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로드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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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님로드 원정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끈 남극 탐험으로,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진행되었다. 섀클턴은 로버트 팰컨 스콧의 디스커버리 탐험에서 겪었던 신체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콧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기 위해 이 탐험을 계획했다. 탐험대는 님로드 호를 사용하여 남극으로 향했으며, 맥머도 해협 대신 케이프 로이즈에 기지를 건설했다. 섀클턴은 남극점 도달을 시도하여 당시 최남단 기록을 세웠지만, 남극점 도달에는 실패했다. 탐험 과정에서 비어드모어 빙하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과학적 연구도 수행했다. 님로드 원정은 섀클턴의 리더십과 팀워크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으며, 남극 탐험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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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로드 원정 | |
|---|---|
| 탐험 정보 | |
| 탐험명 | 님로드 탐험 |
| 시기 | 1907년 ~ 1909년 |
| 지역 | 남극 |
| 목적 | 남극 대륙 탐험 과학 연구 |
| 후원자 | 어니스트 섀클턴 |
| 지휘관 | 어니스트 섀클턴 |
| 주요 참가자 | |
| 대장 | 어니스트 섀클턴 |
| 부관 | 제임스슨 보이드 애덤스 |
| 선의 | 에릭 마셜 |
| 외과의 | 앨리스테어 매케이 |
| 물리학자 | 에지워스 데이비드 |
| 지질학자 | 레이먼드 프리슬리 |
| 생물학자 | 제임스 머레이 |
| 기상학자 | 조지 버트위슬 |
| 기관사 | 해리 던롭 윌리엄 로버츠 |
| 갑판 담당 | 알프레드 체덤 아에네아스 매킨토시 |
| 사진가 | 조지프 머레이 |
| 탐험선 | |
| 선박 종류 | 님로드 |
| 톤수 | 334톤 |
| 주요 성과 | |
| 남극점 최고 도달점 | 남위 88° 23′ (약 97.5해리, 180.6km) |
2. 탐험의 배경
어니스트 섀클턴은 로버트 팰컨 스콧의 디스커버리 탐험(1901~1904)에서 RRS ''디스커버리'' 호의 하급 장교였다. 1903년, 섀클턴은 탐험대의 남쪽 주요 여정에서 신체적인 쇠약으로 인해 구조선 ''Morning'' 호를 타고 귀국했다. 스콧은 그가 "현재 건강 상태에서 더 이상의 고난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섀클턴은 이러한 신체적 실패를 개인적인 오명으로 느꼈고,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앨버트 아미티지의 말처럼 스스로를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롤랜드 헌트포드에 따르면, 1905년에 출판된 스콧의 ''디스커버리호의 항해''에서 섀클턴의 신체적 쇠약에 대한 언급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이후 섀클턴은 남극으로 돌아가 스콧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것을 개인적인 사명으로 삼았다. 섀클턴은 자신의 탐험에 대한 잠재적인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고, 1907년 그의 고용주인 윌리엄 비어드모어 경이 £7,000의 대출 보증을 제공하면서 첫 번째 재정적 지원 약속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섀클턴은 1907년 2월 12일 왕립 지리학회에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다. 섀클턴이 서두른 이유 중 하나는 폴란드 탐험가 헨리크 아르크토프스키가 섀클턴과 같은 날 RGS에서 발표된 탐험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르크토프스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2. 1. 탐험 이전의 상황
어니스트 섀클턴은 로버트 팰컨 스콧의 디스커버리 탐험(1901~1904)에서 RRS ''디스커버리'' 호의 하급 장교였다. 1903년, 섀클턴은 탐험대의 남쪽 주요 여정에서 신체적인 쇠약으로 인해 구조선 ''Morning'' 호를 타고 귀국했다. 스콧은 그가 "현재 건강 상태에서 더 이상의 고난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섀클턴은 이러한 신체적 실패를 개인적인 오명으로 느꼈고,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앨버트 아미티지의 말처럼 스스로를 증명하기로 결심했다.롤랜드 헌트포드에 따르면, 1905년에 출판된 스콧의 ''디스커버리호의 항해''에서 섀클턴의 신체적 쇠약에 대한 언급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이후 섀클턴은 남극으로 돌아가 스콧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것을 개인적인 사명으로 삼았다. 섀클턴은 자신의 탐험에 대한 잠재적인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고, 1907년 그의 고용주인 윌리엄 비어드모어 경이 £7,000의 대출 보증을 제공하면서 첫 번째 재정적 지원 약속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섀클턴은 1907년 2월 12일 왕립 지리학회에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다.
