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테라노바 원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테라노바 원정은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로버트 팰컨 스콧이 이끈 남극 탐험으로, 남극점 정복과 과학 연구를 목표로 했다. 스콧은 개, 모터 썰매, 조랑말을 활용한 혼합 수송 전략을 사용했으나, 악천후, 장비 문제, 보급 부족 등으로 인해 남극점 도달 후 귀환 중 스콧과 대원 4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다. 탐험 과정에서 빅토리아 랜드 탐험, 케이프 크로지어 겨울 여정, 서부 지질 탐험 등 다양한 과학적 연구가 수행되었으며, 남극점 탐험 경쟁에서 로알 아문센에게 뒤쳐졌다. 원정 이후 스콧의 리더십과 탐험 실패 원인을 두고 논쟁이 있었으며, 과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말로 인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11년 남극 - 아문센의 남극점 원정
    로알 아문센이 이끈 남극점 원정은 1911년 12월 14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며 극지 탐험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 1912년 남극 - 아문센의 남극점 원정
    로알 아문센이 이끈 남극점 원정은 1911년 12월 14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며 극지 탐험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테라노바 원정

2. 배경

로버트 팰컨 스콧은 1904년 ''디스커버리''가 남극에서 귀환한 후 해군 임무를 재개했지만, 남극으로 돌아가 남극점 도달을 목표로 삼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디스커버리 탐험은 남극의 과학적, 지리적 지식을 크게 늘렸지만, 남쪽으로는 남위 82도 17분에 머물렀고, 그레이트 아이스 배리어를 건너지는 못했다.[1] 1909년,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의 님로드 탐험이 남극점에 거의 도달했지만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섀클턴은 맥머도 해협 근처 기지에서 출발하여 그레이트 아이스 배리어를 건너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남극 고원으로 향하는 루트를 발견하고 남극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위 88도 23분, 남극점까지 약 180.25km 접근한 지점에서 퇴각해야 했다.[2] 스콧은 맥머도 해협 지역을 자신의 "작업 현장"이라고 말하며 우선 사용권을 주장했고,[3] 섀클턴이 그 지역을 기지로 사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에 대한 위배 행위라고 주장했다.[4] 이 일로 두 탐험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스콧에게는 섀클턴을 뛰어넘겠다는 결의를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5]

스콧은 다음 탐험을 준비하면서 다른 극지 탐험 원정이 계획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탐험대가 곧 출범할 예정이었다. 더글러스 모슨이 지휘하는 호주 탐험대는 1911년에 출발했지만, 대륙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다.[7] 한편, 강력한 라이벌인 로알 아문센도 남극 탐험 계획을 발표했다.[9][10]

2. 1. 디스커버리 탐험의 영향

로버트 팰컨 스콧은 RRS ''디스커버리''가 1904년 남극에서 돌아온 후 해군으로 복귀했지만, 남극으로 돌아가 남극점 정복을 목표로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디스커버리'' 탐험은 남극의 과학적 및 지리적 지식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남쪽으로는 82° 17'까지만 도달했고, 거대한 얼음 장벽을 횡단하지는 못했다.[1]

1909년,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의 ''님로드'' 탐험이 남극점 도달에 거의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섀클턴은 맥머도 해협 근처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얼음 장벽을 건너, 비어드모어 빙하를 통해 극지 고원으로 가는 경로를 발견하고 남극점으로 향했다. 그는 88° 23' S에서 목표 지점으로부터 약 180.25km 미만을 남겨두고 귀환해야만 했다.[2] 스콧은 맥머도 해협 지역을 자신의 "활동 구역"으로 주장했고,[3] 섀클턴이 이 지역을 기지로 사용한 것은 약속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했다.[4] 이로 인해 두 탐험가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스콧은 섀클턴의 업적을 뛰어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5]

2. 2. 남극점 경쟁 심화

로버트 팰컨 스콧은 1904년 RRS ''디스커버리''의 남극 탐험에서 돌아온 후 해군에 복귀했지만, 남극점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1] 디스커버리 탐험은 남극의 과학적, 지리적 지식을 크게 넓혔지만, 남쪽으로는 남위 82° 17'까지만 도달했고, 거대한 얼음 장벽은 넘지 못했다.[2]

1909년,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의 님로드 탐험대가 남극점에 거의 도달했다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섀클턴은 스콧의 ''디스커버리''호 정박지 근처인 맥머도 해협에서 출발해 거대한 얼음 장벽을 건너 비어드모어 빙하를 통해 극지 고원으로 가는 경로를 발견하고 남극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섀클턴은 남위 88° 23', 남극점까지 100 지리 마일(약 180.25km)을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다.[3] 스콧은 맥머도 해협을 자신의 "활동 구역"이라 주장했고,[4] 섀클턴이 이 지역을 기지로 쓴 것은 스콧에게 한 약속을 어긴 것이라 여겼다.[5] 이 일로 두 탐험가 사이는 나빠졌고, 스콧은 섀클턴의 업적을 넘어서기로 결심했다.[6]

스콧은 다음 탐험을 준비하면서 다른 극지 탐험 계획도 알게 되었다. 일본 탐험대가 계획 중이었고,[7] 더글러스 모슨이 이끄는 오스트랄라시아 남극 탐험은 1911년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남극 대륙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할 것이었다.[8] 또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도 남극 탐험 계획을 발표했다.[9][10]

3. 탐험 준비

로버트 팰컨 스콧남극점 정복을 목표로 테라노바 원정을 준비했다. 이 원정은 민간 사업으로 조직되어 자금과 물품을 지원받았다.

스콧은 개, 모터 썰매, 조랑말을 활용하는 복합적인 수송 전략을 세웠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님로드 탐험에서 조랑말이 유용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고, 궤도차량을 개발하여 모터 견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인력으로 극지 고원을 이동할 계획이었다.[7]

원정은 왕립학회왕립지리학회의 지원 없이 민간 사업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스콧은 총 비용 40000GBP 중 절반을 정부 보조금으로, 나머지는 대중의 기부와 대출로 조달했다.[5][6] 탐험대는 또한 여러 회사로부터 물품과 장비를 무상으로 제공받았다.[8] 자금 모금은 스콧이 주로 담당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도 계속되었다.[9]

옥소(Oxo) 식품 회사는 탐험대의 많은 상업적 후원사 중 하나였다.


가장 큰 비용은 12500GBP에 테라노바 호를 구입하는 것이었다.[6] 스콧은 화이트 엔사인 아래 해군 함선으로 항해하기 위해 왕립 요트 전대의 회원이 되었고, 이를 통해 탐험대에 해군 훈련을 부과하고 무역 위원회 규정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었다.[11]

스콧은 원정의 주된 목적을 "남극점에 도달하여 대영 제국이 그 영예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밖에도 과학과 지리학적 목적이 있었다. 수석 과학자 윌슨은 과학적 작업이 원정의 주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윌슨은 디스커버리 탐험 때부터 케이프 크로저의 펭귄 서식지 조사를 계속하고, 지질학, 자기학, 기상학 연구를 "전례 없는" 규모로 할 계획이었다. 또한 킹 에드워드 7세 반도를 탐험하고, 빅토리아 랜드를 탐험할 계획도 있었다.

3. 1. 탐험대 인원 구성

테라노바 원정대는 예비 인원을 포함하여 총 65명의 육상 및 선상 부대로 구성되었다.[7] 8,000명의 지원자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이 중에는 디스커버리 탐험에 참가했던 7명의 베테랑과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어니스트 섀클턴과 동행했던 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904년 ''디스커버리'' 구조 작전에서 ''모닝''의 항해사였던 에드워드 "테디" 에반스 대위는 스콧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에반스는 독자적인 원정대 구성을 포기하고 재정적 지원도 스콧에게 넘겼다.

영국 해군성이 이 원정대에 파견한 영국 해군 인원으로는 해리 페넬 대위가 항해사가 되어 육상 부대가 상륙한 후 배의 지휘를 맡게 되어 있었다. 이 외에 조지 머레이 레빅과 에드워드 L. 앳킨슨이라는 2명의 군의관이 있었다. 전 해군 장교인 빅터 캠벨은 "더 위키드 메이트(악당)"라고도 불렸으며, 스키 기술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에드워드 7세 랜드를 탐험하는 대를 이끌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영국 해군이 아닌 장교 2명이 지명되었다. "버디"라고 불린 헨리 로버트슨 바워스는 왕립 인도 해병대의 대위였고, 로렌스 오츠("타이터스")는 영국 육군 제6 용기병대의 대위였다. 오츠는 개인적으로도 부유한 사람이었고, 대원에 자원하여 그 자금으로 1000GBP를 기부했다.

