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장공주
1. 개요
제국대장공주는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과 차비 카툰의 딸로, 1274년 고려의 충렬왕과 결혼하여 고려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몽골 풍습을 고려에 전파하고, 아들 충선왕을 낳았다. 1297년 사망 후 인명태후로 추존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제국대장공주로 추존되었다. 그녀의 결혼은 고려 왕실과 원나라 황실 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고려 왕위 계승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부 학자들은 그녀가 국왕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평가하며, 불교 숭배와 관련된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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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보르지긴 쿠틀룩 켈미쉬 |
|---|---|
| 원 이름 | 베이얼즈진 후두루 지엘이미시 (孛兒只斤 忽都魯 揭里迷失) |
| 한국 한자음 | 패아지근 홀도로 게리미실 (패아지근 홀도로 게리미실) |
| 칭호 | 제국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 |
| 시호 | 장목왕후 (莊穆王后) |
| 존호 | 인명태후 (仁明太后) |
| 별칭 | 원성공주 (元成公主), 안평공주 (安平公主) |
| 출생 | 1259년 6월 28일 (음력) |
| 출생지 | 몽골 제국 |
| 사망 | 1297년 5월 21일 (음력) |
| 사망지 | 고려 개경 현성사 |
| 능묘 | 고릉 (高陵) |
| 국적 | 원나라, 고려 |
| 아버지 | 쿠빌라이 칸 |
|---|---|
| 어머니 | 차브이 카툰 |
| 배우자 | 충렬왕 |
| 자녀 | 2남 1녀 (충선왕, 공주 (조졸), 왕자 (조졸)) |
| 왕후 칭호 | 고려 왕후 |
|---|---|
| 재위 기간 | 1274년 6월 18일 ~ 1297년 5월 21일 (음력) |
| 전임 왕후 | 경창궁주 유씨 |
| 후임 왕후 | 계국대장공주 |
| 종교 | 불교 |
|---|---|
| 봉호 (1275년) | 원성공주 (元成公主) |
| 봉호 (1294년) | 안평공주 (安平公主) |
| 사후 시호 (고려) | 장목인명왕후 (莊穆仁明王后, 충렬왕에 의해 추존), 정민장선인명태후 (정민장선인명태후, 충선왕에 의해 추존), 인명태후 (仁明太后) |
| 사후 시호 (원) | 황고 제국대장공주 고려국 왕비 (皇姑 齊國大長公主 高麗國 王妃, 테무르 칸에 의해 1310년 추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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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년 사망 -
장순룡
장순룡은 드라마 《기황후》 등장인물로, 배우 김명국이 연기했으며, 《무신》, 《정도전》, 《징비록》, 《옥중화》, 《미스터 션샤인》 등 다수 드라마에 출연하며 폭넓은 연기 활동을 한다. -
1297년 사망 -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1268년 미하일 2세의 뒤를 이어 이피로스의 통치자가 되어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개선과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와의 외교적 균형을 추구했으나 말년에는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이피로스는 분할 통치되었다. -
1259년 출생 -
안드로니코스 2세
안드로니코스 2세는 미하일 8세의 아들로 1282년부터 1328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했으나, 외세 의존 정책, 소아시아 영토 상실, 손자와의 내전 등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지 못하고 폐위되었다. -
1259년 출생 -
배정지
배정지는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어린 나이에 금위에 소속되어 왕을 호종하고, 합단적 격퇴에 공을 세워 칭찬을 받았으며, 제주도 반란을 진압했으나 당옥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다. -
원나라의 공주 -
노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로 원나라 공주였으나 공민왕과 정략결혼 후 고려에 와서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지지하며 헌신적으로 내조했으나 난산으로 사망하여 공민왕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고 사후 대장공주로 추증되었으며 현재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
원나라의 공주 -
계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는 원 현종 카말라의 딸이자 고려 충선왕의 왕비로, 충선왕과의 불화, 정치적 개입, 사치스러운 생활 등으로 논란이 많았으며, 고려 왕실 내 분란을 야기했다는 비판과 원의 문물을 전파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2. 생애
Borjigin Qutugh Kelmysh몽골어는 쿠빌라이 칸과 아속진가돈의 딸로, 몽골 제국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쿠틀룩 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 홀도로게리미실)이다.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11일, 16세의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39세의 세자 심(충렬왕)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충렬왕은 이미 정화궁주와 결혼한 상태였으나,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 공주라는 이유로 제1비가 되고 정화궁주는 후궁으로 물러났다.