2. 2. 섀클턴의 결심과 초기 계획
어니스트 섀클턴은 로버트 팰컨 스콧의 디스커버리 탐험에서 RRS ''디스커버리'' 호의 하급 장교였으나, 탐험대의 남쪽 주요 여정에서 신체적 쇠약으로 1903년 구조선 ''Morning'' 호로 귀국했다. 스콧은 섀클턴이 "현재 건강 상태에서 더 이상의 고난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섀클턴은 이러한 신체적 실패를 개인적인 오명으로 느꼈고, 앨버트 아미티지의 말처럼 스스로를 증명하기로 결심했다.1905년 출판된 스콧의 ''디스커버리호의 항해''에서 섀클턴의 신체적 쇠약에 대한 언급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고, 남극으로 돌아가 스콧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것이 그의 개인적인 사명이 되었다. 섀클턴은 자신의 탐험에 대한 잠재적인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고, 1906년 초에 작성된 미출판 문서에 초기 계획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전체 탐험 비용 £17,000의 추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1907년 초, 윌리엄 비어드모어 경이 £7,000의 대출 보증을 제공하면서 첫 재정적 지원 약속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섀클턴은 1907년 2월 12일 왕립 지리학회에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다.
섀클턴의 최초 계획은 맥머도 해협에 있는 옛 ''디스커버리'' 탐험대 본부를 기지로 삼아 남극점과 남자기극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른 탐험이 이어질 것이고, 지속적인 과학 연구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초기 계획에는 섀클턴이 제안한 운송 수단도 포함되었는데, 개, 조랑말, 특별히 설계된 자동차를 조합하여 사용하는 것이었다. 프레데릭 조지 잭슨이 잭슨-험즈워스 북극 탐험에서 조랑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고, 프리드쇼프 난센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섀클턴은 조랑말 15마리(이후 10마리로 줄임)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1907년 2월 왕립지리학회(RGS)에 계획을 발표할 즈음, 섀클턴은 비용 추정치를 3만 파운드로 수정했다. 그러나 RGS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는데, 섀클턴은 나중에 RGS가 스콧이 새로운 탐험을 이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스콧에게 모든 승인을 보류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탐험 준비
3. 1. 자금 조달
1907년 7월 초, 어니스트 섀클턴은 윌리엄 비어드모어의 보증 외에는 재정적 지원을 거의 확보하지 못했고, ''님로드''호의 개조를 완료할 자금이 부족했다. 7월 중순, 그는 앵글로-아일랜드 맥주 가문의 수장인 아이비 백작 에드워드 기네스에게 접근했고, 섀클턴이 추가로 6,000파운드를 기부할 다른 후원자를 찾으면 2,000파운드를 보증하기로 동의했다. 섀클턴은 이 일을 해냈는데, 추가 자금에는 원정대에 합류하기 위해 이 금액을 지불한 필립 브로클허스트 경의 2,000파운드가 포함되었다.섀클턴의 사촌 윌리엄 벨이 마지막 순간에 기부한 4,000파운드로도 원정대는 필요한 30,000파운드에 훨씬 못 미쳤지만, ''님로드''호의 개조를 마칠 수 있었다. 배가 호주에 도착한 후 호주 정부로부터 5,000파운드가 추가로 기부되었으며, 뉴질랜드 정부는 1,000파운드를 기부했다. 이러한 방법과 다른 소규모 대출 및 기부를 통해 30,000파운드를 모금했지만, 원정이 끝날 무렵 섀클턴의 추산에 따르면 총 비용은 45,000파운드로 증가했다. 섀클턴은 보증인에게 상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국 영국 정부로부터 20,000파운드의 보조금을 받아야 했다.
섀클턴은 원정에 관한 자신의 저서와 강연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또한 섀클턴이 뉴질랜드 정부에 의해 임시 우체국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 설립하고자 했던 남극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특별 우표 판매로 이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계획 중 어느 것도 예상했던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우체국은 로이즈 곶에 설치되어 원정대의 우편물 수송로로 사용되었다.
3. 2. 탐험선 님로드 호
섀클턴은 1907년 여름, 남극 탐험을 위해 낡은 물개잡이배 님로드 호를 5,000 파운드에 구입하여 탐험선으로 개조했다. 님로드 호는 40년 된 목조 선박으로, 섀클턴이 처음 배를 보았을 때는 낡고 바다표범 기름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방수 처리와 돛대 교체 등 숙련된 선박 기술자들의 작업을 거쳐 탐험에 적합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51a54f665_981cf245.jpg|thumb|alt= 돛을 접은 세 개의 돛대가 있는 배, 중앙에 짧은 굴뚝, 그림 왼쪽 뒤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있습니다. 두 대의 작은 보트가 가까이 있고, 깃발로 장식된 더 큰 배가 배경에 보입니다.|남극으로 떠나는 탐험대의 배 ''님로드'']
당초 섀클턴은 700톤급 극지 탐험선 '뵤른'을 구입하려 했으나, 후원자의 지원 철회로 무산되었다. '뵤른'은 결국 독일 탐험가 빌헬름 필히너가 인수하여 '도이칠란트'로 개명하고 웨델해 항해에 사용되었다.
