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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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희제는 고려 고종 때의 무신으로, 몽골과의 외교에서 활약했으며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최우를 해하려 했다는 무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그는 감목직을 시작으로 충청도안찰사를 거쳐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몽골 사신과의 외교에서 뛰어난 언변과 담략을 발휘했다. 특히 몽골 사신 저가와의 대립에서 강경한 태도로 몽골의 요구를 제지했다. 또한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군사를 이끌고 승리하는 등 군사적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전라도순문사로 부임하던 중 최우를 해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체포되었고,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고려사》에는 김희제가 군산도(群山島,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사람으로, 그 선조는 상선(商船)을 따라 개경에 와서 살다가 개경을 본적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김희제는 풍모와 용모가 아름다웠고 지혜와 용기가 있었으며,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담력이 있고 시(詩)와 예(禮)에 능했으며, 언변이 좋았다고 전해진다.[1]
1221년 12월 김희제가 동진(東眞)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을 때, 동진 사신이 "동군(東君, 봄의 신령)이 처음으로 따뜻함을 알리네."라고 읊자 김희제는 "북제(北帝, 겨울의 신령)은 이미 추위를 거두었도다."라고 화답하였다. 동진 사신이 뜻을 묻자 김희제는 "그대가 춘의(春意)로 창하기에 나 또한 춘사(春事)로 화답하였다."라고 대답했고, 사신은 감탄하였다고 한다.[1]
[1]
서적
고려사 권제103 열전제16 제신(諸臣) 김희제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김희제는 처음에 감목직(監牧直)으로 산원(散員)에 보임되었으며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충청도안찰사(忠淸道按察使)가 되었고, 청망(淸望)이 있어 장군(將軍)으로 옮겼다.[1] 그는 상장군(上將軍) 노지정(盧之正), 대장군(大將軍) 금휘(琴輝) 등과 함께 당시 무신정권의 집정이었던 최이(최우)의 측근이기도 하였다.[2]
고종 8년(1221년) 8월, 몽골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저고여(著古與) 등이 고려 측의 접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행패를 부렸다. 고려 측 관리인 관반낭중(館伴郞中) 최공(崔珙) 등은 참다 못해 객관 문밖으로 도망쳐 몽골 사신이 나오지 못하게 객관 문을 잠가 버리기까지 했다. 이때 김희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 저고여를 달래 노기를 풀게 하였다.[1]
저고여가 오고 한 달 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통해 몽골의 사신 저가(這可) 등이 안변도호부 성 밖까지 왔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다. 고종은 김희제가 담략이 있고 시(詩)와 예(禮)를 알며 언변이 좋다 하여 유회사(類會使)로 삼아 보냈다. 저가 등은 김희제에게 예전 안지녀 대왕(安只女大王)이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가 이를 잘 접대하지 않았다고 따져 묻자, 김희제는 저가가 안변도호부에서 고려 측 인사 한 명을 활로 쏘아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살아난다면 다행이지만 죽는다면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물어 구금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때 저가 등은 무릎을 꿇고 부끄러워하였으며, 김희제의 처분을 모두 들어주었다.[1] 10월에 몽골의 사신 코스부카(喜速不花) 등을 맞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는,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코스부카 등이 활과 화살을 차고 대관전에 오르려는 것을 김희제가 나서서 말리며 활과 화살을 풀게 하기도 하였다.[8] 이후 김희제는 서북면으로 나아가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이 되었다.[1]
고종 10년(1223년) 5월, 금의 원수(元帥) 우가하(亏可下)가 마산(馬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몰래 고려의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 3주를 노략질하였다. 김희제는 이들을 진압할 것을 조정에 주청하였으나, 당시 최이가 집정하고 있던 개경의 고려 조정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김희제는 자신의 편의로 갑사(甲士) 100인으로 우가하의 진영을 급습하여 세 명을 생포하고 군수품 수송선 22척을 빼앗아 돌아왔다.[1]
고종 13년(1226년) 1월,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있던 김희제는 우가하가 자신의 군사들을 몽골군으로 변장시키고 의주·정주로 쳐들어 오자, 판관(判官)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손습경(孫襲卿)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송국첨(宋國瞻)과 함께 우가하를 추토할 것을 결의하였다.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편성하여 김희제는 중군(中軍), 손습경은 좌군(左軍), 송국첨은 우군(右軍)을 지휘하여 20일 분량의 군량을 지고 가서 석성(石城)을 쳤다. 우가하가 원군으로 보낸 군사들을 상대로 분격하여 적을 대패시키고 70여 급을 참하였다. 결국 공격을 견디지 못하는 석성의 성주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고 포위를 풀어줄 것을 빌었다. 김희제는 우가하가 지은 배은(背恩)의 죄를 들어 말하고 돌아왔다. 자포강(紫布江)에 이르렀을 때 얼음이 이미 녹아 건널 수가 없었으나, 이날 밤에 얼음이 얼어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1]
《고려사》에 따르면, 김희제가 이때 석성으로 출병하면서 몰래 무신집권자 최이(崔怡)에게 글을 보내 이를 알려 두었고, 김희제가 돌아왔을 때 유사(有司)에서 김희제가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다며 탄핵하려 하였으나 최이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중지하였다. 다만 논공행상은 따로 행하지 않았다.[1]
2. 2. 대몽골 외교 활동
1221년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와서 행패를 부릴 때 김희제가 나서서 달랬다.[1] 1224년 다시 고려를 방문한 저고여는 이듬해 귀국길에 피살되었고,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여겨 국교를 단절했다. 이는 제1차 몽골 침공의 원인이 되었다.
