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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로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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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꼬로아성은 베트남 하노이 근처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로, 달팽이 모양의 토루와 해자로 이루어진 요새이다. 기원전 257년 툭판이 어우락 왕조를 세우고 수도로 삼았으며, 신화에 따르면 황금 거북의 도움을 받아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꼬로아성은 남월과의 갈등으로 멸망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청동기 시대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어 동남아시아 고대 문명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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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로아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개요
유형
위치하노이 동아인현
축조 시기기원전 257년
축조자안즈엉브엉
역사
시대어우락 시대
수도어우락
관련 사건Edict on the Transfer of the Capital
기타롱비엔
송빈
다이라
유적 정보
현재 상태유적
발굴 여부발굴됨
명칭
베트남어Thành Cổ Loa (타인 꼬로아)
한자城古螺 (성 고라)

2. 명칭

"Cổ Loa"(꼬로아)는 한자어로, 古(고)와 螺(라)의 한월어 발음이며, 글자 그대로 '오래된 소라' 또는 '고대 소용돌이'를 의미한다. 이는 중세 중국어 발음 ''kuoX-luɑ''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준 중국어: ''gǔ luó'')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이 성은 다슬기(달팽이) 모양을 하고 있는데,[1] 이는 동심원 형태의 해자와 토루로 이루어진 성의 여러 겹 구조를 나타낸다.[2] 이러한 모양 때문에 '나성'(螺城, 소라 성)이라고도 불렸으며, 이 이름이 지역명의 어원이 되었다.[6]

기원전 258년 안즈엉브엉이 수도 퐁케(封谿)에 세운 이 성채는 '꼬로아 성' 외에도 'K'la'[4], '백계읍'(几羅邑|Kẻ-La ấpvie), '계촌'(Xóm Gà|쏨 가vie)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5]

현재 지명은 하노이 북부 동아인현의 꼬로아사(社)이다.

3. 역사

기원전 257년 어우 비엣족의 지도자였던 툭판(안즈엉 브엉)이 마지막 훙 왕을 물리치고 어우락 왕국을 세우면서 꼬로아를 수도로 삼았다.[8] 꼬로아는 홍 강 삼각주 북부 범람원에 위치한 비교적 큰 규모의 성으로, 당시 건설에는 많은 노동력과 자원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모습이 마치 달팽이를 닮았다고 하여 '라 성'(螺城)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지역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9] 꼬로아 성의 건축 및 어우락 왕조의 멸망과 관련해서는 황금 거북이가 등장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10]

꼬로아 성은 '고꼬로아 성' 또는 'K'la'[4], '백계읍'(几羅邑)[5], '계촌'(Xóm Gà)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하노이시 북부 동아인현 꼬로아사에 해당한다.

성은 3겹의 토루와 해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바깥 성벽의 둘레는 8km, 중간 성벽은 6.6km에 달한다. 가장 안쪽 성벽은 둘레 1.6km, 높이 5m에서 10m 정도로 축조되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호앙 강과 까늪 등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3. 1. 건국 신화와 어우락 왕조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257년 어우 비엣족의 지도자였던 툭판이 마지막 훙 왕인 훙 주에 브엉을 물리치고 반랑을 정복하여 어우락(甌雒/甌駱) 왕국을 세웠다. 그는 꼬로아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8] 꼬로아는 홍 강 삼각주 북부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비교적 큰 규모의 성으로, 당시 건설에는 많은 노동력과 자원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모습이 마치 달팽이(螺, 라)와 같다고 하여 '라 성'(螺城)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9]

꼬로아 성 건축과 관련된 유명한 신화가 전해진다. 성을 쌓을 때 낮에 작업한 부분이 밤이 되면 불가사의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이에 안즈엉 브엉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도움을 구했고, 어느 날 밤 꿈에 황금 거북이가 나타났다. 황금 거북이는 자신의 등 위에 성을 쌓을 것을 조언하며 현재의 꼬로아 위치를 알려주었다. 왕은 거북이의 말대로 성을 쌓기 시작했고, 마침내 견고한 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10]

안즈엉 브엉 사원.