제국대장공주는 고려에 몽골 풍습을 전파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공주는 연회를 즐겼고, 그녀와 친분이 있으면 죄를 지어도 쉽게 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잦은 사냥을 나가는 충렬왕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국사에 힘쓸 것을 간하기도 하였으며, 성격도 매우 엄하고 밝아 자기 측근 가운데 잘못한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9월 30일, 충선왕을 낳았다.
1294년(충렬왕 20년) 음력 6월 29일, 원 성종에 의해 안평공주(安平公主)에 봉해졌다.
1297년(충렬왕 23년) 음력 5월 21일,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릉(高陵)에 안장되었으며,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의 시호를 받았다.
2.1. 가계
Borjigin Qutugh Kelmysh몽골어는 쿠빌라이 칸과 아속진가돈의 딸로, 몽골 제국에서 태어났다. 성은 보르지긴(孛儿支斤, 패아지근) 또는 기악온(奇渥溫), 이름은 쿠틀룩 켈미쉬(忽都魯揭里迷失, 홀도로게리미실, 또는 홀독겁미사)이다.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지만, 장남 충선왕 외의 자녀는 요절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2.2. 왕비 책봉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11일, 16세의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39세의 세자 심(諶, 충렬왕)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원래 충렬왕은 1260년(원종 원년) 이미 신종의 증손녀인 왕씨(정화궁주)와 결혼하여 태자비로 책봉된 상태였으나,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 공주라는 이유로 왕씨보다 14년 늦게 혼인했음에도 제1비가 되고 왕씨는 후궁으로 물러났다. 그해 음력 10월 고려에 온 제국대장공주를 맞이하며 충렬왕은 원나라식 변발을 하지 않은 신료들을 꾸짖기도 하였다.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1월 6일, 제국대장공주는 원성공주(元成公主)에 봉해졌고, 거처는 경성궁 원성전(敬成宮 元成殿)으로 정해졌으며, 공주를 위한 부(府)가 설치되어 응선(膺善)이라 불리고 관속이 배치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15세의 나이(1274년 5월 11일)에 39세의 고려 왕자 왕거와 결혼하여 충렬왕 즉위 후 왕비가 되었다. 양양공의 손녀였던 왕의 첫 번째 부인(정화궁주)을 제치고 왕비가 된 것은 고려가 몽골 제국의 속국이 되면서 영향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며, 정신부인은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 후궁이 되었다.
2.3. 왕비 시절
제국대장공주는 고려로 시집오면서 원나라에서 자신의 시종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고려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 몽골 풍습을 유지하여 고려에 몽골 풍습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공주는 연회를 즐겼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연회를 즐기는 경우가 있었다. 공주와 친분이 있으면 큰 죄를 지어도 금방 풀려나곤 했다. 조인규는 국가 재물을 횡령하고 죄 없는 사람을 무고했음에도 공주와 친분이 있어 귀양에서 금방 풀려나고, 훗날 감찰대부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공주는 잦은 사냥을 나가는 충렬왕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국사에 힘쓸 것을 간하기도 하였으며, 성격도 매우 엄하고 밝아 자기 측근 가운데 잘못한 자가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9월 30일, 공주는 사판궁(沙坂宮)에서 아들 충선왕을 낳았다. 같은 해 음력 12월,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에서 충렬왕은 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를 같은 위치에 놓이게 했는데, 공주는 이를 자신과 정화궁주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분노하여 정화궁주의 자리를 옮기게 했다. 정화궁주가 무릎을 꿇고 공주에게 술잔을 올리자 충렬왕이 눈짓을 하였는데, 공주는 이를 두고 "어째서 나를 흘겨보십니까? 정화궁주가 나에게 꿇어 앉아 그러는 것입니까?"라며 쏘아붙였다. 결국 연회는 곧바로 끝나고 말았다.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5월, 충렬왕과 공주는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공주는 흥왕사에 있는 금탑을 궁으로 가져오고, 금탑의 장식은 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던 시종 홀라대(忽刺歹), 삼가(三哥)가 훔쳐갔다. 공주는 이것을 해체하여 사적으로 쓰고자 했지만, 충렬왕이 이를 못하게 하자 울었다. 얼마 후 충렬왕과 공주가 다시 흥왕사에 행차하였는데, 흥왕사의 스님들이 금탑을 돌려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공주는 이를 거부하였다.
같은 해 음력 12월, 어떤 이가 당시 고려에 다루가치로 와 있던 석말천구의 관사에 익명서를 투입하고 "옷이 있거든 입고 밥이 있거든 먹어 다른 이의 소득이 되게 하지 말라."고 외쳤다. 익명서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하게 하고 있다. 또 제안공을 비롯한 43명이 불궤한 짓을 도모하여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분개한 공주는 정화궁주를 나장(螺匠)에 가두고 그녀의 부고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유경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공주가 감동하여 정화궁주 등을 모두 석방시켰다.
