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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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1267/1268년부터 1296년 사망할 때까지 이피로스를 통치한 지배자였다. 그는 미하일 2세의 아들이자 니케아 제국, 동로마 제국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통치를 이어나갔다. 그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나폴리의 카를로 2세 등과 동맹을 맺으며, 1296년 사망 당시까지 이피로스의 독립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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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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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니케포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 |
원래 이름 | Νικηφόρος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
출생 | 1240년경 |
사망 | 1297년 |
칭호 | 에피로스 전제공 |
재위 기간 | 1266/68년–1296/98년 |
이전 통치자 |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 |
다음 통치자 | 토마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 |
배우자 | 마리아 라스카리스 바타차이나 안나 칸타쿠제네 |
자녀 | 마리아 타마르 미하일 토마스 |
가문 | 콤니노스 두카스 왕조 |
아버지 | 미하일 2세 |
어머니 | 테오도라 페트랄리페나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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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1240년경 이피로스 데스포티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와 테오도라 페트랄리페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니키포로스는 니케아 제국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데스포테스 칭호를 받았으나, 첫 아내는 일찍 사망했다. 이후 아버지 미하일 2세를 도와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 맞서 싸웠으며, 펠라고니아 전투(1259년) 등에서 활동했으나 패배 후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1264년 미하일 8세와 강화 조약을 맺고 그의 조카인 안나 칸타쿠제네와 재혼하였다.
1267/8년(또는 127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페이로스의 통치자가 되었으나, 이복 형제인 요안니스 1세 두카스가 테살리아에서 독립하면서 에페이로스는 분열되어 세력이 약화되었다. 니키포로스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점차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향력 아래 놓이며 실질적인 독자성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에페이로스는 서방의 앙주 가문과 동방의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펼쳐야 했다. 초기에는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와 대립하다가도 세력 확장에 맞서 1276년 동맹을 맺고 부트린토 등 일부 영토를 차지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군주인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으면서도, 동로마 제국 내 미하일 8세의 교회 통합 정책에 반대하는 정교회 세력을 보호하는 모순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1279년에는 카를로 1세의 봉신임을 인정했으나, 시칠리아 만종 사건(1282년)으로 카를로 1세의 세력이 약화되자 동로마 제국에 알바니아 지역 영토를 상실했다.
1282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가 동로마 황제가 되어 정교회를 복원하자, 니키포로스는 아내 안나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내 안나는 점차 동로마 궁정의 이익을 대변하며 니키포로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로 인해 테살리아의 통치자와 갈등을 빚었다. 안나는 딸 타마르를 동로마 공동 황제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아들 토마스가 1290년 동로마로부터 데스포테스 칭호를 받는 데 그쳤다.
에페이로스 내부의 반동로마 귀족들의 압력으로 1291년에는 다시 나폴리의 카를로 2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이는 동로마의 침공을 불렀으나 케팔로니아와 아카이아 등 서방 세력의 도움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이후 나폴리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딸 마리아를 케팔로니아 후계자와, 다른 딸 타마르를 카를로 2세의 아들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혼인시켰다. 특히 타마르와의 혼인은 에페이로스 계승권을 부여하고 정교회 신앙 유지를 약속받는 조건이었으며, 지참금으로 해안 요새들이 필리포에게 넘어갔다. 이는 다시 지역 영주들과의 갈등을 유발했으나 1296년 평화가 회복되었다.
니키포로스 1세는 이 평화 협정 직후인 1296년 9월에서 1298년 7월 사이에 사망하였다.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1296년 또는 1290년 설도 있다.) 그의 사후, 미망인 안나 칸타쿠제네가 섭정을 맡아 미성년 아들 토마스 1세의 계승을 보장했다.
2. 1. 초기 생애와 니케아 제국과의 관계
1240년경 태어난 니키포로스는 이피로스 데스포티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와 테오도라 페트랄리페나의 장남이었다. 1249년경 페가이에서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의 손녀이자 테오도르 2세 라스카리스의 딸인 마리아와 약혼하였다. 이때 요안니스 3세로부터 데스포테스 칭호를 받았다. 결혼식은 1256년 10월 테살로니카에서 열렸으나, 마리아는 1258년에 사망하였다.이후 니키포로스는 아버지 미하일 2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벌인 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펠라고니아 전투(1259년)에서 퇴각하였다. 니케아 군대가 에페이로스 대부분을 점령하자, 니키포로스는 이탈리아반도로 건너가 매형인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왕에게 군사 지원을 받았다. 이 지원군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에페이로스 탈환을 도왔으나, 1264년에 다시 패배하였다. 결국 미하일 8세와 강화 조약을 맺었고, 조약의 일환으로 미하일 8세의 조카인 안나 칸타쿠제네와 결혼하였다.