해군 본부는 해군 부사관 이하의 인원도 대부분 제공했다. 그 중에는 남극 베테랑인 에드가 에반스, 톰 크리언, 윌리엄 래쉴리가 있었다. 또한 본대의 해원에는 패트릭 케오한과 로버트 포드, 토마스 클리솔드(요리사)와 프레데릭 후퍼(스튜어드)가 있었다. 불가리아인 드미트리 기레프(개 조련사)와 러시아인 안톤 오멜첸코(조련사)도 상륙 부대에 합류했다.

과학 관측대를 이끌 사람으로 스콧은 에드워드 윌슨을 수석 과학자로 지명했다. 윌슨은 대원 중에서도 스콧의 신임이 두터웠다. 디스커버리 탐험 때는 스콧과 함께 당시 최남단 기록을 세운 행군에 동행했다. 자격을 갖춘 의사 팀도 있었는데, 스콧의 전기 작가 데이비드 크레인의 말에 따르면 "극지 탐험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 그룹"이었다. 그 중에는 후에 뛰어난 공적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조지 심슨 기상학자, 캐나다인 의사 찰스 라이트, 지질학자 프랭크 데베넘과 레이먼드 프리스틀리가 있었다. 지질학자 T. 그리피스 테일러,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리엄 넬슨, 동물학 조수 앱슬리 체리-가라드도 과학자 팀이었다. 체리-가라드는 과학적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윌슨이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체리-가라드도 오츠와 마찬가지로 1000GBP를 기부했다. 처음에는 스콧에게 거절당한 후 그 기부를 그대로 두는 것을 인정받아 그 일로 인해 스코트의 판단이 바뀌게 되었다. 스콧의 전기 작가 데이비드 크레인은 체리-가라드를 "원정대의 후일 통역, 역사가, 양심"이라고 표현했다. 허버트 폰팅은 원정대의 사진 작가였고, 그의 사진은 쾌활한 시각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프리드쇼프 난센의 조언에 따라 스코트는 젊은 노르웨이 스키 전문가 트리그브 그란을 고용했다.

3. 2. 수송 전략

스콧은 개, 모터 썰매, 조랑말을 활용하는 복합적인 수송 전략을 세웠다.[7] 개 팀은 세실 메어스가, 모터 썰매는 님로드 탐험에서 모터 전문가였던 버나드 데이가 담당했다.[7] 조랑말 담당은 오츠였으나, 1910년 5월에야 탐험대에 합류했고, 스콧은 말에 대해 잘 모르는 메어스에게 조랑말 구매를 지시하여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7]

어니스트 섀클턴은 1907년-1909년 탐험에서 남극에 "극지화된" 자동차를 도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조랑말을 활용하여 비어드모어 빙하 기슭까지 수송했다.[7] 스콧은 조랑말이 섀클턴에게 유용했다고 믿었고, 궤도차량(설상차전차의 전신)을 개발하여 모터 견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7] 스콧은 인력수송으로 극지 고원을 이동하려 했다.[7] 모터나 동물은 장벽을 가로질러 짐을 운반하여, 사람들이 빙하와 고원 단계를 위해 체력을 비축하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실제로 모터 썰매는 잠시 동안만 유용했고, 조랑말은 나이와 열악한 상태 때문에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7] 스콧은 ''디스커버리'' 탐험 경험 때문에 개를 불신했지만,[7] 그의 저술에 따르면 적절한 사람만 있다면 개의 효과를 인지하고 있었다.[7] 탐험이 진행되면서 스콧은 개의 능력에 점차 감탄했다.[7]

3. 3. 자금 조달

디스커버리 탐험과 달리, 테라노바 원정은 왕립학회왕립지리학회(RGS)와 같은 기관의 지원 없이 민간 사업으로 조직되었다. 스콧은 총 비용을 40000GBP로 추산했으며,[5] 이 중 절반은 정부 보조금으로 충당되었다.[6] 나머지는 대중의 기부와 대출로 조달되었다.[7] 탐험대는 또한 우호적인 상업 회사로부터 다양한 물품과 장비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지원을 받았다.[8]

자금 모금 작업은 주로 스콧이 수행했으며, 테라노바가 영국 해역을 떠난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계속되어 그의 시간과 에너지를 상당 부분 소모시켰다.[9]

가장 큰 단일 비용은 12500GBP에 테라노바(''Terra Nova'') 호를 구입하는 것이었다.[6] ''테라노바''는 이전에 두 번째 ''디스커버리'' 구호 작전의 일환으로 남극에 있었었다.[10] 스콧은 화이트 엔사인 아래 해군 함선으로 항해하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왕립 요트 전대의 회원이 되기 위해 100GBP를 지불했다. 그리하여 그는 탐험대에 해군 훈련을 부과할 수 있었고, 전대의 등록된 요트로서 ''테라노바''는 무역 위원회 규정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었다.[11]

3. 4. 탐험 목표

로버트 팰컨 스콧은 RRS ''디스커버리''가 1904년 남극에서 돌아온 후 해군에 복귀했지만, 남극에 다시 돌아가 남극점을 정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9] 디스커버리 탐험은 남극의 과학적, 지리적 지식을 크게 넓혔지만, 남쪽으로는 82° 17'까지만 도달했고, 로스 빙붕을 횡단하지는 못했다.

1909년,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의 님로드 탐험이 남극점에 거의 도달했지만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섀클턴은 맥머도 해협 근처에서 출발하여 비어드모어 빙하를 통해 극지 고원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남극점으로 향했지만, 88° 23' S에서 100 지리 마일(약 180.25km) 미만을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다. 스콧은 맥머도 해협을 자신의 "활동 구역"으로 주장했고, 섀클턴이 이 지역을 기지로 사용한 것은 약속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두 탐험가 사이의 관계는 나빠졌고, 스콧은 섀클턴의 업적을 뛰어넘겠다고 결심했다.

스콧은 다음 탐험을 준비하면서 다른 극지 탐험 계획도 알게 되었다. 일본 탐험대가 계획되었고, 더글러스 모슨이 이끄는 오스트랄라시아 남극 탐험이 1911년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대륙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할 것이었다. 로알 아문센도 북극 항해 계획을 발표했다.

스콧은 원정의 주된 목적을 "남극점에 도달하여 대영 제국이 그 영예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밖에도 과학과 지리학적 목적이 있었다. 수석 과학자 윌슨은 과학적 작업이 원정의 주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윌슨은 디스커버리 탐험 때부터 케이프 크로저의 펭귄 서식지 조사를 계속하고, 지질학, 자기학, 기상학 연구를 "전례 없는" 규모로 할 계획이었다. 또한 킹 에드워드 7세 반도를 탐험하고, 빅토리아 랜드를 탐험할 계획도 있었다.