3. 3. 대원 모집
어니스트 섀클턴은 디스커버리 탐험대에서 인원을 모집하길 원했고, 이전 동료인 에드워드 에이드리언 윌슨에게 수석 과학자 겸 부지휘관 자리를 제안했지만, 윌슨은 영국 농림부의 뇌조 질병 조사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전 ''디스커버리'' 동료인 마이클 바, 레지널드 스켈턴, 조지 멀록도 거절했으며, 멀록은 섀클턴에게 실수로 ''디스커버리''의 장교들이 모두 아직 발표되지 않은 스콧의 탐험 계획에 헌신하기로 했다는 것을 밝혔다. 섀클턴에 합류한 유일한 ''디스커버리'' 인원은 프랭크 와일드와 어니스트 조이스였다. 섀클턴은 탐험대의 런던 사무실을 지나가는 버스 상층에서 조이스를 발견했고, 누군가를 보내 그를 찾아 데려오게 했다고 한다.섀클턴의 부지휘관은 제임슨 애덤스였는데, 그는 섀클턴과 함께 하기 위해 정규 임관 기회를 거절한 왕립 해군 예비군 중위였다. 그는 탐험대의 기상학자로 활동할 예정이었다. *님로드* 호의 선장은 루퍼트 잉글랜드였고, 존 킹 데이비스는 선임 항해사로 임명되었다. 페닌슐라 앤 오리엔탈 증기 항해 회사(P&O)의 상선 장교인 애니어스 매킨토시는 원래 2등 항해사였지만, 나중에 육상 팀으로 옮겨졌고, A. E. 하보드가 2등 항해사로 대체되었다. 육상 팀의 다른 구성원으로는 외과 의사인 앨리스터 맥케이와 에릭 마셜, 자동차 전문가인 버나드 데이, 그리고 지질학 보조원으로 합류한 후원 회원인 필립 브록클허스트 경이 있었다.
영국을 출발한 소규모 과학팀에는 생물학자 제임스 머레이와 지질학자 레이먼드 프리스틀리가 포함되었다. 호주에서는 시드니 대학교의 지질학 교수인 에지워스 데이비드와 그의 전 제자인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광물학 강사인 더글러스 모슨이 합류했다. 데이비드는 팀의 수석 과학 장교가 되었으며, 호주 정부로부터 5,000파운드의 보조금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8월 남극으로 출발하기 전에 조이스와 와일드는 인쇄 방법에 대한 속성 과외를 받았다.
3. 4. 스콧과의 약속
스콧은 1907년 2월 섀클턴이 자신의 탐험대를 옛 ''디스커버리'' 본부에 두겠다고 발표하자, 아직 남극 탐험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맥머도 해협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며 섀클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탐험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지역을 우선적으로 내 것으로 여길 것이다"라고 덧붙이며 섀클턴에게 충성을 상기시켰다.섀클턴은 처음에는 스콧의 견해에 최대한 따르겠다는 호의적인 답변을 보냈으나, 섀클턴의 중재 요청을 받은 에드워드 윌슨은 스콧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섀클턴에게 맥머도 해협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섀클턴은 이에 "그의 권리가 그가 요구한 기지에서 끝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답했다.
1907년 5월, 스콧은 경계선을 서경 170°로 정할 것을 요구했고, 섀클턴은 결국 양보하여 "맥머도 기지를 당신에게 넘겨주겠다"라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는 장벽 입구나 에드워드 7세 랜드에 상륙하려 했으며, 빅토리아 랜드 해안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이는 빅토리아 랜드 내 남극 자기 극 도달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극지 탐험 역사가 보 리펜버그는 이를 "결코 윤리적으로 요구되어서는 안 되는 약속"이라고 평가했다. 이 분쟁으로 섀클턴과 윌슨의 우정은 파멸되었다.
섀클턴은 자신의 탐험에 대한 설명에서 스콧과의 언쟁을 언급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 맥머도 해협 대신 에드워드 7세 랜드에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라고만 언급했다.
