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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로스 전제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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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피로스 전제공국은 1205년 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가 건국한 이피로스 지역의 국가이다. '전제공' 칭호는 처음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가 니케아 제국으로부터 받은 후 사용되었다. 14세기부터 "이피로스 전제공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독립) 이피로스 국가"로 대체되기도 한다. 이 국가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비잔틴 제국에서 분리되어 건국되었으며,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 시기에는 테살로니키를 점령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이후 니케아 제국과의 경쟁,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거치며 세력이 약화되었고, 1318년 콤네노스-두카스 가문의 통치가 끝나고 오르시니 가문, 네마니치 가문 등을 거쳐 1479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며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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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로스 전제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른 표기이피로스 전제공국
영어 이름Despotate of Epirus
1205–1230년의 에피로스
1205–1230년의 에피로스
역사
존속 기간1205년 – 1337년
1356년 – 1479년
건국1205년
멸망1479년
이전 국가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
테살로니카 제국
아르타 전제공국
계승 국가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오스만 제국
주요 사건비잔티움 제국에 의한 정복 (1337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에 의한 재건 (1356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정복 (1479년)
정치
정치 체제전제군주제
수도아르타 (1205–1337/40, 1430–49)
이오아니나 (1356–1430)
앙겔로카스트론 (1449–60)
보니차 (1460–1479)
통치자 칭호데스포테스
주요 지도자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 (1205–1214)
레오나르도 3세 토코 (1448–1479)
문장 및 국기
토코 가문의 문장
문장
카를로 1세 토코의 문장
카를로 1세 토코의 문장
오르시니 가문의 문장
오르시니 가문의 문장
인구 및 언어
공용어그리스어
종교그리스 정교회
기타
통화데니에
현재 국가알바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북마케도니아

2. 명칭

전통적인 역사학이나 현대 역사학에서 이피로스 국가는 보통 "이피로스 전제공국"으로 불리며, 통치자들은 처음부터 "전제공"(Despot) 칭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정확하지 않다.

우선, "전제공" 칭호는 모든 이피로스 통치자가 사용한 것은 아니다. 국가를 세운 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는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14세기 서유럽 문헌에서 사실과 다르게 "이피로스 전제공"으로 불렸을 뿐이다. 그의 뒤를 이은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 역시 전제공 칭호를 쓰지 않았고, 오히려 1225년경 테살로니카에서 스스로 황제(''바실레우스'')를 칭했다. 이피로스 통치자 중 처음으로 전제공 칭호를 받은 인물은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이다. 그는 1230년대에 삼촌인 테살로니카의 마누일로부터 이 칭호를 받았고, 나중에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복종의 표시로 다시 받았다. 초기 역사가들은 미하일 1세가 라틴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폐위된 황제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에게서 1206/7년경 또는 1210년경에 "전제공"으로 임명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미하일 2세 이후의 통치자들을 "이피로스 ''의'' 전제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기술적으로는 부정확하다. '전제공' 칭호는 특정 영토의 지배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세습되는 칭호도 아니었다. 이는 비잔틴 궁정 계층에서 황제가 자신의 가까운 친척, 주로 아들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지위였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반자치적인 분봉령을 통치하도록 파견된 왕자들에게 자주 주어졌으며, 이러한 관행이 정례화되면서 나중에 이 영토와 연관되게 되었다. 이피로스 외에 모레아 전제공국이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전제공국"이라는 영토적 용어 자체(그리스어 δεσποτᾶτον|데스포타톤grc)는 14세기부터 이피로스에 대해 동시대 자료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모레아 연대기'',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의 역사, 성 니폰의 성인전, 또는 ''토코 연대기''에서 전제공국의 주민들은 ''Despotatoi''로 불린다. 따라서 "이피로스 전제공국"이라는 용어는 더 최근의 역사학에서 "(독립) 이피로스 국가"로 대체되기도 한다.