4. 주요 탐험 여정 (1911-1912)

1911년 10월 24일, 모터 썰매 2대를 이용한 모터 팀이 먼저 출발하여 남위 80° 30'까지 보급품을 운반하고 주력 팀을 기다릴 예정이었으나, 11월 1일에 모두 고장났다.[23] 이 때문에 모터 팀은 약 335.66kg의 보급품을 직접 끌고 약 241.40km를 이동해야 했다.[23]

11월 1일, 스콧이 이끄는 주력 팀은 개와 조랑말을 이끌고 케이프 에번스를 출발, 11월 21일에 모터 팀과 합류했다.[24] 스콧은 이동 속도가 예상보다 느려 개들을 더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18]

12월 4일, 탐험대는 비어드모어 빙하로 가는 경로인 게이트웨이에 도착했지만, 눈보라를 만나 12월 9일까지 야영해야 했다.[21] 눈보라가 잦아들자 남은 조랑말들은 계획대로 사살되었고, 그 고기는 귀환 팀을 위한 식량으로 비축되었다. 12월 11일, 세실 미어스와 드미트리 게로프는 개들을 이끌고 기지로 돌아갔다.[22]

일행은 비어드모어 빙하를 오르기 시작했고, 12월 20일에 극지 고원의 시작점에 도달하여 상부 빙하 기지를 설치했다. 12월 22일, 남위 85° 20' 지점에서 스콧은 에드워드 앳킨슨, 앱슬리 체리-가라드, 라이트, 키오한을 귀환시켰다.[23]

남은 여덟 명은 남쪽으로 계속 나아갔고, 1912년 1월 3일, 남위 87° 32' 지점에서 스콧은 최종 남극점 탐험대를 5명(스콧, 에드워드 윌슨, 로런스 오츠, 헨리 로버트슨 바워스, 에드거 에번스)으로 결정하고, 에번스 중위, 윌리엄 래슐리, 톰 크린은 돌아가도록 했다. 애초 4인 기준으로 물자와 식량을 준비했기 때문에, 5인으로 변경하면서 이를 재계산해야 했다.[28]

극지 탐험대는 1912년 1월 9일에 어니스트 섀클턴의 최남단 기록(남위 88° 23')을 경신하며 남극점을 향해 전진했다. 1월 17일, 남극점에 도착했으나, 이미 로알 아문센 팀이 34일 전에 도착한 후였다. 스콧은 "예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환경"이라며 실망감을 기록했다.[25] 1월 18일, 아문센의 텐트와 기록을 확인했다.

스콧은 위치 확인 후 귀환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순조로웠으나, 에드거 에번스와 로런스 오츠의 건강이 악화되었다.[25] 2월 7일, 베어드모어 빙하 하강 중 보급소 위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에드워드 윌슨은 약 13.61kg의 화석 표본을 채취했다.[26] 에번스는 2월 17일 사망했다.[26]

남극 탐험대의 무덤


스콧과 남은 대원들은 귀환길 배리어 구간에서 악천후를 만났다.[28] 3월 17일경, 오츠는 "잠깐 나갔다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오츠의 희생에도 불구, 스콧, 윌슨, 보워스는 3월 20일 1톤 보급소 남쪽 약 17.70km 지점에서 눈보라에 갇혔다. 스콧의 마지막 일기는 1912년 3월 29일, "우리는 끝까지 견디겠지만, ... 마지막은 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4. 1. 1910-1911 시즌

1910년 12월, 뉴질랜드에서 로스해로 출발한 테라노바 호는 1911년 1월 4일 로스섬에 도착했다. 스콧은 케이프 에반스를 탐험 기지로 결정하고, 탐험대의 본부를 설치했다.

1911년 1월 26일, 캠벨 탐험대는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던 중 고래만에서 아문센 탐험대와 마주쳤다.[13] 아문센은 캠벨에게 근처에 캠프를 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으나, 캠벨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스콧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13] 스콧은 이 소식을 듣고도 "두려움이나 공황 없이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며 탐험을 계속 진행할 것을 일기에 기록했다.[13]

허트 포인트에 있는 스콧의 ''디스커버리'' 오두막. 대피소 및 저장소로 사용됨


스콧은 남극점 탐험에 앞서 세이프티 캠프에서 남위 80°까지 보급 기지를 설치하는 계획을 세웠다.[13] 하지만, 조랑말의 건강 문제와 설피 분실, 그리고 좋지 않은 날씨로 인해, 원톤 보급품은 계획보다 약 48.28km 짧은 남위 79°29′에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마리의 조랑말을 잃었지만, 스콧은 틈새에 빠진 개 팀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기도 했다.

1911년 4월 23일부터 해가 뜨지 않는 겨울이 시작되자, 대원들은 에반스 곶의 오두막에서 월동 생활을 시작했다.[16] 이 기간 동안 과학 관측, 장비 정비, 극점 탐험 준비, 다양한 주제의 강의, 축구 경기, 사우스 폴라 타임즈 복간 등의 활동을 했다.[16]

4. 1. 1. 케이프 에반스 기지 건설

1911년 1월 4일, 로스섬에 도착한 ''테라노바''호는 섬 동쪽 끝 케이프 크로지어 주변의 상륙 가능 지점을 탐색한 후,[10] 서쪽 맥머도 해협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이전에 ''디스커버리''호와 ''님로드''호가 상륙했던 곳이다.

스콧은 여러 월동지 후보를 검토한 후, 1902년 헛 포인트 기지에서 북쪽으로 약 약 24.14km 떨어진 "스큐어리"로 기억했던 곳을 선택했다. 스콧은 이곳이 짧은 남극 여름 동안 얼음이 없어 배가 드나들 수 있고, 남쪽 바다가 얼면 헛 포인트와 장벽까지 얼음 위로 쉽게 이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10] 스콧은 이곳을 부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케이프 에반스로 개명했다.

케이프 에반스에서 육상 파티는 하역을 시작했다. 조랑말, 개, 세 대의 모터 썰매(그 중 하나는 하역 중 분실)[11] 및 탐험대의 주요 물품이 하역되었다. 스콧은 배에서 해안으로 물건과 자재를 옮기는 동안 "조랑말의 힘에 놀랐다"라고 기록했다.[12] 약 15.24m 크기의 조립식 오두막이 세워져 1월 18일까지 거주 가능하게 되었다.

4. 1. 2. 아문센 캠프 발견

1911년 1월 26일, 캠벨 탐험대는 배를 타고 동쪽으로 출발했다. 킹 에드워드 7세 랜드 해안에 탐험대를 상륙시키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가 실패한 후, 캠벨은 빅토리아 랜드로 항해하는 선택지를 택했다. 장벽 가장자리를 따라 서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테라 노바''호는 장벽의 만입구인 고래만에 캠프를 차린 아문센의 탐험대와 마주쳤다.[13]

아문센은 예의 바르고 호의적이었으며, 캠벨이 근처에 캠프를 치는 것을 허용하고 개에 대한 도움을 제공했다.[13] 캠벨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탐험대와 함께 케이프 에반스로 돌아갔다. 스콧은 첫 번째 보급품 설치 탐험 중에 2월 22일에 이 소식을 받았다. 체리-개라드의 말에 따르면, 스콧과 그의 탐험대의 첫 번째 반응은 고래만으로 달려가 아문센과 "결판을 내고 싶다"는 충동이었다.[13] 그러나 스콧은 자신의 일기에 이 사건을 차분하게 기록했다. "내 마음에 고정된 것은 단 하나뿐이다. 현명할 뿐 아니라 올바른 과정은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정확히 진행하는 것이다. 두려움이나 공황 없이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13]

4. 1. 3. 보급 기지 설치



첫 번째 시즌의 보급품 설치 목표는 이듬해 봄에 시작될 극지 탐험에 사용할 목적으로 장벽 가장자리인 세이프티 캠프에서 남위 80°까지 일련의 보급품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보급품은 가장 큰 규모가 될 것이며, 원톤 보급품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었다. 이 작업은 12명의 대원, 가장 튼튼한 8마리의 조랑말, 그리고 두 팀의 개들이 수행할 예정이었다. 얼음 상태로 인해 모터 썰매를 사용할 수 없었다.

체리-가라드는 "공황에 가까운 서두름 속에서" 1월 27일에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 진척 상황은 예상보다 느렸으며, 오츠가 노르웨이식 설피 사용을 반대하고 케이프 에반스에 두고 왔기 때문에 조랑말의 성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4일, 일행은 허트 포인트에서 약 64.37km 떨어진 코너 캠프를 설치했는데, 폭풍으로 3일 동안 발이 묶였다.

며칠 후, 행진이 재개된 후 스콧은 가장 약한 세 마리의 조랑말을 집으로 보냈는데, 이 중 두 마리가 도중에 죽었다. 보급품 설치대가 남위 80°에 접근하자, 스콧은 일행이 즉시 북쪽으로 돌아서지 않으면 나머지 조랑말들이 기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스콧은 앞으로 나아가 쓰러지는 조랑말을 고기로 사용하자는 오츠의 조언에 반하여, 원톤 보급품을 의도된 위치보다 약 48.28km 이상 짧은 남위 79°29′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스콧은 틈새에 빠진 개 팀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세이프티 캠프로 돌아갔다. 더 느린 조랑말 일행이 도착했을 때, 동물 중 하나가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고 곧 죽었다. 나중에, 생존한 조랑말들이 허트 포인트 근처의 해빙을 건너는 동안 얼음이 부서졌다. 필사적인 구조 시도에도 불구하고 조랑말 세 마리가 더 죽었다. 보급품 설치 여정을 시작했던 8마리의 조랑말 중 단 두 마리만이 집으로 돌아왔다.

