좋은 방법은 부모가 책임지고 선도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2]1968년 2월 24일, 대법원은 주재황 대법원 판사, 강안희 서울형사지방법원장과 함께 기세훈을 법원측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지명했다.[3]
1968년 5월 24일, 한국부인회가 보건사회부 후원으로 여성회관 강당에서 개최한 관혼상제 개선방안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혼인에 대한 개선 방안'을 주제로 강연하면서,[7] "혼수 준비나 결혼식에는 최소한의 비용만 들이고 나머지 돈으로 신혼 부부가 살면서 고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예금, 적금 통장이나 주권 등을 선물하는 실질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8]
2. 3. 4. 서울고등법원장 및 사법연수원장 시절
기세훈은 1969년 9월 2일 서울고등법원장에 임명되었고, 1971년 신설된 사법연수원장을 겸직하여 1973년까지 재직했다.[1] 서울고등법원장 재직 당시 '정권에 밉보인' 소속 판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후 전국 153명의 판사가 집단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기세훈은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비장한 각오로 사법파동 해결 대책을 마련하라"고 말하며 서울고등법원 전체 법관 명의로 사법권 수호 결의문을 전달했다. 그러나 1973년 법관 발령에서 대법원 판사 8명과 함께 의원면직되었다.[1]서울고등법원장 시절인 1971년 7월 24일, 기세훈은 산악 전문지 '산' 독자들로 구성된 울릉도 성인봉 등반대회에 참가했다.[9] 1972년 2월 3일에는 KBS <신혼 만세> 프로그램에 배우자와 함께 출연하여 약혼 시절의 재미있는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10]
2. 3. 5. 퇴임 이후
서울고등법원장을 마치고 1973년 서울동부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여 한승헌 변호사 등을 변호하면서도 2006년까지 주로 공증 업무를 담당하였다.[1]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과 고봉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며,[4]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내고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광주광역시 소재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열고 학술지인 ‘전통과 현실’을 펴내며 고봉의 학문에 대해 연구했다.[5] 특히 고봉 기대승 문집 11책 1질을 다른 후손들과 함께 1971년 1월에 발간하였다.[6]1989년 12월 27일 인촌기념사업회는 이희승 후임 이사장에 기세훈을 선출했으며, 1995년 8월 11일 대한변호사협회가 개최한 제7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에서 "국선변호를 통한 형사 피고인의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무료변론, 무료법률상담 등 서민의 권리구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기세훈에게 제7회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여했다.[11] 기세훈은 "법조인은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구도자"라면서 "권력이나 어떤 물질적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며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행합일이라며 "후배들도 인권수호와 정의구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12]
전남대학교는 1997년 2월에 "초대 법대학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무료변론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기세훈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13]
2. 4. 사회 활동
서울가정법원장 재직 당시 1966년 6월 2일에 7세 소녀를 살해한 12세 소녀가 아동보호소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기세훈은 "현행법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제일 좋은 방법은 부모가 책임지고 선도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2]1968년 2월 24일, 대법원은 주재황 대법원 판사, 강안희 서울형사지방법원장과 함께 기세훈을 법원측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지명했다.[3]
기세훈은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과 고봉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4] 광주광역시에 있는 선조 때부터 내려온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설립하고 학술지 ‘전통과 현실’을 발행하며 고봉 기대승의 학문을 연구했다.[5]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냈으며, 1971년 1월에는 다른 후손들과 함께 고봉 기대승 문집 11책 1질을 발간했다.[6]
1968년 5월 24일, 한국부인회가 보건사회부 후원으로 여성회관 강당에서 개최한 관혼상제 개선방안 심포지엄에서 '혼인에 대한 개선 방안'을 주제로 강연했다.[7] 기세훈은 이 자리에서 "혼수 준비나 결혼식에는 최소한의 비용만 들이고 나머지 돈으로 신혼 부부가 살면서 고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예금, 적금 통장이나 주권 등을 선물하는 실질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8]