왕이 감사를 표하자 황금 거북이는 자신의 발톱 하나를 뽑아주며 이것으로 석궁의 방아쇠를 만들라고 하였다. 이 발톱으로 만든 신기한 석궁(神機弩, 신기노)은 한 번 쏘면 수천 개의 화살이 나가는 강력한 무기였다. 이 신기노 덕분에 어우락은 한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한편, 북쪽에서는 진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 장수였던 조타(趙佗)가 남월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조타는 어우락을 침공했으나 안즈엉 브엉의 신기노 때문에 번번이 패배했다.[10]

이에 조타는 계략을 써서 자신의 아들 조중시(趙仲始)를 안즈엉 브엉의 딸인 미쩌우(媚珠) 공주와 결혼시켰다. 꼬로아에서 지내게 된 조중시는 미쩌우를 속여 신기노의 비밀을 알아내고 황금 거북이 발톱을 훔쳐 달아났다. 그의 아버지는 어우락을 침략하여 쉽게 물리쳤다.[10] 이 이야기는 베트남의 고전 설화집인 《영남척괴》의 〈금구전(金龜傳)〉에도 기록되어 있다.

안즈엉 브엉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과 황금 거북이가 나타나 그를 바다 속 용궁으로 데려갔다는 설 등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왕이 도망치던 중 황금 거북이로부터 딸 미쩌우의 배신 행위를 전해 듣고 분노하여 딸을 먼저 칼로 벤 뒤 자결했다고도 전해진다.[10]

3. 2. 남월과의 갈등과 멸망

진나라의 장수였던 조타(趙佗)는 진나라가 쇠퇴하는 틈을 타 어우락 북쪽에 남월이라는 독립 왕국을 세웠다. 조타는 남쪽의 어우락을 정복하려고 시도했으나, 툭판(안즈엉 브엉) 왕에게 패배하였다.[10]

이후 조타는 전략을 바꾸어 자신의 아들 중시(仲始)를 툭판의 딸 미쩌우(媚珠) 공주와 혼인시켰다. 꼬로아 성에서 지내게 된 중시는 툭판이 가진 신비한 석궁, 즉 '신기노(神機弩)'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석궁은 황금 거북이가 준 신성한 발톱으로 만들어져, 한 번 발사하면 수천 개의 화살이 나가는 강력한 무기였다.[10] 미쩌우 공주는 남편 중시에게 석궁의 비밀을 알려주고 실물을 보여주었는데, 중시는 이 기회를 이용해 몰래 모조품과 진짜 석궁 발톱을 바꿔치기하여 훔쳐낸 뒤 아버지 조타에게 보냈다.[10] 이 이야기는 《영남척괴》의 금구전(金龜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결정적인 무기인 신기노의 비밀을 손에 넣은 조타는 다시 어우락을 침공했다. 툭판은 여전히 석궁의 힘을 믿고 있었으나, 이미 가짜로 바뀐 뒤였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남월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10]

패배한 툭판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설, 황금 거북이가 나타나 그를 바다 속으로 데리고 가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황금 거북이가 툭판에게 딸 미쩌우의 배신 행위를 알리자, 툭판이 분노하여 자신의 딸을 먼저 처단한 뒤 자결했다고도 전해진다.[10]

4. 고고학적 발굴

꼬로아 성 유적에서는 여러 차례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져 고대 베트남 사회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1970년대 조사에서는 외벽의 무너진 부분 아래에서 동선 문화 시기의 유물 조각들이 층을 이루어 발견되었다.[3] 이는 성벽 축조와 동선 문화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내벽 바깥쪽에서 무게 72kg에 달하는 대형 청동 북이 발굴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3]