이피로스 영토 자체에는 공식적인 명칭이 없었다. 특히 서유럽의 동시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비잔틴 제국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인 ''로마니아''(Ῥωμανία|로마니아el, 로마인의 땅)를 이피로스를 특별히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이는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그의 아들 아풀리아의 필리포, 니콜라스 오르시니, 그리고 나중에 카를로 1세 토코가 주장한 ''Despotus Romanie''라는 라틴어 칭호에서 볼 수 있다. 비잔틴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달마티아, 마케도니아시칠리아를 지칭하거나 심지어 제국의 유럽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인 ''디시스''(Δύσις|디시스grc), 즉 "서방"도 13세기부터 이피로스를 동쪽의 라이벌인 니케아 제국과 나란히 놓을 때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니케아 제국은 ''아나톨레''(Ἀνατολή|아나톨레grc), 즉 "동방"이라고 불렸다. 또한 "헬레네스"라는 용어는 전제공국의 13세기 궁정에서 이전의 "로마인" 대신에 그 인구를 묘사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2]

3. 역사

1230년부터 1251년까지의 에피루스 전제공국


1252년부터 1315년까지의 에피루스 전제공국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의 패배는 에피루스 전제공국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 이후 '테살로니키 제국'으로 불리던 에피루스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니케아 제국이 발칸 반도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의 후계자들은 니케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으며, 에피루스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는 니케아 제국에 맞서 라틴 제국 계열 국가들과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니케아 군대에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에피루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키자, 에피루스는 다시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미하일 2세와 그의 아들 니케포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는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의 앙주 가문의 샤를 등 여러 세력 사이에서 복잡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을 지키려 애썼다.

1315년부터 1358년까지의 에피루스 전제공국


1318년, 전제공 토마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가 그의 조카인 이탈리아계 귀족 니콜라스 오르시니에게 암살당하면서 콤네노스-두카스 왕조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이후 에피루스는 오르시니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계속되는 내부 분쟁으로 인해 국력은 더욱 쇠퇴하였다. 이 시기 에피루스는 잠시 비잔티움 제국에 병합되기도 했으며, 1348년에는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에게 정복당하는 등 외세의 침입에 시달렸다.

파레고레티사 교회, 13세기 니케포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의 통치 기간에 지어진 전제공국의 수도 아르타의 새로운 대성당


스테판 두샨 사후, 그의 이복동생 시메온 우로쉬가 에피루스와 테살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그는 에피루스를 여러 세르비아 및 알바니아인 귀족들에게 분할하여 통치하게 함으로써 지역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14세기 말, 케팔로니아 백국을 다스리던 토코 가문이 에피루스 지역을 점차 통합해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피루스는 점증하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1430년 이오아니나 함락을 시작으로, 1449년 아르타, 1460년 앙겔로카스트론이 차례로 정복되었고, 1479년 보니차가 함락되면서 에피루스 전제공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3. 1. 건국 (1204년 ~ 1215년)

이피로스 전제공국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의 사촌인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에 의해 1205년경 건국되었다.[1] [2] 미하일 1세는 부계로는 앙겔로스 왕조에 속했으나, 모계를 통해 두카스 가문 및 콤니노스 왕조와 연결되어 콤니노스 두카스라는 성을 사용했다.[2]

처음에 미하일은 몽페라토의 보니파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올리브 나무 숲 전투에서 모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프랑크족에게 빼앗긴 후 이피로스로 이동했다.[1] 그는 옛 니코폴리스 지역의 비잔티움 총독임을 자처하며 보니파스에게 등을 돌리고 아르타를 수도로 삼아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1] [2] 이피로스는 곧 콘스탄티노폴리스, 테살리아,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지에서 온 비잔티움 제국 피난민들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으며, 미하일은 라틴 제국의 침략이라는 '홍수'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노아와 같은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1]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10세 카마테로스는 미하일을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고 니케아 제국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를 지지했다.[1] 이에 미하일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권위를 인정하고 일시적으로 동방 정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외교적 선택을 했다.[1]

라틴 제국의 황제 플랑드르의 앙리는 미하일에게 복종을 요구했고, 미하일은 1209년 자신의 딸을 앙리의 동생 유스타스에게 시집보내며 형식적으로 이에 응했다.[1] 그러나 미하일은 이피로스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믿고 이 동맹을 오래 유지하지 않았다.[1] 1210년, 미하일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몽페라토의 보니파스가 세운 테살로니카 왕국을 공격했다.[1] [2] 이로 인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파문당하기도 했다.[1] 같은 해 말, 앙리는 다시 한번 미하일에게 형식적인 동맹 관계를 강요했다.[1]

미하일은 이후 라리사, 디라키움(현재의 두러스)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라틴 세력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주력했으며, 코린토스 만의 항구들도 장악했다.[1] 1214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코르푸 섬을 빼앗았다.[1] 그러나 같은 해 말, 미하일 1세는 암살당했고, 그의 이복동생인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뒤를 이었다.[1] [2]

3. 2. 니케아 제국과의 경쟁과 불가리아와의 전쟁 (1215년 ~ 1230년)

