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윤두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두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선조 시대를 거치며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3년 한성에서 태어나 성수침, 이황 등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서인에 속해 동인과의 당쟁에서 활동했다. 명종 때 외척 세력을 탄핵하고, 선조 때 기축옥사에서 대사헌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하고, 원균을 옹호하여 이순신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590년 광국공신으로 해원군에 봉해졌으며, 정유재란 때 영의정을 역임했다. 사후 호성공신으로 추서되었으며, 문장에 능하고 문징명체에 일가를 이루었다. 윤보선, 윤치영 등이 그의 후손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01년 사망 - 이일
    이일은 1538년에 태어나 1601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제승방략』을 저술했으나 이순신을 모함한 행적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 1601년 사망 - 모리 히데카네
    모리 히데카네는 모리 모토나리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인물이다.
  • 1533년 출생 -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딸로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하여 국교회를 정비하고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등 잉글랜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 국가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 1533년 출생 -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에치젠 아사쿠라 씨의 당주로, 문화와 외교에 능했으나 우유부단한 태도와 군사적 능력 부족으로 가문을 멸망시켰다.
  • 성혼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성혼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윤두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윤두수
한글윤두수
한자尹斗壽
자앙(子仰)
오음(梧陰)
시호문정(文靖)
생애
출생1533년
사망1601년
배우자정부인 창원 황씨
자녀윤방 (장남)
윤흔 (차남)
윤휘 (삼남)
윤훤 (사남)
윤간 (오남)
부모아버지: 윤변
어머니: 팔기 현씨 부인
형제윤담수 (이복 형)
윤춘수 (이복 형)
윤근수 (동복 남동생)
친인척조부: 윤희림
조모: 죽산 박씨
손자: 윤신지
손자: 윤취지
인척: 원균
관직
최고 국무위원임기 시작: 1599년 7월 24일
임기 종료: 1599년 11월 6일
이전: 이원익
이후: 이원익
좌찬성임기 시작: 1598년 3월 31일
임기 종료: 1598년 4월 9일
이전: 김응남
이후: 이원익
좌찬성임기 시작: 1592년 6월 13일
임기 종료: 1594년 12월 11일
이전: 최흥원
이후: 유홍
우찬성임기 시작: 1592년 6월 10일
임기 종료: 1592년 6월 10일
이전: 이양원
이후: 유홍
정치 활동
정당서인 후예 잔존 세력
기타 정보
해원부원군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급제1558년 문과 별시 급제
분야성리학

2. 생애

윤두수는 1533년 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료였던 윤변(尹忭)이며, 동생은 윤근수이다.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2] 1555년(명종 10년) 23세의 나이로 과거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558년 식년 문과에 7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3]

1563년 이조 정랑 재직 시 권세가 이량이 아들을 천거하자, 박소립, 이후백과 함께 반대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잃었다.[2] 이후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고 복직했다.[1][4]

선조 즉위 초, 사림 주도 정치 질서 확립과 을사사화 피해자 신원 및 척신 정치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 1575년 심의겸, 김효원의 이조 전랑 임명 갈등으로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분열되자 서인에 참여했다.[6][7]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송하여 피난길에 올랐으며,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에 반대하며 조선의 힘만으로 일본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기간 중 원균을 옹호하여 '원균 띄우기, 이순신 죽이기'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7]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1601년에 병사하였으며, 사후 호성공신 2등관에 추서되었다.

2. 1. 생애 초반

윤두수는 1533년 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윤변(尹忭, 1493–1549)은 관료였다. 윤두수보다 약 20살 위인 이복 형제 윤담수와 윤천수가 있었고, 동생 윤근수가 있었다. 그는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2]

2. 1. 1. 출생과 가계

윤두수는 1533년 한성에서 군자감정을 지낸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변은 후에 아들들의 현달로 영의정추증되었다. 윤변은 본처에게서 담수와 춘수를 얻었으나, 본부인을 잃고 후처를 얻어 두수와 근수 형제를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윤변은 일찍 사망한다.[1]