1971년 7월 24일, 서울고등법원장 재직 중 울릉도 성인봉 등반대회에 참가했다.[9] 이 등반대회는 산악 전문지 '산' 독자들로 구성되었다. 1972년 2월 3일에는 KBS <신혼 만세> 프로그램에 배우자와 함께 출연하여 약혼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했다.[10]
1989년 12월 27일, 인촌기념사업회는 이희승의 후임 이사장으로 기세훈을 선출했다. 1995년 8월 11일, 대한변호사협회는 제7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를 개최하고, "국선변호를 통한 형사 피고인의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무료변론, 무료법률상담 등 서민의 권리구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기세훈에게 제7회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여했다.[11] 기세훈은 "법조인은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구도자"라며, "권력이나 어떤 물질적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행합일이라며, "후배들도 인권수호와 정의구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12]
전남대학교는 1997년 2월, 기세훈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전남대학교는 "초대 법대학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무료변론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에 공헌을 했다"고 수여 이유를 밝혔다.[13]
2. 4. 1. 선거관리위원회 활동
1968년 2월 24일 대법원에 의해 주재황 대법원 판사, 강안희 서울형사지방법원장과 함께 법원측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었다.[3]2. 4. 2. 향토 및 학술 활동
기세훈은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과 고봉학원 이사장을 맡았다.[4]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광주광역시 소재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열고 학술지인 ‘전통과 현실’을 펴내며 고봉 기대승의 학문에 대해 연구했다.[5]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내고, 1971년 1월에는 다른 후손들과 함께 고봉 기대승 문집 11책 1질을 발간하였다.[6]2. 4. 3. 기타 활동
기세훈은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과 고봉학원 이사장을 맡았다.[4]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내고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광주광역시 소재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열고 학술지인 ‘전통과 현실’을 펴내며 고봉의 학문에 대해 연구했다.[5] 특히 고봉 기대승 문집 11책 1질을 다른 후손들과 함께 1971년 1월에 발간하였다.[6]1968년 5월 24일 한국부인회가 보건사회부 후원으로 여성회관 강당에서 개최한 관혼상제 개선방안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혼인에 대한 개선 방안'을 주제로 강연하면서[7] "혼수 준비나 결혼식에는 최소한의 비용만 들이고 나머지 돈으로 신혼 부부가 살면서 고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예금, 적금 통장이나 주권 등을 선물하는 실질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8]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직하던 1971년 7월 24일 산악 전문지 '산' 독자들로 구성된 울릉도 성인봉 등반대회에 참가했으며,[9] 1972년 2월 3일 KBS <신혼 만세> 라는 프로그램에 배우자와 함께 출연하여 약혼 시절의 재미있는 경험을 털어놨다.[10]
인촌기념사업회는 1989년 12월 27일 이희승 후임 이사장으로 기세훈을 선출했으며, 대한변호사협회는 1995년 8월 11일 제7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에서 "국선변호를 통한 형사 피고인의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무료변론, 무료법률상담 등 서민의 권리구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기세훈에게 제7회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여했다.[11] 기세훈은 "법조인은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구도자"라면서 "권력이나 어떤 물질적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행합일이라며 "후배들도 인권수호와 정의구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12]
전남대학교는 1997년 2월 "초대 법대학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무료변론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기세훈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13]
참조
[1]
뉴스
http://news.donga.co[...]
[2]
뉴스
(제목 없음)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66-06-02
[3]
뉴스
경향신문
1968-02-24
[4]
뉴스
동아일보
1989-12-28
[5]
뉴스
https://www.lawtimes[...]
2018-03-15
[6]
뉴스
동아일보
1971-01-14
[7]
뉴스
매일경제
1968-05-21
[8]
뉴스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
1968-05-28
[9]
뉴스
경향신문
1971-07-26
[10]
뉴스
경향신문
1972-02-03
[11]
뉴스
동아일보
1995-08-12
[12]
뉴스
동아일보
1995-09-03
[13]
뉴스
동아일보
199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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