2. 2. 펠라고니아 전투와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
니키포로스는 아버지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 맞서 벌인 투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웠으나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니케아 제국 군대가 에피로스 대부분을 점령하자, 니키포로스는 이탈리아반도로 건너가 매형인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왕에게 지원군을 받았다. 이 지원군을 바탕으로 니키포로스는 아버지가 에피로스를 다시 정복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1264년에 또다시 패배하였고, 결국 미하일 8세와 강화 조약을 맺고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평화 협정의 일환으로 니키포로스는 미하일 8세의 조카인 안나 칸타쿠제네와 결혼하였다.2. 3. 에페이로스 통치와 앙주 가문과의 관계
1267/8년 (혹은 1271년) 아버지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사망하자 니키포로스 1세는 에페이로스의 통치자 자리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이복 형제인 요안니스 1세 두카스는 이에 불만을 품고 테살리아에서 독립하여 에페이로스 공국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약화되었다. 니키포로스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에 맞서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동로마 제국에 대한 종속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고 실질적인 독자성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쳤다.니키포로스는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샤를 1세)와의 문제에 직면했다.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를 제거하고 1272년에 두러스(디라키움)를 점령했다. 1274년, 동로마 제국이 카를로 1세에 대한 보복 작전을 펼치면서 니키포로스의 이익을 침해하자, 그는 카를로 1세와 협상을 시작하여 1276년에 동맹을 맺었다. 앙주 가문의 카를로 1세, 니키포로스, 그리고 그의 이복 형제인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1세 두카스 연합군은 1278년에 부트린토(부르토)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군주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는 동로마 제국 내 동서 교회 분리주의 세력의 지지자처럼 행동하며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박해를 받던 반(反)통일주의자들에게 보호를 제공했다. 1279년, 니키포로스는 자신을 카를로 1세의 봉신으로 인정하고 부트린토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연합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부분적으로 미하일 8세의 외교적 노력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카를로 1세는 서방 문제에 발목이 잡혀 시칠리아를 잃고 나폴리 왕국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여파로 니키포로스는 알바니아의 영지들을 동로마 제국에 빼앗겼다.
1282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 치하에서 정교회가 복원되자, 니키포로스는 아내 안나 칸타쿠제네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갱신했다. 안나는 조약 체결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직접 가기도 했다. 점차 니키포로스는 동로마 황실의 이익을 대변하는 아내 안나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284년, 부부는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1세 두카스의 아들 미하일을 혼인 동맹을 맺는다는 명분으로 에페이로스로 유인하여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 사건은 니키포로스와 그의 이복 형제 요안니스 1세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요안니스 1세는 1285년에 보복으로 아르타 주변 지역을 파괴했다. 안나는 딸 타마르를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와 혼인시켜 에페이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합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1290년, 니키포로스의 어린 아들 토마스는 동로마 황제로부터 데스포테스 칭호를 받았다.
동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귀족들은 1291년 니키포로스에게 나폴리의 카를로 2세(샤를 2세)와 협상하도록 설득했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유발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와의 동맹이 확고해졌으며, 카를로 2세의 봉신인 케팔로니아 백작 리카르도 오르시니와 아카이아 대공 플로랑 등의 개입으로 동로마의 진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니키포로스는 딸 마리아를 케팔로니아 후계자와 결혼시키고, 다른 딸 타마르를 카를로 2세의 아들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결혼시켰다. 타마르에게는 오빠 토마스를 대신하여 에페이로스를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졌으며, 카를로 2세는 그녀가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결혼은 1294년에 이루어졌고, 타마르의 지참금으로 여러 해안 요새가 필리포에게 넘어갔다. 필리포는 동시에 그리스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와 주장을 이어받았다.
