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마 다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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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야마 다케유키는 일본의 육상 선수로, 마라톤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나가노현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국철 임시직으로 일하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후지쯔 육상부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1984년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4위를 기록했다. 그는 세코 도시히코와의 경쟁과 발언 논란, 지도 방식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황영조 선수가 그를 보고 마라톤을 시작했다는 인연으로 한국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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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야마 다케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명 | 나카야마 다케유키 |
원어명 | ja |
로마자 표기 | Nakayama Takeyuki |
출생일 | 1959년 12월 20일 |
출생지 | 나가노현기타아즈미군이케다정 |
신장 | 180cm |
체중 | 58kg |
선수 정보 | |
종목 | 장거리 달리기・마라톤 |
은퇴 | Yes |
개인 최고 기록 | Yes |
5000m | 13분 43초 80 (1986년) |
10000m | 27분 35초 33 (1987년) |
마라톤 | 2시간 08분 15초 (1985년) |
메달 기록 | |
금메달 | 1986 서울 남자 마라톤 |
2. 선수 경력
나카야마 다케유키는 나가노현 이케다 공업 고등학교와 후지쯔를 거쳐 다이에 육상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83년부터 1994년까지 주요 국제 마라톤 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대회 | 장소 | 순위 | 기록 |
---|---|---|---|---|
1983 | 후쿠오카 마라톤 | 일본 후쿠오카 | 14위 | 2:14:15 |
1984 | 후쿠오카 마라톤 | 일본 후쿠오카 | 2:10:00 | |
1985 | 1985 세계 마라톤컵 | 일본 히로시마 | 2:08:15 | |
1986 | 도쿄 국제 마라톤 | 일본 도쿄 | 4위 | 2:08:43 |
아시안 게임 | 대한민국 서울 | 2:08:21 | ||
1987 | 도쿄 국제 마라톤 | 일본 도쿄 | 2:10:33 | |
후쿠오카 마라톤 | 일본 후쿠오카 | 2:08:18 | ||
1988 | 서울 올림픽 | 대한민국 서울 | 4위 | 2:11:05 |
1990 | 도쿄 마라톤 | 일본 도쿄 | 2:10:57 | |
1991 | 벳푸-오이타 마라톤 | 일본 오이타현 벳푸 | 2:09:12 | |
세계 선수권 대회 | 일본 도쿄 | — | DNF | |
1992 | 도쿄 국제 마라톤 | 일본 도쿄 | 2:10:25 | |
바르셀로나 올림픽 | 스페인 바르셀로나 | 4위 | 2:14:02 | |
1994 | 파리 마라톤 | 프랑스 파리 | 8위 | 2:13:11 |
후쿠오카 마라톤 | 일본 후쿠오카 | 17위 | 2:15:23 |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모두 4위를 기록하여 아쉽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두 대회 연속 올림픽 입상이라는 값진 기록을 남겼다.[7]
2. 1. 초기 경력
나가노현 이케다 공업 고등학교 시절 육상을 시작했다.[1] 고등학교 3학년 때 국민체육대회 나가노현 예선 소년 남자 5000m에서 우승했지만, 기록상 본선에서 상위권에 들 수 없다고 판단되어 참가가 보류되었다.[2]고등학교 졸업 후, 육상부가 있는 현내의 양명주에 채용이 거의 내정되었지만, 면접에서 농구화를 신고 간 실수로 불합격되었다.[2] 그 때문에 국철에 임시 직원으로 입사하여 차량 기지 청소 작업을 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1][2] 이후 고등학교 시절 지도자의 주선으로 후지쯔 나가노 공장 육상부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 후지쯔에서도 통상적인 근무와 잔업을 병행하며 경기 생활을 했다.[1] 이 기간 동안 세코 도시히코의 폼을 연구하며 세계적인 수준의 스피드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3]
1983년 다이에 육상부로 이적하며 기량이 만개했다.[4] 다이에 육상부 코치였던 사토 스스무의 엄격한 훈련을 소화하며 연습량을 늘렸다.[4]
2. 2. 전성기
1984년 후쿠오카 마라톤에서 2시간 10분 00초로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6] 1985년 1985 세계 마라톤컵 히로시마 대회에서 2시간 8분 15초로 당시 일본 최고 기록을 세우며 아메드 사라(지부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6]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2시간 8분 21초의 대회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기록은 30년 이상 지난 현재에도 아시안 게임 남자 마라톤 대회 기록으로 남아있다.