4. 탐험 과정
4. 1. 남극으로의 항해
에드워드 7세 국왕과 알렉산드라 오브 덴마크 왕비에게 알현한 후, ''님로드''는 1907년 8월 11일에 출항했다. 섀클턴은 원정 준비를 위해 남았고, 다른 원정대원들과 함께 쾌속선으로 ''님로드''를 따라갔다. 대원들이 모두 모인 곳은 뉴질랜드였으며, 1908년 새해 첫날에 남극으로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뉴질랜드 정부에 요청하여, ''님로드''를 남극선까지 예인하도록 했다. 거리는 약 2,600 km였으며, 예인 비용은 유니언 증기선 회사와 정부가 분담했다. 1월 14일, 첫 번째 빙산이 보였을 때 예인 밧줄이 끊어졌다. ''님로드''는 자체 동력으로 부유하는 해빙 속에서 남쪽으로 나아가, 6년 전에 ''디스커버리''가 정박했던 배리어 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스콧과 섀클턴이 기구 비행 실험을 했던 곳이었다.배리어(후에 로스 선반빙이라고 불림)는 1월 23일에 시야에 들어왔지만, 만은 사라져 있었다. 배리어의 가장자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히 변해 있었다. 만을 포함했던 곳이 부서져 상당한 만을 형성하고 있었고, 많은 고래가 발견되었기에 섀클턴은 그곳을 고래만이라고 명명했다. 섀클턴은 얼음이 바다로 분리될지도 모르는 배리어 표면에서 동계 숙영을 하는 위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배를 에드워드 7세 반도 쪽으로 돌렸다. 이 해안에 몇 번 접근하려 했지만 실패한 후, 빠르게 움직이는 얼음이 배를 가둘 위험이 있어 ''님로드''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섀클턴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선택지는 원정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제외하면, 스콧과의 약속을 깨는 것이었다. 1월 25일, 맥머도 해협으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4. 2. 케이프 로이즈 기지 건설
1908년 1월 29일, 님로드 원정대는 맥머도 해협에 도착했지만, 헛 포인트의 디스커버리 기지로 가는 길이 얼어붙은 바다에 막혔다. 섀클턴은 얼음이 깨지기를 기다리며 며칠을 보냈지만, 2등 항해사 에니아스 매킨토시가 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에릭 마샬과 알리스터 매케이가 응급 수술을 했지만, 매킨토시는 육상 대원 자리를 포기하고 님로드와 함께 뉴질랜드로 돌아가야 했다.2월 3일, 섀클턴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케이프 로이즈에 본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케이프 로이즈는 헛 포인트에서 북쪽으로 20해리(37 km) 떨어진 곳으로, 탐험대의 조립식 오두막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섀클턴은 "남쪽으로 출발하는 지점과 이처럼 가까운 겨울 숙소를 얻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며칠 동안 님로드에서 물품과 장비를 하역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악천후와 선장의 잦은 배 이동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섀클턴과 선장 사이에 격렬한 불화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2월 22일, 하역 작업이 완료되었고, 님로드는 북쪽으로 항해를 떠났다.

4. 3. 에러버스 산 등반
''님로드''호의 출발 이후, 해빙이 깨지면서 남극 장벽으로 가는 일행의 경로가 끊겼고, 이로 인해 준비 썰매질과 보급소 설치가 불가능해졌다. 섀클턴은 탐험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즉시 에레부스 산 등반을 명령했다. 이 산은 해발 3,794m 높이로, 아직 등반된 적이 없었다. 1904년 ''디스커버리''호의 일행(와일드와 조이스 포함)이 산기슭을 탐험했지만 910m 이상으로 등반하지 못했다.
3월 5일, 데이비드, 모슨, 매케이로 구성된 등반대가 등반을 시작했고, 마셜, 아담스, 브로클허스트가 지원 그룹을 형성했다. 3월 7일 두 그룹은 해발 약 1,700m 지점에서 합류하여 모두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3월 9일에는 낮은 주 크레이터의 정상에 도달했다. 브로클허스트는 동상으로 인해 캠프에 남겨졌고, 나머지 대원들은 4시간 만에 활화구에 도달했다. 몇 차례의 기상 실험과 암석 표본 채취 후, 일행은 빠르게 하산하여 3월 11일 케이프 로이즈(Cape Royds) 오두막에 도착했다.
4. 4. 1908년 월동
탐험대의 오두막은 33 x 19피트(10m x 5.8m) 크기의 조립식 구조물로, 2월 말까지 입주 준비가 완료되었다. 주로 2인용 큐비클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주방, 암실, 저장 공간 및 실험실 공간이 있었다. 조랑말들은 오두막의 가장 바람막이가 되는 쪽에 지어진 마구간에, 개집은 현관 근처에 배치되었다. 섀클턴은 스콧과는 대조적으로 포괄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보였고, 이로 인해 상갑판과 하갑판 사이의 구분이 없었다. 모두 함께 생활하고, 일하고, 식사했다. 사기는 높았다. 브록클허스트가 기록했듯이 섀클턴은 "탐험대의 각 구성원을 탐험대에 가치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이어진 겨울의 어둠 속에서 와일드와 조이스는 포장재를 사용하여 꿰매고 제본한 탐험대의 책인 ''오로라 오스트랄리스''를 약 30권 인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겨울의 작업은 다음 시즌의 주요 여정을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남극점과 남자기극 모두에 대한 시도가 포함될 예정이었다. 섀클턴은 맥머도 해협에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탐험 목표로서 자기극을 다시 설정할 수 있었다. 섀클턴은 남극점 여정을 직접 이끌 예정이었는데, 겨울 동안 남은 조랑말 4마리가 주로 소금 성분을 위해 화산 모래를 먹다가 죽으면서 심각한 차질을 겪었다.