현지 그리스 지주들과 새로운 앙주 가문 영주 사이의 긴장은 불가피했으며, 이는 니키포로스의 친척인 테살리아 통치자(당시 요안니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또는 요안니스 2세 두카스였을 것으로 추정됨)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필리포에게 넘어간 요새 문제에 개입하여 일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요새는 결국 앙주 가문에 의해 회복되었고 1296년에 평화가 찾아왔다. 니키포로스 1세는 평화 협정 직후인 1296년 9월에서 1298년 7월 사이에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 안나는 미성년자인 아들 토마스의 계승을 확보했다.
2. 4.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회복과 갈등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아버지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와 함께 니케아 제국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니케아군이 에페이로스 대부분을 점령하자, 니키포로스는 이탈리아반도로 건너가 매형인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왕에게 지원군을 받았다. 이 지원군으로 아버지의 에페이로스 재정복을 도왔으나, 1264년에 다시 패배하여 결국 미하일 8세와 강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의 일환으로 니키포로스는 미하일 8세의 조카인 안나 칸타쿠제네와 결혼하였다.1267/8년 아버지를 이어 에페이로스의 통치자가 된 니키포로스 1세는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카를로 1세는 만프레디를 몰아내고 1272년 디라키움을 점령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274년, 동로마 제국이 카를로 1세에 대한 보복 작전을 펼치면서 니키포로스의 이익을 침해하자, 그는 카를로 1세와 협상을 시작하여 1276년 동맹을 맺었다. 니키포로스와 그의 이복 형제인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1세 두카스, 그리고 카를로 1세의 연합군은 1278년 부트린토 등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군주인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1세는 동로마 제국 내에서 미하일 8세의 교회 통합 정책에 반대하는 정교회 세력의 지지자 역할을 하며 그들을 보호해주기도 했다. 1279년 니키포로스는 카를로 1세의 봉신임을 인정하고 부트린토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카를로 1세가 시칠리아 만종 사건(1282년)으로 세력이 약화되자, 니키포로스는 알바니아 지역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빼앗겼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부분적으로 미하일 8세의 외교적 노력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1282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가 동로마 황제로 즉위하여 정교회 신앙을 복원하자, 니키포로스는 아내 안나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 관계를 갱신했다. 안나는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조약을 체결하는 등 동로마 황실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니키포로스는 점차 아내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284년, 니키포로스와 안나는 테살리아의 통치자 요안니스 1세 두카스의 아들 미하일을 결혼 동맹을 미끼로 에페이로스로 유인하여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 사건으로 니키포로스는 이복 형제 요안니스 1세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요안니스 1세는 1285년 보복으로 아르타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안나는 자신의 딸 타마르를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와 결혼시켜 에페이로스와 동로마 제국 황실을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다만 1290년 니키포로스의 어린 아들 토마스는 동로마 황제로부터 데스포테스 칭호를 받았다.
에페이로스 내의 반동로마 귀족들은 1291년 니키포로스를 설득하여 나폴리의 카를로 2세와 다시 협상을 시작하게 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유발했지만, 동시에 나폴리와의 동맹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를로 2세의 봉신인 케팔로니아 백작 리카르도 오르시니와 에노의 플로랑의 개입으로 동로마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니키포로스는 딸 마리아를 케팔로니아 백작의 후계자와 결혼시키고, 다른 딸 타마르를 카를로 2세의 아들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결혼시켰다. 타마르에게는 아들 토마스를 대신하여 에페이로스를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졌으며, 카를로 2세는 타마르가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다. 1294년 결혼이 이루어졌고, 타마르의 지참금으로 여러 해안 요새가 필리포 1세에게 넘어갔다. 필리포 1세는 동시에 아버지 카를로 2세로부터 그리스 지역에 대한 권리를 넘겨받았다.
이러한 영토 이전은 지역 그리스 영주들과 새로운 앙주 가문 군주 사이의 긴장을 유발했고, 테살리아의 통치자(니키포로스의 조카)가 개입하여 필리포 1세에게 넘어간 요새 일부를 점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요새는 다시 앙주 가문에 회복되었고 1296년 평화가 찾아왔다. 니키포로스는 이 평화 협정 직후인 1296년 9월에서 1298년 7월 사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아내 안나가 섭정을 맡아 미성년 아들 토마스의 계승을 확보했다.