2000년대에 들어서도 발굴은 계속되었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내벽 지역 조사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친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사회의 높은 수준과 중앙 집권적 특징을 시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3]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중간 벽 발굴에서는 성벽이 여러 단계(세 시기, 다섯 단계)에 걸쳐 건설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발굴들을 통해 성벽의 일부는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한 왕조의 영향 이전에 베트남 지역 토착 사회에 의해 독자적으로 건설되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성벽 건설에는 항토 기법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발굴 과정에서 다량의 청동 쟁기 날, 도끼, 창날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농업 기술과 금속 가공 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4] 특히 대형 청동 북과 그 안에서 발견된 약 200점의 청동 유물들은 동남아시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중요한 발견으로 꼽힌다.[4]

4. 1. 성곽 구조

꼬로아 성은 기원전 258년 안즈엉브엉이 수도 퐁케(封谿)에 건설한 성채이다[5]. 현재 위치는 하노이 북부 동아인현 코로아사(社)이며, 하노이 중심부에서는 홍강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의 모습이 다슬기(우렁이)를 닮았다고 하여 나성(螺城)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지역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6]. 다른 이름으로는 'K'la'[4], '백계읍'(Kẻ-La ấp|백계읍vie), '계촌'(Xóm Gà|계촌vie)으로도 알려져 있다[5]. 전설에 따르면 금 거북이의 조언을 받아 건설되었다고 한다[7].

성채 유적의 일부


성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외성벽과 안쪽에 있는 사각형 모양의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중의 토루와 수해자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해자는 호앙 지앙 강과 연결된 여러 개울 및 호수와 이어져 있어 방어와 수로 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벽의 규모는 상당하다. 가장 바깥쪽 성벽(외곽)은 둘레가 8km에 달하며 망루가 늘어서 있었다. 이 외벽은 현재에도 최대 높이 12m, 기저부 폭 25m가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중간 성벽(중곽)의 둘레는 6.6km이며, 가장 안쪽의 내성은 전체 둘레 1.6km, 높이 5m에서 10m에 이른다. 고고학자들은 전체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200만 입방 미터 이상의 흙과 자재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당시 꼬로아의 인구는 5,000명에서 10,000명 사이였을 것으로 본다.

고고학 조사를 통해 내성벽의 일부가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한 왕조의 지배 이전에 베트남 지역의 토착 사회가 독자적으로 건설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벽 건설에는 고대 중국과 관련된 항토 기법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 1970년: 외벽의 무너진 부분에서 벽 아래에 층층이 쌓인 동선 문화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 1980년대: 내벽 바깥쪽에서 무게 72kg에 달하는 청동 북이 발굴되었다.
  • 2004년-2005년: 내벽 지역에서 여러 시대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엘리트 수준 또는 왕실의 특징"을 보여 중앙 집중적인 생산과 통제가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한다.
  • 2007년-2008년: 중간 성벽 발굴을 통해 여러 겹의 건설 퇴적층이 확인되었고, 크게 세 시기, 다섯 단계의 주요 건설 과정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발굴 과정에서 동선 양식의 도자기들이 성벽 아래에서 시간 순서대로 발견되었으며, 특히 응우옌 지앙 하이와 응우옌 반 훙이 우연히 발견한 청동 북은 중요한 유물이다. 이 북은 홍 강 삼각주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북 중 가장 큰 것으로, 높이 57cm, 입구 지름 73.6cm, 무게 72kg에 달한다. 북 안에서는 약 200점, 무게 20kg에 달하는 다양한 청동 유물 조각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소켓이 달린 호미와 쟁기 날(96점), 소켓 도끼(32점, 보트 모양 포함), 창날(16점), 단검(1점), 화살촉(8점) 등이 포함된다. 특히 창날 중 하나는 철로 된 날을 청동 소켓에 결합한 복합 금속 유물로 주목받았다.