4. 5. 남극점 탐험
1908년 10월 29일, 섀클턴, 와일드, 마셜, 애덤스는 남극점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2] 섀클턴은 디스커버리 탐험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 대신 조랑말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초반에는 순조롭게 전진했으나, 장벽의 험난한 지형 때문에 조랑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11월 26일, 섀클턴 일행은 스콧이 이전에 세운 최남단 기록(남위 82° 17')을 경신했다.[3]일행이 미지의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장벽 표면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파괴되었다. 서쪽의 산들은 그들의 남쪽 길을 막기 위해 둥글게 구부러졌고, 일행의 주의는 앞쪽 하늘에서 "눈부신 빛"에 사로잡혔다.[2] 12월 3일, 산맥의 산기슭을 오르면서 섀클턴은 "남쪽으로 가는 열린 길, [...] 두 개의 거대한 산맥 사이를 거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빙하"를 발견하고, 이를 비어드모어 빙하로 명명했다.[2]
빙하를 지나면서 조랑말 삭스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는 등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결국 섀클턴 일행은 인력운송에 의존해야 했다. 대원들 간의 불화도 있었지만, 탐험은 계속되었다.[3] 박싱 데이에 빙하 등반을 완료하고 극지 고원에 진입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909년 1월 9일, 섀클턴 탐험대는 남위 88° 23' 지점에 도달하여 당시 최남단 기록을 세웠다.[4] 이들은 남극점에서 불과 97.5 지리 마일(180.6 km)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다. 유니언 잭이 꽂혔고, 섀클턴은 극지 고원을 에드워드 7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4] 그러나 식량 부족과 대원들의 건강 악화로 인해, 탐험대는 남극점 도달을 포기하고 귀환해야 했다.

4. 5. 1. 비어드모어 빙하 발견
일행이 미지의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장벽 표면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파괴되었다. 서쪽의 산들은 그들의 남쪽 길을 막기 위해 둥글게 구부러졌고, 일행의 주의는 앞쪽 하늘에서 "눈부신 빛"에 사로잡혔다.[2]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12월 3일에 분명해졌는데, 산맥의 산기슭을 오르면서 그들은 섀클턴이 나중에 "남쪽으로 가는 열린 길, [...] 두 개의 거대한 산맥 사이를 거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거대한 빙하"라고 묘사한 것을 보았다. 섀클턴은 이 빙하를 탐험대의 가장 큰 후원자인 "비어드모어 빙하"로 명명했다.4. 5. 2. 최남단 도달
1909년 1월 9일, 섀클턴 탐험대는 남위 88° 23' 지점에 도달하여 당시 최남단 기록을 세웠다.[4] 이들은 남극점에서 불과 97.5 지리 마일(180.6 km)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다. 유니언 잭이 꽂혔고, 섀클턴은 극지 고원을 에드워드 7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4] 그러나 식량 부족과 대원들의 건강 악화로 인해, 탐험대는 남극점 도달을 포기하고 귀환해야 했다.4. 5. 3. 귀환
섀클턴 탐험대는 남쪽으로 73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귀환했다. 원래 110일로 예정되었던 귀환 여정 시간을 늘리기 위해 식량을 여러 번 줄였다. 섀클턴은 3월 1일까지 헛 포인트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50일 안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님로드호가 3월 1일에 출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네 명의 대원들은 매우 쇠약해졌지만, 1월 19일에 빙하 꼭대기에 도달했다.[10] 하강을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는 2분의 1 식량으로 5일 치의 식량이 있었고, 이는 하부 빙하 보급 기지까지 지속되었다.[10] 같은 거리를 오르는 데 12일이 걸렸다. 섀클턴의 신체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지만, 아담스에 따르면 "그가 더 나쁠수록 더 열심히 밀어붙였다".[10]보급 기지는 1월 28일에 도착했다. 이질로 아픈 와일드는 썰매를 끌거나 비스킷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비스킷은 부족했다. 1월 31일 섀클턴은 자신의 아침 비스킷을 와일드에게 주었고, 와일드는 "맙소사,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수천 파운드를 줘도 그 비스킷 하나를 살 수 없을 거야"라고 적었다.[10] 며칠 후, 나머지 대원들은 오염된 조랑말 고기를 먹은 결과로 심각한 장염에 걸렸다. 그러나 행진 속도는 유지해야 했다. 보급 기지 간에 운반되는 소량의 식량은 지연되면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 썰매에 돛을 달고 좋은 행진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10]