4. 1. 4. 월동 생활

1911년 4월 23일, 해가 뜨지 않는 동계가 시작되어, 대원들은 에반스 곶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스콧의 해군식 방식에 따라 오두막은 포장용 나무 상자로 만들어진 벽으로 구분되어, 장교와 그 외 인원들은 거의 별개의 공간에서 생활했고, 과학자들은 이 점에서 '장교'로 간주되었다.[16] 모두 바쁘게 지냈다. 과학자들은 관측과 측정을 계속했고, 기계류는 분해 수리되어 앞으로의 여정에 대비했다. 남아있는 조랑말들은 매일 운동이 필요했고, 개들도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했다.[16] 스콧은 다가올 극점 탐험을 위해 썰매에 실을 식량과 무게를 계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16] 일상 활동에는 다양한 과목에 대한 정기적인 강의도 포함되었다. 폰팅은 일본에 대해, 윌슨은 스케치에 대해, 오츠는 말 관리에 대해, 지질학자 프랭크 데버넘은 화산에 대해 강의했다.[16]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두막 밖에서 희미한 빛 속에서 축구 경기가 자주 열렸다. 스콧은 "애트킨슨이 지금까지 본 최고의 선수이며, 후퍼, P.O. 에반스, 클린도 매우 훌륭하다"고 기록했다.[17] 디스커버리 호 원정 때 섀클턴이 창간한 『사우스 폴라 타임즈』가 체리-가라드의 편집으로 복간되었다.[16] 6월 6일, 스콧의 43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제가 열렸다. 6월 21일의 두 번째 축제는 동지였으며, 기나긴 극야의 중간 지점이었다.[18]

4. 2. 북방 탐험대

암센의 도착 소식을 케이프 에반스에 있는 스콧에게 보고한 후, 캠벨의 동부 탐험대 (빅터 캠벨, 레이먼드 프리스틀리, 조지 머리 레빅, 조지 P. 애보트, 해리 디카슨, 프랭크 V. 브라우닝)는 '북부 탐험대'가 되었다.[19] 1911년 2월 9일, 그들은 북쪽으로 항해하여 2월 17일 케이프 아데어 근처 로버트슨 만에 도착, 노르웨이 탐험가 카르스텐 보르크그레빈크의 옛 숙소 근처에 오두막을 지었다.[20]

 두 개의 나무 구조물이 펭귄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왼쪽의 더 큰 구조물은 경사진 지붕이 있고 나무 버팀목으로 지지됩니다. 오른쪽의 더 작은 구조물에는 지붕이 없습니다. 눈 덮인 경사면이 배경에 보입니다.
보르크그레빈크의 1899년 케이프 아데어 오두막은 1992년에 촬영되었습니다. 캠벨의 북부 탐험대는 1911-1912년에 근처에서 야영했습니다.


북부 탐험대는 1911년 겨울을 오두막에서 보냈다. 1911-1912년 여름에 그들의 탐험 계획은 해빙 상태와 내륙으로 가는 경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수행될 수 없었다. ''테라 노바''는 1912년 1월 4일 뉴질랜드에서 돌아와 탐험대를 에반스 코브 인근으로 이동시켰는데, 이곳은 케이프 아데어에서 약 약 402.33km 남쪽이고 케이프 에반스에서 약 321.87km 북서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들은 추가 지질학 작업을 완료한 후 2월 18일에 픽업될 예정이었지만, 심한 유빙으로 인해 배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물고기와 물개 고기로 보충해야 하는 빈약한 식량을 가지고 표현할 수 없는 섬에서 파낸 눈 동굴에서 1912년 겨울을 보내야 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혹독한 추위—동상, 이질과 굶주림, 극심한 바람과 낮은 기온, 좁은 공간에서의 고래 기름 난로의 불편함으로 고통받았다.[21]

1912년 4월 17일, 극지 탐험대가 부재한 동안 케이프 에반스를 지휘하던 앳킨슨이 이끄는 탐험대가 캠벨의 탐험대를 구출하러 갔지만 날씨에 의해 격퇴되었다.[22] 북부 탐험대는 얼음 챔버에서 겨울을 견뎌냈고 1912년 9월 30일에 기지 캠프로 출발했다. 그들의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탐험대 전체는 어려운 드라이갈스키 빙설을 건너는 것을 포함한 위험한 여정 끝에 11월 7일 케이프 에반스에 도착했다. 북부 탐험대가 수집한 지질학 및 기타 표본은 1913년 1월 ''테라 노바''에 의해 케이프 아데어와 에반스 코브에서 회수되었다.

4. 3. 서부 지질 탐험대

테라노바 원정의 서부 지질 탐험대는 맥머도 해협 서쪽 해안 지역을 탐사하기 위해 두 차례 파견되었다. 1차 탐험대는 1911년 1월부터 3월까지 맥머도 드라이 밸리와 코틀리츠 빙하 사이 지역을 탐사했다. 2차 탐험대는 1911년 11월부터 1912년 2월까지 버터 포인트 북쪽의 그래나이트 하버 지역을 중심으로 이전 탐험을 확장했다.

4. 3. 1. 1차 지질 탐험 (1911년 1-3월)

맥머도 해협 서쪽 해안 지역, 즉 맥머도 드라이 밸리와 코틀리츠 빙하 사이 지역에 대한 지질 탐사가 1차 지질 탐험의 목표였다.[23] 이 작업은 그리피스 테일러, 데번햄, 라이트, 에드가 에반스로 구성된 탐사대가 수행했다. 1911년 1월 26일, 탐사대는 빅토리아 랜드 해안의 케이프 에반스 맞은편에 있는 버터 포인트에서 ''테라 노바''호에서 내려 상륙했다. 1월 30일, 페라 빙하 지역에 주요 보급 기지를 건설한 후, 드라이 밸리와 테일러 빙하 지역에서 탐사와 측량 작업을 수행했다. 그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코틀리츠 빙하로 향했다. 그곳에서 추가 작업을 수행한 탐사대는 3월 2일에 귀환을 시작하여 3월 14일에 헛 포인트에 도착했다.[23]

4. 3. 2. 2차 지질 탐험 (1911년 11월-1912년 2월)

로버트 포드가 케이프 로버츠에서 블러버 스토브로 물개 튀김 요리를 하고 있다.


이 탐험은 이전 여정에서 수행된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이번에는 버터 포인트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그래나이트 하버 지역에 집중했다.[24] 테일러의 동료는 프랭크 데버넘, 트뤼그베 그란, 로버트 포드였다. 1911년 11월 14일 주 여정이 시작되어, 11월 26일 그래나이트 하버에 도착하기까지 해빙 위를 힘겹게 이동했다. 본부는 지질학 포인트(Geology Point)라고 명명된 장소에 세워졌고, 돌로 된 오두막이 건설되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맥케이 빙하에서 탐험과 측량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빙하 북쪽의 다양한 지형이 확인되고 명명되었다.

