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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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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복기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거쳐 제5, 6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대법원장 재임 기간 중 인혁당 사건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법살인에 가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으로 재직했으며, 친일 행적과 유신 체제 협력으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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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다른 뜻 설명
기본 정보
출판사한국 브리테니커
제목민복기
확인 날짜2007-11-01
링크 깨짐깨진 링크

2. 생애

민복기는 1913년 12월 12일 경성에서 일제 자작 민병석청송 심씨 심경섭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1937년 3월 31일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2] 194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역임하였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서 법률기초국장 겸 법률심의국장을 맡았고, 법무부 검찰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서울지검 검사장, 대통령 비서관, 법무부 차관을 거쳤다.[2] 1954년 11월 30일 당시 외자구매처 차장으로 재직했다.[2] 1955년부터 1956년까지 검찰총장,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68년 10월 21일 제5대 대법원장에 취임하여 1973년 3월 14일 제6대 대법원장으로 연임, 총 10년 2개월간 재직하며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 기록을 세웠다.[3]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사건(인혁당재건위 사건) 상고심에서 8명에게 사형, 8명에게 무기징역, 그 외 피고들에게 15~20년 징역형을 확정했다. 1978년 12월 21일 정년퇴임하면서 "사법시설 근대화, 법관 처우개선 등 취임 당초 약속했던 일들을 대과없이 이루고 정년으로 사법부의 장직을 떠나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소회를 밝혔다.[3]

1980년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되었고,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11월 4일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아 총리공관 만찬에 참석했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1913년 12월 12일 경성에서 일제 자작 민병석(일제 후작 이완용과 사돈지간)과 청송 심씨 심경섭(沈卿燮)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1937년 3월 31일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2]

194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에 취임하였다. 이후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역임하였다.

2. 2. 해방 이후 활동

해방 이후 미 군정청 사법부 법률기초국장 겸 법률심의국장을 역임하고, 법무부 검찰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서울지검 검사장, 대통령 비서관, 법무부 차관을 역임하였다.[2] 1954년 11월 30일 당시 외자구매처 차장으로 재직했다.[2] 1955년부터 1956년까지 검찰총장,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68년 10월 21일 제5대 대법원장에 취임, 1973년 3월 14일에 다시 제6대 대법원장으로 연임하여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보다 10개월이 더 많은 10년 2개월간 대법원장으로 재직하여 이는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이다.[3]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장 재임시, 이른바 인혁당 사건(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상고를 기각해 8명의 사형과 8명의 무기징역, 그 외 피고들에게 15~20년 징역형 등을 확정했다. 1978년 12월 21일 정년퇴임하였다. 이로써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의 재직 기간 9년 4개월보다 10개월이 더 많은 10년 2개월간을 재직함으로써 법조 사상 최장수 대법원장 기록을 세웠다.[3] 퇴임식에서 "사법시설 근대화, 법관 처우개선 등 취임 당초 약속했던 일들을 대과없이 이루고 정년으로 사법부의 장직을 떠나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법 현실과 이념 사이의 거리 속에서 말 못할 고충을 지니게 되는 것이 법관의 숙명이겠으나 앞으로도 국민의 신뢰를 더욱 얻을 수 있는 사법부를 이루게 해달라 내 재임시의 공과는 후세의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고 했다.

1975년 12월 3일에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일부에서 법원이 위축돼있다는 평이 나돌고 있는데 법관은 위축됨이 없이 전인격과 전역량을 발휘하여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최선이며 사법권의 권위를 앙양시키는 길인가를 신중히 판단하여 재판하라"며 "사법권의 독립은 법관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져 있는 것이므로 현실을 직시하여 소신껏 재판에 임하라"고 지시하면서 특히 구속영장 발부율이 94%라는 것에 대해 "신중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4]

1980년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됐다.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7년 11월 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2. 3. 대법원장 재임

1968년 10월 21일 제5대 대법원장에 취임, 1973년 3월 14일에 다시 제6대 대법원장으로 연임하여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보다 10개월이 더 많은 10년 2개월간 대법원장으로 재직하여 이는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이다.[3]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장 재임시, 이른바 인혁당 사건(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상고를 기각해 8명의 사형과 8명의 무기징역, 그 외 피고들에게 15~20년 징역형 등을 확정했다. 1978년 12월 21일 정년퇴임하였다. 이로써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의 재직기간 9년 4개월보다 10개월이 더 많은 10년 2개월간을 재직함으로써 법조 사상 최장수 대법원장 기록을 세웠다.[3] 퇴임식에서 "사법시설 근대화, 법관 처우개선 등 취임 당초 약속했던 일들을 대과없이 이루고 정년으로 사법부의 장직을 떠나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법 현실과 이념 사이의 거리 속에서 말 못할 고충을 지니게 되는 것이 법관의 숙명이겠으나 앞으로도 국민의 신뢰를 더욱 얻을 수 있는 사법부를 이루게 해달라 내 재임시의 공과는 후세의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고 했다.

1975년 12월 3일에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일부에서 법원이 위축돼있다는 평이 나돌고 있는데 법관은 위축됨이 없이 전인격과 전역량을 발휘하여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최선이며 사법권의 권위를 앙양시키는 길인가를 신중히 판단하여 재판하라"며 "사법권의 독립은 법관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져 있는 것이므로 현실을 직시하여 소신껏 재판에 임하라"고 지시하면서 특히 구속영장 발부율이 94%라는 것에 대해 "신중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4]

2. 4. 퇴임 이후

1978년 12월 21일 정년퇴임하였다. 이로써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의 재직기간 9년 4개월보다 10개월이 더 많은 10년 2개월간을 재직함으로써 법조 사상 최장수 대법원장 기록을 세웠다.[3] 퇴임식에서 "사법시설 근대화, 법관 처우개선 등 취임 당초 약속했던 일들을 대과없이 이루고 정년으로 사법부의 장직을 떠나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법 현실과 이념 사이의 거리 속에서 말 못할 고충을 지니게 되는 것이 법관의 숙명이겠으나 앞으로도 국민의 신뢰를 더욱 얻을 수 있는 사법부를 이루게 해달라 내 재임시의 공과는 후세의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고 했다.

1980년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됐다.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11월 4일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으로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3. 논란 및 비판

민복기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과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 포함되었다.[5]

3. 1. 친일 행적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 민복기가 선정되었다.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5]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민병석조선 말기 정치인, 일제 자작. 이완용의 사돈이자 일제 강점기에 일제 통치에 적극 협조함.
어머니청송 심씨심경섭(沈卿燮)의 딸, 형조판서 심광언(沈光彦)의 후손
민홍기일제 자작 (아버지 민병석 사후 습작)
처숙부이병도역사학자, 대학교수
아들민경성(閔庚成)기업인
아들민경택(閔庚宅)법조인 (1935년 3월 10일 ~ 1996년 사망)
아들민경삼(閔庚三)기업인



아내와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참조

[1] 웹인용 민복기 http://preview.brita[...] 한국 브리테니커 2007-11-01
[2] 간행물 조선총독부 관보 http://www.history.g[...] 1937-04-07
[3] 뉴스 閔復基大法院長 퇴임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78-12-21
[4] 뉴스 http://newslibrary.n[...] 1975-12-03
[5] 뉴스 서울대 일제청산위, 1차 친일인물 12명 발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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