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가 1215년 사망한 후, 그의 동생 테오도로스가 권력을 계승했다. 테오도로스는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 라틴 제국의 황제 피에르 드 쿠르트네알바니아 산악 지대에서 생포하는 등 초기부터 활발한 군사 활동을 통해 이피로스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1224년, 테오도로스는 십자군이 세운 테살로니키 왕국을 정복하고 테살로니키에 입성했다. 그는 이곳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동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웠다. 이로써 이피로스는 동쪽의 니케아 제국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목표로 경쟁하는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이 시기 테오도로스가 지배한 영역은 때때로 '테살로니키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추진하던 테오도로스는 1230년, 배후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리아 제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이피로스 군대는 불가리아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테오도로스 자신마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클로코트니차 전투의 패배는 이피로스 전제공국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테오도로스의 야심 찬 확장은 좌절되었고,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며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반면, 경쟁 관계에 있던 니케아 제국은 이피로스의 약화를 기회 삼아 발칸 반도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경쟁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테오도로스의 아들 요하네스는 1242년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의 황제 요하네스 3세로부터 전제공(데스포테스) 칭호를 수여받음으로써 니케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265년동로마 제국 계승 국가들의 세력 분포. 이피로스(서쪽), 니케아(동쪽), 불가리아(북쪽) 등이 경쟁했다.

3. 3. 니케아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종주권 (1230년 ~ 1318년)

1224년 테살로니키 왕국을 정복하고 황제를 칭했던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230년 불가리아 제국을 침공했으나,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참패하여 불가리아군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패배는 에피루스 세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테살로니키 제국'으로 불리던 짧은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에피루스는 급격히 쇠퇴하며 분열되기 시작했다.

클로코트니차 전투 이후, 발칸 반도의 주도권은 니케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니케아 제국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발칸 반도로 영토를 확장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결국 테오도로스의 아들 요아네스는 1242년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 황제 요하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로부터 전제공(데스포테스) 칭호를 받으며 니케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259년, 에피루스는 아카이아 공국, 시칠리아 왕국라틴 제국 계열의 십자군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니케아 제국에 대항했으나,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다시 한번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 전투의 패배는 에피루스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반대로 니케아 제국의 압도적인 우위를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1261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에피루스는 1264년 다시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이후 테살리아 지역이 분리되고 본토 에피루스와 항쟁을 거듭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테살리아는 13세기 말 독립적인 지위를 포기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형식적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1318년, 에피루스 전제공 토마스는 그의 조카이자 케팔로니아 백작이었던 니콜라스 오르시니에게 암살당했다. 니콜라스는 토마스의 미망인이자 비잔티움 황제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의 딸이었던 안나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여 에피루스의 지배권을 차지했다. 이 사건으로 에피루스를 통치하던 안겔루스 가문의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고, 이탈리아계 오르시니 가문이 에피루스의 새로운 통치 가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3. 4. 쇠퇴와 멸망 (1318년 ~ 1479년)

1318년, 전제공 토마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가 그의 조카이자 케팔로니아 백작이었던 니콜라스 오르시니(이탈리아계)에게 암살당하면서, 콤네노스-두카스 왕조의 에피루스 통치는 막을 내렸다. 같은 해, 테살리아의 군주 요한네스 2세 두카스도 사망하면서 테살리아는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에피루스는 올시니 가문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며, 니콜라스 오르시니, 요한 2세 오르시니, 니케포로스 2세까지 3대에 걸쳐 통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 계속된 내분으로 국력은 점차 쇠퇴하였고, 1340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의해 병합되어 에피루스 전제공국은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마지막 통치자였던 니케포로스 2세는 동로마 궁정으로 보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피루스와 테살리아 지역은 스테판 두샨 치하의 세르비아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355년 스테판 두샨이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에서 돌아온 니케포로스 2세는 두샨의 이복동생인 시메온 우로쉬와 에피루스 및 테살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니케포로스 2세가 승리하여 에피루스 전제공국을 잠시 재건했으나, 1359년 에피루스 남부에서 세력을 키우던 알바니아인들을 토벌하려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결국 시메온 우로쉬가 에피루스와 테살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시메온은 스스로 황제를 칭했지만, 직접 통치하는 대신 테살리아의 트리칼라에 머물렀다. 그는 에피루스를 남북으로 나누어, 북부의 이오아니나는 사위인 토마스 프렐류보비치에게 맡기고, 남부의 아르타와 앙겔로카스트론 지역은 두 명의 알바니아인 부족장에게 분할하여 통치하게 했으며, 이들에게 각각 전제공 칭호를 부여했다.