탐험대는 1912년 1월 15일에 ''테라노바''호에 의해 수송될 예정이었지만, 배가 접근하지 못했다. 탐험대는 2월 5일까지 기다린 후 남쪽으로 이동했고, 2월 18일에 마침내 배에서 발견되어 얼음에서 구조되었다. 서부 산맥 원정에서 수집된 지질학 표본은 1913년 1월 ''테라노바''호에 의해 회수되었다.[24]

4. 4. 케이프 크로지어 겨울 여정

이 여정은 에드워드 윌슨이 제안했다. 윌슨은 디스커버리 탐험대의 과학 보고서 동물학 부분에서 이 여정의 필요성을 제안했으며, 이전 연구를 계속하길 원했다. 여정의 과학적 목적은 케이프 크로지어 근처의 황제펭귄 산란장에서 초기 배아 단계의 황제펭귄 알을 확보하여 "새의 발달 과정의 특정 지점을 연구"하는 것이었다.[1]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초기 부화 단계의 알을 얻기 위해 겨울 한가운데에 여행을 떠나야 했다. 부차적인 목적은 다가오는 여름의 극지 탐험에 앞서 식량 배급과 장비를 시험하는 것이었다.[2] 로버트 팰컨 스콧은 이를 승인했고, 윌슨, 보워스, 체리-가라드로 구성된 탐험대는 1911년 6월 27일에 출발했다.[3]

앞쪽에 머리가 검고 몸이 하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서 있다. 뒷쪽에는 다른 새가 오른쪽을 보고 있다.
황제펭귄


남극 겨울에 여행하는 것은 이전에는 시도된 적이 없었다. 스콧은 이를 "과감한 모험이지만, 이를 시도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갔다."라고 기록했다.[4] 체리-가라드는 나중에 케이프 크로지어까지 약 96.56km를 가는 데 19일이 걸린 끔찍함을 묘사했다. 장비, 옷, 침낭은 끊임없이 얼어붙었고, 7월 5일에는 기온이 약 -60.6°C 아래로 떨어졌다. 체리-가라드는 "섭씨 영하 109도, 어둠 속에서 얼어붙은 옷을 입고 견뎌야 할 만큼 추웠다."라고 적었다. 종종 하루에 이동하는 거리는 약 1.61km에 불과했다.[5]

수집된 알들


7월 15일 케이프 크로지어에 도착한 후, 탐험대는 눈 블록, 돌, 그리고 지붕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캔버스로 이글루를 지었다.[6] 그들은 펭귄 군집을 방문하여 여러 개의 황제펭귄 알을 수집할 수 있었다.[7] 그 후 그들의 이글루 쉼터는 보퍼트 풍력 계급 11단계의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에 거의 파괴되었다. 폭풍은 또한 귀환 여정 동안 생존을 의존할 텐트도 휩쓸어 갔지만, 다행히도 이것은 약 0.80km 떨어진 곳에서 회수되었다.[8] 탐험대는 8월 1일에 케이프 에번스에 도착하여 귀환 여정을 시작했다.[9] 여행에서 살아남은 세 개의 알은 처음에는 런던 자연사 박물관(사우스켄싱턴)으로 보내졌고, 그 후 에든버러 대학교의 코사 스튜어트의 보고서의 대상이 되었다.[10] 알은 윌슨의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했다.[11]

체리-가라드는 후에 이것을 "세계 최악의 여정"[12]이라고 묘사했고, 이 여정에 대해 쓴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스콧은 겨울 여정을 "매우 훌륭한 성과"[13]라고 불렀고, 식량 배급과 장비에 대한 실험에 매우 만족했다. "우리는 경험이 안내하는 한 완벽에 가깝다."[14]

4. 5. 남극점 탐험 여정

1911년 9월 13일, 스콧은 남극점 탐험 계획을 발표했다. 16명의 탐험대는 모터 썰매, 조랑말, 개를 이용하여 로스 빙붕을 통과하고 비어드모어 빙하에 도달, 개는 기지로 돌려보내고 조랑말은 식량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이후 12명이 세 개 조로 나뉘어 빙하를 오른 후 남극 고원을 횡단하며, 썰매는 사람이 직접 끌어야 했다. 이들 중 한 개 조만이 남극점에 도달하며, 지원조는 특정 위도에서 돌아오고, 마지막 남극점 도달조는 스콧이 행군 중에 결정하기로 했다.[21]

스콧 팀이 남극점으로 출발하기 11일 전인 1911년 10월 20일, 스콧은 개 조련사 미어스에게 신속한 귀환을 위한 명령을 내렸다.

1912년 1월 3일, 스콧은 최종 남극점 탐험대를 5명(스콧, 윌슨, 오츠, 보워스, 에드거 에번스)으로 결정하고, 에번스 중위, 래슐리, 크린은 돌아가도록 했다. 애초 4인 기준으로 물자와 식량을 준비했기 때문에, 5인으로 변경하면서 이를 재계산해야 했다.[28]

1912년 1월 9일, 섀클턴의 최남단 도달 지점(남위 88도 23분)을 넘었다. 7일 후, 목표 지점 약 약 24.14km 부근에서 로알 아문센의 깃발을 발견하고 추월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1월 17일,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이미 아문센 팀이 34일 전에 도착한 후였다. 스콧은 "예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환경"이라며 실망감을 기록했다.[25] 1월 18일, 아문센의 텐트와 기록을 확인했다.

스콧은 위치 확인 후 귀환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순조로웠으나, 에드거 에번스와 로런스 오츠의 건강이 악화되었다.[25] 2월 7일, 베어드모어 빙하 하강 중 보급소 위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에드워드 윌슨은 약 13.61kg의 화석 표본을 채취했다.[26] 에번스는 2월 17일 사망했다.[26]

한편, 에번스 곶 기지에서는 ''테라노바''호가 돌아왔고, 앳킨슨은 스콧을 맞이하는 대신 물자 하역을 결정했다. 앳킨슨은 괴혈병에 걸린 에드워드 에번스를 발견, 긴급 치료했다. 에번스 대위는 괴혈병으로 1톤 보급소에서 썰매로 이송되었다.[26] 2월 18일, 크린이 해트 곶에서 앳킨슨과 디미트리를 발견, 앳킨슨은 구조대를 조직해 2월 22일 에번스를 구조했다. 래슐리와 크린은 앨버트 메달을 받았다.[27] 앳킨슨은 체리-가라드를 남쪽으로 보냈으나, 스콧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28]

스콧과 남은 대원들은 귀환길 배리어 구간에서 악천후를 만났다.[28] 악천후, 어려운 얼음 표면, 오츠의 발 상태 악화로 전진이 늦어졌다.[29] 2월 말 기온 하강,[30] 3월 2일과 9일, 보급소에서 연료 부족을 겪었다.[31] 일일 이동 거리가 약 8.05km 이하로 떨어졌다. 3월 17일경, 오츠는 "잠깐 나갔다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오츠의 희생에도 불구, 스콧, 윌슨, 보워스는 3월 20일 1톤 보급소 남쪽 약 17.70km 지점에서 눈보라에 갇혔다. 스콧의 마지막 일기는 1912년 3월 29일, "우리는 끝까지 견디겠지만, ... 마지막은 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4. 5. 1. 장벽 통과 (남쪽)

1911년 10월 24일, 에번스 중위, 데이, 래쉴리, 후퍼로 구성된 모터 팀은 모터 썰매 2대를 이용하여 케이프 에번스를 출발했다. 이들은 남위 80° 30'까지 보급품을 운반하여 주력 팀을 기다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11월 1일, 모터 썰매 2대가 모두 고장나 약 80.47k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23] 이 때문에 모터 팀은 약 335.66kg의 보급품을 직접 끌고 남은 약 241.40km를 이동해야 했고, 2주 후에 지정된 위도에 도착했다.[23]

11월 1일, 스콧이 이끄는 주력 팀은 개와 조랑말을 이끌고 케이프 에번스를 출발, 11월 21일에 모터 팀과 합류했다.[24] 스콧은 당초 이 단계에서 개들을 기지로 돌려보낼 계획이었으나,[17] 예상보다 이동 속도가 느려 개들을 더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18] 데이와 후퍼는 이 변경 사항을 케이프 에반스에 남아있던 심슨에게 알렸다.

