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오카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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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오카 공습은 1945년 8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육군 항공대의 B-29 폭격기 125기가 일본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 가한 대규모 공습이다. 이 공습으로 163,000개의 소이탄이 투하되어 시가지의 65.5%에서 80%가 파괴되었고, 1,486명이 사망했으며, 미군 측 피해는 없었다. 나가오카는 1945년 7월 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위한 전술 연습 대상 도시 중 하나로 지정되었으며, 공습 직전 민간인에게 피난 경고가 이루어졌다. 나가오카 공습 외에도 도야마시, 미토시, 하치오지시도 같은 날 폭격을 받았으며, 나가오카역에는 공습 피해자를 추모하는 청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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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 공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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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 공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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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정보 | |
분쟁 | 나가오카 공습 |
전체 |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일본 본토 공습 |
날짜 | 1945년 8월 1일 |
장소 | 일본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
결과 | 나가오카 시가지 80% 파괴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
병력 1 | 중폭격기 125기 |
사상자 | |
사상자 1 | 손실 없음 |
사상자 2 | 1,486명 사망 도시 65.5-80% 파괴 |
2. 배경
나가오카는 일본의 지역 상업 중심지였으며, 일본물리화학연구소 지역 연구소 거점 중 하나였다.[2] 1945년 당시 인구는 67,000명 정도였다. 또한 진주만 공격을 지시한 일본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고향으로, 화학 실험실 건설이 시작되자 폭격 목표가 되었다.[1]
1945년 7월 26일, 나가오카시는 미국 육군 항공대 제509혼성편대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술 연습의 일환으로 진행한 첫 공습을 받았다.[2]
3. 공습의 전개
1945년 8월 1일 오후 10시 30분, 제313항공사단 소속 B-29 폭격기 125기가 나가오카에 925t의 소이탄 163,000개를 투하하는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어 1시간 40분 동안 이어졌다.[2] 이 공습으로 나가오카시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시가지의 65.5%가 파괴되었다는 분석(1953년 미국 육군 항공대 전략폭격분석보고서, 역사학자 리차드 B. 프랭크)과[2] 80%가 파괴되었다는 분석(2016년 워싱턴 포스트)이 엇갈린다.[2] 이 공습으로 280명의 아동을 포함한 1,486명이 사망했으며, 미군 측 피해는 없었다.[2]
같은 날 도야마시, 미토시, 하치오지시도 폭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으며,[2] 뉴욕 타임스는 이날의 폭격을 역사상 가장 많은 폭탄이 투하된 폭격으로 기록했다.[2]
3. 1. 호박탄 투하 연습
나가오카는 1945년 7월 말 미국 육군 항공대 제509혼성편대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위한 전술 연습을 할 10개 도시 중 하나로 지정되어 폭격을 받을 예정이었다. 이 폭격에는 호박탄으로 무장한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2-6기 소편대가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1] 509혼성편대는 나가오카에 대한 소규모 공격 결과에 대해 '괜찮은 편'이었다고 평가했다.[2]
3. 2. 심리전 전개
7월 27일에서 28일 밤 사이, B-29 폭격기 편대가 나가오카를 포함한 10개 도시에 전단지를 투하하여 민간인에게 공습 직전 피난하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전술은 폭격 작전의 심리적 영향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2]
4. 1945년 8월 1일 대공습
1945년 8월 1일, 미국 육군 항공대 제313항공사단 소속 B-29 폭격기 125기가 나가오카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오후 10시 30분부터 1시간 40분 동안 163,000개, 총 925톤의 소이탄이 투하되었다.[2]
4. 1. 피해 규모
1945년 8월 1일 나가오카 대공습으로 도시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1953년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전략폭격분석보고서는 시가지의 65.5%가 파괴되었다고 분석했으며, 역사학자 리차드 B. 프랭크도 2001년 이 수치를 인용했다.[2] The Washington Post 지에서는 나가오카의 80%가 파괴되었다고 분석했다.[2]공습으로 인한 총 사망자는 1,486명이었으며, 이 중에는 어린이 28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2] 나가오카 폭격 과정에서 미군 측 피해는 없었다.[2]
4. 2. 미군 피해
나가오카 폭격 과정에서 미군 측 피해는 없었다.[2]4. 3. 다른 도시의 피해
1945년 8월 1일 나가오카 외에도 도야마시, 미토, 하치오지시도 폭격을 받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2] 뉴욕 타임스는 이날 밤의 폭격이 그때까지 가장 많은 폭탄을 투하한 폭격이었다고 기록했다.[2]5. 전후 추모 및 유산
1951년 11월 나가오카역에 폭격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한 청동상이 세워졌다. 이 청동상은 1996년 일본 평화숲 추모공원으로 이전되었다.[2]
참조
[1]
웹인용
Honolulu and Nagaoka: Two Cities Linked by Wartime Legacies (Part II)
http://www.nippon.co[...]
Nippon.com
2015-02-13
[2]
뉴스
Stroll through history: The peace statue in Nagaoka, Japan
http://news.national[...]
The Washington Post
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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