이러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에 의한 분할 통치는 내부적인 갈등과 항쟁으로 이어져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에피루스는 올시니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으며 케팔로니아 백작령을 계승한 토코 가문에 의해 다시 통합되었다. 토코 가문의 통치는 1449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에피루스가 정복될 때까지 이어졌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1479년까지 레오나르도 3세 토코가 통치자로 남아있었으나, 실질적인 영토는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4. 역대 군주

이피로스 전제공국의 역대 군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 통치 가문과 시기에 따라 변화했으며, 동로마 제국이나 세르비아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군주재위 기간비고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1204년 ~ 1215년
테오도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1215년 ~ 1230년테살로니키 황제 (1224년 ~ 1230년)
마누엘 콤네노스 두카스1230년 ~ 1237년테살로니키 지배
요하네스 콤네노스 두카스1237년 ~ 1244년테살로니키 지배, 1242년 니케아 제국으로부터 전제공 칭호 받음
데메트리오스 안겔로스 두카스1244년 ~ 1246년테살로니키 지배
미하일 2세 안겔로스 콤네노스1230년 ~ 1271년에피루스 지배
니케포로스 1세1271년 ~ 1296년
토마스1296년 ~ 1318년니콜라 오르시니에게 암살됨
니콜라 오르시니1318년 ~ 1323년
조반니 2세 오르시니1323년 ~ 1335년
니케포로스 2세1335년 ~ 1336년, 1356년 ~ 1359년중간에 동로마 제국, 세르비아 왕국의 지배를 받음
동로마 제국 지배 (1336년/1340년 ~ 1348년)
세르비아 왕국 지배 (1348년 ~ 1356년)
시메온 우로슈 팔레올로고스1359년 ~ 1367년황제 칭호 사용, 테살리아 중심 통치



1367년 이후 에피루스 북부 요아니나 지역의 전제공은 다음과 같다.

전제공재위 기간비고
토마 프렐류보비치1367년 ~ 1384년시메온 우로쉬의 사위
마리아 앙겔리나1384년 ~ 1385년토마 프렐류보비치의 아내, 시메온 우로쉬의 딸
에사우 부온델몬티1385년 ~ 1411년
요르요스 부온델몬티1411년에사우의 아들, 잠시 통치
카를로 1세 토코1411년 ~ 1429년
카를로 2세 토코1429년 ~ 1448년1430년부터 아르타에서 통치
레오나르도 3세 토코1448년 ~ 1449년1449년 아르타 함락으로 전제공국 멸망. 이후 케팔로니아 백작 등으로 1479년까지 지배



1271년 이후 테살리아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던 군주들은 다음과 같다.

군주재위 기간칭호/비고
요안니스 1세 두카스1271년 ~ 1289년존엄공(세바스토크라토르)
콘스탄티노스 두카스1289년 ~ 1303년존엄공
요안니스 2세 두카스1303년 ~ 1318년존엄공
스테파노스 가브릴로풀로스1318년 ~ 1333년존엄공, 독립 지배자
동로마 제국 병합 (1333년 ~ 1348년)
세르비아 왕국 지배 (1348년 ~ 1355년)
니케포로스 2세1356년 ~ 1359년에피루스 전제공 겸임
시메온 우로쉬1359년 ~ 1371년황제, 에피루스 전제공 겸임
요반 우로쉬 팔레올로고스1371년 ~ 1381년'황제'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필란트로페노스1381년 ~ 1389년부제(카이사르)
마누일 앙겔로스 필란트로페노스1389년 ~ 1393년부제(카이사르)
139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테살리아 병합


4. 1. 콤니노스-두카스 가 (1204년 ~ 1318년)



원래 전제공(데스포테스)은 동로마 제국작위 중 하나로, 12세기 전반 콤네노스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높은 지위였으며, 주로 황제의 아들이나 후계자 후보에게 주어졌다.

