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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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석휘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1935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된 이후, 청와대 사정비서관실 파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검찰총장을 거쳐 제34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법무부 장관 재직 중 미국 문화원 사건 관련 법정관리 문제로 경질되었으며, 변호사 활동을 거쳐 현재는 학교법인 홍익학원 이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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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김석휘 |
| 로마자 표기 | Kim Seok-hwi |
| 국적 | 대한민국 |
| 직업 | 법조인 |
| 배우자 | 서정숙 |
| 경력 | |
| 경력 | 제34대 법무부 장관 |
2. 생애
1935년 충청북도 청주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청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 합격 후 195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에 합격하고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5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1]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재직하면서, 1959년 10월 19일에 첨부해야 할 진단서나 통,반장을 경유한 날인이 없이 입대 불능계를 받고 금품을 받은 경찰관에 대해 병역기피방조 혐의로 구속했고,[1] 1960년 1월 30일에는 동촌 비행장에 침입하여 미국 공군 소유 기름 탱크에서 휘발유 6드럼 시가 2만환 상당을 절취한 2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으며,[2] 2월 23일에는 절도 피의자를 경찰봉으로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칠곡경찰서 안동지서 조룡수 순경을 독직 폭행 등으로 구속했다.[3]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에서 파견 근무하면서 굵직한 밀수 및 탈세 사건을 처리하면서 "눈치보지 않는 수사 솜씨"로 평가받았으며,[4] 소신대로 밀고나가는 베짱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보스 기질의 검사였다.[4]
1982년 6월 4일 MBC TV 이철희 장영자 어음 사건 공개 청문회에서 김석휘 검찰총장은 "검사들이 소신있게 일하는 것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도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총장으로 있는 동안 외부에서 있을 수 있는 이른바 압력을 악고 모든 것을 걸어 검사들의 소신을 보호해주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5]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에는 미국 문화원 사건의 공판 과정에서 빚어진 소란 행위에 대한 법정관리 문제와 관련하여 경질되었는데, 정부의 한 관계자는 "법정관리는 물론 대법원 소관사항이나 정부로서는 관련 장관의 책임을 묻지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6] 다른 한편에선 그동안 "중공 어뢰정 사건, 민정당사 농성 사건, 미국 문화원 농성 사건 등의 법적 처리 문제와 관련해 온건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정부여당 내에서 미묘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던 것으로 알려져 이번 경질의 이유가 그동안 누적돼 왔던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7]
2. 1. 출생과 학창 시절
1935년 충청북도 청주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청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 합격 후 195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에 합격하고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5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1]대구지방검찰청에서 있으면서 1959년 10월 19일에 첨부해야 할 진단서나 통,반장을 경유한 날인이 없이 입대 불능계를 받고 금품을 받은 경찰관에 대해 병역기피방조 혐의로 구속했다.[1] 1960년 1월 30일에 동촌 비행장에 침입하여 미국 공군 소유 기름 탱크에서 휘발유 6드럼 시가 2만환 상당을 절취한 2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2] 2월 23일에 절도 피의자라고 체포하여 경찰서 지서에 와서 경찰봉으로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칠곡경찰서 안동지서 조룡수 순경을 독직 폭행 등으로 구속했다.[3]
2. 2. 검사 임용과 초기 활동
1935년 충청북도 청주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청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 합격 후 195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에 합격하고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5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1]대구지방검찰청에서 재직하면서, 첨부해야 할 진단서나 통,반장을 경유한 날인이 없이 입대 불능계를 받고 금품을 받은 경찰관에 대해 병역기피방조 혐의로 구속했고,[1] 동촌 비행장에 침입하여 미국 공군 소유 기름 탱크에서 휘발유 6드럼 시가 2만환 상당을 절취한 2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으며,[2] 절도 피의자를 경찰봉으로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칠곡경찰서 안동지서 조룡수 순경을 독직 폭행 등으로 구속했다.[3]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에서 파견 근무하면서 굵직한 밀수 및 탈세 사건을 처리하면서 "눈치보지 않는 수사 솜씨"로 평가받았으며,[4] 소신대로 밀고나가는 베짱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보스 기질의 검사였다.[4]
1982년 6월 4일 MBC TV 이철희 장영자 어음 사건 공개 청문회에서 김석휘 검찰총장은 "검사들이 소신있게 일하는 것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도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총장으로 있는 동안 외부에서 있을 수 있는 이른바 압력을 악고 모든 것을 걸어 검사들의 소신을 보호해주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5]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에는 미국 문화원 사건의 공판 과정에서 빚어진 소란 행위에 대한 법정관리 문제와 관련하여 경질되었는데, 정부의 한 관계자는 "법정관리는 물론 대법원 소관사항이나 정부로서는 관련 장관의 책임을 묻지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6] 다른 한편에선 그동안 "중공 어뢰정 사건, 민정당사 농성 사건, 미국 문화원 농성 사건 등의 법적 처리 문제와 관련해 온건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정부여당 내에서 미묘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던 것으로 알려져 이번 경질의 이유가 그동안 누적돼 왔던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7]
