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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토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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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마토리번은 호리 히데마사의 동생인 호리 도시시게가 1622년 히타치국 니이하리 군에 1만 석의 영지를 받아 세운 번이다. 도시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요직을 역임하며 영지를 늘렸으나, 3대 번주 호리 미치치카가 가신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인해 1679년 폐지되었다. 이후 호리 가문은 미치치카의 동생인 호리 토시오가 3천 석의 영지를 받아 존속했으며, 다마토리 촌은 호리 가문의 영지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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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리 도시시게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오반가시라, 지샤 부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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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토리번
개요
정식 명칭 (한자)玉取藩 (다마토리 번)
위치히타치국 니하리군, 시라카와군, 나메카타군
번주 가문야마자키가
등급후다이 다이묘
석고1만 석
역사
입번야마자키 이에하루
폐번메이지 시대
지리
위치무쓰국 시라카와군 (현재의 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 야마쓰리정)을 중심으로, 히타치국 니하리군, 나메카타군 내에 영지를 가짐
번주
역대 번주야마자키 이에하루
야마자키 요시노리
야마자키 가쓰미쓰
야마자키 도시시게
야마자키 하루타카
야마자키 하루요시
야마자키 아쓰타카
야마자키 나가타카
야마자키 미쓰타카
가신
가신야마자키 씨 가신단

2. 번의 역사

호리 도시시게는 쇼인반가시라(書院番頭), 오반가시라(大番頭), 지샤부교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4천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간에이 15년 도시시게 사후, 장남 호리 도시나가가 가독을 이었고, 동생 호리 도시나오(堀利直일본어)에게 2천 석을 분할해 주었다. 도시나가는 친아들이 없어 호리 미치치카를 양자로 들여 만지 원년 윤 12월에 가독을 잇게 했다. 그러나 엔포 7년 12월 11일, 미치치카는 발광하여 가신을 살해했고, 막부 명령으로 영지가 몰수되어 다마토리 번은 폐지되었다. 이후 다마토리 번 호리 가문은 미치치카의 친동생이자 양자인 호리 도시오(堀利雄일본어)가 3천 석의 고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가 되면서 가문 존속을 허락받았다.

2. 1. 성립 배경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호리 히데마사의 동생 호리 도시시게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가문의 인질로 있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부름을 받아 8천 석의 영지를 받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1614년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의 여파로 오쿠보 다다치카가 실각하면서, 도시시게는 다다치카의 인척이었던 관계로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에게 신병이 맡겨져 시모쓰케국 우쓰노미야 번 내에 칩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사카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사면되어, 새로 히타치국 니이하리 군(新治郡|신치 군일본어) 내의 1만 석 영지를 받고 다마토리 번을 세웠다.

2. 2. 번의 성립과 폐지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호리 히데마사의 동생 호리 도시시게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가문(徳川氏일본어)의 인질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부름을 받아 8천 석의 영지를 받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게이초 19년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大久保長安事件일본어)으로 오쿠보 다다치카가 실각하자, 도시시게는 다다치카의 인척이었던 관계로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에게 신병이 맡겨져 시모쓰케국 우쓰노미야 번 내에 칩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사면되었고, 히타치국 니이하리 군(新治郡일본어) 내의 1만 석 영지를 받고 다마토리 번을 세웠다.

도시시게는 이후 지샤부교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4천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간에이 15년 도시시게가 사망한 후에는 장남 호리 도시나가가 가독을 이었다. 이때 동생 호리 도시나오(堀利直일본어)에게 2천 석을 분할해 주었다. 도시나가는 친아들이 없어 호리 미치치카를 양자로 들여 만지 원년12월에 가독을 잇게 하였다. 그러나 미치치카는 엔포 7년 12월 11일에 발광하여 가신을 살해, 막부의 명령으로 영지가 몰수되어 다마토리 번은 폐지되었다. 이후 다마토리 번 호리 가문은 미치치카의 친동생이자 양자였던 호리 도시오(堀利雄일본어)가 3천 석의 고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가 되면서 가문의 존속을 허락받았다.

2. 3. 폐번 이후

1658년 호리 도시나가가 사망한 후, 호리 미치치카가 양자로서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미치치카는 1679년 12월 11일에 발광하여 가신을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막부는 미치치카의 영지를 몰수하였고, 다마토리 번은 폐지되었다.

이후 다마토리 번 호리 가문은 미치치카의 친동생이자 양자였던 호리 도시오가 3천 석의 고타이요리아이가 되면서 가문의 존속을 허락받았다. 호리 도시오는 이후 야마다 부교, 시모다 부교(재임 중 관청이 우라가로 이전했기 때문에 초대 우라가 부교가 됨)를 역임했다. 하타모토가 된 다마토리 호리 가문은 막말까지 다마토리의 영주로 이어졌다.

3. 역대 번주

3. 1. 호리 가문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호리 히데마사의 동생 호리 도시시게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가문의 인질로 있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부름을 받아 8천 석의 영지를 받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게이초 19년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의 여파로 오쿠보 다다치카가 실각하면서, 도시시게는 다다치카의 인척이었던 관계로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에게 신병이 맡겨져 시모쓰케국 우쓰노미야 번 내에 칩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사카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사면되어, 새로 히타치국 니이하리 군 내의 1만 석 영지를 받고 다마토리 번을 세웠다.

