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루의 인광석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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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우루의 인광석 산업은 1899년 앨버트 엘리스에 의해 인광석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가 채굴권을 확보하고 1907년부터 채굴을 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호주, 뉴질랜드의 신탁 통치 하에 관리되었다. 1968년 나우루가 독립한 후 인광석 사업을 국영화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나, 부실한 투자와 자원 고갈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21세기에는 2차 채굴을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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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루 인산염공사는 나우루의 인산염 채굴 및 수출을 담당했던 국영 기업으로, 독일 지원으로 설립되어 영국 인광석 위원회 시대를 거쳐 나우루 인광석 회사로 국유화되었으나, 인산염 고갈, 재정 실패, 환경 문제 등으로 구조 조정을 겪으며 나우루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국제사법재판소 판례 - 니카라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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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루의 인광석 산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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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주요 광물 | 인산염 |
위치 | 나우루, 바나바 섬 (키리바시) |
매장 시기 | 수천 년 전, 새들의 배설물 축적 |
발견 | 1900년 |
역사 | |
초기 채굴 | 독일 회사가 시작, 이후 영국 회사에 양도 |
채굴권 획득 | 태평양 인산염 회사 |
공동 관리 | 영국, 호주, 뉴질랜드 3국 공동 관리 |
나우루 독립 후 | 나우루 정부가 채굴 사업 인수 |
환경 문제 | 토지 황폐화, 생태계 파괴 |
경제적 영향 | 나우루, 바나바 경제의 주요 기반 |
인산염 고갈 | 채굴 가능한 인산염 고갈로 경제 위기 심화 |
현재 상황 | 대체 산업 개발 노력 중 |
채굴 과정 | |
채굴 방식 | 노천 채굴 방식 |
채굴 지역 | 섬 중앙 고원 지대 |
환경 파괴 | 식물 생장 불가능한 석회암 지대로 변모 |
토양 유실 | 심각한 토양 유실 및 지하수 오염 초래 |
경제적 영향 | |
나우루 경제 의존도 | 인산염 수출에 대한 높은 경제 의존도 |
소득 감소 | 인산염 고갈로 인한 국가 소득 급감 |
투자 실패 | 해외 투자 실패로 인한 재정 악화 |
복지 축소 | 정부 서비스 축소 및 실업률 증가 |
빈곤 문제 | 심각한 빈곤 및 사회 문제 발생 |
환경적 영향 | |
토지 황폐화 | 섬 면적의 80% 이상이 채굴로 황폐화 |
생태계 파괴 | 고유 동식물 서식지 파괴 및 생물 다양성 감소 |
지하수 오염 |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 물질로 인한 지하수 오염 |
기후 변화 |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섬 침수 위협 증가 |
사회적 영향 | |
이주 문제 | 바나바 주민들의 피지 라비 이주 |
문화 유산 손실 | 전통 문화 및 공동체 약화 |
건강 문제 | 오염된 환경으로 인한 건강 문제 발생 |
미래 전망 | |
경제 다각화 노력 | 관광 산업 및 어업 개발 추진 |
환경 복원 노력 | 토지 복원 및 생태계 복원 프로젝트 진행 |
국제 협력 | 국제 사회의 지원 및 협력 필요 |
2. 인광석의 발견과 초기 채굴 역사
1899년 뉴질랜드의 지질학자 앨버트 엘리스가 나우루에서 인광석 광상을 발견했다.[12] 이후 독일은 채굴권을 영국 자본의 태평양 인광석 회사(Pacific Phosphate Company)에 부여했고, 1907년부터 채굴이 시작되었다.[11] 인광석 산업은 빠르게 근대화되어 연간 채굴량이 수십만 톤에 달했지만, 섬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로열티는 1톤당 8펜스(1939년 기준)에 불과해 큰 이익을 얻지 못하고 전통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2. 1. 인광석의 발견 (1896-1899)

1896년,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화물 담당 사무원 헨리 덴슨은 나우루에 잠시 들렀을 때 이상한 모양의 돌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것이 규화목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덴슨은 이 돌로 어린이용 구슬을 만들 계획이었지만, 결국 회사의 시드니 사무실에서 문 받침으로 사용되었다.[12]

1899년,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인광석 부서 관리자 앨버트 풀러 엘리스는 태평양 제도에서 오는 암석 표본을 분석하기 위해 시드니 사무실로 전근을 갔다. 엘리스는 그 돌을 보고 베이커섬에서 나오는 인광석과 외관이 유사하여 인광석이라고 의심했지만, 덴슨은 나무 조각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3개월 후, 엘리스는 자신의 직감을 시험하기로 결정하고 그 돌에 인광석이 있는지 검사했다. 그 결과 가장 품질이 좋은 인광석 광석임이 밝혀졌다.[12][11]
동쪽에 인접한 섬인 바나바섬은 나우루와 지질학을 공유했으며 상당한 인광석 매장량을 가지고 있었다.