섀클턴은 "우리는 너무 말라서 딱딱한 눈 위에 누워 있으면 뼈가 아프다"고 적었다.[10] 2월 18일부터 그들은 익숙한 지형지물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23일에는 조이스가 넉넉하게 보급한 블러프 보급 기지에 도달했다. 섀클턴은 일반 보급품 상자 외에 다양한 진미들을 열거했다. "카를로비바리 자두, 달걀, 케이크, 자두 푸딩, 진저브레드, 설탕 절임 과일".[10] 와일드는 "조이스, 정말 대단해"라고 간결하게 표현했다.[10]
그들의 식량 걱정은 이제 해결되었지만, 3월 1일 마감일까지 헛 포인트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의 마지막 행진은 눈보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들은 24시간 동안 야영지에 갇혔다. 2월 27일, 그들이 안전 지점으로부터 61km 떨어져 있을 때, 마셜이 쓰러졌다. 섀클턴은 그 후 자신과 와일드가 다른 두 명을 구조할 수 있도록 님로드를 찾아 유지하기 위해 헛 포인트로 돌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2월 28일 늦게 오두막에 도착했다.[10] 배가 근처에 있기를 바라며, 그들은 자기 관측에 사용되는 작은 나무 오두막에 불을 질러 주의를 끌려고 했다.[10] 얼마 지나지 않아 에레부스 빙설에 정박해 있던 배가 시야에 들어왔다. 와일드는 나중에 "인간의 눈이 본 것 중 가장 행복한 광경"이라고 적었다.[10] 아담스와 마셜이 빙벽에서 구조되기까지 3일이 더 걸렸지만, 3월 4일까지 모든 남극 탐험대가 탑승했고 섀클턴은 북쪽으로 전속력으로 항해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10]
4. 6. 북부 탐험대
1908년 10월 5일, 에지워스 데이비드가 이끄는 북부 탐험대가 빅토리아 랜드로 출발했다. 이들은 자기극 탐사와 지질 조사를 목표로 했다. 탐험대는 데이비드, 더글러스 모슨, 알리스테어 맥케이로 구성되었으며, 인력으로 탐험을 진행했다. 개들은 보급품 배치 및 기타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기지에 남겨졌다. 탐험대는 자기 극점에 유니언 잭을 꽂고 대영 제국을 위해 빅토리아 랜드를 선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초반에는 해빙 상태와 악천후로 인해 진척이 더뎠다. 10월 말, 그들은 맥머도 해협을 건너 빅토리아 랜드 해안을 따라 100km 전진한 후, 자기 극점 도달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노르덴셸드 빙설과 드라이갈스키 빙설을 횡단한 후, 해안을 떠나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자기 극점을 향했다. 이 과정에서 데이비드는 크레바스에 빠졌으나 모슨에 의해 구조되었다.[11]
내륙 고원으로 가는 길은 리브스 빙하를 통과했으며, 12월 27일 단단한 눈 표면에 도달하여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1월 16일, 자기 관측 결과 자기 극점에서 약 24km 떨어진 지점에 있음을 확인했다. 1909년 1월 17일, 탐험대는 남위 72° 15', 동경 155° 16', 해발 2,210m 지점에 도달하여 자기 극점을 확인하고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귀환 여정은 식량 부족과 신체적 쇠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월 31일 해안 집결지에서 30km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다. 악천후로 인해 지연되었으나, 2월 4일 ''님로드''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구조 과정에서 모슨이 크레바스에 빠지기도 했다. 탐험대는 4개월 동안 같은 옷을 입고 여행하여 "냄새가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5. 탐험 이후
1909년 3월 23일, 어니스트 섀클턴은 뉴질랜드에 상륙하여 런던 ''데일리 메일''에 2,500단어 분량의 보고서를 전보로 보냈다. 그는 이 신문과 독점 계약을 맺고 있었다. 프리초프 난센과 로알 아문센 등 탐험가들로부터 섀클턴은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왕립지리학회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전 회장 클레멘츠 마컴 경은 섀클턴이 주장한 최남단 위도에 대한 불신을 개인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6월 14일, 섀클턴은 런던 채링크로스 역에서 왕립지리학회 회장 레너드 다윈과 스콧 대령을 포함한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섀클턴이 최남단 지점에 도달했다는 주장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1월 3일 이후의 위치 정보 계산이 추측 항법에 근거했기 때문이었다. 즉, 경로, 속도 및 소요 시간이 계산에 사용된 데이터였다. 1월 3일의 마지막 관측 지점은 남위 87도 22분으로 계산되었다. 