이복 형 윤담수의 아들이자 조카 윤현의 사위는 소릉 이상의로, 그는 근기 남인 성호 이익의 증조부이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외증조부가 된다. 이상의는 북인으로 그의 후손들은 북인 몰락 후 남인에 입당하여 근기남인이 된다. 서인 당원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1]

그의 동생 윤근수 역시 선조와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주요 정치인이었다. 그의 가문은 해평 윤씨이며, 그의 시조는 고려 고종과 원종 시대에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낸 윤군정(尹君正)이다.[1]

사육신의 인척으로 고조부 이후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지 못했으나,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가 정1품 벼슬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1]

그의 아버지는 유운조광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투옥되었을 때, 그는 조광조가 죄가 없다고 성균관의 유생들과 함께 변론했지만, 기묘당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소외되었다.[1]

2. 1. 2. 수학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묵암 성혼을 만나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으며, 이때의 영향으로 후에 붕당이 형성될 때는 서인을 택하게 된다.[2] 이후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수학하다가 안동 도산의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된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다른 동문인 박승임, 유성룡 등은 동인이 되나 그는 서인을 선택했다.[2]

1549년, 17세의 나이에 부친상을 당했다. 2년 동안 아버지의 상을 치른 후 이중호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552년에는 성수침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이때 평생의 벗이 될 성혼을 만났으며, 성혼의 영향으로 훗날 붕당이 형성될 때 서인에 참여했다.[2]

2. 2. 관료 생활

윤두수는 1555년(명종 10년) 23세의 나이로 과거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558년 식년 문과에 7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예문관검열, 홍문관정자, 저작을 거쳐 1561년 병조좌랑, 1562년 이조좌랑이 되었다.[3]

1563년 이조 정랑 재직 시 권세가 이량(李樑)이 아들 이정빈(李廷賓) 등을 천거하자, 박소립, 이후백과 함께 반대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잃었다.[2] 이후 이양이 파면되고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고 수찬으로 복직, 이조정랑으로 승진했다.[1][4]

의정부 검상과 사인, 사헌부성균관을 거쳐 사복시로 이동했다. 1565년 홍문관부응교로 문정왕후 국상 때 빈전도청 책임을 맡아 장례를 감독하고 통정대부로 승진, 오위장을 겸했다. 1566년 1월 동부승지, 우부승지, 8월 좌부승지로 선발되었다.[5]

1567년 명종 위독 시 승정원 우승지로서 이준경에게 "송나라 문언보 입궐" 유언을 담은 서신을 보내 명종의 유지를 받게 하여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시켰다.[3][4]

선조 즉위 초(1567–1601), 사림 주도 정치 질서 확립과 을사사화 피해자 신원 및 척신 정치 청산을 위해 사간원 대사간, 이조참의로 임명되었다. 1574년 8월 과거 감독, 9월 대독관으로 임명되었다.[6][7]

1575년 심의겸, 김효원의 이조 전랑 임명 갈등으로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분열되자 서인에 참여했다. 1576년 7월 대사간, 조카 윤현은 이조 낭청에 임명되어 동인을 탄압, 윤 삼윤(三尹)으로 불렸다. 진도군 수령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1579년 3월 파직되었다.[2]

대사헌 김계휘 요청으로 연안도호부사로 등용, 1580-1581년 기근 동안 백성 구제로 1,000여 명이 음식을 먹었고, 어사 보고로 선조에게 비단 옷을 하사받았다.[5] 한성부 좌윤, 형조참판을 지냈고, 1587년 전라도에 일본군 침입 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기강 개혁, 범죄자 처벌했다.[4]

1588년 6월 동지중추부사, 가을 평안도 관찰사 겸 평양부 윤이 되었다. 오랑캐 우두머리 소식에 군사 전략으로 대응했다.[5] 1589년 압록강 주변 백성에게 목화 재배법을 가르쳤다. 1590년 조선 왕조 족보를 바로잡아 광국공신 책봉, 해원군에 봉해졌다. 8월 형조판서로 승진, 대사헌, 지중추부사, 1591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3]

1591년 3월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6월 이산해신성군 지지, 건저 문제에서 광해군 지지로 선조의 분노를 사, 관직 박탈, 동생 윤근수와 회령 유배, 홍원군으로 이배되었다.[1][5]