1987년 후쿠오카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18초로 우승하며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같은 해 7월 2일에는 월드 게임(헬싱키) 10000m에서 27분 35초 33으로 당시 일본 신기록을 세웠다.[6]
1988년 서울 올림픽 마라톤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35km 지점까지 선두 그룹에 있었으나, 마지막에 제린도 볼딘(이탈리아), 더글러스 와키우리(케냐), 사라에게 밀려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1990년 도쿄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초반부터 독주하여 베라인 덴시모(에티오피아), 존 트레이시(아일랜드) 등 경쟁자들을 따돌렸다.
1991년 벳푸 오이타 매일 마라톤에서는 모리시타 히로카즈와 접전 끝에 2시간 9분 12초로 2위를 기록했다. 39km 지점에서 모리시타에게 "일장기를 짊어진다면, 앞으로 나가라"라고 격려하기도 했다.[6]
1992년 도쿄 국제 마라톤에서 다시 모리시타 히로카즈에게 패하며 2위를 기록했지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슈테판 프라이강(독일)에게 마지막에 추월당하며 4위를 기록, 두 대회 연속 올림픽 입상을 달성했다.[7]
2. 3. 은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4위를 기록하며, 두 대회 연속 올림픽 입상을 달성했다.[7]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선수 생활에서 은퇴하였다.은퇴 후에는 오사카 산업 대학 육상부 감독 등을 거쳐, 2004년 4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아이치 제강 육상부 감독을 맡았다. 아이치 제강 퇴임 후에도 마라톤 해설자, 지도자 및 강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3. 주요 대회 성적
연도 | 대회명 | 개최지 | 순위 | 종목 | 기록 | 비고 |
---|---|---|---|---|---|---|
1983 | 후쿠오카 마라톤 | 福岡|후쿠오카일본어, 일본 | 14위 | 마라톤 | 2:14:15 | |
1984 | 후쿠오카 마라톤 | 福岡|후쿠오카일본어, 일본 | 1위 | 마라톤 | 2:10:00 | |
1985 | 1985 세계 마라톤컵 | 히로시마, 일본 | 2위 | 마라톤 | 2:08:15 | |
1986 | 도쿄 국제 마라톤 | 도쿄, 일본 | 4위 | 마라톤 | 2:08:43 | |
아시안 게임 | 서울, 대한민국 | 1위 | 마라톤 | 2:08:21 | ||
1987 | 도쿄 국제 마라톤 | 도쿄, 일본 | 2위 | 마라톤 | 2:10:33 | |
후쿠오카 마라톤 | 福岡|후쿠오카일본어, 일본 | 1위 | 마라톤 | 2:08:18 | ||
1988 | 올림픽 | 서울, 대한민국 | 4위 | 마라톤 | 2:11:05 | |
1990 | 도쿄 마라톤 | 도쿄, 일본 | 1위 | 마라톤 | 2:10:57 | |
1991 | 벳푸-오이타 마라톤 | 벳푸, 오이타, 일본 | 2위 | 마라톤 | 2:09:12 | |
세계 선수권 대회 | 도쿄, 일본 | — | 마라톤 | DNF | ||
1992 | 도쿄 국제 마라톤 | 도쿄, 일본 | 2위 | 마라톤 | 2:10:25 | |
올림픽 | 바르셀로나, 스페인 | 4위 | 마라톤 | 2:14:02 | ||
1994 | 파리 마라톤 | 파리, 프랑스 | 8위 | 마라톤 | 2:13:11 | |
후쿠오카 마라톤 | 福岡|후쿠오카일본어, 일본 | 17위 | 마라톤 | 2:15:23 |
연월 | 대회명 | 기록 | 순위 | 비고 |
---|---|---|---|---|
1983.12 |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 2:14:15 | 14위 | |
1984.09 | 서울 국제 마라톤 | 2:15:45 | 3위 | 오토바이의 선두 실수로 인해 거리 부족으로 기록은 비공인. |
1984.12 |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 2:10:00 | 우승 | 당시 일본 역대 5위 |
1985.04 | 월드컵 마라톤 히로시마 대회 | 2:08:15 | 2위 | 당시 일본 최고 기록, 당시 세계 역대 3위 |
1985.09 | 서울 국제 마라톤 | 2:10:09 | 우승 | |
1986.02 | 도쿄 국제 마라톤 | 2:08:43 | 4위 | |
1986.10 | 서울 아시안 게임 | 2:08:21 | 우승 | 대회 기록 |
1987.02 | 도쿄 국제 마라톤 | 2:10:33 | 2위 | |