섀클턴의 거리표에 따르면 그 후 3일 동안 74km를 전진하여 1월 6일에 남위 88도 7분에 도달했다. 그 후 이틀 동안은 눈보라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1월 9일, 표는 마지막 캠프지에서 30km 전진하여 최남단에 도달한 후, 같은 거리를 캠프로 되돌아갔다. 하루에 전진한 이 거리는 여행의 다른 단계에 비해 너무 길었다. 섀클턴은 그날이 썰매나 다른 장비 없이 "절반은 달리고 절반은 걸었던" 질주였다고 설명했다. 탐험대의 4명 모두 달성한 위도에 대한 신념을 확인했으며, 누구도 그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섀클턴은 에드워드 7세 국왕으로부터 로열 빅토리아 훈장 사령관(CVO) 칭호를 받았고, 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왕립지리학회는 섀클턴에게 금메달을 수여했지만, 공식 기록에는 "우리가 이 메달을 그렇게 크게 만들지 않은 것은 스콧 대령에게 증정하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대중에게 섀클턴은 영웅이었지만, 그가 기대했던 부는 실현되지 않았다. 늘어난 원정 비용과 채무 보증에 대한 대응은, 늦긴 했지만 정부가 2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지원했기에 재정적 어려움 없이 끝낼 수 있었다.
님로드 원정의 최남단 기록은 3년 후인 1911년 12월 15일,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하면서 깨졌다. 섀클턴은 아문센으로부터 "난센이 북극에 한 일은 섀클턴이 남극에 한 일과 같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후 섀클턴의 야망은 남극 대륙 횡단에 집중되었고, 1914–1917년 제국 남극 횡단 탐험을 통해 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섀클턴은 남극 탐험의 영웅 시대의 주요 인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님로드 원정대의 다른 구성원들인 에지워스 데이비드, 애덤스, 더글러스 모슨, 레이먼드 프리스틀리는 모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모슨은 1911~13년 호주 남극 탐험을 이끌었고, 프리스틀리는 테라 노바 탐험에 과학팀원으로 참여했다. 프랭크 와일드는 제국 남극 횡단 탐험과 섀클턴-로웨트 탐험에서 섀클턴의 부사령관을 맡았으며, 1922년 섀클턴이 사우스조지아 섬에서 사망한 후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님로드 호는 남극에서 귀환한 지 10년 후인 1919년 1월 31일 북해에서 좌초되어 파괴되었고, 12명의 선원 중 2명만이 살아남았다.
1909년 케이프 로이즈에 남겨졌던 위스키와 브랜디 상자가 2010년에 회수되어 분석되었고, 뉴질랜드 남극 유산 신탁의 기금 마련을 위해 복제품이 판매되었다.
5. 1. 섀클턴의 귀환과 영웅적 환영
1909년 3월 23일, 어니스트 섀클턴은 뉴질랜드에 상륙하여 런던의 데일리 메일에 2,500단어 분량의 보고서를 전보로 보냈다. 그는 이 신문과 독점 계약을 맺고 있었다. 프리초프 난센과 로알 아문센을 포함한 탐험가들로부터 섀클턴은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왕립 지리학회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전 회장 클레멘츠 마컴 경은 섀클턴이 주장한 최남단 위도에 대한 불신을 개인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6월 14일, 섀클턴은 런던 채링크로스 역에서 왕립 지리학회 회장 레너드 다윈과 스콧 대령을 포함한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섀클턴이 최남단 지점에 도달했다는 주장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1월 3일 이후의 위치 정보 계산이 추측 항법에 근거했기 때문이었다. 즉, 경로, 속도 및 소요 시간이 계산에 사용된 데이터였다. 1월 3일의 마지막 관측 지점은 남위 87도 22분으로 계산되었다. 섀클턴의 거리표에 따르면 그 후 3일 동안 74km를 전진하여 1월 6일에 남위 88도 7분에 도달했다. 그 후 이틀 동안은 눈보라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1월 9일, 표는 마지막 캠프지에서 30km 전진하여 최남단에 도달한 후, 같은 거리를 캠프로 되돌아갔다. 하루에 전진한 이 거리는 여행의 다른 단계에 비해 너무 길었다. 섀클턴은 그날이 썰매나 다른 장비 없이 "절반은 달리고 절반은 걸었던" 질주였다고 설명했다. 탐험대의 4명 모두 달성한 위도에 대한 신념을 확인했으며, 누구도 그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섀클턴은 에드워드 7세 국왕으로부터 로열 빅토리아 훈장 사령관(CVO) 칭호를 받았고, 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왕립 지리학회는 섀클턴에게 금메달을 수여했지만, 공식 기록에는 "우리가 이 메달을 그렇게 크게 만들지 않은 것은 스콧 대령에게 증정하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대중에게 섀클턴은 영웅이었지만, 그가 기대했던 부는 실현되지 않았다. 늘어난 원정 비용과 채무 보증에 대한 대응은, 늦긴 했지만 정부가 2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지원했기에 재정적 어려움 없이 끝낼 수 있었다.
