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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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극효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2년에 태어나 1618년에 사망했다. 좌의정 정유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사위가 되었으며, 광해군의 처이모부이자 유자신의 동서였다. 1614년 위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 김상헌 등을 후손으로 두었으며, 그의 혼인은 신안동 김씨 가문이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극효는 1542년(중종 37년) 김생해와 증정경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유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1]
광해군의 비 문성군부인의 이모부로, 가까운 외척이었지만 광해군 폐출 후 그의 후손들은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1]
문서
선원록 참고
2. 생애
1562년(명종 17년) 21세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고, 1564년(명종 19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604년(선조 37년) 제용감정, 돈녕부 도정, 동지돈녕부사 등을 지냈고, 1614년(광해군 6년) 위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정유길의 사위이자 제자였으며,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였기에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되었다. 또한 정유길의 또 다른 사위인 유자신과 김극효는 동서지간이었으며, 유자신의 아들들과 김극효의 아들들은 이종사촌간이었다. 이러한 혼맥은 신 안동 김씨가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
문과 출신은 아니었지만, 학식과 처가의 배경 덕분에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1569년(선조 2년) 유성룡과 함께 28세의 젊은 나이로 박태수의 회갑연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정유길을 비롯한 당대의 명사 23인이 함께했다.
1618년(광해군 10년) 77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아들, 손자, 증손자들의 현달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1]
2. 1. 가계와 혼인
아버지는 신천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김생해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전주 이씨이다. 김극효는 1542년(중종 37년) 9월 16일에 태어났다. 좌의정 임당 정유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스승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었다.[1]
부인은 임당 정유길의 딸인 정경부인 동래 정씨로, 1542년(임인년) 11월 24일에 태어나 1621년(신유년) 11월 8일에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우의정 김상용, 장단부사 김상관, 진사 광능참봉 김상건, 좌의정 김상헌, 경주부윤 김상복 5형제를 두었다.[1]
광해군의 장인(문양부원군)인 유자신 또한 정유길의 사위이므로, 유자신과 김극효는 동서간이 된다.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이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된다. 또한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한 유자신의 아들 유희분, 유희발 형제와 김극효의 아들 김상용, 김상헌 형제는 이종사촌간이 된다.[1]
김극효가 정유길의 사위가 된 일은 신안동김씨와 동래정씨가 300년 세의(世誼)를 지속하며 정치적인 밀월관계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1]
2. 2. 관직 생활과 교유 관계
1562년(명종 17년) 21세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고, 1564년(명종 19년)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년) 4월 22일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었고 돈녕부 도정(都正),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 등을 지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유길(鄭惟吉)은 광해군의 처외조부이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되며, 유자신(柳自新)과 김극효는 동서간이 된다. 유자신의 아들 유희분(柳希奮)·유희발(柳希發) 형제와 김극효의 아들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이종사촌간이다.
김극효는 문과(文科) 출신은 아니었지만 학식과 행의, 그리고 재상의 사위로서 당대의 명류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1569년(선조 2년) 장동에 살던 박태수(朴台壽)의 회갑연에 28세의 나이로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가장 어린 나이로 원로들과 함께 참연(參宴)하였다. 회갑연에는 조광원(曺光遠), 백인걸(白仁傑), 심봉원(沈逢源), 이준경(李浚慶), 이황(李滉), 조식(曺植), 권철(權轍, 권율의 아버지), 박충원(朴忠元), 정응두(丁應斗), 이탁(李鐸), 정종영(鄭宗榮), 정유길(鄭惟吉), 김계휘(金繼輝), 기대승(奇大升), 윤두수(尹斗壽), 김명원(金命元), 성혼(成渾), 이이(李珥), 홍성민(洪聖民), 정철(鄭澈), 이제신(李濟臣) 등 23명이 참가하였다. 김극효가 여기에 참가하게 된 것은 장인 정유길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2. 3. 후손과 가문의 번성
김극효의 배위는 임당 정유길(鄭惟吉)의 딸인 정경부인 동래 정씨로 1542년(임인년) 11월 24일에 태어나 1621년(신유년) 11월 8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극효와 정경부인 동래 정씨 사이에서 김상용, 장단부사 김상관, 진사 광능참봉 김상건, 좌의정 김상헌, 경주부윤 김상복 5형제가 태어났다.[1]
광해군의 장인(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인 유자신(柳自新)은 정유길의 사위였으므로, 유자신과 김극효는 동서간이 된다. 정유길은 광해군의 처외조부이고 김극효는 광해군의 처이모부가 된다. 또한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한 유자신의 아들 유희분(柳希奮)·유희발(柳希發) 형제와 김극효의 아들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이종사촌간이 된다. 이와 같은 혼인 관계는 신안동 김씨가 서서히 권력의 터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1]
김극효는 동래정씨 정유길(鄭惟吉)의 사위이자 제자였는데, 정유길은 중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였다. 정유길의 가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특히 이들은 회동정씨(會洞鄭氏)로 불리며 조선후기 정치․문화계를 이끌었다. 김극효의 혼인은 신안동김씨와 동래정씨가 300년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으로 협력하는 바탕이 되었다.[1]
김극효는 학문적 소양과 처가의 배경을 바탕으로 당대의 명사로 성장했고, 두 아들 김상용․김상헌이 크게 출세하면서 17세기 이후 장동김씨(壯洞金氏)는 명실상부한 명문가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다만 김상헌은 백부 김대효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장동김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가문(家門)의 계보는 김번(金璠)⇒김생해(金生海)⇒김대효(金大孝)⇒김상헌(金尙憲)⇒김광찬(金光燦)⇒김수증(金壽增)·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으로 이어지게 된다.[1]
3. 기타
참조
[2]
문서
효종 (조선)의 왕비 인선왕후의 외조부
[3]
문서
인선왕후의 모친
[4]
문서
이명 김광추(金光秌)
[5]
문서
작은아버지 김상헌의 양자로 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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