1277년(충렬왕 3년) 음력 7월, 충렬왕과 공주는 천효사에 갔는데, 공주가 시종들이 적다며 돌아오는 바람에 충렬왕도 돌아와야 했다. 이때 공주는 충렬왕을 지팡이로 구타하였고, 공주의 화가 조금 풀려 다시 천효사에 갔는데 이때는 충렬왕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며 또 충렬왕에게 욕을 하고 때리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음력 7월 29일, 경창궁주와 그 아들 순안공 왕종이 저주를 행한다는 무고가 올라왔다. 당시 저주의 내용은 경창궁주가 자신의 아들 순안공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위에 오르려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충렬왕은 대신들을 시켜 경창궁주를 국문하고 순안공에 대해서는 친국까지 하였으나, 대신들이 경창궁주 모자를 용서하기를 청하여 이들의 재산을 적몰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신들이 재산 적몰 또한 상국인 원나라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방침대로 하기로 하였으나, 공주가 이러한 절차를 생략하고 재산을 적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이들의 재산은 공주에게 몰수되었다. 이후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같은 해 음력 9월 16일 경창궁주는 폐위되어 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고, 순안공은 구음도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1281년(충렬왕 7년) 음력 3월 20일, 원 세조가 충렬왕을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하였다.
1282년(충렬왕 8년) 음력 8월, 원 세조가 충렬왕에게 옛 송나라의 의관 연덕신을 하사하였는데, 연덕신이 정력이 강해지는 약인 조양환(助陽丸)을 만들어 바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의 천문학자 오윤부가 '이 약은 왕의 몸에 좋지 못하니, 삼한의 자손을 번성하지 못하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자다.'라고 하였고, 충렬왕이 그 약을 먹은 후 공주는 다시는 임신을 하지 못하였다. 오윤부는 충렬왕이 태묘에 새로운 신위를 모시면서 이에 제사를 지낼 때, 공주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태묘는 조상의 신령이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공주가 새 궁궐 신축 공사를 벌이자 하늘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음을 들어, 공주에게 궁궐 공사를 중단하고 덕을 닦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궁궐 신축을 벌이는데, 이때 공주는 오윤부에게 택일을 명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1294년(충렬왕 20년) 음력 6월 29일, 공주는 조카인 원 성종에 의해 안평공주(安平公主)에 봉해졌다.
2.4. 사망
1297년(충렬왕 23년) 수강궁 향각에 있던 제국대장공주는 시종에게 활짝 핀 작약을 하나 꺾어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이 작약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흐느끼더니, 얼마 후인 음력 5월 9일 병이 들었다. 3일 후인 음력 5월 12일 충렬왕과 공주는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였는데, 공주는 음력 5월 21일 현성사에서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릉(高陵)에 안장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의 시호를, 이어 정민장선인명태후(貞敏莊宣仁明太后)의 시호를 받았으며, 1298년(충선왕 즉위년) 음력 8월 14일에는 충선왕에 의해 정식으로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되었다. 한편 1310년(충선왕 2년) 공주의 종손자인 원 무종이 황고 제국대장공주(皇姑 齊國大長公主)에 추봉하였고, 이 해 음력 9월 충렬왕과 함께 태묘에 부묘되었다.