2. 2. 채굴권 확보 및 채굴 시작 (1900년대 초)
앨버트 엘리스가 인산염을 발견하자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존 T. 아룬델은 흥분했고, 회사는 나우루의 수익성 있는 자원에 대한 권리와 접근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한 협상에는 영국과 독일 정부, 새롭게 개편된 퍼시픽 인산염 회사(Pacific Phosphate Company),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채굴해 온 독일 광산 회사인 얄루이트-게젤샤프트 등 4개 당사자가 참여했다.[2]1906년, 얄루이트-게젤샤프트의 권리가 퍼시픽 인산염 회사로 이전되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이 조건은 "2,000 파운드 스털링(영국), 12,500 파운드 스털링 상당의 퍼시픽 인산염 회사 주식, 그리고 수출되는 모든 인산염 톤에 대한 로열티 지급"이었다.[1]
1907년부터 채굴이 시작되었다.[11] 채굴 첫 해에만 약 4989.51kg의 인산염이 호주로 선적되었다.[1]
2. 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변화 (1919-1968)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호주, 뉴질랜드는 태평양 인산염 회사(Pacific Phosphate Company)의 지분을 인수했고, 나우루의 인산염 채굴은 이 세 국가 간의 신탁 통치를 통해 관리되었다.[12] 이들 정부는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가진 영국 인산염 위원회(British Phosphate Commissioners)를 설립했다.[12] 1919년부터 나우루와 바나바섬 주민들의 복지, 광산 작업으로 손실된 토지와 수자원 복구, 섬의 환경 피해 보상에 대한 책임은 영국, 뉴질랜드, 호주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13]1948년 6월, 오션 섬에서 일하던 약 1,100명의 키리바시인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파업 참가자들의 주요 요구 사항은 무역 상점에서 판매되는 상품 가격 인상에 맞춰 월 10파운드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14]
3. 나우루 독립과 인광석 채굴의 국영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퍼시픽 인산염 회사의 지분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간에 설립된 신탁을 통해 관리되었다.[1] 이들 정부는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인수한 영국 인산염 위원회를 설립했다.[1] 1919년부터 나우루와 바나바 섬 사람들의 복지, 광산 작업으로 손실된 토지와 수자원 복구, 섬에 대한 환경 피해 보상에 대한 책임은 영국, 뉴질랜드, 호주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3]
1948년 6월, 오션 섬에서 일하던 약 1,100명의 키리바시인들이 파업을 했는데, 주요 요구 사항은 무역 상점에서 판매되는 상품 가격 인상에 맞춰 월 10파운드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4]
1968년 나우루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로부터 독립하였다.
3. 1. 국영화와 경제적 번영 (1970년대)
1968년 나우루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 1970년, 새로 구성된 나우루 정부는 호주로부터 인광석 사업에 대한 모든 권리를 2100만호주 달러에 구입했다.[15] 이 구매는 나우루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는데, 1990년대 초 인광석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광업 운영 수익이 연간 1억~1억 2천만 AUD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5] 1968년부터 인광석이 고갈될 때까지 총 생산량은 4,300만 톤에 달한다.[15]
1960년대 초 나우루산 인광석은 1톤당 약 40AUD에 거래되었으며, 생산량은 연간 100만 톤에 달했다. 1974년에는 인광석 사업이 나우루에 약 4.5억호주 달러의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20세기 말에는 인광석이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을 역임한 해머 데로버트는 고갈 이후를 대비하여 이자나 사업 수입을 얻을 목적으로 이익의 대부분을 투자에 사용했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 사기 피해, 부정 행위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고 투자는 거의 실패했다. 인광석의 고갈과 자산의 상실로 인해 1990년대 후반부터 나우루 경제는 파탄 상태가 되었다.