2. 5. 나폴리 왕국과의 협상과 사망
1267/8년 아버지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를 계승한 니키포로스 1세는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와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를 제거하고 1272년에 디라키움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274년, 동로마 제국이 카를로 1세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벌이면서 니키포로스의 이해관계를 침해하자, 그는 카를로 1세와 협상을 시작하여 1276년에 동맹을 맺었다. 니키포로스는 카를로 1세, 그리고 이복 형제인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1세 두카스와 연합하여 1278년에 부트린토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군주인 카를로 1세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1세는 동로마 제국 내에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교회 통합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의 지지자 역할을 하며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1279년, 니키포로스는 카를로 1세의 봉신임을 인정하고 부트린토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생하면서 카를로 1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니키포로스는 이 기회를 틈탄 동로마 제국에게 알바니아 지역 영토를 빼앗겼다. 이 사건은 부분적으로 미하일 8세의 외교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를 잃고 나폴리 왕국만을 유지하게 되었다.1282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가 동로마 황제로 즉위하고 정교회가 복원되자, 니키포로스는 아내 안나 칸타쿠제네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갱신했다. 안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직접 가서 조약을 체결하는 등 동로마 황실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니키포로스는 점차 아내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284년, 니키포로스와 안나는 테살리아의 통치자 요안니스 1세 두카스의 아들 미하일을 결혼 동맹을 미끼로 에페이로스로 유인하여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 사건은 이복 형제인 요안니스 1세와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그는 1285년 보복으로 아르타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안나는 딸 타마르를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와 결혼시켜 에페이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실을 통합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했지만,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1290년, 니키포로스의 어린 아들 토마스는 동로마 황제로부터 데스포테스 칭호를 받았다.
에페이로스 내의 반(反)동로마 성향 귀족들은 1291년 니키포로스에게 나폴리의 카를로 2세와 협상을 시작하도록 설득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유발했지만, 결과적으로 나폴리와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를로 2세의 봉신인 케팔로니아 백작 리카르도 오르시니와 아카이아 대공 플로랑의 군사적 개입은 동로마 군대의 진격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니키포로스는 이 시기에 딸 마리아를 케팔로니아 백작의 후계자와 결혼시키고, 다른 딸 타마르를 카를로 2세의 아들인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결혼시켰다. 타마르에게는 아들 토마스를 대신하여 에페이로스를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졌으며, 카를로 2세는 타마르가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결혼식은 1294년에 열렸으며, 타마르의 지참금으로 여러 해안 요새가 필리포에게 양도되었다. 필리포는 이 결혼을 통해 그리스 지역에 대한 아버지 카를로 2세의 권리와 주장도 함께 넘겨받았다.
그러나 지역 그리스 지주들과 새로운 앙주 영주 사이의 긴장은 불가피했다. 이 틈을 타 니키포로스의 조카이자 테살리아의 통치자가 개입하여 필리포에게 넘어간 요새 대부분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이 요새들 대부분은 다시 앙주 가문에 의해 회복되었고, 1296년에 평화가 찾아왔다.
니키포로스 1세는 이 평화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296년 9월에서 1298년 7월 사이에 사망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1296년 또는 1290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사후, 미망인 안나 칸타쿠제네가 섭정이 되어 아직 어렸던 아들 토마스 1세의 계승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3. 가족
니키포로스 1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의 딸인 마리아(Μαρίαel)이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 마리아를 두었다.
- 마리아(Μαρίαel): 1294년 케팔로니아 백작 조반니 1세 오르시니(재위 1304년–1317년)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니콜라 오르시니와 조반니 2세 오르시니는 후에 에페이로스의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두 번째 부인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조카인 안나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제네(Άννα Παλαιολογίνα Καντακουζηνήel)이다. 그녀는 미카일 8세의 누이인 에이레네 팔레올로기나의 딸이었다. 안나와의 사이에서는 세 자녀를 두었다.
- 타마르(Θάμαρel): 나폴리의 왕 카를로 2세의 아들인 타란토 공작 필리포 1세 디 타란토와 결혼했다.
- 미하일: 1279년부터 1281년까지 아카이아 공국의 글라렌차에서 인질로 지냈다. 아버지 니키포로스 1세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토마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페이로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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