1591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서신이 조선통신사 통해 전달, 명나라 침략을 밝히자 명나라에 적극 알림을 주장했다.[5] 10월 홍원군 유배, 명나라 사절단이 만력제 칭찬 보고, 유배 해제 시도, 사헌부, 사간원 반대로 해주 이송.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부산진, 동래 함락, 4월 23일 특명으로 풀려났다.[3]

4월 28일 신립 충주 전투 패배, 선조 파천 결정, 4월 30일 새벽 선조 서쪽 행차 동참. 5월 1일 개성 도착, 5월 2일 어영대장, 다음 날 우의정 임명.[8][9] 요동 격문, 대신 처벌, 개성 방어 주장, 선조 거부, 새벽 출발 요청, 황해 감사 통해 안전 확보.[2]

5월 3일 개성 출발, 5월 7일 평양 도착, 5월 9일 좌의정 임명. 5월 19일 명나라 구원병 요청 논의, 세 가지 이유로 반대, 상황 악화로 동의, 평양 방어 주장, 선조 거부, 함흥 대신 의주 권유, 이원익과 평양 방어.[2]

2. 2. 1. 명종 대

1555년 3월 생원시에 급제하고,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그 뒤 1558년 문과 식년시에 을과 17등위로 급제하여[18] 승문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저작 등의 직위를 지냈다.

1559년 5월 정자, 1560년 저작, 1561년 9월 부수찬, 10월 병조 좌랑을 지냈다. 11월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12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62년 4월 다시 사간원 정언, 5월 홍문관 부수찬, 7월 다시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562년 10월 이조 좌랑을 거쳐 이후 이조정랑이 되었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을 이조 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 기대승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에 그해 8월 대사헌 이감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이때 이감은 그가 박소립, 이문형, 허엽, 윤근수, 기대승 등과 파벌을 만들고 부박(浮薄)하게 선동한다며 탄핵했으나, 심의겸이감이 이량의 당여라고 공격하여 대호군으로 전임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해 9월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 등의 상계(上啓)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사헌부 장령을 거쳐 1563년 9월 수찬, 10월 이조정랑, 1564년 7월 의정부 검상, 10월 사헌부 장령, 1565년 1월 이조 좌랑, 3월 홍문관 부응교 등을 지냈다. 이후 다시 이조 좌랑을 거쳐 5월 도감 낭청이 되는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한 뒤, 명종 말엽 윤원형, 심통원 등의 외척들을 탄핵하여 몰락시켰고, 그 뒤 사복시정, 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2. 2. 2. 선조 대

1567년(선조 즉위년) 11월 대사간을 거쳐 1568년(선조 1) 8월 우승지 등을 지냈다.

1574년 8월 문과의 고시관으로 과거 시험 주관에 참여하였고, 9월 대독관(對讀官)에 임명되었다. 9월 병조로부터 함부로 정계(停啓)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되자 김효원 등을 따르지 않고 이이, 심의겸, 성혼을 따라 서인에 가담하였다.

1576년(선조 9) 7월 사간원대사간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선발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 사촌동생인 진도군수 이수(李銖)로부터 뇌물을 받아 조카 윤헌, 동생 윤근수와 함께 연좌되어 1579년 3월 파직당했다.[19]

1579년 복직되어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1581년 3월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으로 재령군수 최립(崔岦)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하였다고 천거받고 선조로부터 옷을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부 좌윤·오위도총부 부총관·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6월 통정대부 수전라도관찰사(通政大夫守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587년 7월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우후를 무단으로 잡아들여 벌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당하고 추고받았다. 1588년 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2.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송하여 피난길에 올랐으며, 어영대장, 우의정, 약방 도제조, 좌의정으로 연이어 승진하며 국난 극복에 힘썼다. 그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에 반대하며 조선의 힘만으로 일본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에 맞서 임진강 방어선을 넘어 서울과 개성을 점령하고 평양을 지키려 했으나 실패했다.[2]