2. 3. 청와대 파견과 주요 사건 처리
1935년 충청북도 청주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청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 합격 후 195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에 합격하고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5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1]대구지방검찰청에서 있으면서 1959년 10월 19일에 첨부해야 할 진단서나 통,반장을 경유한 날인이 없이 입대 불능계를 받고 금품을 받은 경찰관에 대해 병역기피방조 혐의로 구속했다.[1] 1960년 1월 30일에는 동촌 비행장에 침입하여 미국 공군 소유 기름 탱크에서 휘발유 6드럼 시가 2만환 상당을 절취한 2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2월 23일에는 절도 피의자라고 체포하여 경찰서 지서에 와서 경찰봉으로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칠곡경찰서 안동지서 조룡수 순경을 독직 폭행 등으로 구속했다.[2][3]
청와대 사정비서관실에서 파견 근무하면서 굵직한 밀수 및 탈세 사건을 처리하면서 "눈치보지 않는 수사 솜씨"로 평가받았다.[4] 1982년 6월 4일 밤 7시 30분에 방영된 MBC TV 이철희 장영자 어음 사건 공개 청문회에서 김석휘 검찰총장은 "검사들이 소신있게 일하는 것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도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총장으로 있는 동안 외부에서 있을 수 있는 이른바 압력을 악고 모든 것을 걸어 검사들의 소신을 보호해주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5]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에는 미국 문화원 사건의 공판 과정에서 빚어진 소란 행위에 대한 법정관리 문제와 관련하여 경질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의 한 관계자는 "법정관리는 물론 대법원 소관사항이나 정부로서는 관련 장관의 책임을 묻지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6] 다른 한편에선 그동안 "중공 어뢰정 사건, 민정당사 농성 사건, 미국 문화원 농성 사건 등의 법적 처리 문제와 관련해 온건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정부여당 내에서 미묘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던 것으로 알려져 이번 경질의 이유가 그동안 누적돼 왔던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7]
2. 4. 검찰총장 시절
1982년 6월 4일 밤 7시 30분에 방영된 MBC TV 이철희 장영자 어음 사건 공개 청문회에서 김석휘 검찰총장은 "검사들이 소신있게 일하는 것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도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총장으로 있는 동안 외부에서 있을 수 있는 이른바 압력을 악고 모든 것을 걸어 검사들의 소신을 보호해주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2. 5. 법무부 장관 시절과 경질
김석휘는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시절, 미국 문화원 사건 공판 과정에서 발생한 소란 행위에 대한 법정관리 문제와 관련하여 경질되었다.[6] 정부 관계자는 "법정관리는 대법원 소관사항이나 정부로서는 관련 장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언급했다.[6]한편으로는, 김석휘 장관이 "중공 어뢰정 사건, 민정당사 농성 사건, 미국 문화원 농성 사건" 등의 법적 처리 문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해 정부 여당 내에서 미묘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으며, 이번 경질이 그동안 누적된 결과라는 해석도 있었다.[7]
2. 6. 퇴임 이후
김석휘는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중, 미국 문화원 사건의 공판 과정에서 빚어진 소란 행위에 대한 법정관리 문제와 관련하여 경질되었다.[6] 정부의 한 관계자는 "법정관리는 물론 대법원 소관사항이나 정부로서는 관련 장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6] 다른 한편에서는 "중공 어뢰정 사건, 민정당사 농성 사건, 미국 문화원 농성 사건 등의 법적 처리 문제와 관련해 온건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정부여당 내에서 미묘한 의견 대립을 보여왔던 것으로 알려져 이번 경질의 이유가 그동안 누적돼 왔던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7]3. 경력
- 195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1961년 법무부 검찰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를 역임했다.
- 1971년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 1973년 대검찰청 특수부 제1과장을 거쳐 1974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5일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에 파견 근무했다.
- 1978년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1979년 법무부 교정국장을 지냈다.
- 1981년 4월 27일부터 1981년 12월 16일까지 제23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다.
- 이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제19대 대한민국의 검찰총장을 거쳐 1985년 2월 19일부터 1985년 7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제34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 1985년부터 2002년까지 김석휘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활동했다.
- 2017년 8월 29일부터 2021년 8월 28일까지 학교법인 홍익학원 개방이사를 지냈고, 2021년 9월 10일부터 학교법인 홍익학원 이사로 재직 중이다.
참조
[1]
뉴스
1959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59-10-21
[2]
뉴스
1960년 2월 1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60-02-01
[3]
뉴스
동아일보 1960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
1960-02-25
[4]
뉴스
1982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2-05-22
[5]
뉴스
1982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2-06-05
[6]
뉴스
1985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5-07-16
[7]
뉴스
1985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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