정부는 광산에서 얻은 이익을 섬 주민들을 위한 신탁에 넣었는데, 이 신탁은 연간 약 14%의 수익을 올리면서 최고 10억 AUD에 이르렀다. 그러나 열악한 투자와 부패로 인해 신탁 기금은 거의 비어 있었고 나우루는 돈이 거의 없게 되었다.[17]
1948년에 인산염 채굴로 인한 수입은 745000AUD였다. 아주 작은 2%(14900AUD)가 나우루인들에게 반환되었고 1%는 "관리" 비용으로 청구되었다. 1960년에 미래 대통령 해머 데로버트는 나우루 사람들에게 이익을 22%로 협상했고 행정부는 14%로 인상했다.[17]
나우루 인산염 공사를 이끌었던 르네 해리스와 같은 저명한 나우루 사람들이 나우루 대통령을 역임했다.
3. 2. 투자 실패와 경제 위기 (1980년대-1990년대)
1968년 나우루는 독립하면서 인광석 채굴 사업을 국유화하고 막대한 수입을 얻었다.[15][16] 1974년에는 인광석 사업으로 약 4.5억호주 달러의 수익을 얻기도 했다.[15] 20세기 말 인광석 고갈이 예상되면서, 해머 데로버트 대통령은 미래를 대비하여 수익의 대부분을 투자에 사용했다.하지만, 나우루 정부는 방만한 경영, 투자 실패, 부패 등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정부는 광산에서 얻은 이익을 섬 주민들을 위한 신탁 기금에 넣었는데, 이 신탁 기금은 한때 최고 10억호주 달러에 달했고 연간 약 14%의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실 투자와 부패로 인해 신탁 기금은 거의 고갈되었고, 나우루는 재정난에 빠졌다.
1948년 인광석 채굴 수입의 단 2%만이 나우루인들에게 돌아갔지만, 1960년 해머 데로버트는 이 비율을 22%로 인상하는 협상을 이끌어냈다.[17] 비교적 성공적인 투자 사례로는 1988년 오리건주 포틀랜드 인근 포리스트 하이츠 지역의 주거용 토지 600acre 매입이 있었다.[18]
결국 인광석 고갈과 자산 상실로 인해 1990년대 후반부터 나우루 경제는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1989년 나우루는 호주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는데, 이는 인광석 채굴로 인한 환경 피해를 해결하지 못한 호주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송은 ''특정 인산염 토지: 나우루 대 호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법정 밖 합의로 이어졌다.[5][6]
4. 21세기 인광석 2차 채굴과 경제 회복 노력
21세기에 들어 나우루의 인광석 수출은 100만호주 달러 이하로 떨어졌지만, 인광석의 이차층을 채굴하는 2차 채굴이 시작되면서 수입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인광석 수출이 2000만호주 달러까지 회복되었다. 2차 채굴은 30년에서 40년 동안 진행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1]
4. 1. 2차 채굴의 경제적, 환경적 영향
21세기에 들어선 후 인광석 수출은 100만호주 달러 이하로 떨어졌지만, 2차 채굴(인광석의 이차층 채굴)이 시작되면서 수입이 증가 추세에 있으며, 2007년에는 인광석 수출이 2000만호주 달러까지 회복되었다. 2차 채굴은 30년에서 40년 동안 진행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1]5. 인광석 채굴과 관련된 주요 인물
- 헨리 덴슨: 1896년,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화물 담당 사무원이었던 헨리 덴슨은 나우루 섬에서 특이한 돌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 이 돌을 규화목 조각이라고 생각했으나, 훗날 앨버트 엘리스에 의해 인광석으로 밝혀졌다. 이 돌은 회사의 시드니 사무실에서 문 받침으로 사용되었다.[12]
- 앨버트 엘리스: 1899년, 뉴질랜드 출신 지질학자 앨버트 엘리스는 시드니에서 태평양 제도에서 온 암석을 분석하던 중 헨리 덴슨이 발견한 돌이 베이커섬에서 오는 인산염과 비슷하다고 의심했다. 3개월 후, 그는 이 돌이 고품질의 인광석임을 확인했다.[12][11]
- 존 T. 아룬델: 앨버트 엘리스가 인산염을 발견하자,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존 T. 아룬델은 나우루의 인광석 자원에 대한 권리 확보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영국 및 독일 정부, 얄루이트-게젤샤프트 등과 협상을 진행했다.[2]
- 해머 데로버트: 1968년 나우루 독립 이후, 해머 데로버트 대통령은 인광석 채굴 수익을 국가 발전에 투자했다. 그러나 경영 부실, 사기, 부정 행위 등으로 인해 투자는 실패했고, 인광석 고갈과 함께 나우루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5][6]
- 르네 해리스: 나우루 인산염 공사를 이끌었으며, 나우루 대통령을 역임했다.[5][6]
5. 1. 앨버트 엘리스