1987.12 |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 2:08:18 | 우승 | 당시 대회 최고 타이 기록, 서울 올림픽 대표 선발전 |
1988.10 | 서울 올림픽 | 2:11:05 | 4위 | 올림픽 첫 입상 |
1989.04 | 보스턴 마라톤 | ----------- | (기권) | |
1990.02 | 도쿄 국제 마라톤 | 2:10:57 | 우승 | |
1991.02 | 벳푸 오이타 매일 마라톤 | 2:09:12 | 2위 | |
1991.09 | 도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 | (기권) | |
1992.02 | 도쿄 국제 마라톤 | 2:10:25 | 2위 |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선발전 |
1992.08 | 바르셀로나 올림픽 | 2:14:02 | 4위 | 올림픽 2회 연속 입상 |
4. 논란과 비판
나카야마 다케유키는 강한 개성으로 인해 지도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자신을 다이에이 육상부로 초청했던 사토 스스무와는 서울 올림픽 이후 결별했으며, 이론을 우선시하는 다카하시 스스무의 지도 방식에 따르지 않았다.[9]
그는 언론의 '올림픽 지상주의'적인 보도에 비판적이었다. 마라톤 자체의 가치를 고려할 때 올림픽 마라톤이 최고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각오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올림픽(마라톤)은 재미없다는 것이 솔직한 인상이었다"라고 언급했다.[9]
또한, 승부에 집착해야 하는 엘리트 선수와 달리 즐겁게 달리는 시민 러너들을 보면 화가 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포함해 4번 마라톤을 달렸으며, 황영조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로, 고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나카야마를 보고 마라톤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4. 1. 세코 도시히코와의 경쟁과 발언 논란
서울 올림픽 남자 마라톤 대표 선발 과정에서 세코 도시히코가 부상으로 불참하자, 나카야마 다케유키는 "나 같으면 기어서라도 나갈 텐데요"[11][12]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언론은 이 발언을 "세코, 기어서라도 나와라!"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보도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10]당시 서울 올림픽 남자 마라톤 선발전은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도쿄 국제 마라톤, 비와코 마이니치 마라톤으로 구성되었고, 올림픽 후보 선수와 강화 선수는 반드시 후쿠오카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사실상 "후쿠오카 단판 선발" 방식이었다. 그러나 세코가 부상으로 불참하게 되면서 일본 육상 경기 연맹은 세코에게 비와코 마이니치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된다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고, 세코는 비와코에서 평범한 기록으로 우승하여 서울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나카야마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세코에 대해 "존경하지 않으면 목표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며[9], 경쟁심에서 비롯된 발언이었음을 해명했다. 그는 세코를 "가공의 존재"라고 표현하며, 그에게서 마라톤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2010년 1월 26일, 도쿄 마라톤 관련 이벤트에서 세코와 함께 출연하여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나카야마는 세코가 "구름 위의 존재"였지만 승부는 다른 문제였다고 답했다.[13]
4. 2. 지도 방식 및 언론 보도에 대한 비판