저고여가 오고 한 달 뒤, 몽골 사신 저가가 안변도호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4] 당시 집권자 최이는 사신 접대에 어려움을 느껴 적당히 돌려보내려 했으나, 신료들은 몽골의 침략을 우려하여 반대했다.[5] 이후 몽골군이 출몰하고[6] 저가가 예물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안변도호부 관리가 중상을 입기도 했다.[1]
고종은 김희제를 유회사(類會使)로 보내 몽골 사신을 상대하게 했다. 김희제는 저가에게 고려 관리를 활로 쏜 책임을 물어 구금하겠다고 하자, 저가 등은 무릎을 꿇고 사과하며 김희제의 처분을 따랐다.[1] 1223년 10월, 몽골 사신 코스부카 등이 대관전에서 연회를 할 때 활과 화살을 차고 오르려는 것을 김희제가 제지하기도 했다.[8] 이후 김희제는 서북면으로 나가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이 되었다.[1]
2. 3. 대금나라 군사 활동
1221년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와서 행패를 부릴 때, 김희제가 나서서 그를 달랬다.[1] 저고여는 1224년 다시 고려를 방문했다가 1225년 귀국길에 피살되었고,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여겨 국교를 단절했다. 이는 훗날 몽골의 제1차 침공의 빌미가 되었다.
저고여가 온 지 한 달 뒤, 몽골 사신 저가가 안변도호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4]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는 사신 접대에 어려움을 느껴 적당히 돌려보내려 했으나,[2] 신료들은 몽골의 침입을 우려하여 반대했다.[5] 몽골군 6~7천 명이 파속로 석성 옆에 진을 쳤고,[6] 저가는 고려에 예물을 독촉하며 안변도호부 관리를 활로 쏘는 등 행패를 부렸다.[7][1]
고종은 김희제를 유회사로 보내 저가를 상대하게 했다. 김희제는 저가에게 고려 관리를 활로 쏜 책임을 물어 구금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저가는 이에 사과하며 김희제의 처분을 따랐다.[1] 1221년 10월, 몽골 사신 코스부카 등이 대관전에서 활과 화살을 차고 오르려 하자 김희제가 제지하기도 했다.[8] 이후 김희제는 서북면으로 나아가 의주분도장군이 되었다.[1]
1223년 5월, 금의 원수 우가하가 마산에 주둔하며 고려의 의주, 정주, 인주를 노략질했다. 김희제는 조정에 진압을 요청했으나 답이 없자, 갑사 100명으로 우가하의 진영을 급습하여 세 명을 생포하고 군수품 수송선 22척을 빼앗았다.[1]
1226년 1월, 서북면병마부사였던 김희제는 우가하가 몽골군으로 위장하여 의주, 정주를 공격하자 손습경, 송국첨과 함께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석성을 공격했다. 우가하의 원군을 격파하고 70여 명을 참수했으며, 석성 성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김희제는 우가하의 배은망덕함을 꾸짖고 돌아왔다.[1]
《고려사》에 따르면, 김희제는 출병 전 최이에게 알렸고, 독단적인 군사 행동에 대한 탄핵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은 없었다.[1]
2. 4. 최후
1227년 최이를 해하려 했다는 무고를 당해 나주 경계에서 체포된 김희제는, "청하(淸河) 백 번 따라주신 은혜 갚으려고/동서남북 이 한 몸 모두 잊었었네/어찌하여 하루아침에 하늘에 버림받아/자맥(紫陌) 사람이 벽해(碧海) 사람 되었을꼬"(欲報淸河百注恩/東西南北摠忘身/奈何一旦逢天厭/紫陌人爲碧海人)라는 절명시를 읊고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1]
《고려사》에 따르면, 최이가 병이 들었을 때 김희제는 최이의 병을 걱정하여 승려 주연지(周演之)에게 병이 나을 수 있을지를 점치게 하였다.[1] 이때 누군가가 최이에게, 김희제가 주연지의 집에서 최이를 죽이고 희종(熙宗)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최이는 이 말을 믿고 김희제와 그의 아들 김홍기(金弘己) 등 세 사람을 바다에 던져 죽였다.[1] [9]
3. 평가
4. 일화
고려사 및 동문선에는 고종 13년(1226년) 김희제가 압록강을 건너 석성의 우가하 세력을 토벌하고 돌아와 청로진(淸虜鎭)을 지나면서 손습경, 송국첨과 함께 화답하여 지었다는 칠언고시 한 수가 실려 있다.청로진(過淸虜鎭)
5.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아들 김홍기 조염경의 딸과 혼인 딸 정상과 혼인 6. 등장 매체
참조
[2]
서적
고려사》권제129 열전제42 반역(叛逆) 최충헌 부(附) 최이
[3]
논문
고려시대 외교문서 연구
[4]
서적
고려사》권제22 세가제22 고종 8년(1221년) 9월 1일 임오
[5]
서적
고려사》권제22 세가제22 고종 8년(1221년) 9월 6일 정해
[6]
서적
고려사》권제22 세가제22 고종 8년 9월 10일 신묘
[7]
서적
고려사》권제22 세가제22 고종 8년(1221년) 9월 12일 계사
[8]
서적
고려사》권제22 세가제22 고종 8년(1221년) 10월 10일 경신
[9]
서적
고려사절요》권제15 고종 14년 3월
[10]
서적
고려사》 권제22 세가 권제22 고종 14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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