이피로스 전제공국은 안젤루스 왕조의 초대 황제 이사이오스 2세 안젤루스의 사촌인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세웠다. 그는 남자 혈통으로는 안젤루스 가문에 속했지만, 여자 혈통으로 두카스 가문과 콤네노스 가문과 연결되어 스스로를 콤니노스 두카스라고 칭했다. 1205년, 미하일 1세는 그리스 서안의 도시 아르타를 수도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1215년까지 다스렸다. 처음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십자군이 세운 테살로니키 왕국에 신종하면서 기반을 다졌지만, 1210년 여름 이후 반기를 들고 그리스 북서부의 이피로스 지방을 점령, 동쪽의 니케아 제국과 함께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미하일의 동생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재위 1215년 ~ 1230년)는 군사적으로 활약하여 라틴 제국의 황제 피에르 2세 드 쿠르트네알바니아 산중에서 사로잡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224년에는 테살로니키 왕국을 멸망시키고 테살로니키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로 인해 동쪽의 니케아 제국과 서쪽의 이피로스 전제공국 양쪽 모두 동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테살로니키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테오도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목표로 1230년, 배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했지만,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대패하여 불가리아군에 사로잡혔다. 이 이후 에피루스의 힘은 쇠퇴하여 분열이 일어나고, 대신 니케아 제국이 발칸 반도에도 영토를 넓혀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의 가장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테오도로스의 아들 요하네스는 1242년,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 황제 요하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로부터 전제공(데스포테스)의 칭호를 받았다. 이로써 요하네스는 니케아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재위 1230년 ~ 1271년) 치하인 1259년, 에피루스는 십자군 세력과 동맹을 맺고 니케아 제국과 싸웠지만 참패했다. 결국, 2년 후인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 에피루스는 1264년에 다시 제국의 영향 아래 놓였고, 그 후 테살리아와 에피루스로 분열되어 항쟁을 반복하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미하일 2세 사후, 그의 서자인 요안니스 1세 두카스는 테살리아에서 독립하여 세력을 구축했다.

미하일 2세의 뒤를 이은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재위 1271년 ~ 1297년) 시기에도 분열과 쇠퇴가 이어졌다. 그의 아들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재위 1297년 ~ 1318년)는 1318년, 조카인 케팔로니아 백작 니콜라(니콜라 오르시니)(이탈리아계)에게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안젤루스 가문의 직계 통치는 단절되었고, 이후 에피루스 전제공국은 여자 혈통으로 안젤루스 가문에 이어진 케팔로니아 백작 올시니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4. 2. 오르시니 가문 (1318년 ~ 1338년)

1318년, 전제공 토마스 두카스가 자신의 조카이자 케팔로니아 백작이었던 이탈리아계 니콜라 오르시니에게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안젤루스 가문의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니콜라 오르시니는 여자 혈통으로 안젤루스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전제공 지위를 차지하여 이피로스에서 오르시니 가문의 통치를 시작했다.

오르시니 가문은 3대에 걸쳐 이피로스를 지배했지만, 이탈리아계 가문의 통치는 내부적인 불안정을 야기했고 내분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전제공재위 기간
니콜라 오르시니1318년 ~ 1323년
조반니 2세 오르시니1323년 ~ 1335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1335년 ~ 1338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결국 1338년 동로마 제국은 이피로스 지역을 다시 병합하였다. 이로써 오르시니 가문의 첫 번째 통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니키포로스 2세는 동로마 궁정으로 보내졌다.

4. 3. 네마니치 가 (1359년 ~ 1385년)

스테판 두샨 사후 세르비아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두샨의 이복동생 시메온 우로쉬는 1359년 니케포로스 2세가 알바니아인과의 전투에서 패사한 후 에피루스와 테살리아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시메온 우로쉬는 스스로 '황제'를 칭했지만, 직접 통치하는 대신 테살리아의 트리칼라에 머물렀다. 그는 에피루스를 분할하여 북부의 요아니나는 사위인 토마 프렐류보비치에게 맡겼다. 이로써 에피루스 지역은 네마니치 가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토마 프렐류보비치는 1367년부터 1384년까지 요아니나의 전제공으로 통치했다. 1384년 토마스 프렐류보비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이자 시메온 우로쉬의 딸인 마리아 앙겔리나가 잠시 통치권을 이어받아 1385년까지 다스렸다.

통치자재위 기간비고
시메온 우로쉬1359년 ~ 1367년황제 칭호 사용, 테살리아 중심 통치
토마 프렐류보비치1367년 ~ 1384년요아니나 전제공, 시메온 우로쉬의 사위
마리아 앙겔리나1384년 ~ 1385년토마스 프렐류보비치의 아내, 시메온 우로쉬의 딸


4. 4. 부온델몬티 가 (1385년 ~ 1411년)

1384년 요아니나의 전제공 토마 프렐류보비치가 사망한 후, 에사우 부온델몬티가 1385년부터 1411년까지 요아니나를 통치했다. 에사우 사후에는 요르요스 부온델몬티가 1411년 잠시 통치했으나, 곧 카를로 1세 토코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4. 5. 토코 가 (1411년 ~ 1479년)

세르비아 왕국 (중세)인과 알바니아인에 의한 분할 지배 시기가 끝나고 혼란을 겪던 에피루스는 올시니 가문과 혈연관계이며 케팔로니아 백작령을 계승한 토코 가문에 의해 통일되었다. 토코 가문의 에피루스 지배는 1449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이어졌다.