그의 강한 개성 때문에 지도자와의 사이에서도 종종 갈등이 일어났다. 그를 다이에이 육상부에 초청한 사토 스스무와는 서울 올림픽 이후 결별했다. 일본 육상 연맹은 그 후임으로 다카하시 스스무를 임명했지만, 자신의 경험과 실전에 입각하는 나카야마는 이론 우선인 다카하시의 지도에는 따르지 않았다.언론의 "올림픽 지상주의"적인 보도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마라톤 자체가 가진 가치로 볼 때,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는 최고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근거이며, "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각오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올림픽(마라톤)은 재미없다는 것이 솔직한 인상이었다"라고 말했다.[9]
마라톤의 톱 선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 마라톤이며, 즐겁게 달리고 있는 시민 러너를 보면 화가 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포함해 4번 마라톤을 달렸으며,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는 고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나카야마를 보고 마라톤을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후에 벳푸 오이타 매일 마라톤 주최자의 초청으로 방일했을 때 나카야마를 소개받자 직립부동이 되었다고 한다.
5. 한국과의 인연
나카야마 다케유키는 한국 마라톤 선수 황영조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황영조는 고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나카야마의 경기를 보고 마라톤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9]
5. 1. 황영조 선수와의 관계
황영조는 고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나카야마의 경기를 보고 마라톤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으며, 이후 벳푸 오이타 매일 마라톤 주최 측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카야마를 만나고 감격하여 직립부동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9]6. 저서
挑戦 炎のランナー中山竹通の生き方走り方|ちょうせん ほのおのランナーなかやまたけゆきのいきかたはしりかた|도전 불꽃의 러너 나카야마 다케유키의 삶과 달리기 방식일본어 (이노우에 구니히코 공저), 자유국민사, 2000년 3월, ISBN 978-4426764029
참조
[1]
뉴스
Boston Marathon Awaits 'The Giraffe'
https://books.google[...]
2021-10-01
[2]
뉴스
Asian Games 2018: Bahrain complain after Hiroto Inoue wins marathon for Japan
https://indianexpres[...]
2021-10-01
[3]
뉴스
Nakayama wins Fukooka race
https://books.google[...]
2021-10-01
[4]
뉴스
Deek's Fukuoka record equalled
https://books.google[...]
2021-10-01
[5]
뉴스
Treacy can erase a bitter memory with Boston win
https://books.google[...]
2021-10-01
[6]
뉴스
불우 넘기 연속 4위 마라톤의 나카야마 다케유키 【우리 거리 올림피언 나가노현】
https://www.47news.j[...]
47NEWS
2022-10-08
[7]
문서
전후의 일본 남자 마라톤 대표에서는, 그 밖에 [[키미하라 겐지]](1968년 멕시코 올림픽 2위, 1972년 뮌헨 올림픽 5위)밖에 없다.
[8]
뉴스
나카야마 다케유키 씨, 왕년의 스트라이드 건재 사가 벚꽃 마라톤 2018
https://www.saga-s.c[...]
2022-10-08
[9]
간행물
일본의 마라톤은 왜 약해졌는가
宝島社
1999
[10]
뉴스
보았나 세코
[11]
서적
마라톤 러너
文藝春秋
2003
[12]
뉴스
"신 효고인-빛나는" 제3부 장거리 왕국 (3) 일장기를 가슴에 "반골심이야말로 세계로 가는 티켓"
http://www.kobe-np.c[...]
2009-06-21
[13]
뉴스
인연 라이벌 세코 & 나카야마가 "화해"의 악수
http://www.sponichi.[...]
201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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