님로드 원정의 최남단 기록은 3년 후인 1911년 12월 15일,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하면서 깨졌다. 섀클턴은 아문센으로부터 "난센이 북에 있다면, 섀클턴이 남에 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후 섀클턴의 야망은 남극 대륙 횡단에 집중되었고, 1914–1917년 제국 남극 횡단 탐험을 통해 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섀클턴은 남극 탐험의 영웅 시대의 주요 인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5. 2. 탐험의 과학적 성과
님로드 탐험은 지질학, 기상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비어드모어 빙하의 발견은 남극점 도달을 위한 새로운 루트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1909년 3월 23일, 어니스트 섀클턴은 뉴질랜드에 상륙하여 런던 ''데일리 메일''에 2,500단어 분량의 보고서를 전보로 보냈다. 그는 이 신문과 독점 계약을 맺고 있었다. 섀클턴이 프리초프 난센과 로알 아문센을 포함한 탐험가들로부터 끊임없는 찬사를 받는 가운데, 왕립 지리학회(RGS)의 반응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전 회장 클레멘츠 마컴 경은 섀클턴이 주장한 위도에 대한 불신을 개인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6월 14일, 섀클턴은 런던의 채링크로스 역에서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왕립 지리학회 회장 레너드 다윈과 다소 마지못해 참석한 로버트 팰컨 스콧도 있었다.
섀클턴은 에드워드 7세 국왕으로부터 로열 빅토리아 훈장 사령관(CVO) 칭호를 받았고, 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왕립 지리학회는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했지만, 분명히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한 관계자는 "우리는 그 메달을 스콧 선장에게 수여한 것만큼 크게 만들 생각은 없다"고 기록했다.
1909년에 케이프 로이즈에 남겨진 여러 개의 거의 손상되지 않은 위스키와 브랜디 상자가 2010년에 증류 회사에 의한 분석을 위해 회수되었다. 발견된 특정 브랜드에 대한 빈티지(이후 손실됨) 공식의 부활이 판매 제안되었으며, 수익금의 일부는 잃어버린 술을 발견한 뉴질랜드 남극 유산 신탁에 기부되었다.
5. 3. 탐험의 유산
님로드 원정은 이후 남극 탐험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어니스트 섀클턴의 리더십은 극한 상황에서의 위기 극복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09년 3월 23일, 섀클턴은 뉴질랜드에 상륙하여 런던의 데일리 메일에 2,500단어 분량의 보고서를 전보로 보냈으며, 이 신문과 독점 계약을 맺고 있었다. 프리초프 난센과 로알 아문센을 비롯한 탐험가들은 섀클턴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왕립 지리학회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전 회장 클레멘츠 마컴 경은 섀클턴이 주장한 최남단 기록에 대해 불신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14일, 섀클턴은 런던 채링크로스 역에서 왕립 지리학회 회장 레너드 다윈과 스콧 대령을 포함한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섀클턴의 최남단 기록(남위 88° 23')은 1911년 12월 15일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섀클턴은 아문센으로부터 "난센이 북극에 한 일은 섀클턴이 남극에 한 일과 같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섀클턴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을 통해 남극 대륙 횡단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극 탐험의 영웅 시대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님로드 원정대의 다른 구성원들인 에지워스 데이비드, 애덤스, 더글러스 모슨, 레이먼드 프리스틀리는 모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모슨은 1911~13년 호주 남극 탐험을 이끌었고, 프리스틀리는 테라 노바 탐험에 과학팀원으로 참여했다. 프랭크 와일드는 제국 남극 횡단 탐험과 섀클턴-로웨트 탐험에서 섀클턴의 부사령관을 맡았으며, 1922년 섀클턴이 사우스조지아 섬에서 사망한 후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님로드 원정대가 사용했던 님로드 호는 남극에서 귀환한 지 10년 후인 1919년 1월 31일 북해에서 좌초되어 파괴되었고, 12명의 선원 중 2명만이 살아남았다.
1909년 케이프 로이즈에 남겨졌던 위스키와 브랜디 상자가 2010년에 회수되어 분석되었고, 뉴질랜드 남극 유산 신탁의 기금 마련을 위해 복제품이 판매되었다.
6. 한국과의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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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List of Everest Fatalities
https://www.coola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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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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