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룡군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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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룡군절도사는 당나라 시기 유주(幽州) 지역을 관할하던 절도사(節度使)로, 713년 유주 절도사로 시작하여 범양 절도사로 개칭되기도 했다.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이후 노룡군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졌으며, 이회선, 주희채, 유씨 일족, 장씨 일족 등 여러 인물들이 절도사 자리를 거쳐갔다. 당나라 멸망 이후에는 이모순, 이극거, 이전충, 유인공 등이 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유수광의 연(燕)이 이존욱에게 정복되면서 노룡군절도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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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룡군절도사 | |
|---|---|
| 개요 | |
| 존속 기간 | 755년 - 907년 |
| 별칭 | 노룡번진(盧龍藩鎭) |
| 위치 | 유주(幽州) |
| 지배 가문 | 이씨(李氏) 유씨(劉氏) |
| 역대 절도사 | |
| 초대 절도사 | 안록산 |
| 마지막 절도사 | 유인공 |
| 역사 | |
| 배경 | 안사의 난 발발과 그 여파 |
| 성립 | 755년, 안록산이 범양절도사로서 반란을 일으킨 후 |
| 주요 사건 | 회흘과의 협력 주자 토벌전 참여 이재의의 배반 유총경의 자립 유인공의 할거 |
| 멸망 | 907년, 유인공이 자립을 선언하며 사실상 해체 |
| 군사 | |
| 주요 군사 거점 | 계주(薊州), 탄주(檀州), 순주(順州), 탁주(涿州) |
| 주요 방어 대상 | 북방 유목민족 (특히 거란) |
| 사회 및 문화 | |
| 문화적 특징 | 한족 문화와 유목민 문화의 혼합 불교의 융성 |
| 경제적 특징 | 농업과 유목업의 병행 대운하를 통한 물자 수송 |
2. 역사
盧龍軍節度使중국어는 당나라 시기 오늘날의 베이징, 톈진 및 허베이성 북부, 랴오닝성 남서부 지역을 통치하던 군사·행정 조직이다.
당 현종은 713년 수나라의 탁군을 기반으로 거란과 해족에 대한 완충 지대로 유주 절도사를 설치했고, 742년에 범양 절도사로 명칭을 변경했다.
안사의 난 당시 안록산과 사사명은 범양, 하동, 평로 지역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켜 756년 대연을 건국했다.[1] 763년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가 사망하면서 대연은 멸망했다.[1]
안사의 난 이후 군관구는 유주 절도사로 개명되었으나, 노룡군과의 연관성 때문에 노룡 절도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763년 이회선은 사사명의 머리를 당나라에 바치고 항복했고, 당 조정은 이회선을 유주-노룡의 절도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768년 이회선은 부하들에게 암살되었고, 이후 노룡 절도사는 주씨 일가, 유씨 일가 등의 지배를 거쳐 오대 십국 시대 초기까지 존속했다.
2. 1. 유주와 범양
당 현종은 713년에 수나라의 탁군을 기반으로 거란과 해족에 대한 완충 지대로 유주 절도사를 설치했다.742년에 절도사의 명칭은 범양 절도사로 변경되었다.
2. 2. 안록산과 사사명
안록산과 사사명은 범양, 하동, 평로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난을 일으켰고, 756년에는 대연을 건국했다.[1]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가 연나라 황제를 칭하다가 763년에 죽으면서 대연은 멸망했다.[1]2. 3. 노룡 절도사
안사의 난 이후 군관구는 유주 절도사로 개명되었으나, 노룡군의 명성과 그 지역과의 연관성 때문에 노룡 절도사로 알려지게 되었다.763년 이회선은 시사명의 머리를 당나라에 바치고 항복했다. 하북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당 조정은 연나라의 옛 동맹들을 회유하기로 결정하고, 이회선을 반자율적 권한을 가진 유주-노룡의 절도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회선은 768년 그의 부하 주희채, 주사, 주도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주희채는 지휘권을 넘겨받아 이회선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이보진이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굳혔다. 당 조정은 왕진을 유주의 절도사로 임명하여 그곳으로 보냈으나, 희채는 그에게 존경을 표하면서도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이 쥐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왕진은 며칠 후 떠났고, 당은 768년 희채를 절도사로 인정했다. 주희채는 사치스럽고 오만하며 병사들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 772년 그의 비서 이회원이 그를 살해했고, 주사가 희채의 뒤를 이었다.[1][2][3]
774년 주사는 당나라에 복종했고, 그의 형제 주도는 유주의 절도사 대행으로 남았다. 782년 주도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기왕이라고 칭했고, 그 결과 주사는 직위에서 물러났다. 주사 또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785년에 모두 진압되었다.
2. 4. 유팽, 유기, 유종
875년, 공수는 위구르족 장교이자 아부시 씨족 출신인 이모순에게 패배하여 절도사 직위를 빼앗겼다. 이모순은 1년 후 은퇴했고, 그의 아들 이극거가 뒤를 이었다. 878년, 이극거는 대동에서 이극용의 반란에 대항하여 당나라를 돕기 위해 소환되었다. 이극거는 이극용을 두 번 격파하고 타타르 부족으로 도망가게 했다. 이극용은 882년에 대동으로 돌아와 이극거를 격파했지만, 정종당에게 격퇴당했다. 885년, 이극거는 이극용을 공격했지만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이극거의 부하인 이전충이 그가 돌아오자 이극거를 공격했다. 이극거는 자결했다.[10]이전충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이광위가 다음 해에 뒤를 이었다. 이광위는 893년에 그의 형제 이광주에게 전복되었다. 이극용은 894년에 유주를 공격했고, 이광주는 이창(오늘날의 창저우)으로 도망가야 했다. 이창의 지사인 노연위가 이광주를 죽였다. 노룡은 유인공에게 주어졌다. 유인공은 907년 그의 아들 유수광에게 전복될 때까지 통치했다. 유수광의 단명한 연은 913년에 이존욱에 의해 정복되었다.
3. 관련 항목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web.archive.[...]
[2]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web.archive.[...]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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