홍순언 등이 명나라에 구원병 파병을 요청하는 것을 반대하고 평양성 사수를 주장했으나, 평양성 전투 패전 소식에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을 요청했다. 윤두수는 이를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망명 요청 철회를 요구했다. 함흥 피난론을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는데, 함흥이 함락되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의주에서 선조가 월경을 준비하자, 상소를 올리고 직접 막아서는 등 랴오둥 피난을 막았다.[2]

임진왜란 기간 중 원균을 옹호하여 '원균 띄우기, 이순신 죽이기'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7] 1593년 삼도체찰사를 겸임하고, 1595년 해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원균이순신의 갈등에서 원균의 편을 들었고, 동생 윤근수와 함께 원균을 명장이라 칭하며 적극 지원했다.[21] 1594년 9월, 군사를 이끌고 거제의 왜적을 몰살하려다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하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해 파직되었다. 1595년판중추부사로 복직했다.

1597년 일본명나라와의 화의 조약을 깨고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선조가 이순신을 불신하던 중, 1597년 1월 27일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위급할 때는 장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파직해야 한다[22]"고 주장하며 이순신을 한양으로 압송하여 고문했다.

1591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통신사를 통해 명나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을 때, 다른 신하들과 달리 일본의 상황을 명나라에 적극적으로 알릴 것을 주장했다.[5] 1591년 10월, 홍원군 유배 중 명나라 사절단(진주사|進奏使중국어)이 만력제의 칭찬을 보고하자 조정은 그의 공헌을 인정해 유배를 풀려 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로 해주로 이송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진동래를 함락시키자, 4월 23일 국왕의 특명으로 풀려났다.[3]

4월 28일, 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자 선조는 파천을 제안했고, 다음 날 결정되었다. 윤두수는 4월 30일 선조의 서쪽 행차에 동참했다. 5월 1일 개성에 도착한 왕실 행렬은 5월 2일 윤두수를 어영대장(어영대장|禦營大將중국어)으로, 다음 날 우의정으로 삼았다.[8][9] 윤두수는 요동에 격문을 보내 전쟁을 알리고, 국왕과 함께 오지 않은 대신들을 처벌하고, 개성에 남아 방어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경성군 함락 소식에 개성을 떠나려 했고, 윤두수는 왕실 행차가 새벽에 출발할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황해 감사를 보내 백성들을 안심시켜 행렬이 안전하게 개성을 떠날 수 있도록 했다.[2]

5월 3일 개성을 떠나 5월 7일 평양에 도착했다. 5월 9일 좌의정이 되었다. 5월 19일,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윤두수는 조선 군대가 임진강을 지키고 있고 충분한 병력이 있다는 점, 명나라 정부의 군대 파견 불확실성, 요동과 광녕 군대의 흉포함으로 평안도가 황폐해질 것이라는 세 가지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상황이 절박해지자 구원병 요청에 동의했다. 그는 평양 방어 여부에 대한 논의에서 평양을 지킬 것을 주장했으나, 선조는 함흥 대신 의주로 갈 것을 권한 윤두수의 의견을 따랐다. 행렬은 의주로 떠났고, 윤두수는 이원익과 함께 평양을 지켰다.[2]

2. 4. 생애 후반

임진왜란원균이순신이 갈등할 때 원균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생 윤근수와 함께 원균은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21] 1594년 9월 윤두수는 군사를 이끌고 거제에 머물고있는 왜적을 몰살시키려 했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했다. 이에 윤두수는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적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5년 초 판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597년 일본명나라와의 화의 조약을 깨고 조선을 재침공하였다. 이때 선조는 이순신을 불신하고 있었다. 1597년 1월 27일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위급할 때는 장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파직해야 한다[22]"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한양으로 압송된 이순신을 심문하여 고문을 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그해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1599년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동인들이 반대하므로 곧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출입하였다. 글씨 재주도 뛰어났으며 문장에 능하고 시도 잘 지었으며, 문징명체(文徵明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1601년에 병사하였다.