12월 4일, 탐험대는 섀클턴이 장벽에서 비어드모어 빙하로 가는 경로로 명명한 게이트웨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눈보라를 만나 12월 9일까지 야영해야 했고, 빙하 이동을 위해 준비해둔 식량을 소모해야 했다.[21] 눈보라가 잦아들자 남은 조랑말들은 계획대로 사살되었고, 그 고기는 귀환 팀을 위한 식량으로 비축되었다. 12월 11일, 미어스와 디미트리는 개들을 이끌고 기지로 돌아가면서 "모든 것이 밝지는 않지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22]

4. 5. 2. 비어드모어 빙하 등반

일행은 비어드모어 빙하를 오르기 시작했고, 12월 20일에 극지 고원의 시작점에 도달하여 상부 빙하 기지를 설치했다. 12월 22일, 남위 85° 20' 지점에서 스콧은 앳킨슨, 체리-가라드, 라이트, 그리고 키오한을 귀환시켰다.[23] 스콧은 앳킨슨에게 "미어스가 귀국해야 할 경우, 3월에 있을 극지 탐험대의 귀환 여정을 지원하기 위해 두 개의 개썰매 팀을 남쪽으로 데려가라"고 당부했다.[24]

남은 여덟 명은 더 나은 조건 속에서 남쪽으로 계속 나아갔고, 이는 장벽에서 손실된 시간을 만회할 수 있게 해주었다. 12월 30일까지 그들은 섀클턴의 1908–1909년 일정에 "따라잡았다".[27] 1912년 1월 3일, 남위 87° 32' 지점에서 스콧은 극지 탐험대의 구성을 결정했다. 다섯 명(스콧, 윌슨, 오츠, 바우어스, 에드가 에반스)은 계속 전진하고, 에반스 중위, 래쉴리, 그리고 크린은 케이프 에반스로 돌아갈 것이다. 다섯 명을 데리고 가기로 한 결정은 모든 것이 4인 팀을 기준으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무게와 식량을 재계산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28]

4. 5. 3. 남극점 도달

극지 탐험대는 1912년 1월 9일에 섀클턴의 최남단(남위 88° 23') 기록을 경신하며 남극점을 향해 전진했다. 7일 후, 목표 지점에서 약 약 24.14km 떨어진 곳에서 아문센의 검은 깃발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선두를 놓쳤음을 알게 되었다.[25] 그들은 다음 날인 1912년 1월 17일에 남극점에 도착했다. 스콧은 "남극점. 그렇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세상에! 이곳은 끔찍한 곳이고, 우리가 선두를 차지하는 보상 없이 여기까지 고생하며 온 것은 정말 끔찍하다. 그래도 여기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라고 기록했다.

스콧은 여전히 아문센보다 먼저 호주에 있는 전신 케이블 헤드에 소식을 전달하기를 희망하며, "이제 먼저 소식을 전하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이다.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라고 기록했다. 1912년 1월 18일, 그들은 아문센의 텐트와 약간의 보급품,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에게 보내는 편지(아문센은 스콧에게 정중하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를 발견했다. 또한, 아문센이 1911년 12월 14일에 네 명의 동료와 함께 도착했다는 메모도 발견되었다.

4. 5. 4. 마지막 행군

스콧 일행은 남극점을 확인하고 깃발을 꽂은 후 귀환을 시작했다. 처음 3주 동안은 순조롭게 전진했고, 스콧의 일기에는 "훌륭한 행군"이 여러 차례 기록되었다.[25] 그러나 스콧은 대원들의 건강, 특히 에드거 에번스의 심한 동상과 "매우 지쳐 있는"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26] 로런스 오츠의 발 상태는 일행이 비어드모어 빙하 정상에 접근하여 장벽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25]

2월 7일, 하산을 시작했지만 보급 기지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날씨가 잠시 좋아지자 스콧은 반나절 휴식을 명령했고, 에드워드 윌슨은 지질 조사를 하여 약 13.61kg의 화석을 포함한 표본을 썰매에 추가했다.[26] 이 식물 화석들은 나중에 대륙 이동설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다.[26] 에번스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손 부상은 낫지 않았고 심한 동상에 걸렸으며, 얼음 위에서 여러 번 넘어져 머리 부상까지 입은 것으로 보인다. 스콧은 "그는 평소의 자립적인 모습에서 완전히 변했다"고 기록했다.[26] 빙하 아래쪽 부근에서 에번스는 쓰러졌고, 2월 17일에 사망했다.[26]

귀환 행군의 장벽 단계에서 스콧은 개 썰매팀과의 만남 지점인 남위 82° 30' 지점에 예정보다 3일 먼저 도착하여 1912년 2월 27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개들을 만날 가능성, 장소, 시기 등을 항상 논의하고 있다. 이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다. 다음 보급 기지에서 무사할 수도 있지만, 끔찍한 의혹이 있다."[27] 이후 일행은 세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개 썰매팀이 나타나지 않은 점, 예상치 못한 급격한 온도 강하[28], 보급 기지의 연료 부족이었다.[27] 낮은 기온으로 인해 스콧이 "사막 모래 위를 끌고 가는 것"에 비유한 좋지 않은 표면이 만들어졌다.[29]

오츠의 왼쪽 발 동상으로 인해 일행은 더욱 느려졌다.[27] 매일의 행군은 이제 약 8.05km 미만으로 줄어들었고, 이는 기름 부족을 고려할 때 충분하지 않았다.[30] 3월 10일, 개 썰매팀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31] 3월 16일, 에드거 스페이어 경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에서 스콧은 자신이 만남 지점을 지나쳤는지, 그리고 자신이 개 썰매팀에 의해 버려졌다는 의심과 싸웠는지 궁금해했다. 같은 날, "이제 손과 발이 거의 쓸모없게 된" 오츠는 자발적으로 텐트를 떠나 죽음의 길을 걸었다. 스콧은 오츠의 마지막 말이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였다고 기록했다.

오츠의 희생은 팀의 속도를 높였지만, 이미 너무 늦어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특히 스콧의 오른발가락은 동상에 걸리고 있었다. 스콧, 윌슨, 헨리 로버트슨 바워스는 원톤 창고에서 남쪽으로 약 17.70km 떨어진 지점까지 간신히 나아갔지만, 3월 20일 심한 눈보라에 가로막혔다. 매일 전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스콧의 마지막 일기 기록은 1912년 3월 29일로, 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날짜이며,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 매일 우리는 11마일 떨어진 창고로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텐트 밖은 여전히 소용돌이치는 눈보라의 풍경일 뿐이다. 이제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끝까지 버틸 것이지만, 물론 점점 더 약해지고 있으며, 끝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R. 스콧. 마지막 기록. 제발 우리 사람들을 돌봐주세요.

5. 구조 시도 (1912)

1912년 초, 테라노바 원정대의 구조를 위한 노력은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혼선과 악천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스콧은 남극점 탐험 전 개썰매를 이용해 탐험대를 귀환시킬 계획을 세우고 미어스에게 관련 임무를 지시했다.[1] 그러나 미어스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임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앳킨슨은 미어스를 대신해 체리-가라드에게 원톤 데포에 보급품을 운송하고 스콧을 기다리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체리-가라드는 앳킨슨의 "개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는 명령,[1] 원톤 데포의 개 먹이 부족, 악천후 등의 이유로 남쪽으로 더 이동하지 못하고 3월 10일 기지로 돌아왔다.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돌아온 앳킨슨은 기지 캠프 지휘를 맡게 되었으나,[1] 익숙하지 않은 역할에 어려움을 겪었다.[1] 그는 스콧을 만나러 가는 대신 해안 탐사대 하역 작업에 투입되었고,[2] 이는 체리-가라드가 실수라고 평가했다.[3]

2월 13일, 앳킨슨은 드미트리 게로프와 함께 스콧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지만, 악천후로 헛 포인트에 늦게 도착했다. 에반스 중위가 괴혈병으로 쓰러지면서, 앳킨슨은 에반스 구조에 집중해야 했다.[4][5][6] 앳킨슨의 최우선 과제는 에반스를 안전하게 배로 데려가는 것이었다.[7]

체리-가라드가 스콧 일행 없이 돌아오자 불안감은 커졌고, 앳킨슨은 직접 스콧 탐험대를 찾아 나섰다. 3월 26일, 케호인과 함께 썰매를 끌고 출발했지만, 매우 낮은 기온(-40°C) 때문에 3월 30일 코너 캠프에 도착한 후 더는 남쪽으로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8] 앳킨슨은 "내 마음속으로는 [극지] 탐험대가 죽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고 기록했다.[8]

5. 1. 개썰매 동원 명령과 혼선

스콧은 남극점 탐험에 출발하기 전, 개를 이용하여 탐험대를 귀환시킬 준비를 하였다. 미어스에게는 12월 말이나 1월 초에 원톤 데포까지 식량과 개 먹이를 운송하고, 3월 1일경에는 남위 82° 또는 82°30'에서 극지 탐험대를 만나라는 지시를 내렸다.[1] 이 명령의 목적은 탐험대가 ''테라 노바''호가 떠나기 전에 케이프 에반스로 돌아와 극점 정복 소식을 뉴질랜드로 즉시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미어스는 스콧의 탐험에 "역겨움을 느꼈다"며 사임 의사를 밝히고, 아버지의 유산 문제로 빨리 귀국하고 싶어했다. 이로 인해 원톤 데포에 필요한 보급품 운송에 차질이 생겼다.