도시시게는 그 후 쇼인반가시라, 오반가시라, 지샤부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이 기간 동안 4천 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간에이 15년 도시시게가 사망한 후에는 장남 호리 도시나가가 가독을 이었고, 이때 동생 호리 도시나오에게 2천 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도시나가에게는 친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호리 미치치카를 양자로 맞아들여 만지 원년 윤 12월에 가독을 잇게 하였다. 그러나 미치치카는 엔포 7년 12월 11일에 발광하여 가신을 살해하였고, 결국 막부의 명령으로 영지가 몰수되어 다마토리 번은 폐지되었다. 이후 다마토리 번 호리 가문은 미치치카의 친동생으로 그의 양자였던 호리 도시오가 3천 석의 고타이요리아이가 되면서 가문의 존속을 허락받았다.

외様
1만 석 → 1만 4000석 → 1만 2000석도시게 → 도시나가 → 미치카네


4. 번의 영지

1622년(겐나 8년), 호리 도시시게는 사면을 받고 히타치국니하리군에서 1만 석을 받았다. 『간세이 중수 제보』에서는 "니하리군 쓰치우라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쿠가와 실기』에서는 "히타치의 내"라고만 언급하고 있으며, 『무가권징기』에서는 3대 번주 호리 미치카의 소령에 대해 "히타치 내의 다마토리 및 안보 가즈사 내를 영유"라고 기록하고 있다.

1633년(간에이 10년)에는 오미국아자이군, 아와국나가사군, 가즈사국모다군에서 4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4000석이 되었다.

1638년(간에이 15년) 호리 도시시게가 사망하자 장남 호리 도시나가가 가독을 이었으나, 동생 호리 도시나오에게 2000석을 분여하여 1만 2000석이 되었다.

1679년(엔포 7년), 호리 미치카가 "광기"하여 가신을 살해한 사건으로 12월 11일 소령이 몰수되어 다마토리번은 폐번되었다.

1664년(간분 4년) 시점의 번령은 다음과 같다.

국명군명촌 수
히타치국니하리군13개 촌
오미국아자이군6개 촌
아와국나가사군5개 촌
가즈사국모다군1개 촌



"다마토리(玉取)"라는 지명은 남북조 시대에 나타난다. 다마토리 촌은 1622년(겐나 8년)부터 호리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다마토리 번 폐번 후에도 다마토리 촌은 호리 가문 2개의 영지로 계속되었다. 『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에 따르면, 1730년(교호 15년)에 영주인 호리 가문이 다마토리 촌에 진야를 설치했다고 한다. 막말 시점에서는 호리 가문 2가(호리 요시지로, 호리 코시로)와 막부령이었다.

5. 다마토리 진야

1622년(겐나 8년), 호리 도시시게는 사면을 받고 히타치국니하리군에서 1만 석을 받았다. 다다마사가 우쓰노미야번주로 복귀한 후, 도시시게는 오쿠다이라 가문의 가정을 맡도록 명령받아 우쓰노미야에 살았다. 1626년(간에이 3년) 쇼인반토에 재임명되었고, 1633년(간에이 10년)에는 오미국아자이군, 아와국나가사군, 가즈사국모다군에서 4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1만 4000석이 되었다. 이후 오반가시라, 지샤부교 등 막부 요직을 역임하고 1638년(간에이 15년) 사망했다.

장남 호리 도시나가가 가독을 이었으나, 동생 호리 도시나오에게 2000석을 분여하여 1만 2000석이 되었다. 도시나가는 오반가시라를 맡았고 1658년(만지 원년) 사망했다.

도시나가의 뒤는 양자(사위)인 호리 미치카가 이었다. 미치카는 아마가타 구리미치의 장남으로, 호리 도시시게의 외손자이자 도시나가의 조카이다. 1664년(간분 4년) 영지주신장을 받았고, 1671년(간분 11년) 처음으로 봉지에 갈 틈을 얻었다(산킨코타이). 1676년(엔포 4년) 이치노야 야사카 신사 본전을 조영했다.

그러나 1679년(엔포 7년), 미치카는 오사카 가반 부임 중 "광기"하여 가신을 살해했다. 이 때문에 소령이 몰수되어 다마토리 번은 폐번되었다. 미치카는 1694년(겐로쿠 7년) 사망했다.

1664년(간분 4년) 시점의 번령은 다음과 같다.

국명군명촌 수
히타치국니하리군13개 촌
오미국아자이군6개 촌
아와국나가사군5개 촌
가즈사국모다군1개 촌



"다마토리(玉取)"라는 지명은 남북조 시대에 나타난다. 다마토리 촌은 1622년(겐나 8년)부터 호리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다마토리 번 폐번 후에도 다마토리 촌은 호리 가문 2개 영지로 계속되었다. 『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에 따르면, 1730년(교호 15년) 영주인 호리 가문이 다마토리 촌에 진야를 설치했다고 한다. 막말 시점에서는 호리 가문 2가(호리 요시지로, 호리 코시로)와 막부령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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