공주가 사망하고 약 두 달이 지난 1297년(충렬왕 23년) 음력 7월 27일, 충선왕은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임금의 총애를 투기하는 자들의 소치라 하여 충렬왕의 후궁 무비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둔 후 예쁜 과부 하나(훗날의 숙창원비)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이에 충격을 받은 충렬왕은 충선왕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할아버지 | 예종 툴루이 | 1192년 ~ 1232년 | 원나라 추존 황제 |
| 할머니 | 현의장성황후 겁렬씨 소르칵타니 | 1192년 ~ 1252년 | |
| 아버지 | 세조 쿠빌라이 | 1215년 ~ 1294년 | 원나라 제5대 황제 (재위: 1259년 ~ 1294년) |
| 어머니 | 차브이 카툰(차비) | 1216년 ~ 1281년 | |
| 남편 | 충렬왕 | 1236년 ~ 1308년 | 고려 제25대 왕 (재위: 1274년 ~ 1298년, 1298년 ~ 1308년) |
| 아들 | 충선왕 | 1275년 ~ 1325년 | 고려 제26대 왕 (재위: 1298년, 1308년 ~ 1313년) |
| 며느리, 종손녀 | 계국대장공주 | ? ~ 1315년 | 충선왕의 제1비. 원 현종(진왕)의 딸이자 제국대장공주의 조카. |
| 딸 | 공주 | 1277년 ~ ? | |
| 아들 | 왕자 | 1278년 ~ ? |
충렬왕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으나, 장남 충선왕을 제외한 나머지 1남 1녀는 출생 기록만 남아있을 뿐, 그 생애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4. 영향
제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시집온 것을 기점으로 고려 왕들은 모두 원나라 황족 출신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 왕위는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자에게만 돌아갔다. 충혜왕이 원나라로 끌려간 후 왕위는 장성한 동생 공민왕이 아닌 어린 아들들(충목왕, 충정왕)에게 돌아갔다. 공민왕은 어머니가 고려인(명덕태후)이라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원나라 황족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이후 1351년(공민왕 즉위년) 공민왕은 왕위에 올랐다.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시종들을 데려와 몽골 풍습을 따르게 했고, 충렬왕은 원나라식으로 머리를 바꾸지 않은 승려들을 꾸짖기도 했다. 몽골 공주가 고려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몽골 풍습은 고려에서 널리 퍼졌다.
일부 학자들은 제국대장공주가 이전 고려 왕후들과 달리 원나라 황녀라는 신분을 이용해 국왕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평가한다. 그녀가 불교를 맹신하여 국고를 낭비했다는 평가도 있다.
5. 평가
제국대장공주는 고려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녀는 몽골 풍습을 고려에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시종들을 데려와 몽골 풍습을 따르게 했고, 충렬왕은 원나라식으로 머리를 바꾸지 않은 승려들을 꾸짖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몽골 풍습은 고려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백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며, 자주 사냥을 가는 충렬왕에게 사냥을 중단하고 국사에 힘쓰라고 촉구했다. 그녀는 매우 엄격하고 강인하지만 밝은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실수를 저지른 측근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처럼 남편인 충렬왕의 통치를 돕고 국정에 헌신했다.
5.1. 부정적 평가
일부 학자는 제국대장공주가 기존의 고려 출신 왕비와는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으며, 상국(원나라)의 공주라는 신분을 앞세워 국왕보다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지나치게 불교를 믿는 바람에 불사에 국고를 낭비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한편 부산일보는 2005년 10월 6일의 기사에서, 제국대장공주 소생의 충선왕을 시작으로 원나라 출신 왕비들 소생의 고려의 왕들이 대부분 성격이 좋지 않고 일부는 요절까지 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어떠한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하였다.
6. 기타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올 때 공주를 따라온 시종들 중 일부는 고려에 정착하여 이름을 고려식으로 바꾸고 일부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들은 충렬왕에게 고려식 이름을 하사받고, 모두 중랑장이 되어 내시부에 소속되었다.
| 이름 | 시조가 된 성씨 | 비고 |
|---|---|---|
| 인후 | 연안 인씨 | 1275년(충렬왕 1년) 공주의 겁령구로 고려에 온 몽골인으로, 본명은 후라타이(홀라대, 忽刺歹)이다. 대장군 인공수의 집에서 지내면서 인후로 개명했다. |
| 장순룡 | 덕수 장씨 | 공주를 따라 겁령구로 고려에 온 이슬람계 사람으로, 본명은 상기(三哥)이다. 고려에 귀화하여 장순룡으로 개명했다. |
| 연수창 | 곡산 연씨 | 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와 곡산에 정착했다. |
| 차신 | 해당사항 없음 | 본래 고려 사람으로, 몽골 침공 시기에 끌려간 어머니가 제국대장공주의 유모가 되었다. 공주의 겁령구 신분으로 고려에 귀국하여 1290년 상장군, 1308년(충선왕 즉위년) 첨의찬성사 판의조사가 되었다. |
| 노영 | 해당사항 없음 | 본명은 시투르[式篤兒]로, 하서국(河西國)(티베트계의 당항(黨項)) 사람이다. 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와 노영으로 개명했다. |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사찰인 전등사에는 벌거벗은 여인을 조각한 나부상이 있다. 이에 대해 정화궁주를 질투한 제국대장공주를 벌주기 위해 옷을 벗은 형태로 조각했다는 설이 전한다.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원찰이었다.
충선왕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위해 금서대장경을 제작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제국대장공주가 이전 고려 왕후들과는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으며, 원나라 황녀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국왕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녀가 불교를 너무 맹신하여 자신의 불멸을 위해 국고를 낭비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