애킨슨은 미어스를 대신할 사람으로 물리학자 라이트를 고려했으나, 수석 과학자 심슨의 반대로 체리-가라드를 선택했다. 체리-가라드는 원톤 데포에 식량을 보급하고 스콧을 기다렸지만, 스콧이 오지 않자 3월 10일 기지로 돌아갔다.

체리-가라드는 애킨슨으로부터 "개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원톤 데포에 개 먹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더 이동하지 못했다. 그는 날씨가 좋지 않아 더 이상 여행할 수 없었고, 데포를 떠나면 스콧을 놓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애킨슨은 체리-가라드의 판단을 옹호했지만, 체리-가라드는 평생 동안 극지 탐험대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1] 스콧의 명령에는 3월 1일에 남위 82도 또는 82도 30분에서 만나도록 지시되어 있었지만, 애킨슨은 충분한 개 먹이가 없었기 때문에 스콧이 지정한 날짜에 해당 위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출발을 2, 3주 늦춰 에반스 곶과 헛 포인트에서 스콧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5. 2. 앳킨슨의 구조 시도

1월 말,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케이프 에반스로 돌아온 앳킨슨은 그곳의 최고 선임 장교가 되어 기지 캠프를 지휘하게 되었다.[1] 이는 그가 익숙하지 않은 역할이었다.[1] 스콧을 만나러 가는 대신, 앳킨슨은 해안 탐사대를 배에서 하역하는 작업에 투입했다.[2] 체리-가라드는 이 결정이 실수라고 생각했다.[3] 2월 13일, 앳킨슨은 드미트리 게로프와 개썰매 팀과 함께 스콧과 만나기로 예정된 곳으로 출발했지만, 악천후로 인해 헛 포인트에 도착하기까지 지연되었다.

에반스 중위는 괴혈병으로 심각하게 앓게 되었다. 원톤 데포 이후 그는 행진할 수 없었고, 크리언과 래슐리에 의해 헛 포인트에서 남쪽으로 약 56.33km 떨어진 지점까지 썰매에 실려 이동했다.[4] 2월 18일, 크리언은 18시간 만에 약 56.33km의 험난한 지형을 걸어 헛 포인트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앳킨슨과 드미트리를 발견했다.[5] 앳킨슨은 에반스를 구조하는 데 집중했고, 2월 22일, 거의 죽어가는 에반스를 헛 포인트로 데려왔다.[6] 그 후 앳킨슨의 최우선 과제는 에반스를 배로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이었다.[7]

체리-가라드가 스콧 일행 없이 원톤 창고에서 돌아오자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앳킨슨은 극지 탐험대를 다시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3월 26일 케호인과 함께 18일치 식량을 실은 썰매를 직접 끌고 출발했다. 매우 낮은 기온( -40°C ) 속에서 3월 30일 코너 캠프에 도착했지만, 앳킨슨은 날씨, 추위, 그리고 연말이 다가오면서 더 이상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앳킨슨은 "내 마음속으로는 [극지] 탐험대가 죽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고 기록했다.[8]

체리-가라드는 에반스 대위를 기지로 데려왔기 때문에 스콧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중단했다. 어킨슨은 의사로서 에반스를 보기 위해 베이스 캠프에 남아 있어야 했다. 어킨슨은 숙련된 항해사인 라이트를 먼저 스콧과 합류시키려 했지만 기상학자 주임 심슨이 라이트는 과학적 작업에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어킨슨은 이어서 근시인 체리-가라드를 보냈다. 체리-가라드는 항해를 할 수 없었으며, 에레버스 산에서 보이는 범위 내에 있는 남위 79도 30분 지점의 1톤 데포를 재보급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상 남위 82도 또는 82도 30분 지점에서 합류하라는 스콧의 명령에는 맞출 수 없었다.[9] 어킨슨은 이 당시 아직 남극점 원정대의 안전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킨슨이 체리-가라드에게 구두로 전달한 명령은 "가능한 한 빨리 1톤 데포까지 가서 식량을 두고 올 것. 스콧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것"이었으며, "다음 시즌의 개썰매 계획을 위해, 개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었다.[10]

체리-가라드는 디미트리와 개 두 팀과 함께 2월 26일 헛 포인트에서 출발하여 3월 4일에 1톤 데포에 도착하여 추가 식량을 두었다. 스콧은 거기에 없었다. 체리-가라드는 스콧을 기다리기로 했다. 3월 10일, 날씨가 악화되는 가운데, 체리-가라드의 물자도 줄어들고 있었지만, 스콧대가 불과 약 112.65km도 안 되는 곳에서 분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기지로 돌아가기로 했다.[11] 체리-가라드는 그 후의 삶에서, 다른 행동을 취했더라면 남극점 원정대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체리-가라드가 스콧 대원들을 데리고 가지 않고 1톤 데포에서 돌아오자 불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해군 상급 장교로서 에반스 곶을 지휘하고 있던 앳킨슨은 날씨가 허락한다면 남극점 탐험대를 맞이하러 가기로 결정하고, 3월 26일에 키헤인과 함께 썰매에 18일분의 식량을 싣고 사람이 끌어 출발했다. 매우 낮은 기온(-40°C)이었고, 3월 30일까지 코너 캠프에 도착했지만, 앳킨슨의 판단으로는 그 날씨와 기온, 그리고 1년 중 이 시기에는 더 이상 남쪽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앳킨슨은 "내 마음속으로는 남극점 탐험대는 전멸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했다.[8]

6. 수색대 발견 (1912년 10월)

케이프 에반스에 남아 있던 원정대원들은 겨울 동안 과학 연구를 계속했다. 봄이 되자, 애킨슨은 캠벨의 북방 탐험대를 먼저 구출할지, 아니면 극지 탐험대의 운명을 먼저 밝혀낼지를 결정해야 했다. 회의 결과, 스콧의 흔적을 먼저 찾기로 결정했다.[27] 탐험대는 10월 29일 노새 팀과 함께 출발했다.[27] 11월 12일, 탐험대는 원톤 데포에서 남쪽으로 약 17.70km 떨어진 곳에서 스콧, 윌슨, 보워스의 얼어붙은 시신이 든 텐트를 발견했다. 애킨슨은 스콧의 일기를 통해 비극의 전모를 확인했다. 일기, 개인 소지품, 기록을 수집한 후, 텐트를 시신 위에 덮고 그란의 스키로 만든 십자가를 얹은 돌무더기를 세웠다. 탐험대는 오츠의 시신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더 수색했지만, 그의 침낭만 발견했다. 11월 15일, 그들은 오츠가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곳 근처에 돌무더기를 세웠다.[27]

11월 25일 헛 포인트로 돌아온 수색대는 북방 탐험대가 스스로를 구출하여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7] 1913년 2월 10일 이른 아침, 애킨슨과 페넬은 오아마루의 뉴질랜드 항구로 가서, 원정대의 뉴질랜드 대리인인 조셉 킨지에게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내 스콧과 탐험대의 운명을 알렸다. 이후 애킨슨과 페넬은 크라이스트처치 근처의 리틀턴에서 ''테라 노바''를 만났다.[2]

7. 이후

로버트 팰컨 스콧과 그 일행의 손실은 루알 아문센이 남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업적과 함께 영국 대중의 마음속에 큰 영향을 주었다.[28] 오랫동안 스콧은 비난받을 수 없는 비극적 영웅으로 여겨졌고, 탐험대와 가까운 사람들, 특히 사망자들의 친척들 사이의 갈등도 공개되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대중의 인식에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으며, 당시에는 탐험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사망했다.