1899년, 뉴질랜드의 지질학자 앨버트 엘리스는 태평양 제도에서 오는 암석을 분석하기 위해 시드니 사무실로 옮겨졌다. Pacific Islands Company의 인산염 사업부 관리인이었던 엘리스는 헨리 덴슨이 발견한 암석을 보고 베이커섬에서 오는 인산염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덴슨은 그것이 단지 나무라고 추측하며 엘리스의 의견을 무시했다.[12] 3개월 후, 엘리스는 자신의 직감을 시험하기 위해 암석에 인산염이 있는지 테스트했고, 그 결과 가장 풍부한 품질의 인광석으로 판명되었다.[12][11] 동쪽에 이웃한 섬인 바나바섬은 나우루와 지질학을 공유하며, 역시 상당한 양의 인산염 매장량을 가지고 있었다.5. 2. 헨리 덴슨
1896년,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화물 담당 사무원 헨리 덴슨은 나우루 섬에 잠시 들렀을 때 이상한 모양의 돌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 그것이 규화목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덴슨은 이 돌로 어린이용 구슬을 만들 계획이었지만, 결국 이 돌은 회사의 시드니 사무실에서 문 받침으로 사용되었다.[12]1899년,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인광석 부서 관리자 앨버트 풀러 엘리스는 태평양 섬에서 온 암석 표본을 분석하기 위해 시드니 사무실로 전근을 갔다. 엘리스는 그 돌을 보고 베이커섬에서 나오는 인광석과 외관이 유사하여 인광석이라고 의심했지만, 덴슨은 그것이 나무 조각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3개월 후, 엘리스는 자신의 직감을 시험하기로 결정하고 그 돌을 인광석 검사를 했고, 그 결과 가장 품질이 좋은 인광석 광석임이 밝혀졌다.[12][11]
5. 3. 존 T. 아룬델
앨버트 엘리스가 인산염을 발견하자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존 T. 아룬델은 흥분했고, 회사는 나우루의 수익성 있는 자원에 대한 권리와 접근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한 협상에는 영국과 독일 정부, 새롭게 개편된 퍼시픽 인산염 회사,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채굴해 온 독일 광산 회사인 얄루이트-게젤샤프트 등 4개 당사자가 참여했다.[2]1906년, 얄루이트-게젤샤프트의 권리가 퍼시픽 인산염 회사로 이전되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이 조건은 "2,000 파운드 스털링(영국), 12,500 파운드 스털링 상당의 퍼시픽 인산염 회사 주식, 그리고 수출되는 모든 인산염 톤에 대한 로열티 지급"이었다.[1]
5. 4. 해머 데로버트
1968년 나우루가 독립하면서 인광석 채굴 수익을 직접 얻게 되었다. 채굴 사업은 국영화되었고, 나우루 정부는 막대한 수입을 얻었다. 20세기 말 인광석 고갈이 예상되자 해머 데로버트 대통령은 고갈 이후를 대비하여 이자나 사업 수입을 얻을 목적으로 이익 대부분을 투자했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 사기 피해, 부정 행위로 인해 막대한 손실이 계속되어 투자는 거의 실패했다. 인광석 고갈과 자산 상실로 인해 1990년대 후반부터 경제는 파탄 상태가 되었다.[5][6]5. 5. 르네 해리스
나우루 인산염 공사를 이끌었던 르네 해리스는 나우루 대통령을 역임한 저명한 나우루인 중 한 명이다.[5][6]6. 인광석 채굴과 관련된 주요 단체
단체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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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 | 1899년 뉴질랜드의 지질학자 Albert Fuller Ellis|앨버트 엘리스영어가 인광석 광상을 발견하자, 회사의 존 T. 아룬델은 나우루의 자원 개발을 추진했다. 영국과 독일 정부, 얄루이트-게젤샤프트 등과 협상을 진행했다.[2] |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 | 1906년 얄루이트-게젤샤프트로부터 인광석 채굴권을 인수했다. 인수 조건은 "2,000 파운드 스털링(영국), 12,500 파운드 스털링 상당의 회사 주식, 그리고 수출되는 모든 인산염 톤에 대한 로열티 지급"이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인산염 위원회에 인수되었다. |
얄루이트-게젤샤프트 (Jaluit-Gesellschaft) | 19세기 후반부터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채굴해 온 독일 광산 회사. 1906년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에 인광석 채굴권을 양도했다.[11] |
영국 인산염 위원회 (British Phosphate Commissioners)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호주, 뉴질랜드가 설립한 신탁을 통해 나우루의 인산염 채굴을 관리했다.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인수하고, 나우루와 바나바섬 사람들의 복지, 광산 피해 복구, 환경 피해 보상 책임을 맡았다.[12] |
나우루 인산염 공사 (Nauru Phosphate Corporation) | 1968년 나우루 독립 이후 인광석 채굴 사업을 국영화하면서 설립된 공기업. 1970년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인산염 사업에 대한 모든 권리를 2100만호주 달러에 구입했다.[15] 르네 해리스 등 많은 나우루 대통령을 배출했다.[5] |