4. 2. 주요 출토 유물

꼬로아 유적에서는 다양한 시기의 발굴 조사를 통해 중요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1970년 외벽의 붕괴된 부분 조사에서는 벽 아래 층에서 동선 문화 조각들이 발견되었다.[3] 1980년대에는 내벽 외부에서 무게 72kg에 달하는 청동 북이 발굴되었다.[3]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진행된 내벽 지역 발굴에서는 여러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이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엘리트 수준 또는 왕실의 특징"을 보여주어 중앙 집중식 생산과 독점의 가능성을 시사한다.[3]

특히 주목할 만한 발견은 응우옌 지앙 하이(Nguyen Giang Hai)와 응우옌 반 훙(Nguyen Van Hung)이 우연히 발견한 청동 북이다.[4] 이 북은 홍 강 삼각주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북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높이 57cm, 입구 지름 73.6cm, 무게는 72kg에 달한다.[4] 북 안에서는 약 200점, 총 무게 20kg에 달하는 다양한 청동 유물 조각들이 함께 발견되었다.[4]

북 안에서 발견된 주요 유물은 다음과 같다.[4]

  • 쟁기 날: 96점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 호미와 정: 6개가 한 세트로 발견되었다.
  • 소켓 도끼: 보트 모양 도끼 머리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도끼 32점이 나왔다. 이 중 보트 모양 도끼는 랑 까(Lang Ca)의 청동 세공인 무덤에서 발견된 점토 모형과 거의 동일한 형태이다.
  • 창날: 16점.
  • 단검: 1점.
  • 화살촉: 8점.


이 중 창날 하나는 철로 된 날이 청동 소켓에 결합된 이중 금속 형태여서 고고학적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4] 꼬로아에서 발견된 이러한 청동 유물들은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그 수량과 희귀성 면에서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4]

4. 3. 발굴의 의의

꼬로아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고대 베트남 사회의 기술, 문화,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발굴을 통해 드러난 유적의 규모와 유물들은 이곳이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중요한 정치·문화적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

성벽에 대한 조사는 유적의 축조 시기와 기술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1970년 외벽의 붕괴된 부분에서 실시된 조사에서는 벽 아래에서 동선 문화의 조각들이 층을 이루어 발견되었다. 이는 유적의 연대를 동선 문화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내성벽 일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에서는 그 축조 시기가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로 추정되었으며, 고대 중국과 관련된 항토(夯土) 기법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중간 벽 발굴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건설 단계(3개의 주요 시기와 5개의 건설 단계)가 확인되어, 유적이 오랜 기간에 걸쳐 증축되었음을 보여준다.

발굴 조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1980년대에 내벽 외부에서 발견된 대형 청동 북이다. 우연히 발견된 이 북은 높이 57cm, 지름 73.6cm, 무게 72kg에 달하며, 홍 강 삼각주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북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평가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북 안에 약 200점, 무게 20kg에 달하는 다양한 청동 유물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북 내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당시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96개의 쟁기 날이며, 이 외에도 호미, 정, 다양한 형태의 소켓 도끼(보트 모양 도끼 포함), 창날, 단검, 화살촉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쟁기 날과 호미 등 농기구가 다수 출토된 것은 당시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또한, 철로 된 날을 청동 소켓에 결합한 이중 금속 창날의 발견은 당시의 발달된 금속 가공 기술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물들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과 규모를 가지고 있어 꼬로아 유적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특정 구역에서만 발견되는 '엘리트 수준 또는 왕실의 특징'을 지닌 유물들은 이곳이 중앙 집중화된 생산 체계와 권력 구조를 갖춘 사회였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https://zh.wikisourc[...]
[2] 서적 Việt Nam: a history from earliest time to the present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3] 간행물 Arts du Vietnam: la fleur du pêcher et l'oiseau d'azur 2002
[4] 문서
[5] 논문 Vietnamese-American engineers: An examination of the leadership University of Phoenix 2009
[6] 문서 2008
[7] 간행물 Michelin Vietnam 2010
[8] 문서
[9] 문서 2008
[10] 서적 A Story of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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