사후 1605년(선조 38) 선조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한 자들을 포상할 때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관에 추서되었다.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추록되었다. 그는 평소 온화하고 화평하였으나, 큰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극복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 사상과 신념

윤두수는 조선정복하고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 은 정치가 기자에 관한 중국 사료를 수집하여 『기자지』를 편찬하고, 기자를 현창했다.[12]

4. 저서


  • 《오음유고》
  • 기자지[12]
  • 《성인록》
  • 《평양지》
  • 《연안지》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조부윤희림(尹希琳)
아버지윤변(尹忭)
어머니전주 이씨
이복 형님윤담수(尹聃壽)
이복 형님윤춘수(尹春壽)
이복 형님윤기수(尹期壽)
생모팔거 현씨, 현윤명(玄允明)의 딸
동생윤근수(尹根壽, 1537년~1616년)
부인황씨, 황대용의 딸
장남윤방(尹昉): 윤덕영, 윤택영의 선조
손자윤이지(尹履之)
손자윤신지(尹新之)
차남윤흔(尹昕, ?-?): 윤웅렬, 윤영렬의 7대조
손자윤취지(尹就之)
삼남윤휘(尹暉)
손자윤면지(尹勉之)
사남윤훤(尹暄, 1573~1627)
손자윤의지(尹誼之)
손자윤순지(尹順之)
손자윤징지(尹澄之)
서자윤간(尹旰)
외조부현윤명(玄允明)
사돈심의겸(명종의 처남, 인순왕후의 동생, 순회세자의 외숙부)


6. 기타

원균서인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동인의 지지를 받는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윤두수는 친척인 원균을 비호하며 그를 삼도 통제사에 앉히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26] 이 때문에 이순신임진왜란을 극복한 성웅(聖雄)으로 신격화되면서 그를 비난할 때 역비난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북인이던 이산해도 대체로 원균을 지지했고, 남인류성룡이원익은 대체로 이순신의 편이었다.[26] 한편 대한민국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서울특별시윤치영 등은 그와 윤근수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문제가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자, 누군가에 의한 무고라고 해명한다.

참조

[1] 논문 梧陰 尹斗壽의 官僚 文人的 性格과 文學的 位相 https://www.dbpia.co[...] 2022-01-18
[2] 논문 梧陰 尹斗壽의 정치활동과 임진왜란 https://www.dbpia.co[...] 2022-01-18
[3] 논문 梧陰 尹斗壽의 인물과 도학적 실천 https://www.dbpia.co[...] 2022-01-18
[4] 간행물 윤두수 http://encykorea.aks[...] 2022-01-18
[5] 웹사이트 Yun Doo-su https://terms.naver.[...] 2022-01-18
[6] 웹사이트 Veritable Records of Seonjo 7th August 18 http://sillok.histor[...]
[7] 웹사이트 Veritable Records of Seonjo 7th September 11 http://sillok.histor[...]
[8] 웹사이트 Veritable Records of Seonjo 25th May 2nd http://sillok.histor[...]
[9] 웹사이트 Veritable Records of Seonjo 25th May 3rd http://sillok.histor[...]
[10] 웹사이트 윤두수(尹斗壽) http://encykorea.aks[...] 2022-08-20
[11] 뉴스 윤두수 尹斗壽,1533~1601 https://www.doopedia[...] 2022-06-26
[12] 서적 韓國歷史與現代韓國 https://books.google[...] 台湾商務印書館 2005-08-01
[13] 서적 李王朝六百年史 洋々社 1968-01-01
[14] 웹사이트 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https://www.hani.co.[...] 2023-10-28
[15] 문서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 윤두수 http://people.aks.ac[...]
[16] 뉴스 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http://www.hani.co.k[...] 한겨레 2009-08-14
[17]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18] 문서 문과방목 http://kdaq.empas.co[...]
[19] 간행물 윤두수 [尹斗壽]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 간행물 関西邑誌 제16권(1872) 강서,영유 편, 강서편 1872
[21] 서적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
[22] 뉴스 조선 500년 뒤흔든 전투 생중계 http://news.mk.co.kr[...] mk뉴스 2011-08-26
[23] 문서 http://news.donga.co[...]
[24] 문서 http://gsm.nricp.go.[...]
[25] 문서 그의 증조부이다.
[26]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