나우루 인산염 로열티 신탁 (Nauru Phosphate Royalties Trust) | 나우루 정부가 인광석 채굴 이익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신탁 기금. 해머 데로버트 대통령은 나우루인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을 늘리는 협상을 성공시켰다.[17] 부실 투자와 부패로 인해 기금은 거의 고갈되었다. |
6. 1.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
1899년 뉴질랜드의 지질학자 Albert Fuller Ellis|앨버트 엘리스영어가 인광석 광상을 발견하자,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존 T. 아룬델은 회사가 나우루의 수익성 있는 자원에 대한 권리와 접근을 추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인산염에 대한 권리 추구 협상에는 영국과 독일 정부, 새롭게 개편된 퍼시픽 인산염 회사,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채굴해 온 독일 광산 회사인 얄루이트-게젤샤프트 등 4개 당사자가 참여했다.[2]
1906년, 얄루이트-게젤샤프트의 권리가 퍼시픽 인산염 회사로 이전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 조건은 "2,000 파운드 스털링(영국), 12,500 파운드 스털링 상당의 퍼시픽 인산염 회사 주식, 그리고 수출되는 모든 인산염 톤에 대한 로열티 지급"이었다.[1]
채굴 첫 해에만 약 4989.51kg의 인산염이 호주로 선적되었다.[1]
6. 2.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
엘리스가 인산염을 발견하자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존 T. 아룬델은 흥분했고, 회사는 나우루의 수익성 있는 자원에 대한 권리와 접근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한 협상에는 영국과 독일 정부, 새롭게 개편된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채굴해 온 독일 광산 회사인 얄루이트-게젤샤프트 등 4개 당사자가 참여했다.[11]
1906년, 얄루이트-게젤샤프트의 권리가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로 이전되는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조건은 "2,000 파운드 스털링(영국), 12,500 파운드 스털링 상당의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 주식, 그리고 수출되는 모든 인산염 톤에 대한 로열티 지급"이었다.[12]
채굴 첫 해에만 약 4989.51kg의 인산염이 호주로 선적되었다.[1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의 지분은 인수되었고, 나우루의 인산염 채굴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간에 설립된 신탁을 통해 관리되었다. 이들 정부는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인수한 영국 인산염 위원회를 설립했다.[12]
6. 3. 얄루이트-게젤샤프트 (Jaluit-Gesellschaft)
1899년 뉴질랜드의 지질학자 앨버트 엘리스|Albert Fuller Ellis영어가 인광석 광상을 발견했다.[2] 엘리스의 인산염 발견은 Pacific Islands Company의 존 T. 아룬델을 흥분시켰고, 회사는 나우루의 수익성 있는 자원에 대한 권리와 접근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인산염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한 협상에는 영국과 독일 정부, 새롭게 개편된 Pacific Phosphate Company,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채굴해 온 독일 광산 회사인 얄루이트-게젤샤프트 등 4개 당사자가 참여했다.[11]1906년, 얄루이트-게젤샤프트의 권리가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Pacific Phosphate Company)로 이전되는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조건은 "2,000 파운드 스털링(영국), 12,500 파운드 스털링 상당의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 주식, 그리고 수출되는 모든 인산염 톤에 대한 로열티 지급"이었다.[1] 1907년 채굴이 시작되었다.[12]
6. 4. 영국 인산염 위원회 (British Phosphate Commissioners)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나우루의 인광석 채굴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간에 설립된 신탁을 통해 관리되었다.[12] 이들 정부는 인광석에 대한 권리를 인수한 영국 인산염 위원회를 설립하였다.[12] 1919년부터 영국 인산염 위원회는 나우루와 바나바섬 사람들의 복지, 광산 작업으로 손실된 토지와 수자원 복구, 섬에 대한 환경 피해 보상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13]6. 5. 나우루 인산염 공사 (Nauru Phosphate Corporation)