토코 가문의 통치는 1411년, 에사우 부온델몬티의 뒤를 이어 요아니나의 전제공이 된 카를로 1세 토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429년까지 에피루스를 다스렸다. 그의 뒤를 이은 카를로 2세 토코는 1429년에 전제공위를 계승했으며, 1430년부터는 수도를 요아니나에서 아르타로 옮겨 1448년까지 통치했다.

마지막 전제공은 레오나르도 3세 토코로, 1448년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449년 오스만 제국이 아르타를 함락시키면서 에피루스 전제공국은 사실상 멸망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3세는 이후 케팔로니아 백작 및 레프카스 공작으로서 1479년까지 지배를 유지했다.

통치자재위 기간비고
카를로 1세 토코1411년 ~ 1429년요아니나 전제공
카를로 2세 토코1429년 ~ 1448년1430년부터 아르타에서 통치
레오나르도 3세 토코1448년 ~ 1449년1449년 아르타 함락으로 전제공국 멸망. 이후 케팔로니아 백작 및 레프카스 공작으로 1479년까지 지배.


5. 문화

이피로스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된 용어 사용은 주목할 만하다. 13세기 전제공국의 궁정에서는 주민들을 과거의 로마인이라는 명칭 대신 "헬레네스"라고 부르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2]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자로서의 정체성을 넘어, 고대 그리스와의 연결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으며, 당시의 문화적 자의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이피로스 영토 자체를 부르는 공식적인 명칭은 없었다. 동시대 서유럽인들은 종종 비잔티움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인 ''로마니아''(Ῥωμανία|로마니아el, 로마인의 땅)를 사용하여 이피로스를 지칭했다. 이러한 용례는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그의 아들 아풀리아의 필리포, 니콜라스 오르시니, 그리고 나중에는 카를로 1세 토코가 주장했던 라틴어 칭호 ''Despotus Romanie''에서도 확인된다.

비잔틴 세계 내부에서는 이피로스를 지칭하기 위해 ''디시스''(Δύσις|디시스grc), 즉 "서방"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이 용어는 달마티아, 마케도니아, 시칠리아 또는 제국의 유럽 전체를 지칭했지만, 13세기부터는 동쪽의 경쟁자인 니케아 제국(''아나톨레'', Ἀνατολή|아나톨레grc, 즉 "동방")과 대비하여 이피로스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명칭들은 당시 이피로스가 비잔틴 세계 내에서 차지했던 지정학적 위치와 다른 세력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피로스 전제공국"이라는 명칭과 통치자의 "전제공" 칭호는 현대 역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엄밀히 말해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창시자인 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는 전제공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그의 후계자 테오도르 콤네노스 두카스 역시 테살로니카에서 스스로 황제(''바실레우스'')를 칭했다. 이피로스 통치자 중 처음으로 전제공 칭호를 받은 인물은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로, 1230년대에 테살로니카의 마누일로부터 받았고, 이후 니케아 황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에게 복속하며 다시 인정받았다.

"전제공" 칭호 자체는 특정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잔틴 궁정 내에서 황제의 가까운 친족에게 수여되는 높은 지위였다. 따라서 이피로스 통치자들을 "이피로스 ''의'' 전제공"으로 부르는 것은 기술적으로 부정확하다. "전제공국"(''데스포타톤'', δεσποτᾶτον|데스포타톤grc)이라는 영토적 용어는 14세기에 들어서야 ''모레아 연대기'',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의 기록 등 동시대 자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이피로스 전제공국" 대신 "(독립) 이피로스 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참조

[1] 서적 Faiths Across Time: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4 Volumes]: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ABC-CLIO
[2] 간행물 Chapter 2, Greek Ethnic Survival Under Ottoman Domination https://scholarworks[...] 2008
[3] 서적 Greece http://books.google.[...] New Holland Publishers 2003-05-01
[4] 서적 Faiths Across Time: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4 Volumes]: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ABC-C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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