1979년 롤랜드 헌트퍼드의 저서 ''스콧과 아문센''(''지구의 마지막 장소''로 재출판 및 텔레비전 방영) 출간과 함께 논란이 촉발되었다. 헌트퍼드는 스콧의 권위적인 리더십 스타일과 부적절한 인물 판단을 비판했고, 극지 일행 모두의 죽음을 초래한 일련의 조직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28]

대부분의 극지 역사가들은 스콧과 아문센의 업적을 비교할 때, 아문센의 스키와 개에 대한 기술, 얼음 상태에 대한 전반적인 친숙함, 그리고 비과학적인 탐험에 대한 명확한 초점이 극점 경쟁에서 그에게 상당한 이점을 주었다는 점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28] 스콧은 "우리의 파멸은 분명히 장벽에 있는 [...] 이 갑작스러운 혹독한 날씨의 출현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29]

2017년 8월, 뉴질랜드 단체 Antarctic Heritage Trust는 케이프 아데어에서 테라노바 원정대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과일 케이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31]

7. 1. 관측 언덕 십자가 건립

로버트 팰컨 스콧이 이끌던 테라노바 원정대의 마지막 몇 주 동안, 탐험대의 선임 해군 장교였던 캠벨이 지휘를 맡았다. 1913년 1월 18일 ''테라 노바''호가 도착하기 전, 맥머도 기지의 관측 언덕 경사면에는 큰 나무 십자가가 세워졌다. 이 십자가는 헛 포인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졌으며, 다섯 명의 사망 대원 이름과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의 구절인 "노력하고, 찾고, 발견하고, 굴복하지 않으리라"가 새겨졌다.[28]

 평평한 언덕 꼭대기, 낮은 경사면에는 눈이 있고, 앞쪽에는 바다가 있으며, 하늘에는 외로운 새가 날고 있다
1913년 1월에 ''테라 노바'' 기념 십자가가 세워진 헛 포인트가 내려다보이는 관측 언덕

7. 2. 스콧 평가 논쟁

로버트 팰컨 스콧을 둘러싼 논란은 영국 대중의 인식 변화와 함께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오랫동안 스콧은 비극적 영웅으로 여겨졌으나, 1970년대 이후 그의 리더십과 탐험 실패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등장했다.

1979년, 롤랜드 헌트퍼드는 저서 《스코트와 아문센》에서 스콧의 권위주의적인 리더십 스타일과 부적절한 인물 판단을 비판하며, 탐험 실패의 책임을 스콧에게 돌렸다.[28] 이 주장은 스콧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라누프 파인스는 헌트퍼드의 주장에 직접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고, 수잔 솔로몬은 스콧을 패배시킨 기상 조건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데이비드 크레인은 2005년 스콧의 전기를 출간했으며, 카렌 메이는 스콧이 개 팀을 운용하여 기지 귀환을 서두르라는 명령을 어긴 점을 지적했다.[29]

대부분의 극지 역사가들은 스콧과 루알 아문센을 비교할 때, 아문센이 스키와 개를 다루는 기술, 얼음에 대한 지식, 비과학적인 탐험에 대한 명확한 초점 등에서 유리했다고 평가한다.[28] 스콧은 탐험 실패의 원인을 조랑말 수송의 초기 손실, 기상 조건, 연료 부족, 에반스와 오츠의 질병 등으로 분석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장벽에서의 갑작스러운 혹독한 날씨 변화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스콧은 "아무도 비난할 사람이 없으며, 우리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제안은 없기를 바란다"고 썼지만,[29] 쳬리-가라드는 "모든 문제는 '만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언급하며, 다른 결정과 상황이 재앙으로 이어졌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29]

7. 3. 테라노바 호 침몰

로버트 팰컨 스콧과 그 일행의 죽음은 영국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롤랜드 헌트퍼드의 저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스콧은 비극적 영웅으로 여겨졌다.[3] 1943년 9월 13일, 그린란드에서 보급품을 운반하던 중 손상된 테라노바 호는 그린란드 남쪽 해안에서 총격을 받고 불태워져 침몰했다.[5] 테라노바 호의 침몰 잔해는 2012년에 발견되었다.[5]

8. 과학적 유산

테라노바 원정대의 과학적 성과는 스콧과 대원들의 사망으로 인해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남극 과학팀이었던 12명의 과학자들은 동물학, 식물학, 지질학, 빙하학, 기상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을 했다.[4] ''테라노바'' 호는 2,100점 이상의 식물, 동물, 화석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이 중 400점 이상이 과학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호주, 뉴질랜드, 아프리카, 인도에서도 발견된 화석 식물 ''글로소프테리스''의 발견은 남극 대륙의 기후가 한때 나무를 지탱할 만큼 따뜻했으며, 남극 대륙이 한때 다른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뒷받침했다.[5][6] 원정 전에 빙하는 유럽에서만 연구되었다.[6] 수집된 기상 데이터는 20세기 초 가장 긴 연속 기상 기록으로, 현재의 기후 변화 평가에 대한 기준을 제공했다.[4] 1920년, 전 ''테라노바'' 호의 지리학자 프랭크 데벤햄과 지질학자 레이먼드 프리슬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극지 연구 관련 주요 도서관을 소장하고 있는 스콧 극지 연구소를 설립했다.[6]

참조

[1] 웹사이트 Scott of the Antarctic could have been saved if his orders had been followed, say scientists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blog 2012-12-30
[2] 뉴스 Terra Nova Arrives at Oamaru http://www.nzhistory[...] 2012-09-09
[3] 뉴스 Scott's wrecked ship Terra Nova found off Greenland https://www.bbc.co.u[...] 2012-08-16
[4] 간행물 Antarctica: Scientists to the end 2012-01-19
[5] 뉴스 Researchers praise Scott's legacy https://www.bbc.com/[...] 2012-01-17
[6] 뉴스 The Scott expedition: how science gained the pole position https://www.telegrap[...] 2011-06-21
[7] 서적 Listed in {{harvnb|Huxley, ''Scott's Last Expedition'', Vol. I | pp=xxi–xxii}}
[8] 서적 See {{harvnb|Huxley, ''Scott's Last Expedition'', Vol. II | pp=488–89}}
[9] 서적 Edward Wilson letter, quoted in {{harvnb|Crane|p=398}}
[10] 서적 Huxley, L. (ed.), pp. 81–85
[11] 서적 Huxley, L. (ed.), pp. 106–07
[12] 서적 Huxley, L. (ed.), p. 99
[13] 서적 Huxley, L. (ed.), pp. 187–88
[14] 서적 Cherry-Garrard|pp=167–70. Wilson thought it an "insane risk" – {{harvnb|Preston|p=144}}
[15] 서적 Bowers's account of the incident, {{harvnb|Cherry-Garrard|pp=182–196}}
[16] 서적 Huxley, L. (ed.), pp. 292–94, p. 316
[17] 서적 Huxley, L. (ed.), p. 259
[18] 서적 Huxley, L. (ed.), pp. 304–05, pp. 324–28
[19] 서적 Huxley, L. (ed.), p. 112
[20] 서적 Huxley, L. (ed.), p. 126
[21] 서적 Huxley, L. (ed.), pp. 134–35
[22] 서적 Huxley, L. (ed.), pp. 401–02
[23] 서적 See Scott's instructions, {{harvnb|Huxley, ''Scott's Last Expedition'', Vol. II | pp=184–85}}
[24] 서적 Scott's instructions; {{harvnb|Huxley, ''Scott's Last Expedition'', Vol. II | pp=222–23}}
[25] 서적 Huxley, ''Scott's Last Expedition'', Vol. I | p=545. The words "to get the news through first" were omitted for Scott's published diary. {{harvnb|Huntford|p=481}}
[26] 서적 Lashly's diary, quoted in {{harvnb|Cherry-Garrard|pp=442–62}}
[27] 뉴스 Terra Nova Arrives at Oamaru http://www.nzhistory[...] 1913-02-10
[28] 서적 Crane|p=426; {{harvnb|Preston|p=221}}
[29] 뉴스 Scott of the Antarctic could have been saved if his orders had been followed, say scientists http://www.telegraph[...] 2012-12-31
[30] 뉴스 Scott's wrecked ship Terra Nova found off Greenland http://www.bbc.co.uk[...] 2012-08-16
[31] 뉴스 南極から100年前のフルーツケーキが発見される 金属ケース内で「完全に保存」され、今でも食用可能 https://nlab.itmedia[...] 2017-08-0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