1968년 나우루는 독립 국가가 되었고, 1970년에 새로 구성된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인산염 사업에 대한 모든 권리를 2100만호주 달러에 구입했다.[15] 이 구매는 나우루에 경제적 부양을 가져왔으며, 1990년대 초 자원 고갈 시점까지 독립 이후 연간 1억호주 달러~1.2억호주 달러의 채굴 수익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15] 1968년부터 고갈될 때까지 인산염 총 생산량은 4,300만 톤이었다.[15]나우루 인산염 공사(Nauru Phosphate Corporation)는 나우루 독립 이후 인광석 채굴 사업을 국영화하면서 설립된 공기업이다. 1960년대 초 나우루산 인광석은 1톤당 약 40 AUD에 거래되었으며, 생산량은 연간 100만 톤에 달했다. 나우루가 독립하자, 인광석 채굴에 따른 수익을 직접 얻게 되었고 채굴 사업은 국영화되어, 나우루 정부는 막대한 수입을 얻게 되었다. 1974년에는 인광석 사업이 나우루에 약 4.5억호주 달러의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20세기 말에는 인광석이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을 역임한 해머 데로버트는 고갈 이후를 대비하여 이자나 사업 수입을 얻을 목적으로 이익의 대부분을 투자에 사용했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 사기 피해, 부정 행위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계속하여 투자는 거의 실패했다. 인광석의 고갈과 자산의 상실로 인해 1990년대 후반부터 경제는 파탄 상태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후 인광석 수출은 100만호주 달러 이하로 떨어졌지만, 2차 채굴(인광석의 이차층 채굴)이 시작되면서 수입이 증가 추세에 있으며, 2007년에는 인광석 수출이 2000만호주 달러까지 회복되었다. 2차 채굴은 30년에서 40년 동안 진행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
나우루 인산염 공사를 이끌었던 르네 해리스를 비롯한 많은 저명한 나우루인들이 나우루 대통령을 역임했다.[5]
1989년, 나우루는 호주의 섬 관리, 특히 인산염 채굴로 인한 환경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것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했다. 이 소송은 ''특정 인산염 토지: Nauru v. 호주'' 로 알려져 있으며, 나우루의 광산 지역을 재건하기 위한 법원 밖 합의로 이어졌다.[15][16]
6. 6. 나우루 인산염 로열티 신탁 (Nauru Phosphate Royalties Trust)
나우루 정부는 인광석 채굴로 얻은 이익을 섬 주민들을 위해 나우루 인산염 로열티 신탁 (Nauru Phosphate Royalties Trust)이라는 신탁 기금에 넣었다. 이 기금은 한때 최고 10억호주 달러에 달했고 연간 약 14%의 수익을 올렸다.[17] 1960년, 미래 대통령이 될 해머 데로버트는 나우루인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을 22%로, 행정 비용을 14%로 인상하는 협상을 성공시켰다.[17]1988년, 로열티 신탁은 오리건주 포틀랜드 근처 포리스트 하이츠에 600acre의 주거용 토지를 매입하는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토지는 분양률 75%를 달성할 때까지 나우루 신탁이 관리하다가 이후 주택 소유자 협회로 넘어갔다.[18]
그러나 부실한 투자와 부패로 인해 신탁 기금은 거의 고갈되었고, 나우루는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0세기 말 인광석 고갈이 예상되면서 해머 데로버트는 이자 및 사업 수입을 목표로 이익의 대부분을 투자했지만, 방만한 경영, 사기 피해, 부정 행위로 인해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인광석 고갈과 자산 상실로 인해 1990년대 후반부터 나우루 경제는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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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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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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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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